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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사사시대의 정리 및 재확인
사사시대를 다시 보면, 주전 1406년 가나안 땅 진입에서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된 주전 1010년까지로 보면 396년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시조 살몬(살마)에서 보아스까지 적어도 5대 이상 끊어져 있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의 계보를 같은 시대의 대수로 다시 비교해 봅니다.
<유다 후손의 족보>
룻기 4:20~22 : ①살몬(살마)과 라합 ··· (약 5대 누락)··· ②보아스와 룻 - ③오벳 - ④이새 - ⑤다윗
누가복음 3:31: ①살몬(살마)과 라합 ··· (약 5대 누락)··· ②보아스와 룻 – ③오벳 - ④이새 - ⑤다윗
<레위 후손의 족보>
역대상 6:4~8 : ①엘르아살-②비느하스-③아비수아-④북기-⑤웃시-⑥스라히야-⑦므라욧-⑧아마랴-⑨아히둡-⑩사독(사독은 다윗 시대 제사장, 삼하 8:17)
두 지파의 계보를 비교하면 레위 지파는 다윗 왕까지 세대수가 10대지만, 같은 기간에 유다 지파는 5대뿐입니다. 여기서 오벳에서 다윗까지 96년으로 잡아서 제외하면, 사사시대의 시조인 살몬(살마)과 라합 이후 그의 직계 후손인 보아스(룻)의 사이는 약 300년 기간이며, 그 기간에 적어도 약 5대의 계보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끊어진 5대 정도의 계보는 누가복음 족보 기준으로 보면 기업이 없어서 이름이 빠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기업이 없는 이유는 첫째, 라합의 신분이 미천하여서 라합 가족과 후손들이 주류들에 의하여 기업을 상속받지 못했다는 추정이고, 그다음이 베들레헴 지역의 특수성 때문에 여호수아의 토지분배에서도 빠져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역의 특수성은 예루살렘이 다윗의 통일왕국 시대까지 정복하지 못한 것과 헤스론이 애굽 종살이 때부터 미리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그 땅을 개척하여 후손들이 살았기 때문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사사시대는 족보가 단절된 채 약 300년을 지속하다가 살몬과 라합의 직계 후손인 보아스의 윗대 조상이 유다 지파의 주류 계보(소발 자손 또는 살몬의 본처 후손)와 여성 상속법에 따른 결혼으로 혈통과 기업의 상속권을 회복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에서 주류 계보의 후손인 엘리멜렉은 흉년이 들자 모압으로 이주하였다가 본인은 물론, 두 아들까지 죽어서 계보가 단절되었습니다(룻 1:1~5). 그래서 이 단절된 유다 지파의 주류 계보를 기생의 후손이 이어줍니다. 그 방법은 베들레헴 사람 보아스와 룻이 준행한 계대결혼과 기업 무르기라는 속량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사사시대 300년 기간의 족보는 속량의 수단으로 가계와 기업이 온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이 속량이 바로 십자가의 구원원리입니다.
그러나 주류 계보인 엘리멜렉은 그들의 시조인 라합의 직계 후손들을 홀대하였기 때문에 족보에서 단절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주류들은 계보가 다말에서 계대결혼법 위반과 나태로 족보에서 제외되었고(창 38:7,26), 애굽 종살이 시대는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약속의 땅 진입에서도 불순종으로 나손의 후계자는 훌의 아들로 살몬(살마)으로 교체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사시대에 들어와서도 불순종으로 살몬에서 엘리멜렉까지 약 5대까지는 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엘리멜렉에 와서 그 육적 혈통은 씨마저 완전히 끊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끊어져 버린 계보의 씨를 기생의 직계 후손인 보아스가 잇습니다(마 1:5).
