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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감리회와 제1•2대 양주삼 총리사
미국 남북 감리회가 조선에 복음의 씨를 뿌린 후 46년과 33년 만에 미국 감리교회도 하지 못한 하나의 감리교회를 조선에서 이루었다. 두 감리교회가 조선의 텃밭에서 맺은 값진 선교의 열매였다. 이는 복음의 씨가 옥토에 뿌려졌을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자연의 원리와 같다 하겠다. 비록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 늦게 심어진 복음의 씨앗이지만 신앙의 토양이 비옥한 조선 땅에서는 짧은 시간에 이렇게 부흥하고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미국 교회가 조선에 선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결과였다.
1930년 12월 2일 오전 10시에 경성부 냉동에 있는 협성신학교 강당에서 제1회 조선감리회 총회가 역사적으로 개최됨으로써 명실상부(名實相符) 조선감리회 자치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임시 의장으로는 미국에서 온 웰치 감독이 맡았고 부회장으로는 윤치호, 서기 장병익, 김응태 목사, 영문 서기로 케이블(奇怡富, Elmer Mannasseh Cable), 윔스(魏任世, C.N Weems) 선교사, 회계에는 한익수 전요섭(J.L. Gerdine), 통역에는 변성옥, 류형기, 김성실 목사를 선택함으로써 제1회 총회를 구성했다. 제1회 총회 회원은 남북 감리교회 합동 전권 위원들 20명과 특선위원 20명, 한국 대표 60명 등 모두 100명으로 구성했다. 이 총회에서 제일 먼저 다룬 안건은 조선인 감독의 선출이었다.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에 즈음하여 결의한 사항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 책임자의 명칭을 정하였는바 총감리사(General Superintendent)를 요약한 총리사(總理司)였다. 단기 4년의 임기로 재임할 수 있어서 총 8년을 임기로 정했다. 이는 평생 임기인 미국교회 감독(Bishop)과는 다르게 조선감리회 총리사는 권위주의를 배격한 평민적이요 민주적임을 뜻했다. 그러나 민주적인 총리사에게도 감리교회 특징을 살린다는 취지는 살리기로 함으로써 총리사의 권한 속에 교역자의 파송권이 부여했다.
조선감리회 총리사는 무기명 투표로 선출하였다. 이 투표는 12월 8일 오후 2시 30분에 오후 회의를 속개하고 진행했다. 그 결과 양주삼 목사가 4차 만에 총 표수 95표 중에서 65표를 얻어 피선되었다. 또한 전도국장 오기선(吳基善) 목사, 교육국장 케이블 선교사, 사회국장 하디(河鯉泳, Robert Alexander Hardie) 선교사, 재무국장 윤치호를 각각 임명했다. 양주삼 총리사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배후에는 무한하신 능력의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앞에는 무한히 발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로써 양주삼 총리사는 앞날이 밝은 기독교 조선감리회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로서 한국감리교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양주삼(梁柱三, 호는 白沙堂) 총리사는 1879년 1월 25일에 평남 용강군 산남면 흥문리에서 가난한 선비 양정섭(梁禎涉)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유학자의 가문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유학을 접하여 일찍부터 유불선(儒佛仙)에 심취하였다. 그러던 그가 15, 6세쯤에 우연히 한문으로 된 ≪만국공부≫란 잡지와 ≪덕혜입문≫이란 상해 주재 선교사들이 발행한 전도서를 접하면서 기독교를 알게 되었다. 1899년 그는 용강읍에 있는 교회에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1년 5월 헐버트(訖法, Hormer Bezaleel Hulbert) 선교사의 소개로 중국 상해(上海)에 있는 남 감리회의 중서서원(中西書院, Anglo China College)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1902년 10월 7일에 파커(R.A. Parker) 원장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 남 감리회 교인이 되었다.
