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찬송시 입니다. 찬송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입니다. 처음에 ‘찬송으로 부름’이 있고, 그 다음에 찬송의 이유, 그리고 확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3절은 찬송의 당위성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의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찬송합니다. 찬송은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입으로만 찬양하지 않고 악기를 가지고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합니다. 반주자들은 단지 도우미가 아니라 입술로서 동일하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의인들이 부르는 노래는 ‘새 노래’입니다. 이것은 단지 새로 지어서 부른 최신 노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노래는 어제도 불렀지만, 오늘도 새롭게 부른다는 뜻입니다. 계속 부르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다시 새롭게 이스라엘과 세상을 향해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에 대한 응답으로 다시 새롭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새노래는 하나님의 백성이 부르는 끊임없이새롭고 다시 새로워진 증언입니다.
4절부터 19절은 찬송에 대한 이유를 말씀합니다. 먼저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고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되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행하시는 것과일치합니다. 여호와는 신실하신 분이시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분입니다. 또 그분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시에 그분의 인자하심, 헤세드가 온 세상에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분은 인자하심이 온 세상에 어떻게 드러납니까? 이어지는 구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의해서 드러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하늘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입의 기운, 말씀과 성령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늘과 바다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둘째날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궁창과 땅을 구부하시고, 물도 구분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깊은 물을 곳간에 두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깊은 물은 상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성경을 보면 자주 물은 악한 세력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물을 곳간에 가두셨다는말은 파괴적이고 반역적인 힘들을 모으고 제한하시는 것으로 의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유지하시면서 하나님은 악의 세력들에게 의해서좌우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컨트롤하고 계심을 시인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분을 찬송하는 것은 창조하신 것만 찬송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것을 보존하시는 분으로 노래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은 만물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것 뿐만 아니라 해가 뜨고 지는 것, 천체가 기가 막히게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을 붙드시는 인자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찬송합니다.
이어지는 구절 8절을 보시면 그래서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분을 경외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을 경외한 거민들도 창조하신 분입니다. 인간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고 경외하는것은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 위대하시기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존경과 사랑입니다. 제대로 된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입니다. 여호와께 말씀하실 때 그대로 되고, 명령하실 때 견고하게 되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뜻에 자신을 맞추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11절을 보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세상의 강대국의 계획에 의해서, 또는 사람들의 사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과통치에 의해서 영원히 돌아간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옛날에 뿐만 아니라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고 인정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셔서 당신의 백성으로삼아 주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백성에게 기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이었고, 천국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것이 있다는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미래가 있고 정체성이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이고,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업인 백성을 그냥 두지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모든 인생을 굽어 살펴 보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중적입니다. 그의 기업인 백성에게는 큰 기쁨과 축복이고, 즐거움과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시고 돌보고계시고 계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의 기업이 아닌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 감출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낱낱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 없이 자신의 군대와 능력과 힘으로 구하는 자들에게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16절은 분명하게 많은 군대로 구원을 얻은 왕이 없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해서 부귀영화를 누릴 지 몰라도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의 결국은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쎈 장수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을 얻는 데에는 말이나 군대의 많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28절을 보시면,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 보는 자를 살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만소망을 두고, 그분의 인자하심, 헤세드를 갈망하는 자, 바라보는 자에게 그들의 영혼을 건지시고, 그들을 굶주릴 때에 건지신다고 하십니다. 영혼 뿐만 아니라육체적으로 돌보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 20절을 보시면 갑자기 주체가 ‘우리’로 바뀝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도움과 방패라고 고백합니다. 군마, 많은 군대, 힘, 재력, 부귀영화 모두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말로 의지할 만한 분,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데,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합니다. 시인혼자가 아닙니다.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합니다. 21절에서는 우리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의지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을 고백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공동체적입니다. 찬송도 공동체적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고백하고 즐거워 날마다 부르는 노래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의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하기 더 즐거운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기를 소망할 때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인자하심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의 이름을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할 당위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창조를 고백하고, 창조주를 높이고, 또한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것을 붙드시며, 당신의 백성을 부르셔서 그들을 굽어 살피시고, 보호하시며,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공동체에게 당신의 인자하심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우리를 초청합니다. 우리는 공동체가 이런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넘쳐나고 날마다 새롭게 한결 같이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는 이 시간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