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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6)
예루살렘 성전
성전산(모리아산)
통곡의 벽
예수 시험받은 성전, 지금은 바깥벽 흔적만…
‘건축왕’ 헤로데가 20여 년 걸쳐 지어
"돌 하나 남지 않고 파괴” 예언하신 곳
현재 이슬람 황금 사원 자리 잡아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 일간 단식하실 때, 사탄은 주님을 거룩한 도성, 곧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운 후, 밑으로 몸을 던져 보라고 유혹했다(마태 4,4-6). 사탄이 주님을 시험했던 그 성전은 폐허가 되어 현재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 잡고 있지만, 성전의 바깥벽들이 지금껏 남아 그때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신약 시대 성전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로데 임금의 작품이었다. 헤로데는 건축왕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손꼽히는 유적지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그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은 단연 최고의 작품이었고, 예수님도 그곳에서 가르치셨다.
▲ 신약 시대 예루살렘 성전 모습을 재현한 그림
예루살렘에 최초로 성전을 봉헌한 이는 기원전 10세기경 솔로몬이다. 그는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지었는데(2역대 3,1), ‘모리야’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 한 곳이다(창세 22,2). 또 고대 전승에 따르면, 하느님은 바로 이 산에서 천지창조를 시작하셨다고 한다(탈무드 요마 54B). 그러나 솔로몬 성전은 기원전 6세기 초 바빌론에 의해 무너졌고, 약 50년 후 유다인들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왔을 때 즈루빠벨의 주도로 제2성전을 봉헌했다. 그리고 헤로데가 나중에 그곳을 웅장한 규모로 재건한다.
그가 제2성전을 다시 지은 까닭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이두매아(에돔) 사람, 어머니는 나바테아 여인으로서, 유다의 피가 섞이지 않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자기 왕위의 정통성을 확인받기 위하여, 하스모니안 공주 마리암과 정략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가 대국민적인 미움을 받았을지언정, 건축사에 남긴 업적만큼은 대단하다. 특히 성전 공사는 기원전 20~19년부터 그가 죽은 후에도 서기 64년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굉장했던 것 같다. 헤로데는 성전을 최대한 웅장하게 지으려고 모리야를 평평하게 깎아 오백 미터 길이의 광장을 만들었으며, 그 위에 성전을 개축했다. 성전 공사에 사용된 돌은 대부분 2~3톤이었고, 가장 큰 돌은 무게 570톤에 길이는 13미터로 버스보다 길었다. 이 돌들은 모리야 산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북쪽을 채석하여 충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헤로데는 종종 자기가 사용한 돌에 독특한 문양을 새겼으므로, 그의 건축물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가족이 묻힌 헤브론의 ‘막펠라’ 동굴도 같은 문양의 돌로 지어졌기에, 헤로데가 재건한 건물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의 압도적인 위용에도, 세속 시장처럼 변질되어버린 타락상을 꾸짖으셨다(요한 2,16). 일견, 희생 제물과 성전세를 바치는 등 많은 활동을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마르 11,12-14) 공정과 정의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 버린 성전에서 양과 소를 몰아내고 환전상과 상인들을 내쫓으셨다(마태 21,12-13). 이 모습은, 예레미야가 제1성전을 강도들의 소굴이라 꾸짖었던 신탁을 떠올리게 한다(예레 7,11). 즈카 14,21에 따르면, 신약 시대 이전부터 성전에 장사꾼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편, 예수님이 성전에서 짐승들을 몰아낸 것은, 동물 제사를 폐기하심을 상징적으로 예고하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예수님을 통해 희생 제사가 모두 완성되므로, 죄 사함을 위한 제물이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히브 7,27).
▲ 로마 티투스 장군의 성전 약탈 장면을 묘사한 조각.
