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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본색」은 12장으로 구성된 장시이며 신진 시인이 난폭한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며 시와 시인의 위치를 반성하고 마침내 ‘비관할 수 없는 희망’을 감추지 않으려 한 역작이다. 이 한 편의 장시를 통하여 그는 인간상과 세계관, 현실 인식과 미래 전망 등의 문제를 두루 서술하고 있다. 먼저 시적 화자는 1장 「거리」에서 원체험으로 “처음 만난 혁명의 불꽃”이라는 유년의 기억을 회상한다. “미군 매형에게 초콜릿을 조르던/동네 친구의 아슬아슬한 평화”라는 외적 호명의 본색을 자각하는 일과 연관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세계의 지배 속에서 “산만 한” “거대한 바위”의 위험에 여전히 내몰린다. “양말 한 묶음에 5천원 혁명 한 두름 1천원”이라는 진술처럼 이미 ‘혁명’조차 상품으로 전락한 현실에서 회의와 비관을 벗어나기 힘들다. 2장 「결실」이 말하듯이 혁명, 진실, 양심, 자유, 정의, 병, 신 등의 말들이 그 바른 의미를 상실한 사태인데 시인마저 “풀벌레 우는 소리에 죽은 척 엎드렸다가/때맞춰 별유천지비인간 명시 명창 영원의 나발”을 부는 형국이다. 외부를 비판하고 내부를 풍자하는 양날을 견주나 현실은 가망 없는 나락으로 기울어 “눈물 없는 슬픔”과 “분노 없는 침묵” 속에서 “종소리 맞추어 종의 행렬 따르는 얼뜨기들”의 자발적 복종과 예속의 행진이 계속된다. 이와 같은 “얼뜨기들”의 표정은 3장 「내실」에서 더욱 뚜렷하다. “노력하면 못 될 거 없다”라는 이데올로기에 현혹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얼뜨기들”은 “사방으로 머리 조아리며 못 갖춘 죄 반성하고/모다 팔자소관이요, 공수래공수거요/인생 즐거웠다 소풍 잘 다녔다 내실 기하는 얼뜨기들”의 모습이다. 체념과 복종 그리고 자기합리화에 익숙한 민중의 얼굴인데 4장 「건달 세상」의 시적 화자는 시인이나 학자, 법률가나 정치지도자들 모두 “미제 뜬구름 중국제 황사구름으로 요령 치며 길을 잡는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달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통탄한다. 여기서 “요령”이라는 비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요령 따르던 얼뜨기들”의 한편에 “무엇이든 하면 다 이루어지는 건달들의 세상”이 되었는데 모두 체제와 제도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삶을 영위한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동치미 무 씹고 국물 넘기며 볼살 올리던 추억/동지섣달 한 이불 밑에서 발끝으로 서로의 체온을 재던/배고파도 배고픈 줄 모르던 시절 찾을 길 없네”라는 향수와 상실의 감정이 커진다. 물론 이러한 감정은 회의적 현실과 단절의 골을 깊게 하며 서정적 비전의 바탕을 이루는 비극적 감성을 강화한다. “해악 크게 입힐수록 복 받는 세월”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5장 「외로워도 그립지 않고」에서 시적 화자는 세계에 관한 환멸에서 비롯하는 노스탤지어를 매우 절실하고 돌올하게 표출한다.