중서서원을 졸업한 양주삼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06년 12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거주하면서 직업 때문에 미국에 온 한국 노동자들의 불쌍한 삶을 보면서 그들을 위해 한인교회 설립을 결심하였는데 마침 리드(李德, Clalence Frederick Reid) 선교사를 만나 한인교회 전도사 일을 맡게 되었다. 1907년 7월 《한인연합교회보》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회보는 1908년에 12월 《대도》로 개칭하여 월간으로 발간되었다. 1908년에는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 저격 사건의 주모자인 장인화(張仁煥), 전명운(田明雲)을 변호하는 통역을 맡았다. 그러다가 1909년 7월 기도 중에 “하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으라”는 소명을 받아 신학을 정식으로 공부하기로 다짐하였다. 이에 1910년 1월 테네시주의 밴더빌트대학교 신학부에 입학, 1913년 6월에 졸업했다. 곧바로 그해 9월에 예일대학 신학부에 입학하고 1914년 6월에 졸업하였다. 1912년 9월 12일에 남 감리회 준회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15년 1월에 귀국하여 협성신학교 교수로 일했으며 1915년 10월 3일에 김흥순, 정춘수와 함께 남 감리회 한국인 최초의 정회원목사 안수를 받고 경성의 자교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했다. 1916년 2월에 《신학세계》를 창간하였고 9월에는 개성의 한영서원(후에 송도중학교) 부원장으로 일했다. 1918년 11월부터 1923년 9월까지 남 감리회 선교백주년기념사업회 총무로 선출되어 시베리아 선교 사업을 시작하는 등 남감리회 전도 사업을 총괄하였다. 1919년 9월 경성의 종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2년 간 목회했다. 1923년 시베리아 선교사업 관리자, 1924년 철원지방 장로사, 1929년 경성지방 장로사로 일하였다.
양주삼 목사는 당시에 영어를 제일 잘하는 목사로 인정받아서 1922년, 1924년, 1926년에 개최된 미남감리회 총회에 참석했다. 1927년에는 일본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하여 국제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해 11월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 회장으로 위촉을 받고 1928년 3월 24일부터 4월 8일까지 이스라엘 국제선교연맹대회 조선대표회장으로 참석했다. 1928년 9월 조선남감리회 전도국 총무를 역임했고, 1920년대 말부터 조선기독교 창문사(彰文社) 이사를 맡았다.
1930년 미국 남북 감리회가 조선에서는 합동하여 하나를 이루어 기독교 조선감리회 자치시대를 열게 되었는데 그해 12월 2일 협성신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조선감리회 제1회 총회에서 총리사로 선출되어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그는 1934년 제2회 총회에서도 재선되어 1938년 10월까지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8년간 뛰어난 조직력과 행정력을 발휘하여 조선감리교회를 이끌었다.
양주삼 총리사는 총리사 재임 시 1931년 6월 미국 랜돌 메이컨(Randolf-Macon) 대학과 1932년 6월 미국 개렛(Garrett) 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해 6월 경성 이화고등여학교를 설립하였고, 1934년 10월 윤치호 희년(稀年) 기념회 발기인 겸 상무위원을 맡았기도 했다. 이처럼 양주삼 총리사는 조선 감리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감리회 최고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그가 총리사로 재임하면서 기독교 교육계에 신사참배거부 문제가 발생했다. 1936년 1월 양주삼 총리사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윤치호(尹致昊)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에게 신사참배가 국가의 제사의식이라고 설명하였고 참석자들은 이를 수용하고 말았다. 1936년 4월에는 감리회 정간지인 《감리회보》에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을 번역하여 공포함으로써 조선감리회가 일제의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한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직후 종교단체 연합 시국강연회에 감리교 대표로 참석하여 강연하였다. 8월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최 조선인 유력자 시국강연 강사로 선정되었고, 12월 이화토지경영주식회사 이사로 위촉되었다. 1938년 5월부터 1942년 4월까지 조선기독교연합회 위원으로 일하였으며 1938년 9월 영변 숭덕학교 재단이사를 맡았다. 동년 10월에는 제3회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 공식순서에 ‘애국일 실시’를 넣고 배재학교 운동장에서 치른 애국일 행사를 총 지휘하여 기독교인으로 ‘충량한 신민이 되라’고 강연하였다. 더 나가서 신도들을 이끌고 총독부에 가서 만세 봉창을 하고 조선신궁에 참배하였다. 10월 기독교 조선감리회 만주선교사업 관리자로 취임하였고 12월 감리교 대표로 일본을 방문해 이세신궁(伊勢神宮)과 신사(神社)를 참배하였다.
총리사의 임기를 마친 후 1939년 2월 그는 세브란스의학 전문학교 이사로 선출되어 재단법인 영변숭덕학원과 송도고등보통학교 이사직을 사임하였다. 그 해 3월 그는 회갑을 맞이하였는데 회갑연금을 국방헌금으로 냈다. 이 헌금은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일제의 전쟁 후원금이다. 이로 인해 그 해 5월에는 일제의 전시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에 선임되었으며, 10월 내선감리교회합동문제 연합위원회에서 기독교 조선감리회 대표가 되었다. 12월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 겸 은급부장, 연희전문학교 이사로 재선되었다. 1940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감리회연맹 이사,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과 재단법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유지재단 이사, 1941년 1월 조선성서공회 특별위원회 위원장, 3월 국민총력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이사 겸 기독교 조선감리교단 본부 규칙개정위원 및 교파합동연락위원을 맡았다. 4월 조선기독교서회 이사장 및 행정총무, 5월 국민총력 기독교 조선감리교단 연맹 이사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8월 흥아보국단 상임위원 및 경기도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1월에는 대동민우회가 주최한 ‘미영배격설전대’ 연사로 평양, 진남포, 안주 방면을 맡았고, 3월 감리교회조선선교부 유지재단 대표이사, 4월 기독교 조선감리교단 경성교구년회 목사대표에 위촉, 6월 《내선일체》에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한다는 발표가 얼마나 감격스러운가”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1943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한 ‘미영격멸간담회’에서 미영폐풍 근절운동을 논의하였다. 11월 9일 《매일신보》에 “학도여 성전(聖戰)에 나서라”, 1944년 12월 14일 《매일신보》에 “전열, 제4년의 각오: 총후는 총무장, 임전무퇴의 결사대”를 투고하여 학병지원을 독려하였다.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 1945년 7월 조선총독부가 개신교 교파를 통폐합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고문에 선임되었다. 1945년 8월 15일에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했다.