역사는 반복한다고 했던가? 기원전 6세기 초 강도들의 소굴처럼 더럽혀진 성전을 하느님이 버리신 것처럼(에제 10장),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기쁨이자 자랑거리인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파괴되리라 예고하셨다(마태 23,37). 그리고 서기 70년, 열혈당원들의 봉기를 진압하던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그 예고가 실현되었다. 현재 그 자리에는 성전에 관련된 유적들은 거의 없고, 이슬람 사원이 팔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순금의 위용을 뽐내며 서 있다(황금 사원은 이슬람의 예언자 모하메드의 승천을 기념한다). 그러나 주님의 몸이 성전이 되셨고(요한 2,21), 또 주님의 희생 제사로 우리 모두가 성전이 되었으니(1코린 3,16), 당신 거처를 백성들 사이에 두겠다 하신 하느님의 약속은(에제 37,28) 지금도 변함없다. 모리야 산은 과거 헤로데 성전의 웅장함이 무색할 정도로 빈터가 되어 버렸지만, 그 옛날 솔로몬 때부터 이어져온 자신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을 조근조근 들려준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에 있어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 곧 그분의 현존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의 장소, 곧 친교와 경신례의 장소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의 의미는 다음 시편에서 잘 드러난다.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라. 너희는 알아라,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그분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이어라. 감사드리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드리며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을 찬미하여라.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며 그분의 성실은 대대에 이르신다.”(시편 100,1-5) 현재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이슬람의 황금 돔 대사원이 있는 곳이 바로 과거 유다인들의 성전이 있었던 장소이다. 성전은 언제 세워졌고 또 언제 파괴되었는가? 이제 그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를 살펴보자.
■ 솔로몬의 성전
다윗이 예루살렘을 차지하였을 때, 그는 그곳을 수도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예루살렘은 그 어떤 지파에도 속하지 않은 도시로서 북과 남을 가르는 경계에 위치하여 다른 지파들의 견제를 피할 수 있었고 다윗에게 정치적 독립을 선사하였다. 사실 성조들과 연관이 있는 여러 성소들이 있었으나 다윗은 예루살렘을 왕국의 종교적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키르얏 여아림에 있던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하였다. “키르얏 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그들은 주님의 궤를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옮기고, 그의 아들 엘아자르를 성별하여 그 궤를 돌보게 하였다.”(1사무 7,1) 마침내 계약의 궤는 다윗의 성에 우선 이집트 탈출 때처럼 천막 아래 모셔졌다. “다윗은 기뻐하며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그들은 다윗이 미리 쳐 둔 천막 안 제자리에 주님의 궤를 옮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주님 앞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 다윗은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다 바친 다음에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2사무 6,12-18)
다윗의 성 북쪽에 위치한 언덕 꼭대기에 바위가 있었다. 그곳은 아마도 가나안인들의 제사 장소로 사용된 듯하다. 구약성경은 이 장소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가드가 그날 다윗에게 와서 말하였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올라가시어 주님을 위한 제단을 세우십시오.’ 다윗은 가드의 말에 따라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곳에 올라갔다. 아라우나가 내려다보니, 임금과 그 신하들이 자기에게 건너오고 있었다. 아라우나는 곧 임금 앞에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라우나는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서 무슨 일로 이 종에게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다윗이 대답하였다. ‘그대에게 타작마당을 사서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아 드리려고 하오. 그러면 재난이 백성에게서 돌아설 것이오.’”(2사무 24,18-21) 다윗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바치기 위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구입하였다. “다윗은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2사무 24,25)
그러나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는 일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나탄의 예언에서도 언급된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2사무 7,12-13)
사실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수도를 확장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북쪽 언덕, 곧 옛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위에 궁전과 성전을 세우려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사 년째 되던 해 지우 달,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은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1열왕 6,1) 이곳은 모리야 산으로도 불린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주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으로서, 본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집터로 잡아 놓았다.”(2역대 3,1) 그리하여 솔로몬은 기원전 960년경에 페니키아인들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웠다. 티로 임금 히람은 레바논 향백나무와 방백나무를 보냈다.(1열왕 5,15-32; 2역대 2,2-15) 이것이 솔로몬의 성전(Solomon’s Temple)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제1성전(First Temple)이다. 솔로몬은 이 성전에 계약의 궤를 모셨다. 이 성전을 묘사하는 성경 본문(1열왕 5,15-7,5)은 이집트 탈출 이후 하느님이 모세에게 만남의 천막을 세우기 위해 명령하신 본문(탈출 25-31장; 35장)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솔로몬의 성전은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파괴되었다.
