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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춤추는 사회주의
김창진 外, 가을의 아침 2017.
쿠바는 어디로 가는가?
혁명과 개혁
쿠바는 어디로 가는가? 소련에서 중국, 베트남까지 국가사회주의 개혁의 길을 먼저 간 선배들이 있지만, 쿠바 지도부는 그대로 따라가려 하지 않았다. ‘쿠바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쿠바는 앞서서 간 자들을 참조하지만 추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수많은 인민들의 예상치 못한 반응과 실제로 개혁정책을 집행하는 관료들의 태도, 그리고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국제관계는 이 나라를 지도부의 의도와는 다른 목적지로 데려갈 수도 있다. 1985년 ‘뻬레스뜨로이까’라는 이름으로 소련의 개혁을 선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불과 6년 만에 사회주의 진영의 종주국을 충격적인 붕괴로 이끌고 말았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던 덩 샤오핑의 신념은 불과 한 세대 만에 중국을 또 다시 세계 강대국으로 만들었지만, 이제 ‘중국식 사회주의’를 운운하기에는 이 나라 도처에서 자본주의의 물결이 너무나 세차고 곳곳에서 사회적 모순이 첨예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가하면 베트남에는 돈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북한과 쿠바의 지도부는 바로 이 지점을 중시하고 있을 것이다. 기존 제도와 정책의 개혁이 곧 체제 자체의 근본적인 붕괴나 해체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무엇인가?14-15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혁명이 엄청난 사건이라면, 개혁은 지난한 과정이다. 혁명은 초법적인 사태이지만, 개혁은 합법적인 조율이 불가피하다. 혁명은 기존 제도와 기득권 집단을 “쓸어버리면” 되지만, 개혁은 바로 그 제도와 집단들의 동의를 구하거나(최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못하게 중립화하지(최소한)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개혁세력에게는 압도적인 사회적 지지와 우여곡절을 거듭할 개혁의 시기를 지탱할 정치·경제적 자원이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의 존재도 중요하다. 개혁과정에서 정치·군사적으로는 물론 경제·문화생활에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웃 강대국의 특별한 조치는 국내 사태를 일거에 뒤집어버릴 수도 있다. 오늘의 쿠바는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가? 조건과 상황 자체가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평가나 전망이 앞으로도 계속 유효하리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따라서 쿠바의 앞길은 우리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아직은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능성의 기회가 열려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15
2015년, 외교 관계의 복원을 선언하며 어색하게 손을 맞잡은 버락 오바마와 라울 카스트로의 표정만큼이나 미국과 쿠바 두 나라 상호 관계의 전망은 아직 불확실하다. 새로 미국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는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탐탁지 않게 보고 있다. 사태가 뒤집어질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던 판에 2017년 6월 16일, 그는 마이애미의 한 극장에서 미국인들의 쿠바여행을 더욱 제한하고 쿠바 군부와 거래하는 미국 기업들을 단속하는 조처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간 두 나라의 수교 정상화 조치가 단지 선언적인 것일 뿐 혁명 이후 끈질기게 쿠바를 괴롭혀 온 경제봉쇄를 미국이 여전히 풀고 있지 않다고 항변해 온 쿠바 당국의 의심과 불만을 트럼프가 정확하게 확인해준 셈이다. 물론 쿠바를 탈출한 ‘리틀 아바나’의 반공주의자들을 다분히 의식한 것으로 보이는 이 발표로 인해 쿠바-미국의 국교가 다시 단절되는 극단적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고, 오바마 행정부가 해제한 쿠바산 럼주나 시가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15-16
