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께서 내가 보는 모든 것 안에 계시니, 내 마음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
오늘의 아이디어는 비전을 위한 발판이다.
이 아이디어로부터 그대 앞에 세상이 열리며, 그대는 그 안에서 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에 그대가 보았던 것은 아예 희미하게라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2.
오늘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투사를 사용한다.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밖에서 봄으로써 그것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세상 안에서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을 보려고 하며, 우리가 인지하고자 원하는 것이 거기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보이는 것을 우리로부터 떼어놓으려 하기보다는 그것과 결합하려 한다.
바로 이것이 비전과 그대가 보는 방법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3.
오늘의 아이디어는 하루를 지내는 동안 가능한 한 자주 적용되어야 한다.
잠시 짬을 낼 수 있을 때마다 그것을 천천히 속으로 반복하면서 주위를 돌아보고, 지금 그대에게 보이는 것 혹은 지금 시야 안에 있다면 그대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에 이 아이디어가 적용됨을 깨달으려 노력하라.
4.
진정한 비전은 “가깝다” 혹은 “멀다” 등의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아이디어에 익숙해지려면, 오늘의 아이디어를 적용할 때 그대가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현재 그대의 시야 너머에 있는 것들도 생각해 내려 노력하라.
진정한 비전은 공간과 거리의 제한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육안에도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마음이 비전의 유일한 근원이다.
5.
동시에 그대가 이 아이디어에 익숙해지는 것을 돕기 위해 몇 번의 연습은 시간 내내 눈을 감고, 밖이 아니라 안을 보면서 마음에 무엇이 떠오르든 그것을 사용하여 오늘의 아이디어를 적용하라.
오늘의 아이디어는 안과 밖에 모두 똑같이 적용된다.
...
[예수의 추가 설명]
그대가 첫 달의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 있음에 우리는 아주 행복하다.
그대는 이렇게 멀리 올 것이라고 믿지 않았으나 30일차 기적수업 레슨을 하고 있다.
그대는 이미 설정한 목표의 12분의 1에 도달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사라지지 마라.
레슨을 빼먹지도 말고, 레슨이 너무 딱딱하거나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대는 이 레슨을 하는 동안 이미 그대의 주위에 사랑의 씨앗을 심고 있다.
그대가 보는 모든 것 안에 신이 있을 때 그대는 판단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며, 그대가 자신, 그대의 몸, 그대의 가족, 그대의 공동체 및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어떤 것을 향해 “틀렸다,” “사악하다,” “불경하다”면서 판단하지 않을 때, 그대는 우주를 향해 여는 것이다.
그대는 신에게 그대의 의식을 열며, 그렇게 할 때 우리가 함께 걷는 길이다.
그곳에는 오로지 모든 것을 위한 사랑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증오를 투사하거나 세상에 증오의 이야기를 씌우고 세상에 끔찍한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에, 그대는 그대가 보는 모든 것 안에 신이 있다는 진리를 투사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신이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All That Is)이라는 뜻이다.
용서의 이 기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이가 용서란 사람들을 속박으로부터 풀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용서는 세상을 보는 방법이다.
부드러운 방법, 사랑하는 방법, 친절한 방법이며, 그대의 가슴을 계속 열어 두고 그대의 방어를 내려놓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두려움 없이 형제들과 연결하는 방법이다.
세상에 대한 그대의 이야기, 세상에 대한 그대의 판단, 세상에 대한 그대의 저주가 그대를 방어적으로 만들고, 그대를 걸어 잠그게 만들며, 그대를 외롭게 만든다.
그대가 고통을 받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큰 열정을 가지고 오늘의 레슨에 임하라.
그대는 그대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그대의 의식을 바꾸고 있다.
세상을 그대의 적이 아니라 단순히 그대의 마음에 있는 것을 반영할 뿐이라고 봄으로써, 그대로부터 발산하는 투사를 그대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바꾸고 있다.
요즘 레슨에 더 깊이 들어감에 따라 때때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대는 이를 보고
"아, 나는 몇 시간 동안 마음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구나!
그래, 이것이 바로 내가 마인드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하는 이유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요, 이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한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심하게 증오하거나 판단하지 마라.
단지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없었는지 보라.
그대는 초점을 두지 못하였다.
그대는 때때로 영적인 실천을 위해 1분의 시간을 낼 용의조차 없었다.
그런 부분을 관찰함으로써 영적인 실천에 1분도 할애하지 못한 채 6, 7시간을 보냈다면 온종일 무의식적으로 창조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무의식적 창조가 그대에게 반영하는 결과물을 받아들게 될 것이다.
용기를 내어 이 비디오를 공유하라.
그대가 무엇을 하는지 사람들에게 알려라.
자기가 하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설명하려 하지 말고, 단지 “내가 하고 있는 것이다.
동참하거나 하지 않고는 그대의 몫이다!”라고 말하라.
...
[알렌의 설명]
어제의 레슨이 비전을 위한 전체 토대였듯이, 오늘의 아이디어는 발판(springboard, 도약대)입니다.
하느님이 내가 보는 모든 것에 계신다는 사실이 기초가 됩니다.
하느님이 내 마음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한 시각에서 비전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 아이디어로 인해서 세상이 네 앞에서 열릴 것이며, 너는 그 세상을 바라보고 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것을 그 안에서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전에 네가 보았던 것은 희미하게라도 아예 보이지 않을 것이다."
기적수업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토대가 되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의 원인은 직접적으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지각에 대한 상식적인 아이디어는, 밖에 있는 어떤 것이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 마음 위에 인상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수업에 의하면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내 마음 안의 생각들이 밖으로 투사되어 나의 지각을 일으킵니다.
텍스트는 두 곳에서, “투사가 지각을 낳는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레슨이 우리에게 가르치려 시도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투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긍정 투사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불편해 하는 생각들을 제거하기 위해 투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보기를 원하는 것을 세상에서 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나는 나의 순결함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을 순결하게 보려고 시도합니다.
나는 내 생각들을 선택하여 의도적으로 그 생각들을 세상에 투사합니다.
나는 하느님이 내 마음에 있다고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이 모든 것에 계시다고 선택합니다.
만약 모든 것들에 하느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놓으려 하기 보다는, 그것과 결합하려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비전과 자신이 보는 방법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우리의 봄은 차이와 구분을 강조하지만, 비전은 동일함을 강조합니다.
실제의 비전은 공간과 거리에 의해 제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의 눈에도 전혀 의존하지 않습니다.
마음만이 비전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각 레슨을 해 나가면서, 비전은 우리의 육체적인 시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이 점점 분명해졌습니다.
기적수업의 사고 체계에서 우리의 눈은 전혀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눈은 단순히 속임수를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육체적 시각의 범위 너머에 있는 것들을 우리의 지각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봄입니다.
“마음만이 비전의 유일한 원천이다.”
이제 앞에서 한 28과,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보고 싶다.”를 목적 지향을 강하게 하고 상기해 봅시다.
나는 비전을 원합니다.
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보는 다른 종류의 봄을 원합니다.
내가 만약 사물을 그런 식으로 본다면, 나 자신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왠지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나는 그런 비전을 원합니다.
만약 내가 당신을 거룩하고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하느님의 아이로 볼 수 있다면, 내가 나 자신의 반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보고 싶으므로 당신을 그렇게 보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은 내 마음에 계십니다.
세상은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기를 원할까요?
나는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신 세상을 보기를 원하나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내가 나의 마음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영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