|
원성왕(元聖王)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원성왕(元聖王, ? ~ 798년 음력 12월 29일/양력 799년 2월 8일,
재위:785년 2월 26일(음력 1월 13일) ~ 798년 음력 12월 29일)
신라의 제38대 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휘는 경신(敬信)이다.
삼국사기에는 원성왕은 선덕왕과 마찬가지로 내물왕의 10세손으로 되어 있다.
생애
김경신은 혜공왕 때 선대 경덕왕의 관제개혁을 원상 복귀시키는 일에 참여하였다.
선덕왕 1년(780년) 이찬(伊飡)으로 상대등(上大等)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고 상대등에 올랐다. 선덕왕이 죽고 대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당과 통교하였다. 원성왕 4년(788년)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했고, 이어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여 농사를 장려했다.
김경신은 경덕왕과 성덕왕(김양상 외조부), 개성왕(추존, 김양상 아버지)의 사당을 허물고 자신의 부, 조부, 증조부의 사당을 세웠다. 또한 내물왕, 무열왕, 문무왕 및 조부인 흥평대왕(추존)과 부친인 명덕대왕(추존)을 국가 5묘로 지정하여,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를 무열왕, 문무왕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원성왕은 자신의 고조부인 법선을 현성대왕, 증조부인 의관을 신영대왕, 할아버지 위문을 흥평대왕, 아버지 효양을 명덕대왕, 어머니를 소문태후로 추봉하였다.
신라 하대는 원성왕 시대가 기점이다. 김경신은 무열왕계 경덕왕과 자신의 동료였던 김양상의 아버지 개성왕, 외조부 성덕왕의 사당을 허물었다. 불국사를 만들어 자신의 부, 조부를 모셨다.
원성왕은 새로운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불국사를 만들었다.
가계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경신의 가계는 복호-습보-지증-진종-흠운-마차-법선-의관-위문-효양이다.
기록이 정확하다면 무열왕과 "지증"까지는 같은 혈통이다.
아버지 : 김효양 -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존
어머니 : 계오부인 박씨(繼烏夫人)
왕후 :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 각간 김신술(神述)의 딸
아들 : 인겸(仁謙) 785년 태자 책봉 791년 음력 1월 사망 혜충태자(惠忠太子)에 추증되었다가 소성왕 즉위 후 혜충대왕으로 추존
손자 : 준옹(俊邕) - 인겸의 아들로 794년 음력 4월 태자 책봉, 798년에 소성왕 즉위
손자 : 언승(彦昇) - 인겸의 아들로 809년에 헌덕왕 즉위
손자 : 숭빈(崇斌, ? ~ 819년 2월)
손자 : 수종(秀宗) - 인겸의 아들로 826년에 흥덕왕 즉위
손자 : 충공(忠恭) - 인겸의 아들로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봉되었다.
손자 : 제옹(悌邕)
아들 : 의영(義英) - 792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794년 사망
아들 : 예영(禮英) - 혜강태자(惠康太子)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혜강대왕(惠康大王)에 추봉, 부인은 혜강태후
손자 : 헌정(憲貞) - 익성대왕(翌成大王)에 추봉, 부인은 성목태후(聖穆太后)
손자 : 균정(均貞) : 성덕대왕(成德大王)에 추봉, 부인은 헌목태후(憲穆太后)
손녀 : 귀승부인(貴勝夫人) : 헌덕왕(憲德王)의 부인
딸 : 대룡부인(大龍夫人)
딸 : 소룡부인(小龍夫人)
원성왕(元聖王)은 신라의 제38대 왕.
내물 마립간의 12세손이다.
신라 하대의 첫 번째 왕으로 선덕왕을 뽑지만, 그는 모계 쪽으로 태종 무열왕의 혈통을 잇고 있어서 과도기적 왕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원성왕 이후에 즉위하는 모든 김씨 왕이 원성왕의 후손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신라 왕계는 그의 즉위를 기점으로 태종 무열왕계에서 원성왕계로 완전히 변화하게 되었다.
