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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_52p, I collected them and then did my rounds, feeling the patients' pulses and giving half-tablets to te serious case. But the desperately ill received no medicine. It would not have helped, and besides, it would have deprived those fro whom there was still some hope. For light cases, I had nothing, except perhaps a word of encouragement. In this way I dragged myself from patient to patient, though I myself was weak and exhausted from a serious attack of typhus. Then I went back to my lonely place on tghe wood cover of the water shaft. This shaft, incidentally, once saved the lives of three fellow prisoners. Shortly before liberation, mass transports were organized to go to Dachau, and these three prisoners wisely tried to avoid the trip. They climbed down the shaft and hid there from the guards. I calmly sat on the lid, looking innocent and playing a childish game of the throwing pebbles at the barbed wire. On spotting em, the guard hesitated for a moment, but then passed on. Soon I could tell the three men below that the worst danger was over.
It is very difficult for an outsider to grasp how very little value was placed on human life in camp. The camp inmate was hardened, but possibly became more conscious of this complete disregard of human existence when a convoy of sick men was arranged. The emaciated bodies of the sick were thrown on two-wheeled carts which were drawn b prisoners for many mile, often through snowstorms, to the next camp. If one of the sick men had died before the cart left, he was thrown on anyway-the list ad to be correct! The list was the only thing that mattered. [번역판_99p, 약을 받은 다음 나는 회진을 했다. 환자들의 맥발을 일일이 재보고 상태가 위급한 환자에게 반 알씩 주었다. 약을 받은 다음 나는 회진을 했다. 환자들의 맥박을 일일이 재보고 상태가 위급한 환자에게 반 알씩 주었다.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는 약을 주지 않았다. 약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그것이 결국 가망 있는 환자들을 위해 써야 할 약을 빼앗는 것가 같기 때문이다. 증사가 가벼운 환자에게는 격려의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나 자신도 발진티푸스에 심하게 걸려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몸을 끌다시피 하면서 이 환자에서 저 환자로 옮겨가며 그들을 돌보았다. 그런 다음 나는 다시 배수구의 나무 뚜껑 위에 있는 나 혼자만의 장소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 구멍이 어느 날 우연히 내 친구 세 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풀려나기 바로 직전 다카우를 목적지로 하는 대규모 수송 작전이 있었다. 하지만 세 친구들은 아주 약삭빠르게 이것을 피해갔다. 그 구멍 안으로 들어가 감시병의 눈을 피했던 것이다. 친구들이 구멍으로 들어가고 나서 나는 조용히 뚜껑 위에 앉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순진한 표정을 하고 어린 아이처럼 철조망에 자갈을 던지고 있었다. 감시병이 나를 보고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다음 그냥 가버렸다. 그가 간 다음 나는 밑에 있는 세 친구들에게 최악의 위험한 상황은 지나갔다고 알려 주었다. 수용소에서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을 여겨지는지는 이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감정이 무뎌진 수용소 사람들도 병든 사람을 이송할 때에는 이곳에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시당하는지를 느꼈을 것이다. 다 죽어가는 환자의 몸은 바퀴 두 개 달리 수레에 던져진다. 동료 수감자가 그 수레를 끌고 대개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을 몇 마일이나 걸어서 다른 수용소로 옮긴다. 만약 병자 중 한 명이 수레가 떠나기 전에 죽는다 해도 그 역시 마찬가지로 수레에 던져진다. 리스트에 올린 번호와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번호뿐이다.
[원서_53p, A man counted only because he had a prison number. One literally became a number: dead or alive-that was unimportant; the life of a "number" was completely irrelevant. What stood behind that number and that life mattered even less: the fate, the history, the name of the man. In the transport of sick patients that I, in my capacity as a doctor, ahad to accompany from one camp in Bavaria to another, there was a young prisoner whose brother was not on the list and therefore would have to be left behind. The young man begged so long that the camp warden decided to work an exchange, adn the brother took the place of a man who, at the moment, preferred to stay behind. But the list had to be correct! That was easy. The brother just exchanged numbers with the other prisoner.
As I have mentioned before, we had no documents; everyone was lucky to own his body, which, after all, was still breathing. All else about us, i.e., the rages hanging from our gaunt skeletons, was only of interest if we were assigned to a transport of sick patients. The departing "Moslems" were examined with unbashed curiosity to see whether their coats or shoes were not better than one's own. After all, their fates were sealed. But those who stayed behind in camp, who were still capable of some work, had t make use of every means to improve their chances of survival. They were not sentimental. The prisoners saw themselves completely dependent on the moods of the guards-playthings of fate-and this made them even less human than the circumstances warranted.
In Auschwitz I had laid down a rule for myself which proved to be a good one and which most of my comrades later followed.