이렇게 정상 계보로 회복한 보아스에서 태어난 오벳이 베들레헴 사람으로 칭함을 받는(삼상 16:1) 이새를 낳았습니다(룻 4:21). 이새가 다윗을 낳아서 다윗을 통하여 통일왕국이 탄생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사사시대의 400년 기간의 족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족보의 선택요건(또는 선택기준)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마 13:24)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
농부가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두면, 거둔 곡식 중에서 다음 해 농사를 위해 종자용 씨앗부터 준비합니다. 이때 농부는 거둔 수확물 중에 제일 좋은 씨를 골라서 종자용 씨앗으로 삼습니다. 씨앗이 한 말이 필요하면, 그 양은 수확물 중에 제일 좋은 것을 골라서 한 말을 보관하게 됩니다. 만약에 한 말이 필요한데 수확물에서 제일 좋은 것이 모자라면, 품질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그다음 품질로 씨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자용 씨는 품질이 다소 나쁘더라도 한 말이 될 만큼은 양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도 그 계보는 농부가 씨를 준비하는 것과 원리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구세주가 태어날 때까지 씨와 땅을 이어가는 기록이 족보입니다. 그러나 그 씨는 자손들 중에서 골라서 올리게 됩니다. 품질이 나쁘면 씨를 빼버리기도 하고, 아예 없애버리기도 하고, 다른 씨로 바꾸기도 합니다. 그래도 씨의 양이 부족하면 다소 질이 떨어지더라도 그 이름을 계보에 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인 족보는 대를 잇는 모든 대수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대수 중에 이름을 선택하여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 족보는 공적인 지도자 계보이므로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대수를, 족장시대와 사시시대, 왕조시대, 그리고 포로기 이후 시대로 나누어 시기별로 14명씩만 선택하여 기록합니다(마 1:17). 누가복음 족보는 사적인 가계의 지도자 계보이므로 마태복음 족보와는 차별성을 가집니다. 그렇지만, 누가복음 족보도 한 가계대표자로서 족보에 이름이 오르려면 그에 따른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족보도 사사시대는 300년 기간에 기업이 없어서 약 5대가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룻기의 족보에서 유다 지파의 주류 계보인 엘리멜렉의 선조들을 먼저 족보에서 빼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기록한 마태·누가복음 족보가 구성된 요건이나 이름을 선택한 기준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족보를 통하여 보여주는 이름이나 행적을 따라 그 요건과 기준을 찾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족보의 선택요건이나 선택기준은 특히 사사시대의 족보가 장기로 단절되거나 다시 이어지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합니다. 그래서 필자의 생각대로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요건이나 기준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는 믿음이 필수 요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그 계보에 속한 사람이 큰 업적을 남겨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이름이 족보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왕조시대에 악한 왕이었던 므낫세, 나라를 패망하게 한 여고냐(여호야긴)가 계보에 오를 믿음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죄가 있었어도 모세나 다윗처럼 회개를 했기 때문에 이름이 계보에 오른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족보는 분기별로 14명씩 선택하여 기록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믿음의 등급이 14명 안에 들어간다면 그 이름은 계보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믿음의 판별과 선택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판단하십니다.
(2) 혈통입니다. 족보에 믿음 다음의 구성요소는 혈통입니다. 이것은 공동체에서 그 공동체가 가진 정체성과 역사성을 나타내는 데 필요합니다. 그러나 혈통이라고 모두 계보로 이름이 오르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장자라고 장자권자의 계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차자라도 장자의 권리와 의무를 준행하는 자가 계보에 오릅니다. 이처럼 족보에 이름이 오르는 것은 직계 혈통(장자나 친아들)이라고 계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계대결혼, 양자 입적, 여성 상속법 등으로 직계 혈통이 아니어도 계보에 들어갑니다. 족보나 직위의 계승에는 경우에 따라서 사위도 들어갑니다(눅 3:23, 요 17:13). 이것부터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오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3) 기업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기업을 아주 중시합니다. 이 기업은 미래에 천국까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희년법은 기업의 영구 매매는 금지하고 있으며(레 25:23), 거래는 시한부로만 할 수 있고(레 25:15,16), 이때도 친족이 무르기를 해주어야 합니다(레 25:24,2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기업이 있어야 족보에 이름이 오릅니다. 그렇다고 기업이 항상 필수적 요건이거나 선택기준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희년법 제정과 가나안 땅 토지분배가 있기 전에는 가족별로 할당된 기업이 없었습니다. 또 족보의 흐름에서 부득이하게 기업이 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를 때는 기업이 없었더라도 그 기업을 유지, 관리할 능력이 있다면, 족보에 이름이 오를 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1), (2), (3)의 세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족보 모두 적용해야 할 구성요소이고, 선택기준입니다. 다음은 이에 추가하여 마태·누가복음 족보가 각기 목적과 특성을 따라 별개의 기준을 적용해야 할 요건이 더 있습니다.