사라졌구나, 내기 없이 즐거웠던 자치기, 점수 없는 무반주 노래/샅바 없이도 하하 헤헤, 온종일 땀 흘리던 민둥씨름/속 빌수록 자랑 되던 엿치기 사라졌구나/우리가 가득 들었던 우리 집 어디로 갔나?/뭉근히 익어가는 화롯불에 함께 익던 형 동생 누이의 숨기척/없다, 빛깔도 냄새도 남지 않았다
이처럼 시적 화자는 진정성의 경험과 감각이 사라지고 “허상”으로 남은 세계를 통탄한다. “그리움도 외로움도 길이 들어서/외로워도 그립지 않고 그리워도 외롭지” 않은 타자화된 삶 속에서 환상을 좇는 “떨거지”와 “얼뜨기”가 되어버린 현실이다. 사회와 가족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적 희망이 사라졌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6장 「혁명의 나팔소리」는 그 결구에서 “US병사가 손에 쥐어준 혁명의 첫 시간/애재라, 그때가 혁명의 끝자리였나?”라고 혁명의 원초적 시발을 떠올리고 있다. 하지만 “죄 지어도 두렵지 않는 혁명의 나팔소리 방방곡곡 울려퍼지네”라는 진술이 말하듯이 장시 「혁명본색」의 주조는 실존적 수준이든 세계 차원이든 진정한 혁명의 불가능성을 서술하고 있다. “미중일러”로 둘러싸인 지정학과 지경학이 그렇고 “정치 경제 행정 언론 종교 교육에 다단계 튼실히 구축”하는 현실이 또한 그렇다. 이러한 가운데 “시인은 여유의 미학 설파하면서/선악 애증 경계 없는 비눗방울 형형색색 마구” 날리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시적 화자에게 “혁명의 나팔소리”는 혁명 본색을 말살하고 반혁명을 공고히 하는 세계의 의지를 표상한다. 따라서 풍자와 비판으로 세상을 교정하려는 태도는 회의주의와 비관주의에 비례하여 냉소와 환멸로 귀결한다. 7장 「웃기네」의 시적 화자는 “판단의 칼 기회의 뚜껑 하수구에서 녹슬고/정의의 종 자유의 북 제멋에 울고불고 돌다 종적 감추네”라고 하면서 더 이상 “혁명하지 못하는” 사회와 개인, 성직자와 시인을 비판하는 한편 “주먹 없는 건달들이 주먹으로 주름잡는 웃기는 세상”이 되었음을 탄식한다.
혁명이여 무정하구나/혁명하지 못 하는 자 혁명 바로 그대뿐이다/개미떼 벌떼 쥐똥나무 은사시나무 이미 혁명을 이루었나니/자유여, 자유인 양 반죽거리지 마라/장구애비 무당거미 말똥구리도 이미 자유를 이루었나니/자유롭지 않은 자 자유 그대뿐이다/얼뜨기들 눈 감고 귀 막고 입 지운 채/배운 바 복창한다/일하지 않는 자 더 먹으며 양심 비운 자 더욱 선량하리라
이처럼 시적 화자는 인간의 세계에 전면적으로 회의적이다. 인간이 자연의 자발성에 조금도 다가가고 있지 못하다고 진단한다. 진정한 자유와 양심을 상실하였으니 8장 「가면 세상」이 말하듯이 가면의 세상이 도래하였을 뿐이다. 온통 진정성이 사라진 인간상과 세계상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시인의 회의주의가 극한에 이르렀음을 알기 어렵지 않다. 따라서 “사람이 밥이다”라고 시작하는 9장 「훈요」는 장시 「혁명본색」의 정점에 해당한다. 희망 없는 혹은 혁명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식의 가르침인 훈요(訓要)를 서술하고 있다. “다음 생에도 다단계, 가진 순으로 줄 설 것인즉/밑에서 아래에서 놀게 밟아놓으라”라는 진술처럼 현존의 인간상에 드리운 환멸의 정조가 심각하다. 그래서 시인의 비관주의는 다음처럼 단호하다.