이렇듯 양주삼 목사는 일제 통치시기에 친일 행위의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이 시기는 우리 민족에게 어두운 역사의 터널이었다. 그 누구도 이 어려운 시대를 거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누구도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던 시기였다. 해방 후 국가는 양주삼 목사에게 친일 행위에 대해서 그 책임을 물었다. 1948년 제헌국회는 정부 수립을 앞두고 애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친일파를 처벌할 목적으로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을 제정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양주삼 목사는 그의 친일행적 때문에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구속되었지만 다음 달 4월에 바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의 친일행위는 크게 문제 될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주삼 목사는 그해 10월에는 대한적십자사가 창설될 때 초대 총재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는 양주삼 목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끼친 공로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활동하던 양주삼 목사는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생활을 책임지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했던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많은 의료기구와 설비를 그냥 두고 무책임하게 피난길에 오를 수 없었다. 군의관도 부족한데 전쟁 부상자들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총재로서 활동이 더 많아졌다. 그러나 전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고 불가불 서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6월 27일 양주삼 총재는 의사와 직원들에게 석 달 월급을 미리 나누어주고 자신도 석 달 월급 18원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9시경 한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듣고 양주삼 총재는 한강철교까지 갔지만 국군 헌병이 갈 수 없다고 길을 막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양주삼 목사 내외는 “우리는 늙었으니 죽는 것이지만 우리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하며 울었다. 그때 공산군이 그의 집으로 쳐들어와서 집안 안팎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그날부터 매일 찾아왔다. 8월 23일 아침에 갑자기 공산군들은 목사들을 모아 놓고 의논할 회의가 있으니 참여하라는 양주삼 목사에게 통지했다. 그는 몸이 아파서 못 간다고 했지만, 심부름 온 공산군들은 10분 후에 차를 가지고 와서 그를 강제로 태우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 이후 그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이것이 양주삼 목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당시 납치된 목사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납북되어 살해당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공산당에게 납치당한 양주삼 목사도 납북되어 순교했음은 당연했을 것이다.
양주삼 목사는 피난갈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많은 생명들을 지켜야 할 총재직을 수행하느라고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목숨의 위협이 가중되는 전시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자기 직임을 성실하게 수행했던 양주삼 목사는 결국 납북되어 순교자가 된 것이다. 이런 그의 행보는 하루아침에 나온 결단이 아니었다. 그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바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서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주삼 목사는 전 생애가 죽음을 빛나게 해줌으로써 순교 신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 감리교회가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기여한 공로는 지대했다. 오늘의 세계 중심에 우뚝 선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이룩할 수 있었던 저변에는 감리교회의 공로가 있었음을 만방이 아는 바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애국애족의 믿음을 가지고 후세에 본을 이룬 양주삼 목사 같은 어른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하겠다. 이런 분이 감리회 초대 총리사였음은 감리교인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자랑거리가 분명하다.
양주삼 총리사의 연회 및 총회 활동
1930년 12월 2일에 개최된 기독교 조선감리회 제1회 총회에서 총리사로 선출된 양주삼 목사는 1931년 6월 10일에 제1회 연회를 개최하였다. 개성북부 예배당에서 서부, 중부, 동부 등 3개 연회가 처음으로 모인 합동 연회는 감리교 교역자는 물로 평신도에게도 커다란 자긍심을 불러 일으켰다. 제1회 연합 연회에서 다루었던 주요 안건은 목사 안수식과 남북 감리교회에 조직되었던 지방을 증설 정비하는 일이었다. 특히 여자 목사 안수는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행사였다. 미국에서도 없던 여자목사 안수를 한국에서 시행했고 피선교국의 총리사로서 선교사에게 안수하여 목사로 세웠다는 것은 선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는 자격자가 없어서 미국인 여 선교사들에게 안수를 거행했다. 참고로 한국인으로 최초 여자 목사 안수 받은 사람은 1955년 3월 중부연회에서 유형기 감독의 집례 하에 전밀라(全密羅)와 명화용(明和蓉) 목사다.