(4) 마태복음 족보는 공식적인 지도자 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1), (2), (3)의 세 가지 요건 외에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이나 기준이 더 필요합니다. 이것 역시 성경이 명시적으로 정해 놓은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 시대나 상황에 따라 주권적인 개입으로 결정되어 왔습니다. 이 선택기준은 특히 지도자가 중시되었던 왕조시대에 우선하여 적용할 요건이고, 기준입니다. 마태복음 족보가 각 기별로 14명으로 제한된 것은 공식적인 지도자의 계보를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5) 누가복음 족보는 사적인 가계의 계보입니다. 그러므로 사적인 가계 대표의 요건이나 자격이 필요합니다. 특히 누가복음 족보에서 중요한 것은 희년법이 지켜지는 기업의 상속권자 계보입니다. 여기에는 희년법 토지 무르기, 여성 상속법, 계대결혼 등의 권리와 의무가 포함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족보의 구성요건이나 선택기준은 이 상속권(또는 족보 기록)의 적용 범위가 가족(family)에 한정되지 않고, 친족(families) 또는 크게는 씨족(clans), 곧 지파의 영역까지 범위가 넓혀져야 합니다(민 36:5~9). 이것을 알아야 족보에서 이름이 빠진 사람들과 들어간 사람들의 계보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족보는 기업 상속권에 대한 권리나 의무를 준행하면 먼저 족보에 이름이 오를 수가 있고, 이를 지체하거나 불순종하면 이름을 올리기 어렵습니다. 물론 가족별로 분배된 기업이 없었던 족장시대는 이런 귄리나 의무를 준행할 수 있는 자가 족보에 이름이 오릅니다.
(6) 마태·누가복음 족보는 모두 속량(고엘, redemption)의 권리와 의무를 준행한 자에게 족보 기록에 우선권이 주어집니다. 속량이란 문제 해결에서 내가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남이 대신하여 해결하여 줄 때를 말하고, 그 난제의 해결자 또는 조력자를 고엘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고엘의 의무는 친족 또는 동족 간에 해야 하는 몸값 무르기(레 25:47,48), 기업 무르기(레 25:24,25), 채무의 면제(레 25:25:36, 신 15:1~5), 계대결혼(신 25:5,6), 피의 보수(민 35:19) 등이 있고, 경제적 의무를 더 넓게 보면 여성 상속의 권리와 의무(27:6~11)가 포함됩니다.
(7)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보여주는 속량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유일 수단이자,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규례이며, 시장원리입니다. 이 속량은 죄를 사하는 방법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곧 레위기 제사법은 내가 지은 죄로 짐승이 속죄의 제물로 피를 흘려 죽어야 합니다(레 17:11). 가난한 자가 드릴 속죄의 제물이라도 곡식이 빻아져서 고운 가루가 되어 불살라져서 희생이 되어야 했습니다(레 5:11). 이 속량은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희생되어 우리를 살려주시는 “십자가의 구원원리”로 연결되게 됩니다.
이상입니다. 혹시 필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그 구성요건이나 선택기준을 (1)~(7)의 항목을 정한 것은 우리가 구원의 조건을 항목으로 규정짓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성경이 보여주는 경제생활에 대한 것을 알리려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필자는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 공동체에서 필요한 믿음이나 구원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생활 공동체에서 필요한 생활의 조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은 기본이고, 그 기본적인 신앙을 가진 자가 생활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필자는 도로교통법 준수 의무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도로교통법 준주 여부가 구원의 조건인 신앙(믿음)과는 별개입니다. 도로교통법을 어겼다고 구원이 없다고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자가 신호등도 지키지 않고, 빨간불에도 차를 멈추지 않고 주행을 하거나 도로를 역주행 하는 위반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이런 경우 개인은 생명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으며, 사회는 교통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의 정신과 영혼, 그리고 생활을 온전한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자가 말하는 생활신앙은 종교 행위인 제사나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나 제사를 마친 사람이 그 장소나 공동체에서 나오면, 생활에서 필요한 사람, 장소, 공동체에서 실행해야 할 실무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 내용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족보의 선택요소나 기준도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이 기준은 성경에서 명시적 구절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족보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을 종합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의 요건이나 기준은 우리가 생활 실무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영성과 이성으로 진위 판별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족보나 성경의 전반적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족보의 선택요건이나 기준을 찾아보고 정리했습니다.