미국의 플로리다 코앞에 있는 카리브 해의 이 작은 섬나라는 1959년 혁명 이후 우여곡절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쿠바는 이제 “20세기 사회주의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거의 마지막 실증적 답변의 사례로 보인다. 그것은 ‘사회주의’ 또는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긍정적 또는 부정적) 입장에 따라 “아직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사회주의 쿠바”, 또는 “아직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지 못한 후진국 쿠바”로 여겨진다. 중국이나 베트남은 ‘시장경제 도입을 통한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향해 멀리 나가버렸고, 북한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점진적인 경제활성화 조치에도 불구하고, 그 완고하고 폐쇄적인 정치체제 탓에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때는 우고 차베스가 이끈 베네수엘라가 ‘21세기 사회주의’ 모델로 일컬어졌지만, 그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사망과 국제유가의 곤두박질 이후 이 나라는 깊은 경제적·정치적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거기에 인민의 불만을 이용한 기득권계급의 노림수와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16-17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와 체 게바라 등이 이끈 쿠바 혁명은, 흔히 잘못 알려져 있다시피 처음부터 ‘사회주의 혁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저기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쿠바의 공산혁명을 이끈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라는 상투적인 문구는 쿠바혁명사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는 게으른 자들의 블로그 제목에 불과하다. 그것은 처음에 민주주의혁명이요, 민족주의혁명이었다. 카스트로는 혁명 전에 사회주의자인적이 없었다. 게바라는 사회주의에 관해서 좀 더 읽었지만, 역시 이념적으로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1959년 1월 1일에 절정에 달한, 그 이전 수십 년 간 쿠바의 학생운동가들과 노동운동가들,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들이 고통스럽게 쌓아올린 투쟁의 결실로 이 섬나라를 뒤흔든 사건은 반독재 민주주의혁명이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이었다. 그것은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꼭두각시요, 대내적으로는 약탈국가의 우두머리였던 쿠바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축출하고 쿠바인들 자신이 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자주독립의 외침이었다. 그 혁명은 땀 흘려 생산에 종사하는 인민을 착취하고 토지와 자원 등 국부의 대부분을 탐욕스런 미국의 사업가들과 마이애미의 조직폭력배들에게 넘겨준 대가로 허랑방탕한 생활에 젖어있던 부패한 매국노 집단을 응징한 정치혁명이요, 사회혁명이었다.17-18
쿠바는 혁명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 세계체제의 어디에 자리 잡을지 강요당하는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사회주의 진영’에로 이끌려 들어갔다. 혁명이 폭발하고 그 혁명 정권이 급진적 사회개혁을 수행하던 1950년대 말-60년대 초반은 2차 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특징지은 냉전의 한복판에 위치한 시대였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소련의 지도자 흐루쇼프가 평화공존 정책을 내걸면서 잠시 국제적 ‘해빙’ 무드가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곳곳에서 벌어지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차가운 전쟁’은 세계 어디서든지 국지적 열전으로 터져버릴 수 있었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두 초강대국이 직접 맞붙는 핵전쟁에 인류가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18-19