[번역판_100p, 오로지 죄수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말 그대로 번호가 되었다. 그 사람이 주었는지 살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번호’의 생명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 번호의 이면에 있는 것, 즉 그의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된다. 그의 운명과 그가 살아온 내력 그리고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한번은 내가 의사로서 바바리아의 수용소에서 다른 수용소로 한자를 호송할 때 동행한 적이 있었다. 호송되는 환자 중에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의 형이 호송자 명단에 들지 못해 뒤에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수용소 관리인에게 아주 오랫동안 간청을 했고, 관리인은 마침 수용소에 그대로 남기를 원하는 사람과 그의 형을 바꾸기로 했다. 물론 리스트가 정확하게 맞아야 했지만 그것은 아주 간단히 일이었다. 그 형의 번호 남아 있는 사람의 번호를 바꾸면 그만이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당시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서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숨쉬고 있는 자기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 환자의 호송을 맡은 사람들이 갖는 관심은 환자의 유일한 소유물, 즉 끔찍한 해골 위에 씌워 놓은 넝마 옷뿐이었다. 호송을 맡은 사람들은 뻔뻔스런 호기심을 가지고 호송되는 ‘회교도’의 외투나 신발이 자기 것보다 좋은 것인지를 살폈다. 결국 그들의 운명은 정해진 순서를 따라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수용소에 살아남은 사람들, 여전히 일할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상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전적으로 감시병의 기분-운명의 노리개라고나 할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을 환경이 강요한 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아우슈비츠에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을 위한 하나의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그 후 내 동료들도 모두 이 규칙을 따랐다.
[원서_54p, I generally answered all kinds of questions truthfully. But I was silent about anything that was not expressly asked for. If I were asked my age, I gave it. If asked about my profession, I said "doctor", but did not elaborate. The first morning in Auschwitz an SS officer came to the parade ground. We had to fall into separate groups of prisoners: over forty years, under forty years, metal workers, mechanic, and so forth. Then we were examined for ruptures and some prisoners had to form a new group. The group that I was in was driven to another hut, where we lined up again. After being sorted out once more and having answered questions as to my age and profession, I was sent to another small group. Once more we were driven to another hut and grouped differently. This continued fro soem time, and I became quite unhappy, finding myself among strangers who spoke unintelligible foreign languages. Then came the last selection, and I found myself back in the group that had been with me in the first hut. They had barely noticed that I had been sent from hut to hut in the meantime. But I was aware that in those few minutes fate had passed me in many different forms.
When the transport of sick patients for the "rest camp" was organized, my name(that is, my number) was put on the list, since a few doctors were needed. But no one was convinced that the destination was really a rest camp. A few weeks previously the same transport had been prepared. Then, too, everyone had thought that it was destined for the gas ovens, When it was announced that anyone who volunteered for the dreaded night shift would be taken off the transport list, eighty-two prisoners volunteered immediately. A quarter of an houir later the transport was canceled, but the eighty-two stayed on the list for the night shift. [번역판_102p, 나는 모든 종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딱 꼬집어서 질문을 받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만약 누군가 내 나이를 물으면 나는 나이를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내 직업을 물었을 때는 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그냥 “의사”라고만 대답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처음 아침을 맞았을 때, 친위대 장교 한 사람이 점호장에 나타났다. 우리는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마흔살 이하, 마흔살 이상, 정신노동자, 기계공 등 이런 식이었다. 그 다음 우리는 탈장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새로운 그룹이 형성되었다. 내가 속해 있던 그룹은 다른 막사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줄을 섰다. 여기서 또 한 번 분류를 한 다음, 내 나이와 직업을 물었다. 나는 또 다른 작은 그룹으로 보내졌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다른 막사로 보내졌으며, 거기서 또 다른 그룹이 만들어졌다. 이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었으며,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왜냐하면 알아들 수 없는 외국말을 사용하는 이상한 사람들 그룹에 내가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다시 마지막 선별 작업이 진해되었다. 결국 나는 처음에 막사에서 개장 속했던 바로 그 그룹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그 동안 이 막사에서 저 막사로 옮겨 다녔다는 것을 거의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 몇 분 동안, 여러 가지 형태의 운명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병든 사람을 ‘요양소’로 호송하게 될 때 내 이름(즉 내 번호)이 리스트에 올라갔다. 의사 몇 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적지가 요양소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몇 주 전 비슷한 호송계획이 있었는데, 그 때도 사람들은 호송되는 환자들이 모두 가스실로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수용소 측에서 호송될 환자 중에서 자원해서 야간작업반에 가겠다는 사람들은 호송자 명단에서 빼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82명의 사람들이 자원을 해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15분 후, 환자 호송계획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82명은 야간작업반 리스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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