1.즉위 전 행보
아버지는 일길찬을 지낸 김효양.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이다. 《삼국사기》에는 내물 마립간의 12세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를 보면 그의 5대조는 김마질차라는 사람으로 잡찬을 지냈다고 한다.
780년 김양상(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고, 혜공왕을 죽이고 김양상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서 선덕왕 즉위 직후 상대등에 오르게 되었다.
선덕왕이 죽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본래 무열왕계였던 김주원이 왕위에 더 근접했으나 알천 북쪽에 살았던 주원이 홍수로 인해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김경신과 김주원 사이의 왕위다툼에서 주원이 패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훗날 주원의 아들인 헌창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원성왕은 김헌창을 달래려고 애를 쓴 것을 보면, 완벽하게 제압하진 못한 듯.
이 즉위 전 김경신의 이야기에 대해 《삼국유사》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꿈에 복두(고위 관리들이 쓰는 모자)를 벗고 소립(삿갓)을 쓰고 12현 가야금을 든 채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래서 점쟁이에게 해몽을 의뢰했는데 점쟁이는 "복두를 벗는 건 벼슬에서 쫓겨날 징조고, 가야금은 칼을 쓰게 되는 것이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건 감옥에 들어갈 징조입니다. 라는 해몽을 듣게 되어 걱정이 매우 컸다.
그러던 중 아찬 벼슬의 '여산'(혹은 '여삼')이라는 사람이 김경신을 만나기를 청했는데 처음에 이를 만나지 않다가 재차 청하자 결국 만났다. 여산이 무엇이 고민이냐고 묻자 김경신은 일전의 꿈과 해몽 이야기를 했고 여산은 "그건 길몽입니다. 만약 한 자리 차지하고도 저를 잊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신다면 해몽을 해 드리지요"라고 말하자 김경신은 주위를 물리치고 해몽을 들었다. 여산의 해몽은 이랬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하는 다른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까지 왕위를 전한다는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징조입니다."
전에 점쟁이에게 들은 해몽과는 정 반대였다. 이 꿈을 들은 김경신은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내가 어찌 왕위에 오를 수 있겠냐고 물었고 여산은 은밀히 북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말했고 그 말을 따랐다. 이후의 이야기는 위에 서술된 북천이 넘친 이야기로 이어진다. 여담으로 김경신이 왕위에 오를 무렵에는 여산은 이미 죽고 없어 그의 자손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2. 치세
성은 김(金), 이름은 경신(敬信), 시호는 원성(元聖)이다.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일길찬(一吉湌) 김효양(金孝讓)이고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이다. 각간(角干) 김신술(金神述)의 딸을 비(妃)로 맞이하여, 김인겸(金仁謙), 김의영(金義英), 김예영(金禮英) 등을 낳았다.
원성왕은 제36대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때에 이찬(伊湌)의 직위에 있었고, 780년(혜공왕 16)에는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다. (김지정의 난) 그리고 반란의 과정에서 혜공왕이 죽고 김양상이 제37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으로 왕위에 오른 뒤에는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어느 왕 때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원성왕이 각간(角干)의 직위에 있으면서,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를 봉양한 효자 성각(聖覺)을 포상하도록 이찬 김주원(金周元)과 함께 왕에게 진언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원성왕은 785년(선덕왕 6) 정월 선덕왕이 병으로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신하들이 원래 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그가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 입궁하지 못하자 하늘의 뜻으로 여겨 상대등이었던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원성왕이 아찬(阿飱) 여삼(餘三)의 꿈풀이와 권유에 따라 북천(北川, 알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 김주원이 개울을 건너지 못했고, 그 사이에 원성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원성왕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무열왕계의 김주원과 갈등이 있었음을 나타내며, 822년(헌덕왕 14)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다.
