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 시절 은사님들 / 임헌영
나에게 몇 학번이냐고 물으면 5.16 쿠데타 학번이라도 답하곤 한다. 1961년 3월 입학식을 마친 나는 돈을 아끼려고 영어와 프랑스어교재만 사고 나머지는 아예 교재도 없이 다녔다.
초등학교 교사를 2년간 하다가 상경한 미리 든든한 아르바이트를 실습해 둔 터였는데, 그게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자상하게 소개되어 있다.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이 한국전쟁 때는 미 8군의 공식 PX점이어서 그 1층에 하우스보이 출신의 최만길 사장이 화가 다섯을 데리고 미군들이 주문한 초상화를 스카프, 손수건, 사륙배판 크기의 노방조각 등 세 종류에다 그려 팔던 가게가 있었다. 박관서 자신은 이경이란 이름으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데, 미군에게 자기 애인이나 가족사진을 그리도록 유인하는 판촉일과 경리를 겸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내가 바로 이런 아르바이트를 구해두고 나는 서울로 온 것이라, 이미 미8군 본부인 삼각지 안에다 PX를 옮긴 뒤였다. 그래서 나는 나목의 이경과 똑 같은 일을 평택 미 공군기지 부근에서 구해 둔 것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미군부대에는 출입증을 내야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기에 패스 없이 몰래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찾은 게 평택 공군기지여서 아예 학교에는 띄엄띄엄 나가면서 쏠쏠하게 돈벌이에 취해 있었다. 촌놈인 나이게 이런 아르바이트를 소개, 안내, 실습시켜 준 은인은 우리 고향 족조 뻘인 임호순(중앙대 국문과, 내 진로를 정해준 작가 지망생)이었고, 다른 한 분은 윤상환(단국대 법대생으로 나중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 징역 3년을 살고 나와 도미)였다. 재미있게 돈도 벌면서 대학엘 다니다 보니 공부라는 게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게 되어 어떨 때는 내가 왜 서울까지 와서 이렇게 지내나 반성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5.16쿠데타였다. 모든 대학은 폐쇄됐고, 미군부대는 일체 출입 금지에다 미군조차도 외출을 금지해 출입패스를 가졌더라도 아예 그 자체가 무효였다. 그러니 나는 졸지에 실직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주문 받은 그림도 팔지 못한 채 날릴 판이었고, 아무런 전망도 해결책도 없었다. 빈둥거리다가 대학이 문을 열자 오랜만에 달려가 강의에 열중하게 되어 나는 농담 삼아 5.16 쿠데타 덕분에 공부 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학에서 배우고 싶었던 것들은 참 많았다. 우선 외국어를 한껏 하고 싶어 영어는 필수고, 선택으로는 불어를 해놓고, 독일어도 수강신청을 않고도 그냥 강의실에 들어가 듣기로 했다. 철학과에만 있던 그리스어에 눈길이 가서 수강신청을 해서 들어갔더니 모인 학생이 10명도 안 됐다. 교재도 없이 알파벳부터 시작한 강의는 불과 몇 시간 하더니 폐강되고 말았다. 참으로 아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학에 관한 한 용두사미로 허망하게 막을 내린 대학 생활이었다.
당시 중앙대학은 문리과대학의 백철, 상과대학의 최호진, 영문과의 정인섭 등 명망가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신화적인 존재였던 고전문학의 가람 이병기나 서양사학의 조규동은 떠나고 없었다. 이병기는 출강 때면 만취해서 정문 앞에서부터 비틀거리며 학생들을 보면 함부로 욕을 해댔다는데, 특히 여학생들이 인사하면 “야 이 X할 년아, 너 여기 뭐하러 왔니?”라고 따져서 기절초풍했다고 전한다. 조규동은 문화사 강의 때 항상 이승만을 ‘하와이 어부’로 호칭하며 그가 한 일을 하나하나 씹어 대서 대인기였다는 소문이었으나 내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희대의 명교수는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국문과 교수진은 짱짱했다. 고전문학 분야에는 양재연, 김동욱 두 교수가 단연 어느 대학에도 뒤지지 않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근대 민속학의 대가 송석하의 사위인 양재연 교수는 국문학사를 너무나 해박하게 강의하여 나로 하여금 전공을 바꿀까 할 정도로 매력이 넘쳤다. 그는 항상 나에게 “자네를 보면 내 젊은 시절의 로맨틱한 꿈을 다시 보는 듯하다.”며 격려해 주었다. 댁은 흑석동 학교 부근의 고색창연한 기와집에 소나무와 바위들이 어우러진 정원과 새 사육장을 갖춘 곳이었다. 사모님은 우아하고 품위와 교양에다 전통문화에 통달했으나 명절 때 여학생들이 세배도 못 오게 할 정도로 남녀관계가 엄격하다는 뒷소문이 나돌았다. 원래 서울대 사범대학에 몸 담았던 양 교수가 그곳엔 워낙 여학생들이 많아 중앙대로 옮겼다고 농반진반으로 하시는 말씀이 생각난다.