그리고 연합연회에서 지방 증설과 정비를 하였다. 중부연회는 개성북, 개성서, 개성동, 경성, 인천, 이천, 수원, 공주, 홍성, 천안, 이안지방 등 11개 지방으로 조직되었다. 서부연회는 6개 지방으로 영변, 신창, 평양, 진남포, 해주, 사리원지방이었다. 동부연회는 원주, 홍천, 춘천, 강릉, 원산, 철원지방 등 총 6개 지방이었고, 만주 선교연회는 만주, 간도지방이었다. 그런데 1935년 1월 25일에 만주 선교연회에 소속된 감리교 중견 교역자들이 감리교회를 사퇴하고 조선기독교회를 창립한다고 선언하여 한국 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주로 북만주(北萬洲) 지방의 교역자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조선감리교회에 그대로 남기로 하였다. 그래서 1935년 6월 28일에 열린 제5회 만주선교연회는 끝내 조선기독교회로 넘어 간 길림교회를 제외하고 모든 교회에 교역자를 파송하여 파문을 가라앉혔다. 이는 양주삼 총리사의 교권에 불만을 품을 변성옥 목사가 만주라는 특수지역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교회를 만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2회 연회도 연합연회로 모였다. 서부, 중부, 동부연회가 합동으로 1932년 3월 16일부터 22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제3회 연회는 서부, 중부, 동부연회가 각각 열렸다. 각 연회의 회장은 모두 양주삼 총리사가 맡았으며 중부연회는 1933년 3월 15일부터 20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개성북지방이 평산지방으로 개칭되었다. 동부연회는 1933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춘천 허문리(許文里) 교회에서 열렸으며 교역자 이사비를 매년 2백 원씩 부담하여 이것을 저축하여 4년 후에 사용키로 결의하였다. 서부연회는 1933년 5월 31일부터 6월 5일까지 평양 남산현 교회에서 개최하였으며 홀(許乙, Rosetta Sherwood Hall) 의사 동상 제막식을 특별행사로 거행하였다. 제6회 중부연회는 1937년 4월 7일부터 13일까지 개성 북부교회에서, 동부연회는 5월 26일부터 30일까지 외금강 온정리교회에서, 서부연회는 5월 5일부터 9일까지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열렸다.
양주삼 총리사는 감리교 자치시대를 열면서 재임 기간 중에 총 3번의 총회와 18회의 연회를 주재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회 총회(1930년 12월 2일~12일, 경성부냉동협성신학교 강당 개최), 제2회 총회(1934년 10월 3일~11일, 경성냉동감리교회신학교 강당 개최), 제3회 총회(1938년 10월 5일~13일, 경성감리교신학교 강당 개최)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제1회 중부, 동부, 서부연회 연합연회(1931년 6월 10일~19일, 개성북부교회 개최)와 제1회 만주선교연회(1931년 12월 4일~6일, 용정램벗기념예배당 개최)이며, 제2회 중부, 동부, 서부연회 연합연회(1932년 3월 16일~22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2회 만주선교연회(1932년 12월 9일~12일, 용정에서 개최)이다. 제3회 중부연회(1933년 3월 15일~20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3회 동부연회(1933년 4월 15일~22일, 춘천허문리교회 개최), 제3회 서부연회(1933년 5월31일~6월5일, 평양 남산현교회 개최), 제4회 만주선교연회(1933년 12월 7일~10일, 용정램벗기념예배당 개최)이다. 또한 제4회 중부연회(1934년 3월 13일~19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4회 동부연회(1934년 4월 4일~8일, 원산에서 개최), 제4회 서부연회(1934년 5월 15일~21일, 해주남본정교회 개최), 제4회 만주선교연회(1935년 6월 28일~7월1일, 신경교회 예배당 개최)이다. 그리고 제5회 중부, 동부, 서부연회 연합연회(1935년 4월 25일~5월 1일, 정동제일교회 개최)와 제5회 만주선교연회(1937년 6월 24일~27일, 용정램벗기념예배당 개최)이다. 제5회 만주선교연회는 양주삼 총리사가 신병을 인해 대신하여 전도국장인 오기선 목사가 사회를 맡았다. 제6회 중부연회(1937년 4월 7일~3일, 개성북부교회 개최), 제6회 동부연회(1937년 5월 26일~30일, 외금강 온정리교회 개최), 제6회 서부연회(1937년 5월 5일~일, 평양 남산현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양주삼 총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