혁명 직후 카스트로는 미국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는 자본주의체제는 무조건 배격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고, 이 작은 섬나라가 바로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거대한 자본주의 종주국의 압도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898년 스페인제국이 아메리카 대륙의 신흥강대국 미국에 의해 쫓겨난 이후 쿠바는 사실상 이 새로운 제국의 뒷마당이 되어버렸다. 4년 동안 군정을 실시한 미국은 이 나라에서 신식민지 질서와 인종주의를 부활하고 쿠바 정치를 미국의 인질로 만들었다. 그 사이 쿠바 경제는 미국 기업들이 거의 다 접수하다시피 했는데, 1905년의 시점에서 쿠바 토지의 69%, 담배·철강·구리·니켈·철도·전기·통신 등 주요 산업의 90%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쿠바인들은 바로 미국의 예속으로부터, 미국과 결탁한 독재정권으로부터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는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은 불가피하게 부패한 독재자들과 그들의 비호를 받던 조폭들을 내쫓고 인민의 고혈을 쥐어짜던 매판기업들을 국유화하는 조치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혁명의 대의였다.20-21
카스트로는 1959년 4월 미국을 직접 방문했다. 이미 석 달 전 미국은 새로운 혁명정부를 마지못해 승인한 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미국은 카스트로의 손을 잡지 않았다. 외교적으로는 미국의 단견 탓이었다. 그 때 미국이 통 크게 카스트로를 품에 안았다면 쿠바는 굳이 소련의 동맹국이 되지 않았을 터이고,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이 중남미에서 오히려 고립되는 악수(惡手)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인 탐욕에 눈이 멀어버린 미국은 자국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그 섬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카스트로에게 혁명의 대의를 부정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아니 쿠바는, 그런 요구에 무릎 꿇지 않았다. 대신 또 하나의 세계적 강대국 소련에게로 눈을 돌렸다. 미국의 숙적 소련이 그 천혜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1960년 쿠바와 소련이 다시 수교했다. 바로 주적의 코앞에 자진해서 나타난 새로운 동맹자−쿠바! 1959년 쿠바혁명에서 소련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기존 쿠바의 공산주의자들은 카스트로와 게바라 식의 무장봉기를, 이 나라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제도가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모하게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기까지 했다. 이런 의미에서 쿠바혁명은 차라리 ‘반反공산당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1917년 러시아혁명을 ‘반反자본(론) 혁명’이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피델 카스트로가 새로운 정부의 공식 이념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건 것은 혁명 발생 2년이 지난 1961년이었다.21-22
쿠바의 경제개혁: 피델에서 라울로
라울 카스트로는 2006년부터 사실상 쿠바의 최고 통치자 역할을, 그리고 2008년부터 본격적인 개혁을 시작했다. 피델로부터 라울로 권력이 넘어가면서 내각 구성원들과 군부 및 공산당과 정부 기구에서도 상당한 인적 쇄신이 일어났다. 2009년 이후에는 정부 수준에서 개혁위원회와 반부패기구가 성립되기도 했다. 라울이 임기 초반부터 시행한 일련의 경제개혁과 제한된 정치적 자유화 조처 덕분에 이 나라에서는 국가사회주의 모델과 시장경제를 결합한 혼합경제가 형성 중이다. 그리고 기존의 수직적 국가-시민사회 관계가 완화되면서 양자의 접점이, 느리지만 점점 더 다양화하고 있다. 이런 제도적 변화에 따라 재정과 신용, 협동조합에 관한 법률의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부동산, 중고차, 즉석식품과 식당 등 쿠바인들의 일상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소비재 시장과 교통 서비스가 합법화되었다. 아래에서 라울 카스트로가 ‘구조 개혁’이라고 부른, 시장경제를 향한 중요한 진전을 부문별로 살펴보자.26
국가사회주의 경제모델을 ‘갱신’하다