왕위에 오른 원성왕은 고조부 대아찬 김법선(金法宣)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증조부 이찬 김의관(金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조부 이찬 김위문(金魏文)을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아버지인 김효양을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했다. 그리고 선덕왕의 왕비인 구족부인(具足夫人)을 외궁으로 내보내고 3만4천석의 조(租)를 지급했으며, 이듬해인 786년(원성왕 2)에는 김원전(金元全)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왕위 계승 사실을 알렸다. 《삼국유사》에는 조부의 이름이 훈입(訓入)이며, 고조부인 김법선은 잡간(匝干) 마질차(摩叱次)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성왕은 785년(원성왕 1) 이찬 충렴(忠廉)과 제공(悌恭)을 각각 상대등과 시중으로 임명했고, 장군인 총관(摠管) 직위의 명칭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제공이 곧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찬 세강(世强)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790년(원성왕 6)에는 종기(宗基)를 시중으로 삼았고, 이듬해 제공이 반란을 꾀하다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자리에서 물러난 종기를 대신해 자신의 손자인 대아찬 김준옹(金俊邕)을 시중으로 삼았다.
792년(원성왕 8)에는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世强)을 상대등으로 삼았고, 김준옹이 병으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찬 숭빈(崇斌)을 시중으로 삼았다. 794년(원성왕 10)에는 숭빈이 사직하자 잡찬(迊湌) 언승(彦昇)을 시중으로 삼았고, 795년(원성왕 11)에는 혜충태자의 아들인 김준옹을 태자로 봉했다. 796년(원성왕 12)에는 시중 언승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이찬 지원(智原)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797년(원성왕 13)에는 시중 지원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아찬 김삼조(金三朝)를 시중으로 임명해 국정을 맡겼다.
원성왕은 중앙귀족의 내분으로 불안정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실시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권농(勸農) 정책과 구휼(救恤) 정책을 펼쳐 민심을 얻으려 했다. 786년 금성(金城) 일대에 기근이 들자 두 차례에 걸쳐 6만여 석의 곡식을 백성에게 나눠주었다. 788년(원성왕 4)에는 《곡례(曲禮)》ㆍ《효경(孝經)》ㆍ《논어(論語)》ㆍ《문선(文選)》ㆍ《예기(禮記)》ㆍ《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 유학 경서의 독해 수준에 따라 상ㆍ중ㆍ하로 나누어 관리로 선발하는 독서삼품과를 실시했다. 《삼국사기》에는 활솜씨로 선발하던 것을 이때에 와서 고쳤으며, 오경(五經)과 삼사(三史),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두루 능통한 자는 절차를 밟지 않고 등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789년(원성왕 5)에는 한산주(漢山州)에 기근이 들자 그곳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고, 790년(원성왕 6)에는 전주(全州) 등 7개 주의 사람들을 징발해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했다. 그리고 이 해에도 큰 가뭄이 들자 한산주와 웅천주(熊川州)의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796년(원성왕 12)에도 금성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자 창고를 풀어 백성을 구제했다.
원성왕 때에도 신라는 당나라와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했는데, 792년(원성왕 8)에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를 지녔으며 몸에서 향기가 나는 김정란(金井蘭)이라는 미녀를 당나라로 보냈다고 한다. 790년(원성왕 6)에는 일길찬(一吉飡) 백어(伯漁)를 발해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것은 신라에서 발해로 사신을 보낸 것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원성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불교 진흥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785년(원성왕 1) 승관(僧官)을 두어 정법전(政法典)이라 하여 승려 가운데 재주와 덕행이 있는 자를 선발해 등용했으며, 787년(원성왕 3)에는 승려인 혜영(惠英)와 범여(梵如)를 불교 교단을 관리하는 소년서성(少年書省)으로 임명했다. 794년(원성왕 10)에는 봉은사(奉恩寺)를 창건하고, 서궁(宮西)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로 전해진다.