그런 분에게 내가 학점을 못 딴 한 선배의 교양영어 대리시험을 봐주다가 들켜 혼쭐이 났다. 예상에 없이 양 교수가 시험 감독으로 들어오더니 한 명 한 명의 답안지 위에 날인을 하다가 내 앞에 서서는 “자네가 웬 일인가?“라고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날인을 해주었다. 날인을 먼저 받은 후에야 내 이름이 아닌 선배의 성함을 써서 내자 그는 내 시험지를 닥 꼬불쳤다. 얼른 선생님을 따라가 사죄드렸더니 앞으로 주의하라며, 유야무야로 넘겨주었다. 그런데 정작 창피한 것은 내가 본 대리시험이 효험이 없어 그 선배는 두 번째로 학점을 못 딴 것이었다. 내가 시험을 잘 못 본 것인지, 양 교수가 아예 시험지를 무효화 해버렸는지는 밝히지 못했다.
양 교수의 사위는 김진홍 교수(동아투위, 외국어대 교수)였다.
국어학의 남광우 교수는 국문과 전 학생에게 우상처럼 군림하면서 우리 인생 전반을 지도했다. 댁이 대학 정문 바로 앞에 있어 무시로 드나들며 직간접적으로 많은 신세를 졌다. 남 교수의 농담 중 잊을 수 없는 것 하나가 이승만이 시내 나들이 뒤 고민하는 거였다. 그는 경무대에 돌아가자 ‘심조불’이 뭐냐?‘라고 비서들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답을 못했다. 자세히 조사해보니 ’불조심‘을 한문처럼 오른쪽에서 읽었던 것이었단다. 그는 대한제국 말기의 한글 표기법으로 번역된 성서 수준의 한글 실력이라 공문서도 제대로 못 읽어서 맞춤법을 옛날식으로 개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가 온 나라가 반대해서 톡톡히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김상선 교수는 현대 작가론, 문장수사학 등을 담당한 가장 젊은 신진 교수로 내가 입학시험을 볼 때 임호순 아재를 따라 그의 자취방으로 찾아가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작은 문간방에 연탄아궁이, 그 위에 작은 솥으로 밥 짓는 게 꼭 내가 고교 때 자취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 흑석동 연못시장 주변에는 아가씨들을 고용하는 술집이 즐비했고, 거기에 김 교수와는 대학 시절 내내 단골로 자주 다녔다. 그의 수사론은 당시까지는 탁월한 저서였다.
직접 강의를 듣진 않았으나 국어학의 유목상 교수, 대 선배였던 수필문학의 대가 윤재천 선생, 김영수 선생, 두창구 조교 등등 재재다사였다.
강사진으로는 소설 창작의 최인욱 선생은 대중소설과는 달리 명 강사였다. 그는 자신이 그런 강의를 하게 만들어 준 것은 오로지 모울턴 교수와 일본의 평론가 키무라 키의 덕분이라고 고백했다. 한국어 번역은 없는 이 명저는 문학의 근대적 연구(文學の近代的研究-文学の理論及び解釋の序論ー(リチャード・グリーン・モウロトゥン著 本田顕彰譯, 岩波書店, 1951)였고, 키무라 키(木村毅)의 소설연구 16강(小說硏究十六講)(新潮社, 1925)이었다. 당시에는 고서점에서 이런 책을 쉽게 구입할 수 있어서 나는 지금까지 갖고 있다. 그를 상도동의 집으로 인사차 가면 언제나 밤늦게 까지 술판을 벌여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온갖 유머와 잡담을 펼쳤는데, 매우 유익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시창작의 조병화 교수는 낭만파의 넉넉한 인간미를 풍겼는데, 교재는 세실 데이-루이스의 시론 중 자신이 번역한 두 권이었다. 일역본을 우리말로 중역한 현대시론(정음사, 1956)과 현대시작법>(정음사, 1959)이었다. 당시 시론 공부로는 가장 훌륭한 교재였다. 흔히 조 시인의
강의가 별로라지만 나는 진짜 시를 배울 수 있었고, 특히 그의 대학시절 추억담은 일품이었다. 그가 동경 고사(東京高師, 지금의 사범대학 격)시절 겨울방학에 나가노현(長野県) 간바야시(上林)온천으로 가던 도중에 있는 고모로(小諸)라는 소역은 시인 시마자키 도오손(島崎藤村)의 시 「고모로의 옛 성터에서(小諸なる古城のほとり)」로 유명하기에 정차하면 내려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을 작정이었으나 논스톱으로 지나쳤다. 엉겁결에 옆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여학생에게 “고모로가 여기 입니까”라고 물으니, 그녀는 마치 질문자의 속내를 간파한 듯이 “시마자끼 도오손 선생의 고모로는 저 산 쪽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선생을 감동시켰다. 동경 고사 정복과 교모를 본 그 여학생은 부러운 듯이(그만큼 유명학교였다) 쳐다보며 고향이 어디냐고 묻기에 “게이죠(京城)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고 애교 넘치게 말했다. 이유를 묻자 그녀는 차창 밖 멀리로 시선을 향하며(이 순간 조 시인도 교실 창밖 하늘을 쳐다보며), “아주 먼 곳이기 때문이예요.”라고 답했다. 그 여학생의 모습을 상기하듯이 “아주 먼....” 하시던 조 선생의 마력적인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 대목에서 선생은 시란 이런 것, 먼 곳을 그리워하는 연정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가끔 문학 강연에서 이 대목을 표절해서 박수를 받았다.
