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27 주일설교
영화 한 편 찍고 가실게요
사도행전 16:25~34
저에게는 다음과 같은 희망 사항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인품이 좋아지고 말도 교양있게 변하고 가족들은 평안하고 사회적 지위도 올라가고 그 모습을 본 동료들이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교회에 따라 나와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도가 되어 교회는 점점 부흥하고 그래서 우리 사회는 아름답게 바뀌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건전한 소원입니까? 여러분도 모두 그렇게 되면 좋겠지요? 그런데 이것은 말 그대로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이 희망 사항 그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 중에 일부는 이루어지지만, 어딘가는 항상 문제가 발생하고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예수님 믿어도 별수 없다고 할까 봐 걱정됩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성경대로 살려고 애쓰는 우리에게 왜 이렇게 곤란한 상황이 생길까요?
감사하게도 성경에는 이런 문제, 여러분의 의문에 관해 이미 답을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 잘 믿는 나에게 왜 문제가 생기는지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해답을 발견하고 기쁘게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확인한 바울과 실라는 누가와 디모데와 함께 드로아에서 배를 탔습니다. 배는 사모드라케 섬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네아폴리스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항구에서 몇 시간 걸어가면 빌립보라는 도시가 있는데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빌립보에 도착 후 안식일이 되었는데 빌립보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장소를 찾아 강가에 갔더니 경건한 유대인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두아디라에서 온 루디아가 있었는데 자색 옷감 사업가였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자 루디아가 예수님을 믿었고 그 집안사람들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는 바울 일행을 위해 자기 집에서 숙식을 제공했습니다. 목사가 이런 성도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지요. 이처럼 빌립보에서의 전도는 아주 순조로웠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만나는 사람마다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귀신들인 하녀 하나가 따라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전에 예수님에게도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알기는 귀신같이 잘 알아요. 바울이 그 귀신에게 그 여자에게서 나오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했더니 즉시 나왔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귀신도 꼼짝 못 하는 이런 모습을 보고 믿는 사람이 많이 생기게 되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귀신의 힘으로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돈을 많이 벌어주었는데 귀신이 나가자 이제 점을 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을 끌고 관리에게 갔다가 상관에게 갔습니다. 여기 상관(στρατηγός)은 집정관을 뜻하는데 당시 로마는 전직 집정관을 속주 총독으로 파견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상관에게 바울과 실라를 거짓으로 고발하자 상관은 재판도 하지 않고 채찍질하라고 했습니다. 22절에서 옷을 찢어 벗기라고 한 것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에는 옷이 비싸고 구하기 어려웠는데 옷을 찢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많이 때린 후에 간수에게 든든히 지키라고 명령하자 간수가 깊은 옥에 가두고 차꼬를 채웠습니다. 차꼬에 묶인 죄수는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질질 끌고 가서 옷을 찢어 벗기고 채찍으로 때리는 것은 생각만 해도 억울합니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옥에 가두고 차꼬까지 채웠으니 몸과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피가 터지도록 맞은 상태에서 차꼬에 채워졌으니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순종해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다. 처음에는 경건한 부유한 루디아를 만나서 모든 것이 형통했는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입니까? 바울과 실라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울과 실라는 과연 감옥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런 상황이 생기도록 하나님을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혹시 바울과 실라가 무슨 죄라도 지었나요?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께 순종해서 유럽으로 왔습니다. 처음에는 전도도 잘 되고 순조롭더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제발 우리를 살려주시고 구출해 주세요.”
바울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25절에서 기도하고 찬송했다는 말을 볼 때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선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가 고생하더라도 주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특이한 죄수 둘이 기도하고 찬송할 때 다른 죄수들이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상황이 좀 나아졌을까요? 나아지기는커녕 갑자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차꼬에 묶인 죄수는 지진이 발생해도 피할 수도 없습니다. 26절에서 ‘큰’은 헬라어 메가스(μέγας)입니다. 지진이 얼마나 심했던지 옥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고 쇠사슬이 다 끊어졌습니다.