희년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그리고 성경에 대한 관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필자가 예수 그리스의 족보에서 사사시대의 두 가족, 곧 살몬(살마)과 라합, 보아스와 룻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에 걸쳐서 했습니다. 때로는 추리 소설처럼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룹바벨의 조상이나 후손에 대한 족보 이야기도 “몸통은 하나지만, 머리가 둘이고, 꼬리는 셋”이라는 말도 소설 같은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족보에 오른 이름과 행위에 대하여 육법전서를 갖다 대듯이 풀기도 했습니다. 족보 이야기에서 레위기 희년법, 민수기 상속법, 신명기 계대결혼법을 자주 언급한 것이 그 예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반 사회생활에서 다루어야 할 삶의 방식을 다큐멘터리 드라마 같이 접근하기도 하고, 때로는 성경을 사회법에서 생활법을 해석하는 것과 원리가 비슷했습니다. 독자들은 이에 대해서도 이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필자는 나이가 스물셋이 되어 처음 교회에 나갔습니다. 고시 공부를 하다가 몸이 망가져서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여 교회로 나갔습니다. 스스로 교회에 나갔으나 아직 믿음은 없었기에 “교회에 나갔다”라는 말이 적합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스물일곱에 결혼하면서 집사람과 교회로 나가면서 신앙을 가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해오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장로의 직분도 여김을 했었고, 지금은 은퇴했습니다.
제가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성경의 족보를 소설처럼 추정하고 있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생활 법리를 해석하듯이 해야 할 줄은 제 자신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50년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접해온 성경은 간단히 언급하면 이런 것입니다.
첫 단계로 성경은 사람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내용을 담아놓은 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들은 대로 “성경은 과학이 아니며, 역사도 아니며, 경제도 아닌 구원의 책”이었습니다. 성경은 오직 죄로 죽을 생명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전부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무릎 관절에 이상이 생겨서 직장도 못 나가고 4주간 휴무하면서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말씀이 지금 본문으로 소개한 히브리서 4:12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성경은 영혼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서도 변화를 주고 살려낼 수 있다는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다음 단계는 성경에서 희년법을 알았고, 이 희년법은 경제문제를 뿌리에서 해결해 놓은 것을 알았습니다. 희년법을 공부하여 보니 참으로 기가 찼습니다. 성경은 그야말로 신통방통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할 수가 없고, 이때부터 저는 성경에 대한 인식이 더 크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과학이 아니지만, 과학이 들어있고, 역사가 아니지만, 역사가 들어있고, 성경은 경제학이 아니지만, 경제가 구체적으로 들어있다”라고 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가복음 족보를 공부하면서 성경에 대한 제 생각은 또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성경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장 우수한 과학이고, 성경은 인간의 모든 역사를 인도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성경은 경제학 중의 경제학으로 생활구원의 유일무이한 책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과학과 역사와 정치와 경제(학)에서도 교과서(기본서)이며, 그 위에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신앙고백과도 별개입니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땅은 내 것이다"라고 여기고 행동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희년법과 신앙고백은 전혀 상반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물론 지금의 세상법이 바알 제도이므로 다른 대안이 없기는 하지만). 희년법은 사람이 생활 공동체에서, 실제 생활에서, 믿음이 있든, 없든, 그렇게 적용하고 순종을 해야 하는 실천 사항이었습니다.
희년법, 상속법, 계대결혼법은 생활 실무입니다.
