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09-25 주일예배
당신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8:14~17)
어느 산속에 겁 많은 토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토끼들은 맹수들이 두려워서 살 수가 없다며 연못에 빠져 죽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토끼들이 연못가에 도착하자 개구리들이 놀라 도망쳤습니다. 이를 본 토끼들은 세상에는 자기보다 약한 동물도 있음을 발견하고 용기를 내어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가끔, 나는 토끼 같고 주변 사람들이 황소나 코끼리로 보입니다. 그들에 비해 나는 너무나 약한 존재입니다. 나는 평생 뭘 하며 세월만 허송했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를 보고 대단하다, 부럽다고 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어울리지 않는 말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게도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은 여러 가지로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부족하고, 건강이 부족하고, 지식이 부족하고, 말주변이 부족하고, 음악 실력, 운동 실력, 유머 감각과 순발력이 부족합니다. 부족하지 않은 것은 나이뿐인데 나이는 또 너무 많습니다. 하여간 우리는 약점투성이입니다. 이래서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있을까요?
이처럼 위축된 사람들에게 이솝은 ‘토끼와 개구리’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세상에는 나보다 약한 사람도 있고 그들도 열심히 살고 있으니 힘을 내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용기를 내어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고작 토끼와 개구리 비유뿐일까요? 나보다 약한 사람도 있다는 이유로 용기를 내고 산다고 생각하면 우선 처량하고요 그런 이유로 살다 보면 강자에게는 비굴해지고 약자에는 군림하는 졸장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약점과 부족함이 많은 우리가 소망을 품고 살 수 있는 다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절망케 하는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그런 문제를 안고 살면서도 용기를 낼 수 있는 이유를 품을 주님의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약점을 그대로 품고 주님 앞에 함께 나아갑시다.
오늘날과는 달리 고대에는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서 환자와 장애인들도 많았고 사소한 병으로도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난한 사람 가운데는 아픈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힘든 초대교회 인자들에게 소망을 주는 메시지라면 오늘 우리에게도 당연히 소망이 될 것입니다. 마태가 주는 소망의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말씀을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하는데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예수님께서 각종 병을 고치는 사건들이 나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쳤습니다(마 8:1~4). 나병(한센병)은 오늘날에도 치료제는 있지만 손상된 부위가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즉시 깨끗하게 회복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나병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어서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도 없고 사람들이 나병 환자와 접촉해서도 안 되는데 예수님은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면서 고쳐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중풍병은 오늘날도 치료가 쉽지 않은 병인데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만나지도 않고 그 주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낫게 해 주셨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린 것을 보고 고쳐 주셨습니다. 의사였던 누가는 이를 “중한 열병”이라고 표현했는데(눅 4:38) 예수님이 그녀의 손을 만지자 열병이 떠나고 그녀는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귀신 들린 자와 온갖 병든 자들이 몰려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 주신 사건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실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면 그 이야기가 무슨 교훈을 주는지 생각하는데 본문에서 마태는 직접 해설을 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 중풍병자, 심한 열병, 각종 환자들, 귀신들린 자까지 고쳐 주신 사건들은 바로 이사야가 말한 예언을 이루시는 사건이라고 마태는 설명합니다(17절).
그렇다면 이사야는 뭐라고 예언했을까요? 이사야 53:1~6은 고난주간마다 읽는 본문인데 4절에서는 메시아가 오면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질고(疾苦)란 질병과 고통을 의미하는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질고(홀리 חֳלִי)는 질병이라는 뜻이고 슬픔(마코브 מַכְאֹב)는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말한 그 메시아 예언이 예수님이 사람들의 각종 질병과 귀신들린 것을 해결해 주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마태의 설명입니다.