이런 난리가 났으면 당연히 모든 죄수가 도망했겠죠. 로마에서는 죄수를 놓친 사람은 죄수의 벌을 대신 받아야 합니다. 잠에서 깬 간수는 자결하려고 칼을 뺐습니다. 바울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메덴 프락시스 세아우토 카콘(Μηδὲν πράξῃς σεαυτῷ κακόν) 자살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 있소.” 죄수가 도망가지 않은 것은 지진보다 더 놀라운 일은 사건입니다.
간수는 달려와서 바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모시고 나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들, 제가 무엇을 하면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집안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대답에 이어서 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간수는 바울의 상처를 씻어 치료해 주고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고 음식을 차려 한밤중에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룻낮과 밤사이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엄청난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는 새로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정관이 부하를 보내어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라고 했습니다. 어제는 든든히 지키라고 하더니 오늘은 풀어주라니 아무 이유 없이 때리고 가두었다는 소리 아닙니까? 어쨌던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반전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인 우리를 재판도 없이 때리고 감금해놓고 그냥 나가라니, 집정관이 직접 와서 에스코트하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집정관은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에 로마시민은 재판이 맘에 안 들면 황제에게 상소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런 로마시민을 재판도 없이 채찍질했하고 가두었으니 큰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집정관이 친히 와서 제발 조용히 떠나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제야 바울은 감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있는 신자들을 만나서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교인들이 바울에게 위로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교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다음 도시를 전도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사실 바울은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암행어사 출두요.” 바울의 마패는 로마시민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마패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질질 끌려갈 때, 온갖 모함과 거짓 증언을 당할 때, 옷이 찢어지고 채찍에 맞을 때, 감옥에 갇히고 차꼬에 묶일 때까지 로마시민권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간수와 그 집안은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빌립보 제2교회는 세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루디아의 집이 빌립보 제1교회였다면 간수의 집은 빌립보 제2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당한 사건을 좀 복기해 봅시다.
드로아-사모드라케-네아폴리스-빌립보-강가-루디아
여기까지는 순조롭게 잘 풀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귀신들린 여종-채찍과 감옥-기도와 찬송-큰 지진-간수의 전도-석방까지 정말로 정신없는 하루였습니다. 바울의 하루는 정말 드라마틱한 영화같지 않습니까?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독일군에 쫓겨 338,226명을 철수시킨 덩게르크 철수 작전을 필름에 담은 영화가 2017년에 개봉되었습니다. 영화 덩게르크는 9일간의 다이나믹한 사건을 담았지만, 바울의 빌립보 사건은 단 하루 동안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카메라에 담는다면 짧은 시간,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영화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영화 한 편을 찍은 셈입니다. 이렇게 전도한 빌립보교회는 전 세계 어느 도시의 교회보다 바울을 사랑했고 그들은 선교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에서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에게 복음을 받은 교회 중에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보내어 준 교회는 빌립보교회가 유일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채찍에 맞고 감옥에 들어가 차꼬에 매였을 때는 괴롭고 억울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바친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그 일은 감사할 일이며 찬양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일 아침에 죽을지도 모르는 빌립보 감옥에서 감사기도와 찬송을 올렸던 것입니다.
울고 있는 형제여, 왜 찬송을 잃었는가?
어둠 속의 찬송은 기적을 부른다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은
찬송으로 열었다오. 고통의 문을
찬송 찬송으로. 찬송 찬송으로.
이제 제가 처음에 말했던 희망 사항을 생각해볼까요?
예수 잘 믿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자식들도 다 잘되고 주변 사람에게 덕을 끼쳐 전도도 많이 하고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그런 희망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로 우리 앞에 드라마틱한 상황을 허락하십니다. 질병도 있고 부도도 있고 사고도 있습니다. 나의 순수한 의도를 오해하는 사람도 있고 억울한 누명을 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까닭 없는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실까요? 그런 때는 우리 손에 마패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럴 때 믿음의 사람 바울은 로마시민권이라는 마패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대체로 형통하지만, 때로는 하나님과 함께 신자의 삶이 영화처럼 드라마틱할 때도 있습니다. 그 드라마를 찍은 후의 우리 믿음은 하나님의 사심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한없이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 자취를 밟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