성경에서 레위기 희년법, 민수기 상속법, 신명기 계대결혼법은 성경이지만, 우리의 생활에서 실제로 적용을 해야 했을 실무 규정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규정들은 법리를 해석하듯이 풀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성경의 희년법, 상속법을 가지고 성경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 법은 머리를 싸매고 공부도 하고, 그 법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데,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레위기 희년법은 소설처럼 생각하거나 그렇게 경솔하고 야박하게 읽고, 전하고, 대하면서 살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길을 건너가도 신호등을 보고 건너고, 차를 몰면 차선을 지키면서 운전을 합니다. 우리가 보험을 들어도 보험 약관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알아보고 보험을 들며, 그 약관을 지켜야 사고가 나면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본 레위기 희년법, 민수기 상속법, 그리고 신명기 계대결혼법도 그러합니다. 이 법은 신앙 문제라기보다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생활 법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말씀으로 이런 법을 주실 때는 그 시대에는 이런 법을 지켜야 한 가정의 안전이 보장되고, 사회는 공동체 전체가 화평을 누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제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중에서도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희년법, 상속법, 계대결혼법을 준수 여부를 필수 요건으로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 세 가지 법을 지키지 않으면, 족보를 이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한 가계에서 희년법이 정해 놓은 땅이 없으면, 씨가 살아갈 수 있는 터가 없어서 씨를 이을 수가 없습니다. 씨(대)가 끊어졌을 때는 계대결혼이 아니면, 땅(기업)을 상속할 씨를 얻지 못합니다. 더구나 남은 자(여성)의 생존을 위한 생계 수단을 보장할 수가 없고, 가정을 회복할 수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법과 제도는 구약시대의 생활구원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사사시대는 토지를 분배한 초기 시대이고, 농업에서 토지는 생존의 필수재이므로 백성들 대다수는 여호수아로부터 분배 받은 자기 기업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이 재임할 때까지는 분배된 토지와 희년법의 골격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사시대가 문란해도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고, 다윗이 왕국을 통일하고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여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사시대는 초기부터 희년법의 불순종을 부추기는 바알 신을 믿기 시작했습니다(삿 3:7). 누가복음 족보는 장기로 계보가 끊어져 있으며, 룻기에서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떠나서 몰락하는 것(룻 1:5) 등을 종합하여 보면, 희년법이 온전하게 지켜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알 신을 받아드릴 때부터 희년법은 그에 비례하여 훼손되고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회는 이 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레위기 제사법 준수는 필수로 보았으나, 기업 무르기를 거부한 아무개처럼(룻 4:6) 희년법은 필수로 보지 않았고, 지키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희년법은 지켜도 억지로 지키거나 순종에는 경솔하고 인색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율법을 따라 돼지고기는 먹지 않지만, 같은 율법인 희년법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땅을 집값이 포함시켜 팔고 사기 때문에 텔아비브는 부동산가격이 중국처럼 매우 높습니다.
그 대신 지도자들이 성경과는 별개로 만든 600여 가지의 규율(유전)을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단적인 실례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수십 가지의 규율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안식일 규정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안식일을 어겼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진작에 지켜야 할 희년법과 같은 큰 법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고 꾸짖습니다(마 23:24).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레위기 제사법은 눈여겨 보아도 레위기 희년법은 소설처럼 보고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계대결혼법을 보거나 오난이 형수에게 설정하는 장면을 읽으면 야한 동영상을 대하듯이 하고 그치지 않았나요? 아니면 계대결혼을 케케묵은 율법의 한 단면으로 보고, 무시해 버렸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계대결혼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데 필수적 수단이었음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사사시대의 끊어져버린 족보를 소설처럼 추정하여 접근하면, 그게 진짜로 삼류 추리 소설이 되어버립니다. 그만큼 희년법, 상속법, 계대결혼법을 쉽게 무시하고, 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약시대에 희년법 관련 준수 여부