법이란 소수의 다수가 엮는 그물/진실되게 초지일관 진실을 멀리 하라/소수(小數)를 끌어들여 다수를 가두리하고/케이스바이케이스, 현실은 내가 갖고 환상은 남 주어라/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지는 복지세상 외치다/복창하며 기어오를라치면 혁명이다! 싹 다 비우고 살라 하고/비워놓은 재화며 잔머리 낟가리 싹쓸이 쓸어 담아라/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쌓지 못할 산을 쌓아라/원천 영양원 인간, 갖고 놀다 먹고 데리고 놀다 삼키고/밑 닦는 데 쓰고 깔고 자는 데 쓰고 심심풀이 쥐어박는 데 쓰라/뒤돌아보지 마라, 돌아보면 돌이 되느니
인용에서 우리는 “복창하며 기어오를라치면 혁명이다! 싹 다 비우고 살라 하고”라는 구절을 만난다. “혁명”이라는 말의 쓰임새가 그 바른 의미를 잃고 복종 혹은 예속의 알리바이로 회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래라는 희망이 없으므로 시적 화자는 “뒤돌아보지 마라, 돌아보면 돌이 되느니”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상실과 노스탤지어는 서로 비등한다. 환멸은 환상이 사라지면서 시작하고 진부한 낙관주의는 희망 없음을 대변한다. 오히려 비관주의는 희망의 잔상을 품게 마련이다. 10장 「흐릿한 방」은 “막 내리고 불 꺼진 방/흐리멍덩한 그 방으로 가는 문 아직 있을까?”라고 진술하면서 희망의 흔적을 환기한다. 에른스트 블로흐에 의하면 희망은 ‘아직은 아니다’라는 문법을 지닌다. 여기서 시적 화자가 말하는 “그 방”은 “바다가 먼저 젖은 자의 것이 아니듯” “새들의 노래가 새들만의 노래가 아니듯” 소유와 등수가 매겨지기 이전 모두의 방이다. 앞서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모든 제도를 경배하던 “얼뜨기”는 여기에서 무소유의 자유를 누리는 존재로 그려진다. 인간이 만든 종교, 체제, 시장, 사회에 예속된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자발성과 함께하는 행위자이다. 그러니까 “흐릿한 방”은 소위 자발적 삶의 자유가 가능한 공동체의 잔영이다. 지금은 사라진 이 장소는 “풀씨들 방향 없이 날다 저마다 자리 찾아 내리듯/셈 없이 공기 마셔도 시비에 말리지 않듯/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흐리멍덩한 방/넘어진 이 일어나고 잃은 이 잃은 만큼 되찾는 방”이다. 공산과 공생이 모두 가능한 일종의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내포하며 “별빛 달빛 햇빛이 어두운 구석부터 찾아들 듯/별빛 달빛 햇빛이 방향 바꾸어가며 어둠을 녹여내듯/얻은 이, 못 얻은 이 걸어온 길은 달라도/먹을거리 누울 자리 고루 갖춘 방/일 이루지 못하면 다른 일이 찾아와 꼬리치는 방”이라는 표현으로 이어진다.
은행도 주식시장도 냉장고도 없는 방/절창도 음치도 말재주도 없는 얼뜨기들/바닥에 떨어지면 으샤샤 불기둥 되어 함께 일어나는 방/춥고 배고픈 놈부터 들이는 따시고 배부른 방/불 꺼진 그 방 흐릿한 그 방 가는 문 아직 있을까?//높이 쌓기, 앞서 달리기, 환히 밝히기 흉이 되고/자연으로 내주기, 흐리멍덩하기 몸에 익은 방/하찮은 몸놀림이 신명으로 어우러져/둘이 셋이 되고 셋이 다섯 여섯이 되는/나와 너 사이 너와 그 사이/내가 있어도 나는 없고 내가 없어도 내가 엄연한 방/없음으로 확고한 흐릿한 그 방/불 꺼진 그 방으로 가는 문 남아 있을까?
여기에서 시적 화자는 본디 “얼뜨기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본과 문명이 세계를 지배하기 이전에 평등하고 서로 돕고 배려하고 환대하는 인간상에 상응한다. 지금은 그들이 형성한 자발적 공동체는 사라지고 다만 “불 꺼진 그 방 흐릿한 그 방”으로 흔적과 잔상으로 남아 있을 뿐인데 시적 화자는 “그 방 가는 문 아직 있을까?”라고 거듭 묻는다. 또한 축적과 경쟁 그리고 발전을 비판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신명과 생성의 공유 사회의 염원인 “그 방으로 가는 문 남아 있을까?”라도 다시 물음을 반복한다. 단순한 상실의 표현이 아니라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혁명본색’의 자리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11장 「그날은 오지 않으리」가 말하고 있듯이 기억 저편에 있는 “그 방으로 가는 문”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혁명이 혁명의 가면에 침을 뱉고/귓속마다 넘치는 이별의 노래, 이별에서 이별하는 날/맨 아랫것들이 수십 미터 공중 농성장에서 내려와/노래하며 식탁으로 가 앉는 날/손톱으로 철제 사슬을 끊고 가슴으로 탄환을 막아/가상과 추상의 불을 끄는 그날, 그날은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혁명의 불가능성에 관한 시인의 확증이 아니라 그에 관한 절망의 표현이다. 이는 11장이 “그날은 오지 않으리”를 여러 차례 되풀이하면서 마침내 “그날 다시는 오지 않으리/위도 모르고 아래도 모르고 오른쪽 왼쪽 방위도 없이/모르게 오고 모르고 놓치게 되리, 그러다 영영 오지 않으리”라고 결구를 배치하고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점차 고조하는 염원과 더불어 절망의 정동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그 심중에 내재한 “혁명의 불꽃”(1장 「거리」에서)이 여전함을 강렬한 울림으로 전달한다.