그는 중대신문의 편집국장인 최진우 작가를 아주 아껴서 출강하면 신문사에 꼭 들려, “야, 진우야!“라고 불렀다. 당시 나는 중대신문 기자여서 그들 둘의 만남을 자주 보거나 가끔은 함께 했는데, 작가인 최진우 국장은 우리 앞에서 매번 ‘조’자 밑에다 ㅈ을 붙여 발음하여 우리를 웃기곤 했다.
내 진짜 은사인 백철 교수는 내 대학시절 비평수업의 유일한 스승이자, 어떻게 보면 그의 고명을 듣고 내가 중앙대엘 갔다고도 할 지경이건만 그런 나의 간절한 소망도 부질없이 휴강이 다반사였고, 교실에 들어와서도 강의를 열심히 하다 보면 조교가 찾아와 뭐라 뭐라 하면 급한 일이 생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휑하니 나가버리곤 했다.
그런데 정작 대학원에 들어가자 거의 휴강을 않고 꼭 챙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자신이 청탁 받은 글들의 자료를 우리에게 자문 형식으로 취재하기도 했고, 가끔은 운 좋게 나에게 대필을 시켜 용돈을 벌게도 해주었다.
대학원 때 나는 처음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했으나 낙방하자 나는 바로 현대문학에 투고, 조연현 선생의 눈에 쏙 들어 금방 등단(1966)했다. 조 선생은 나를 끔찍이 잘 챙겨주어 백철 선생에 이어 제2의 평론계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두 스승은 서로가 만날 기회조차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했고, 전 문단이 그들의 소원한 관계를 다 알고 있었다. 나는 이 둘을 한 자리에 모셔서 화해를 도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내가 점심을 대접하고 싶은데 두 선생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겠느냐고 떠보았더니 의외로 쉽게 좋다는 응낙을 했다. 너무나 뿌듯해서 중앙대 출신의 선배 신상웅작가와 백승철 평론가와 함께 이 두 노대가를 종로 통닭구이집(지금의 종각 자리)에서 접대할 수 있었다. 둘은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지며 뿌듯해 했다.
백 선생은 내가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 ‘전후 한국 참여시 연구’라는 주제를 전후 한국 시 연구-6.25이후 시문학의 특이성 고찰(1968)로 수정해 주었다. ‘특이성’이란 ‘참여시’였고, 그 사상적 배경을 나는 근대문학사에서 카프문학과 8.15 이후의 진보적인 정치의식, 여기에다 6.25 이후 유행했던 실존주의 사상 중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을 거론했는데, 그는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백 선생은 간곡하게 “중앙대학에서는 그런 건 않았으면 좋겠다.”고 점잖게 타일러주었다. 깊은 정이 스민 충고였다.
(끝)
첫댓글 -나의 대학 시절 은사님들-
선생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 시대의 처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책 한권을
마음 놓고 살 수 없었던 그런 시대에
61년 3월생으로 태어나게 하신
우리 부모님께서도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을 하면서 눈물이 글썽여집니다
반갑습니다.
임헌영 선배는 나보다 1년 선배에요.임선배는 1941년생으로 61년도에 입학하고 저는 62년도에 입학했어요.그해 국가고시란 게 있었어요.점수가 낮으면 아예 대학을 못들어갔어요.당시는 대학도 몇개 안되었어요.임선배의 원래 본명이 임준렬이에요.내가 3학년때 4학년이었으니까 그때가 1964년도 까마득한 옛날이지요
.3학년때 제가 총학생회 문예부장으로 있을때 중대 문학상이란게 있었는데 제가 당시 임영신 총장께 교육과의 이정길선배 그리고 국문과의 임준렬 선배를 문학상후보로 추천해 수상을했는데 임선배는 평론으로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 로 수상을했어요.
임선배는 최진우교수가 편집인으로 있는 중대신문의 기자로 계셨어요.졸업후 수십년간 못뵈다가 20여년전인가전라도 화순에서 열린 문학모임에서 뵙고 제가 쓴책 김구소설에 추천사부탁을하다가 컴퓨터의 이메일 을 몰라 그만둔적이 있어요.
이글에 나오시는 남광우 양재연 최인욱 김동욱교수님들에게 배웠어요.분위기는 임선배가 쓰신 것과 거의 같아요.남교수님이 주임교수시고 나중에 제 결혼식의 주례를 서셨어요.새삼 그 까마득한 날의 기억이 떠오르네요.임선배는 매우 인간적이시고 다정다감한 분이에요.참으로 뵙고 싶은분이에요
고마워요 하옥님
선생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