우리가 지금은 구약시대의 계대결혼법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민수기 상속법도 그러하고, 레위기 희년법도 문자 그대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는 이런 구약 제도를 완전히 개혁하는 복음이 필요했습니다(히 9:10,14).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이 법이 가진 시대적 의미를 알아야 하고, 이것이 신약에서는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레위기 제사법이 신약시대에는 예배로 바뀌었으면, 레위기 희년법은 신약시대에 와서 어떻게 바뀌어 성취되고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도록 개선시켜야 합니다. 복음은 율법을 온전하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마 5:17,18).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레위기 제사법과 안식일 규정은 기를 쓰고 지키려고 했으므로, 신약시대는 제사와 안식일 준수 대신에 주일 예배와 주일 성수를 그만큼 강조합니다. 이처럼 레위기 제사법 못지 않게 레위기 희년법이나 계대결혼법 등도 신약시대에는 어떻게 계승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제사법은 지켰어도 희년법은 무시하고, 편중된 신앙생활을 해 왔었다면, 신약시대에도 그런 과오를 다시 반복하고 있지 않는지에 대해 확인을 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는 한 가정에서 형제의 씨를 빌려주어서라도 자녀를 두고, 족보를 잇고, 가정을 복원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신약시대에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관과 결혼관은 과연 옳은지를 깊이 새겨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결혼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가족 없는 1인 세대, 비혼주의자로 살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계와 족보를 끊어지게 합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나 사회적 혜택은 생각하지 않고, 주신 생명을 자기 대에서 단절시켜 생명의 영속성과 생명의 역사를 끊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는데(창 9:1) 혼자 사는 삶이 나의 생활철학이라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가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소유하고, 자유롭게 매매할 지주의 자격을 주지 않았습니다(레 25:23). 그런데도 우리는 지주 형세를 하면서 땅을 상품처럼 팔고 사서 부동산 가격이 치솟게 하여서 물가를 계속하여 올리게만 하고 있습니다. 나라 경제는 주기적으로 흔들리며 충격을 주었고, 심지어 가계와 기업이 빚덩이를 견디지 못하고 도산합니다. 그래도 이런 경제적 비극을 계속 반복하고 있어도 이것은 그리스도인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지를 냉철하게 알아봐야 합니다.
부동산시장과 금융시장을 뿌리에서 지켜주는 희년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금융자산(토지, 주식 가상화폐 등)이 부풀어서 사람들의 혼을 빼앗아 갑니다. 더구나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들이 가상화폐는 영원히 아무것도 없는 허구 가격물임을 모르고, 거기에 영혼까지 끌어들였다가 어처구니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성경 희년법을 경전으로 가진 사람들이 이에 대해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면,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맞는지를 심각하게 한번 곱씹어 보아야 합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레 11:7,8) 해도 복음 시대에는 아무 꺼리낌 없이 먹어도 되듯이, 땅은 팔리지 말라고(레 25:23) 해도 복음 시대는 팔고 사도 되는지를 현실적 삶에서 진위를 따져 보아야 했습니다.
필자가 희년법 등을 도로교통법을 준수하듯이 지켜야 한다는 말이 독자들에게 근본주의자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드는 근본주의는 별로입니다. 근본주의에도 지키려는 열정은 있으므로 배울 것은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가 보기에 바리새인들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틀에 스스로 같혀 살아온 종교인들입니다. 이들의 성경관은 교조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또한, 성경을 사람의 생각대로 풀어가는 경향이 있는 인본주의나 자유주의적 접근도 경계합니다. 그들은 신약에서 사두개인들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그 시대에 지배 계층으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권위와 이권을 밝히는 부류들이었습니다.
제 역시 부족한 사람인데 이런 표현이 남을 평가하고 있다면, 교만일 수 있겠습니다. 남의 신앙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독자들이 혹시나 선입감으로 인하여 희년법 이해에 장애가 될까하여 이런 구차한 말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성경에서 가정을 지키려고 만들어놓은 희년법과 그 희년법이 가지고 있는 속량은 창조질서를 따라 만든 제도로, 구원의 유일한 방법론입니다. 필자는 성경에 대하여 이런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희년법은 인간의 영적, 이성적, 문자적, 근본적, 내용적으로 흠이 없는 경전 중의 경전입니다. 말이 자꾸 길어지므로 이렇게 줄이겠습니다.
① 족보가 끊어지지 않도록 만들어놓은 희년법을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그 선택요건이나 선택기준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② 희년법을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③ 족보에 관련된 희년법을 알아야 성경을 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④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끊어지고 이어지는 이유를 알아야 생활 공동체(신앙 공동체와 별개)를 바로 운영하고, 지도할 수가 있습니다
⑤ 그러나 희년법을 모르고 족보의 영적 경제적 의미를 모르거나 무시하면,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족보에 나타는 이름들의 행적을 볼 때, 희년법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지도자는 생활 공동체에서 쓰임을 받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신앙 공동체에서는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