원성왕은 798년(원성왕 14) 음력 12월에 죽었으며,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奉德寺) 남쪽으로 옮겨 화장했다. 《삼국유사》에는 왕릉이 뒷날 숭복사(崇福寺)라고 불린 토함산 서쪽의 곡사(鵠寺)에 있으며 (경주 숭복사지), 최치원(致遠)이 비문을 적은 비석이 서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경주시 외동읍 괘능리에 있는 경주 원성왕릉(元聖王陵)은 사적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성왕이 죽은 뒤에는 손자인 김준옹이 제39대 소성왕(昭聖王, 재위 799~800)으로 왕위를 이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원성왕이 흥망의 이치를 깨달아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아버지인 김효양에게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받아 일본의 왕 문경(文慶)이 감히 신라를 침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795년(원성왕 11)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동천사(東泉寺)와 분황사(芬皇寺)의 연못과 우물에 살던 용을 잡아가려 했으나 원성왕이 용을 구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원성왕 [元聖王] (두산백과)
원성왕은 경덕왕과 선덕왕의 아버지 개성왕, 외조부 성덕왕의 사당을 허물었다. 대신 불구사에 자신의 아버지와 조부를 보시고, 내물 마립간, 태종 무열왕, 문무왕 및 조부인 흥평대왕(추존)과 부친인 명덕대왕(추존)을 국가 5묘로 지정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경신의 가계는 복호-습보-지증-진종-흠운-마차-법선-의관-위문-효양으로, 기록이 정확하다면 무열왕계와는 지증왕까지는 같은 혈통이다. 일설에는 무열, 문무왕의 묘를 헐지 않은 것을 보아 문무왕의 방계 태생이라는 설도 있지만, 단순히 국가의 중간 시조로서 모셨다라는 견해가 맞붙이친다. 혜공왕때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는 절대 옮길수 없는 불천지위라고 천명했는데 이것을 번복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컸던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독서삼품과(788년) 같은걸 시행하기도 했었다. 벽골제를 재공사하여 농업 생산량을 늘리려고 시도했다.
즉위하자마자 장자 인겸을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791년에 죽었고 곧바로 차자 의영을 태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의영이 793년에 죽자 장손 즉 인겸의 아들이었던 준옹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여러모로 신라의 세조?
4. 외왕내제(外王內帝)
원성왕 때 신라 내부적으로 황제국처럼 행세하는 외왕내제(外王內帝)체제를 한 것이 많이 보인다.
경덕왕 때 건립되고 원성왕 때 글이 새겨진 갈항사석탑기에는 원성왕이 '경신대왕'으로, 그의 어머니가 '조문황태후'로 기록돼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돼있는 문성왕의 유언에는 헌안왕을 '선황(先皇)의 영손'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계이든 부계이든 헌안왕의 조상에서 왕이었던 사람은 원성왕이 유일하므로 여기서 '선황'은 원성왕이고 원성왕은 '황제'로 불렸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재위기간 중 5묘를 만들고 왕권강화를 했던 것으로 보아 황제를 칭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 등 몇몇 기록에서는 786년에 원성왕이 자신이 왕위를 빼앗은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책봉하고 그에게 명주 일대를 식읍으로 주어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주원과 그의 후손은 '명주군국'이라는 국호를 쓰며 4대 37년간 그 일대를 다스렸다고. 원성왕이 황제국에서 하는 것처럼 일종의 제후국을 둔 것이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자 명주군국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5. 괘릉(掛陵)
원성왕은 798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왕의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태웠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화장한 후 왕의 유해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기록이 없다. 문무왕이나 효성왕처럼 화장하여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왕의 유해가 경주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는데, 그곳에는 최치원이 찬술한 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최치원이 저술한 초월산대숭복사비문(初月山大崇福寺碑文)에 의하면 이 '동곡사'라는 절은 본래 파진찬 벼슬의 김원양이라는 사람이 세운 절이었지만 이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원성왕의 능을 그 절터에 꾸몄으며, 옮겨진 동곡사는 '숭복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숭복사는 오늘날 남아 있지 않지만 숭복사 터가 경주시 외동면에 남아 있고, 이 교차검증에 따라 숭복사 터 아래쪽에 '괘릉'이라는 능이 남아 있었는데, 이 능이 원성왕의 능으로 밝혀졌다.