2011년 4월 쿠바공산당 6차 대회는 “당과 혁명의 경제 및 사회정책 지침”이라는 제목의 개혁정책 청사진los lineamientos을 승인했다. 쿠바 관리들은 경제개혁을, 과거 소련에서 ‘재편perestroika’이라고 불렀듯이, 기존 경제모델의 ‘갱신’이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1989년 쿠바를 방문한 고르바초프가 카스트로에게 쿠바에서도 소련식의 개혁 정책을 제안했을 때 피델이 거부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동생이 20여년 만에 고집 센 형과는 다른 정책에 시동을 걸었다. 쿠바 정부의 ‘갱신’ 개념에 따라 시장과 비국유부문의 확장은 허용되었지만, 주로 국가의 개획에 따른 경제운용은 부정되지 않았다. 이것은 사회주의적 모델의 본질은 문제시되지 않으며, 다만 “낮은 생산성, 생산부문과 사회 하부구조의 자본 부족” 등 만성적인 경제적 성과의 취약성을 개선해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로 국제교역의 3/4을 담당하던 주요 무역상대국을 상실하면서 쿠바는 관광산업과 외국투자의 문호개방, 시장 지향적 농업, 민간 소사업체 허용 등을 추진했다. 쿠바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농민시장의 발전에 기여한 사례를 들면서 피델에 비해 라울이 훨씬 개혁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상당한 기대를 표시하는가 하면, 보다 서구식 자유주의에 경도된 이들은 그가 오랫동안 국방장관을 역임한 비경제전문가라서 본질적인 한계를 가졌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기존 모델의 ‘갱신’이 쿠바 경제체제의 부분적인 체질 개선으로 이어질지, 근본적인 체제전환으로 이어질지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된다.26-28
놀고 있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주다
2009년 쿠바정부는 농민들에게 경작되지 있지 않은 토지에 대한 ‘이용권’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무엇을 생산할지, 누가 소비할지, 누구에게 팔지 스스로 선택하도록 했다. 이후 농민들의 경작 규모가 확대되고, 주택과 헛간의 건축, 조립과 과수원 경영이 허용되었다. 토지는 10년 계약 조건으로 양도되었으며, 계약 만료 시점에서 국가는 농부가 투자한 것을 변제해주고 토지 통제권을 반환받거나 계약을 갱신할 수도 있다. 만약 임대자가 죽으면, 토지를 경작하는 친척들이 그 게약을 이어받을 수 있고, 계약 기간에 농부는 은행 계좌를 열고, 소신용을 제공받을 수 있고, 호텔이나 레스토랑 등 관광 업체에 농산물을 팔 수 있게 되었다. 2009년 이래, 약 370만 에이커의 유휴 농지가 174,275 농민-임차인들에게 분배되고, 그 중 97퍼센트가 개인들이었다. 2014년에는 최초로 농업용품 도매시장이 열렸다. 이런 농장들을 규제하는 2012년의 법에 따르면, 농민은 농업용 물자나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그리고 시장용 생산을 위해서 국가가 관여하는 협동조합 또는 국영농장에 연결되어야만 한다. 이들 농장 운영과 국가가 제공하는 소신용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28-29
농업부문 이외에도 협동조합을 설립하도록 새 법을 만들다
2012년 말에 통과된 협동조합법은 농업생산과 서비스, 소사업체와 교통 부문에 대한 정부 통제를 벗어나게 하는 중대한 진전 사항을 담고 있다. 혁명 이후 쿠바에서 오랫동안 ‘협동조합’은 으레 ‘농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비농업 분야에서도 협동조합 설립을 허용한 조치는 협동조합 자체의 다양성 확보뿐만 아니라 국영기업만으로 구성되는 단조롭고 경직된 쿠바 경제제도의 변화를 향한 의미 있는 조치로서 해석될 수 있다. 법령은 또한 협동조합들의 생산 활동을 늘리고 다양한 협동조합들 사이에서 원만한 조율이 이루어지도록 2차 협동조합이나 협동조합 클러스터의 설립을 허용하고 있다. 이 협동조합법은 생산성 증대와 집단적 형태를 선호하는 기존 사회주의적 기제 사이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다. 협동조합의 소유권 개념은 개인들이 운영하는 중소사업체들의 그것에 비해 구체적인 규정이 부족한데, 그 덕분에 오히려, 쿠바에서는 아직 그 전형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계약체계가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1990년 이래 협동생산 기본단위(UBCP, Units of Basic Cooperative Production)의 경험을 통해 보건대, 시장 기제와 적절한 법적 자율성의 부재 상황에서 협동조합의 구체적 작동은 사실상 국영기업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협동조합은 네 단계의 관료적 절차를 밟아 승인을 얻는데, 그 최종 결정은 라울 카스트로가 의장직을 맡고 있는 국가평의회가 좌우한다. 지금까지 비농업 분야에서 500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승인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절반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29-30
공무원 수를 줄이고 민간부문을 확대하다