주먹 없는 얼뜨기, 건사한 건달이 되고/시인 축에 들지 못한 얼뜨기, 맑은 땀내 뿜는 시인이 되어/헛웃음 벗어던지고 줄타기 끼어들기 잔머리 벗어던지고/잡티 없이 껄껄껄, 속엣말 해대는 날/아아, 사랑이 제 손으로 봉긋한 가슴을 추스르며/정의가 처박아 두었던 놋그릇 호호 닦아 광을 내며/가난이 슬프지 않고 외로움이 아프지 않고/만나도, 아니 만나도 혼자라도 여럿으로 깨춤 추는 날/그날은 오지 않으리/뱀과 뱀이 늘어져 햇볕에 찬 피 데우며 얼크러지고/아침이면 나뭇가지에서 닭들이 꼬끼요, 먼동을 전하는/낮이면 참새 떼 이 집 저 집 소식 물어 나르는 날/마당에는 소 돼지 사람 따라 다니며 등 쓸어달라고 조르는 날/담장 없이 사는 주민들 아침저녁 빗자루 메고 나와/못 들어도 인사 하고 안 보여도 구시렁구시렁 안부 전하는/그날 다시는 오지 않으리/위도 모르고 아래도 모르고 오른쪽 왼쪽 방위도 없이/모르게 오고 모르고 놓치게 되리, 그러다 영영 오지 않으리
이처럼 시적 화자는 시인도 사람도 모두 본디의 진실을 회복하고 진정한 관계를 통하여 사랑이 흐르고 정의가 빛나며 “가난이 슬프지 않고 외로움이 아프지” 않는 세계를 염원한다. 또한 인간과 동물과 자연 사물이 한데 어우러져 서로 공생하며 공락하는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이 선연하다. 유년의 추억에서 발원한 원초적 경험의 장소는 그 저편의 사라진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번져나 시인의 주요한 시적 비전으로 생성한다. 마침내 12장 「그래도 가네」에 당도한 장시 「혁명본색」은 “아직도 가고 있네, 길 없는 길”이라는 첫 행에 도착한다. 절망 속에서 희망의 조짐들을 읽으면서 그 출구를 찾으려는 저간의 시적 발화 과정을 여기서 결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아니다’라는 희망의 문법에 여전하게 시적 비전을 걸고 있는 형편이다. 시인은 공들여 쓴 장시 「혁명본색」을 통하여 에른스트 블로흐가 ‘농민의 도(道)’라고 부른 단순함에 상응하는 유토피아를 이끌어 내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자기 이상과 충족이 실현되리라는 순진한 낭만주의를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미래 없는 암울한 풍경을 마지막까지 전경화한다. 시적 화자는 “폭력이 평화를 작동하고 불의가 정의를 작동하는 알고리즘/억압이 자유를 작동하고 비겁을 변명하는 철학사상 공유하며/허영을 변명하는 문화예술 둘러쓰고/발길질에 채여 굴러 가네/병든 지구를 위해 약 쓰자 악을 쓰며 나는 빠지고/지구가 폭발하면 화성 가서 살자 하고 나만 빠지고/혁명? 미개의 잠꼬대, 비인간의 도로(徒勞)”라고 폭력과 억압, 이데올로기와 환상이 지배하며 “병든 지구”의 위기가 가중하는 현실에서 “혁명”이 “미개의 잠꼬대, 비인간의 도로”가 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마침내 1장에서 선을 보인 “양말 한 묶음에 5천원 혁명 한 두름 1천원”이라는 구절을 수미상응의 형식으로 제시함으로써 시장이 신이 된 자본주의 세계에서 “혁명”이 처한 초라한 형국을 정직하게 그려놓고 있다.
확실히 「혁명본색」은 시인이 공력을 기울여 존재의 감각을 드러내고 자기의 위치를 정립한 장편이다. 경험시를 추구하는 그의 입장을 온전하게 표출하는 시적 비전과 세계 인식을 제시하였다고 생각한다.
신진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나며' 해설 구모룡(문학평론가, 한국해양대교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