능 이름 치고는 좀 이상한 이름인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이 능을 조성한 자리에는 본래 절의 연못이 있었고 연못을 메워 능을 조성했는데 물이 괴어 왕의 유골을 바닥에 그대로 안치하지 못했고 양쪽으로 관을 걸어 유골을 안치해서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괘릉에 가면 능 뒤편으로 깎은 석축에서 아직도 물이 흐르고 있고 물줄기를 돌리기 위해 수로를 따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괘릉은 신라의 왕릉 중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능 중 하나로 손꼽히는 능이다. 십이지신상이나 여러 석물들은 그야말로 괘릉의 백미이다.
6.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一月 원성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二月 선조를 추봉하다
一年春二月 오묘를 정비하다
一年春二月 관작을 한 계급씩 더하다
一年春二月 충렴을 상대등으로, 세강을 시중으로 삼다
一年春三月 전 왕비를 외궁으로 내보내다
一年春三月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다
一年春三月 총관을 도독으로 고치다
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상하다
二年夏四月 김원전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 방물을 바치다
二年秋七月 가뭄이 들다
二年秋九月 왕도에 기근이 들어 진휼하다
二年冬十月 또 다시 진휼하다
二年冬十月 무오에게 굴압현령직을 주다
三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春二月 친히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二月 대사면을 하다
三年夏五月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
三年秋七月 황충이 곡물을 해치다
三年秋八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四年 독서삼품과를 신설하다
四年 사자를 파견해 가뭄, 황충, 도적 피해를 안무케 하다
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한산주의 기근을 진휼하다
五年秋七月 서리가 내려 곡식이 상하다
五年秋九月 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삼다
二十三年 논하여 말하다
六年春一月 종기를 시중으로 삼다
六年春一月 벽골제를 증축하다
六年春一月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다
六年春三月 백어를 발해에 사신 보내다
六年春三月 크게 가물다
六年夏四月 태백성과 진성이 동정에 모이다
六年夏五月 한산주와 웅천주의 기근을 진휼하다
七年春一月 왕태자가 죽다
七年春一月 제공이 반란을 일으키다
七年春一月 웅천주에서 한 번에 남자아이 셋이 태어나다
七年冬十月 경도에 눈이 내려 동사자가 나다
七年冬十月 시중 종기가 물러나고 준옹이 시중이 되다
七年冬十一月 경도에 지진이 일어나다
七年冬十一月 김언이 삼중아찬이 되다
八年秋七月 당에 미녀를 바치다
八年秋八月 왕자 의영을 태자로 삼다
八年秋八月 상대등 충렴이 죽어 세강이 상대등이 되다
八年秋八月 시중 준옹이 물러나고 숭빈이 시중이 되다
八年冬十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九年秋八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벼가 쓰러지다
九年秋八月 김뇌가 흰 꿩을 바치다
十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年春二月 태자 의영이 사망하다
十年春二月 시중 숭빈이 물러나고 언승이 시중이 되다
十年秋七月 봉은사를 창건하다
十年秋七月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치다
十年秋七月 망은루를 세우다
十一年春一月 준옹을 태자로 봉하다
十一年夏四月 가물어 죄수를 심사하니 비가 오다
十一年秋八月 서리가 내려 곡물이 상하다
十二年 기근과 역병이 돌아 진휼하다
十二年夏四月 시중 언승을 병부령으로 삼고, 지원을 시중으로 삼다
十三年秋九月 황충으로 곡물이 해를 입다
十三年秋九月 홍수로 산이 무너지다
十三年秋九月 김삼조가 시중이 되다
十四年春三月 궁 남쪽 누교가 불타다
十四年春三月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치다
十四年夏六月 가뭄이 들다
十四年夏六月 석남오의 처가 한 번에 남자 셋, 여자 하나를 낳다
一四年冬十二月二十九日 왕이 붕어하다
원성왕부터 삼국사기 10권이 시작된다.
첫댓글 나이 많음을 개의치 말고, 지위가 높음을 개의치 말고,
형제의 세력을 개의치 말고 벗을 사귀어라.
벗이란 상대방의 덕을 가려 사귀는 것이니,
여기에 무엇을 개재시켜서는 안 되느니라.-"孟子"-
좋은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