한 미국 경제학자의 추산에 따르면 쿠바에는 전체 노동력의 30%가 넘는 노동자가 필요 이상 고용되어 있다고 한다. 2011년, 정부는 감원 조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잉여 공무원의 감축과 실업자들을 흡수할 자가 고용(작은 사업체), 비농업부문의 생산 및 서비스협동조합을 포함한 비국유부문의 확대를 선언했다. 협동조합 영역에서 국가는 건물과 토지의 소유권을 갖고, 그것을 협동조합원들에게 임대해준다. 조합원들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생산물과 서비스를 시장가격으로 팔고 이익을 남길 수 있다. 자가 고용하는 개인과 협동조합은 국가기관과 거래할 수 있고, 가족이 아닌 사람을 고용할 수 있으며, 은행 계좌를 열고, 국가의 소신용을 제공받고, 새로 개장하는 도매시장에서 생산에 필요한 물자를 구입할 수 있다. 자가 고용과 협동조합의 성장을 가로막는 심각한 제약들로서는 고용 인원에 따라 높아지는 노동세를 비롯한 과중한 세금, 그리고 농업부문의 소신용과 투입의 비효율성, 제한된 도매시장의 한계 등이 지적되고 있다. 2012년 말에 365,000명의 국영부문 고용자들이 해고되었는데, 이에 따라 국영부문 인원은 2006년 82%로부터 2012년에는 75%로 줄었다. 자가 고용 인원을 비롯한 비국영(민간) 부문 고용도 그만큼 증가했다.30-31
명목임금은 올랐으나 사회복지와 배급량은 줄어든다
2008년의 임금개혁으로 명목임금이 오르고, 부업과 생산성에 기초한 지불이 허용되었으며, 경화로 지급되는 상여금이 합법화되었다. 동시에 정부는 예산부족에 대응하여 복지혜택을 줄였다. 2007~08년 사이 쿠바의 사회서비스 비용은 정점에 달해 정부 예산의 55%, 국내총생산의 37%에 이르렀고 이는 남미 최고 수준이었다. 보편적인 교육과 보건 혜택이 무상으로 제공 되었다. 노동자들은 연금을 불입하지 않아도 되었다. 쿠바가 남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기대수명을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은퇴 연령은 이 지역에서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로, 과거 소련을 본받아 여성은 55세, 남성은 60세였다. 배급품은 원가 이하로 팔렸고, 최근 개혁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들의 식당에서 제공되는 음식에는 보조금이 지급되었다.31-33
2009년에 라울 카스트로는 사회서비스를 지속하기 위한 재정이 충분하지 않다고 인정했고, 가장 혹독했던 1990년대에도 감축하지 않았던 사회보장비용을 삭감했다. 동시에 정부는 비효울적이라고 간주되는 수천 개의 공공서비스 문을 닫았고, 보건의료 부문 인력의 16%를 축소했다. 은퇴 연령 또한 남녀 모두 5년씩 상향 조정되고, 노동자들은 연금을 불입해야 했다. 정부는 또한 공공요금과 국영상점의 경화 가격을 인상했다.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맨 결과, 사회복지비용 지출은 2013년 예산의 51%로 내려갔다.33
하지만 더 이상 축소가 이루어질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하는데, 많은 고령자들과 빈민층에게 사회안전망을 유지해주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배급량이 축소되고 그것도 단지 한 달에 일주일 내지 열흘만을 버틸 수 있는 기본 식품에 한정되지만, 해외로부터 송금 받을 수 없는 저소득층에게 그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배급 품목에서 사라진 몇몇 식료품들은 시장에서 서너 배 비싼 가격으로 팔리고 있다.33
개인들이 집을 사고 팔 수 있게 되다
1960년에 정부는 주택 매매와 모기지(주택저당 대출), 그리고 개인 주택의 신축을 금지했다. 그리고 주민(입주자)들이 국가에 내는 월세를 정하고, 20년이 지난 후에는 주택의 소유자가 되도록 했다. 그 결과 지금 쿠바인의 95%가 주택소유자이다. 하지만 그간 주택 건설은 인구 증가에 상응하지 못했다. 기존 주택의 노후화, 허리케인에 따른 주택 파괴와 함께 현재 약 60만-1백만 호의 주택이 부족한 것으로 추산된다.34
2011년 개혁에 따라 휴가용 두 번째 주택의 소유는 물론, 쿠바를 떠난 사람들의 친척에게 주택이 상속될 수도 있게 되고, 시장가격으로 주택 매매가 허용되었다. 국가가 제공하는 소신용의 약 90%가 주택 건설 또는 수리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2011년과 2013년 사이에 133,000호의 주택이 팔렸고, 추가로 기증된 주택(필경 전에 불법적이던 판매가 합법화되면서)이 168,500호에 이르렀다.34
집을 사기 위해서는 국가의 부동산 기관에 등록을 해야 하는데, 실제로 이렇게 하는 소유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주택 건축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넉 달 넘게 기다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뇌물과 세금 사기가 일어나기도 한다. 법률상 이민을 간 쿠바인들을 포함하여 비거주자 외국인들은 주택 구입이 금지되었다. 그 결과 개혁 이후 주택 매매는 370만 호의 주택 중 단지 3.6%만 거래되었다.34-35
외국 투자를 허용했지만...