이후에도 예수님은 여러 번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8:28 귀신 들린 자, 9:2 중풍병자, 9:20 혈루증 걸린 여인, 9:27 맹인, 9:32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심지어 9:18 죽은 소녀도 살려 주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이 그가 메시아라는 증거인데 왜 마태복음 12:10에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후에는 병을 고쳐 주시는 이야기가 없을까요? 예수님은 왜 어 이상 병을 고쳐 주지 않고 설교만 하고 다녔을까요? 그러다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버리는데 그러면 이제 병은 누가 고쳐 주실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 53장을 다시 봅시다. 4절에서는 그가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대신 지셨다고 하더니 5절에서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찔리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다고 합니다. 결국, 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죄악의 문제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병에 걸리면 아프다가 결국 죽는데 죽음이란 죄 때문에 왔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사람은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죽음이 죄에서 왔다면 죽음의 원인인 질병도 죄 때문에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담당하는 확실한 방법은 질병의 원인인 죄를 고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역 초창기에 각종 질병을 고쳐 주심으로 그가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인간들의 질병과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사람들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질병이라는 현상만이 아니라 근본 뿌리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세상 모든 질병과 고통과 죽음의 원인인 죄 문제를 해결받아야 합니다.
산에 가면 칡넝쿨이 많습니다. 어떤 나무든지 칡넝쿨이 감고 올라가서 꼭대기 생장점을 휘감으면 나무가 질식하여 고사해버립니다. 그래서 산에 묘목을 심는 농부는 칡과의 한판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저도 전에 잣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낫을 들고 열심히 칡넝쿨을 제거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칡넝쿨은 아무리 잘라내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칡넝쿨은 하루에 30센티까지 자랍니다. 그 정도 속도이면 동물 아닙니까? 칡의 중심 뿌리는 굵기가 장정 허벅지만 하고 넝쿨이 뻗어 나가면서 땅에 뿌리를 내리는 방식으로 반경 30미터까지 약 850평을 점령해버립니다. 나무를 휘감은 넝쿨을 제거한다고 하루에 30센티씩 자라나는 칡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칡넝쿨과 싸우는 농부 처지에서 칡은 마귀 넝쿨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이 칡을 확실하게 죽이는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무 넝쿨이나 자르지 말고 반드시 중심 뿌리를 찾아서 뿌리에서 출발하는 머리 줄기를 잘라야 한답니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닙니다. 제초제 10밀리를 비닐봉지에 담아서 뿌리와 머리 줄기를 각각 그 봉지에 넣고 잘 묶어 놓으면 며칠 후에 완전히 말라 죽는다고 합니다. 넝쿨이 중간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즉시 죽는 것은 아니고 머리 줄기에서 제초제를 흡수하여 전체 넝쿨에 약효가 퍼지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칡과 싸울 일은 없어도 죄와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죄와 사탄이 가져다준 표면적인 죄, 표면적인 질병과 고통도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병도 나아야 하고 문제도 해결되어야 합니다. 또 악한 마음을 버리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죄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적으로 죄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칡넝쿨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 예수님이 처음에는 낫을 들고 나무를 휘감은 칡을 제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잘라도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칡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칡넝쿨의 머리 줄기를 자르듯이 사탄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칡이 말라 죽는 데 며칠이 걸리듯이 전 인류에게 뿌리를 내린 사탄의 죄가 죽는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탄에게 영양분을 공급하지 말고 사탄을 대적하며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합니다.
정리해봅시다. 사람에게 질병과 죽음이 온 것은 인류의 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질병을 고친 것은 예수님이 바로 죄와 죽음을 해결하는 메시아임을 보여주시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농부가 칡넝쿨의 머리 줄기를 잘라서 제초제에 담그듯이,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정복하셨는데 지금 사탄이 죽어가면서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근본 문제인 죄를 해결해 주셨는데 지금 우리가 고통받는 질병의 문제, 각종 약점은 도와주실까요, 안 도와주실까요? 정답은 둘 다입니다.
우선 우리의 모든 약점을 담당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예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하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때로 우리가 기도한 것과 다른 결과를 주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실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더 좋은 일이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나중에는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역시 하나님은 지혜로우십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가시밭길 인생을 허덕이면서 갈 때에
시험과 환란 많으나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셨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이제 여러분은 헷갈릴 것입니다. 질병과 문제를 위해 기도하라는 건가요? 하지 말라는 건가요? 당연히 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대로 응답하셔도 감사하고 더 좋은 응답을 주셔도 좋으므로 마땅히 기도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근본적인 죄 문제부터 여러분의 질병과 모든 약점을 다 책임지고 해결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 주십니다. 다만 여러분의 욕망까지 채워 주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고통과 슬픔이 무엇입니까? 부족한 부분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의 문제와 약점을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께 구하고 예수님으로부터 해결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간증이 풍성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첫댓글 https://youtu.be/t1pDJMu_2H0
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