쿠바 경제성장의 가장 큰 지체 요인 중 하나는 매우 낮은 국내 투자 수준인 것으로 지적된다. 쿠바 정부 자체 통계에 따르면, 경제의 도약을 위해서는 매년 20억-25억 달러가 필요하다. 새로운 법령에 따르면 보건, 교육, 군대 부문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외국인 투자를 확대하고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개인 소득세, 노동세, 수입세를 면제해 주도록 했다. 새로운 투자자들은 이윤을 내서 세금을 납부하기까지 8개월 간 유예기간을 허락받았으며, 판매세 의무도 1년간 연기된다. 투자자들은 직접 수출입은 물론 외국은행에 태환 화폐로 계좌를 열 수 있게 되고, 새로운 투자 결정에 걸리는 기간은 최대 60일이 넘지 못하게 했다. 이 법령 하에서 쿠바의 ‘법인’들은, 잠재적으로 해외에 거주하는 쿠바인들을 포함할 수도 있는, 투자자가 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법령에 따라 몰수되는 경우 보상을 보증했다. 이렇게 특별히 많은 투자가 요구되는 곳은 마리엘 항구 특별개발구역이다.35
하지만, 이 법령은 쿠바 노동자들이 국가기관에 고용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달고 있다. 따라서 투자자들은 직접 노동자들을 고용하거나 해고할 수 없고, 노동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국가기관에 해결을 의뢰하도록 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임금을 쿠바정부에 경화로 지급하고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쿠바 페소화로 지불한다. 외국투자는 공익사업체이거나 사회적 이해관계를 이유로 수용(징발)될 수 있다.35-36
내국인용과 외국인용 이중 화폐는 언제 통일될까?
1995년 이래 쿠바에는 두 종류의 화폐가 쓰이고 있다. 하나는 국내용 페소(CUP)이고, 다른 하나는 태환성 페소(CUC)이다. 공식 환율은 1CUC에 25CUP이지만, 국영기업 부분에서는 두 화폐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통화 체계는 심각한 왜곡을 낳고 있다. 예컨대, 노동자들은 급여를 CUP으로 받지만, 지출의 일부는 CUC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통화의 이중성은 사업(체)의 효율성, 수출의 채산성, 국제경제 측면의 경쟁력을 평가하거나 비교할 수 없게 만든다. 두 종류의 통화를 통일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런 조처가 장기적으로는 유익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 과정은 국영기업과 민간 부문에서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진행될 것이다.36-37
쿠바 개혁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피델 카스트로는 생전에 쿠바 인민이 그 나라를 다시 미국의 식민지로 되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소련의 경험을 볼 때 “이 혁명은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 과오는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그는 “도대체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도둑들이 활개 치는가?”고 물었다. 말년의 혁명가는 수많은 쿠바인들이 생존을 위해서 저지르고 있는 불법 활동, 암시장 활동을 가리키며 개탄한 것이다. 그는 택시운전사들의 편법적 고소득, 국가재산을 훔쳐다 내다파는 자들, 그리고 다른 ‘구두쇠들’과 ‘에고이스트를’ 탓에 생긴 불평등을 비난했다.37
하지만 피델을 이어받은 최고 지도자 라울의 2007년 11월 첫 번째 주요 정책 연설은 형과는 다뭇 다른 어조로 경제정책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그는 쿠바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지만, 모든 생활상 필요를 충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며, 따라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적 원칙을 지키지 않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 사회적 규율의 실패, 작은 도둑질과 암시장 활동의 만연을 “근절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라울은 또한 청년층에 대해서도 더욱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옛날 청년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을 갖추고, 교육을 받고, 무엇보다도 더 비판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요구 사항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나쁜 징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세대는 그 자신의 동기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어떤 청년도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가 극도의 곤경을 겪었다고 설명해준다고 해서 혁명가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2006년 6월 2일 <그란마>논설).37-38
그간 진행된 쿠바 개혁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비판적인 미국 전문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2009년 이래 공식 성장 목표치는 성취되지 못했고, 경제성장은 남미지역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했다. 2009년에서 2014년 사이 연평균 1.7퍼센트의 성장률은 개혁이 경제성장을 부추기는 데 별로 성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미미한 성장조차도 이 나라의 경제가 베네수엘라에 의존하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석유부국은 쿠바 무역의 43%를 차지하고, 쿠바에게 석유의 60%를 공급해 준 가장 큰 투자자였다. 하지만, 이제 베네수엘라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버렸다.38-39
하지만 전체적으로, 라울 정부에 의해 수행된 구조개혁은 긍정적이고 쿠바 혁명 이후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그것은 기존의 조처들에 비해 훨씬 더 분명하게 시장 지향적이고 성장지향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한 관료적 규제, 사업을 하는 개인들에게 부과되는 높은 세금은 실질적인 경제적 효과를 거두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라울은 개혁이 아주 복합적이며 실험에 의해 검증되어야 함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개혁 과정에서 저지를 수 있는 큰 실책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의 모토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이다. 하지만 그가 은퇴할 것으로 예상되는 2018년 이후 쿠바의 경제개혁, 나아가 사회의 진로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열려있는 가능성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39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외부 전문가들은 중국과 베트남의 개혁은 공산당이 권력을 보유하면서도 더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과 사회복지에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쿠바의 경제개혁도 더욱 급진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쿠바 내부의 일부 자유주의적 지식인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반해 실질적으로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쿠바 지도자들은 중국과 베트남 모델의 복제는 상황이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에 쿠바에 적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반응하고 있다. 서구 전문가들의 예측대로 향후 “시장지향적인 개혁의 가속화와 심화”가 쿠바인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뿐 아니라 개혁 과정에 더욱 많은 정통성을 부여할 것인지, 아니면 쿠바 지도부가 걱정하는 것처럼 통제할 수 없는 물결로 쿠바의 기존 체제를 휩쓸어 버릴지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지난 2008년의 갤럽 조사에 따르면 쿠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다수 나라에서 보통의 인민들은 자본주의체제보다 사회주의체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39-40
마지막으로, 쿠바개혁의 앞날과 관련하여 두어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먼저, 20세기 국가사회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저지른 가장 기본적인 개념적·정책적 오류 가운데 하나인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일시”문제이다. 개념적으로 ‘시장경제’는 완전한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인간의 사회경제 생활에서 보편적으로 불가피한 교환의 메커니즘이다. 그에 반해 ‘자본주의’는 시장경제 주체들이 낮 동안 땀 흘려 일궈놓은 것을 몰래 훔쳐가는 “밤의 손님이다”(프랑스의 경제학자 페르낭 브로델). 그동안 왜곡되었던 국가사회주의체제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시장경제 메커니즘을 도입, 확산하는 조치를 마치 ‘자본주의의 도입’ 그 자체와 동일시하면서 개혁의 전망이나 전략에 중대한 잘못이 발생할 것이다.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추진하되, 그것이 ‘천민자본주의’로 타락하는 것을 규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정교한 정책들이 요구되는 것이다. 둘째로, 변혁의 시기에 개혁조치를 구체적으로 감당하는 관료들의 의식과 행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고지도부의 의도와 전략, 그리고 일반 인민들의 관심과 요구 사이에서 위치한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평소에는 기존 법령과 관행의 틀 속에서 ‘안전하게’ 업무를 처리한다. 하지만 그들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개혁 조처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하는데 훌륭한 능력을 가진 ‘기회주의’적 태도에 익숙하다 따라서 최고 지도부로서는 개개인 공무원들이 개혁 과정에서 개인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데 골몰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관료제도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칫 지방과 하급기관에 허용되는 자율성 확대가 상부의 개혁 조처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채 체제 자체의 정통성과 기반을 근본적으로 허물어버리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김창진)(4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