■ 제2성전
약 50년가량의 바빌론 유배 이후, 유다인들은 귀환하였다. 그들은 다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바쳤다. 성전의 재건축은 기원전 537년에 세스바차르에 의해 시도되었고,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지원으로 기원전 520-515년 동안 즈루빠벨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이렇게 유배 이후 다시 세워진 성전을 우리는 제2성전(Second Temple)이라 한다. 사실 기원전 587년의 유다 왕국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그리고 뒤이은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엄청난 상실이요 위기였다. 유배에서 되돌아온 유다인들의 주된 관심사며 과제는 상실의 회복, 과거의 복구와 재건이었다. 이 과제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통하여 가시화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는 동시에 유배 이후 유다 민족의 권위 있는 최고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함께 했다. 새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던 자리에 같은 구조로 세워졌으나 그 규모는 첫 번째 성전에 비하여 작았다.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 가운데에서 주님의 옛집을 보았던 많은 노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서 이 주님의 집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목 놓아 울었다. 그러는가 하면 다른 많은 이들은 기뻐하며 목청껏 환호성을 올렸다.”(에즈 3,12)
제2성전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헤로데 대왕(King Herod the Great, 기원전 37-4년)에 의해 더 웅장하게 확장되었다. 이두매아인인 헤로데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성전을 다시 개조하는 작업을 기원전 20년에 시작하였다. 성전은 화려하게 꾸며졌고 그 면적은 두 배로 늘어났다. 이 헤로데의 작업은 요세푸스의 문헌인 『유다 전쟁사』 5권 184-237과 『유다 고대사』 15권 380-425뿐 아니라 라삐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약 5세기 동안 유다인들의 경신례의 중심이 되었던 제2성전은 제1차 유다 항쟁이 진압되었던 기원후 70년에 로마제국의 티투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이 성전은 제2차 유다 항쟁 당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132년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로마 황제는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고 불렀고 성전이 있었던 곳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다.
■ 예수님 시대의 성전
예루살렘의 성전산(Temple Mount)은 당시 유다인들의 삶에서처럼 역사적 예수님의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 유배 이후 세워진 제2성전인데, 헤로데 대왕에 의해 증축된 것이다. 헤로데의 성전산(Herodian Temple Mount)의 크기는 남북으로 450m, 동서로 300m 가량 되었다.
성전은 여러 경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방인들에게도 개방되었던 “이방인의 뜰(Court of the Gentiles)”, 이스라엘의 남자와 여자들을 위한 “여자들의 뜰(Court of the Women)”, 이스라엘의 남자들만을 위한 “이스라엘의 뜰(Court of the Israelites)”, 그리고 사제들에게만 허용된 “사제들의 뜰(Court of the Priests)”이 있었다. 그래서 전체 성전산은 본격적인 의미의 성전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의 뜰”로 나눌 수 있었다. 이 둘 사이에는 난간이 있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명각(Inscription)에 경고문이 새겨졌다. 즉 이방인이 들어올 수 없음을 알리고 이를 어길 경우 죽음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성전산의 넓은 뜰을 둘러싼 벽들이 사방에 있었고 성전의 뜰 안으로 통했던 문들과 계단들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현재 성전산 부근 남쪽에서 우리는 정결예식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목욕 시설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성전산의 북서쪽 모퉁이에는 안토니아 성채(Antonia fortress)가 있었고 마태 4,5에 언급되는 성전 꼭대기는 성전산의 남동쪽 끝이었을 것이다.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5-7)
성전산의 사방 벽에는 주랑들이 있었는데 남쪽의 왕궁 주랑(Royal Portico)의 기둥들은 네 줄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주랑들은 두 줄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쪽에는 “솔로몬의 주랑(Solomon’s Portico)”이 있었다. 이 주랑들에서는 율법학자들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토론하였고,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파는 장수들과 환전상들이 있기도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파스카 축제 때의 일을 전하는 루카 2,41-52에 따르면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46절) 그리고 마르 11,15-19에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전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 로 만들어 버렸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요한 10,22-39은 예수님과 유다인들 간의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논쟁 이야기이다.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들(마태 26,59-66; 마르 14,55-64; 루카 22,66-71)과는 달리 최고 의회에서의 예수님 재판을 전하고 있지 않지만 그 재판의 중요한 요소들을 10,22-39의 성전 봉헌 축제 때의 논쟁 안에서 소개한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요한 10,22-23) 요한 10,30에 따르면, 예수님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하자 유다인들은 그를 신성모독으로 비난하며 돌로 치려 한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님은 한갓 사람이면서 스스로를 하느님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성전 봉헌 축제 때의 논쟁에서 유다인들과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다음의 질문들이 제기된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위해 우리의 관심은 요한 본문의 시간적 배경, 즉 성전 봉헌 축제에 집중된다. 이 축제는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1마카 1,54; 다니 9,27; 11,31; 12,11)을 세운 지 3년 후, 즉 기원전 164년 키슬레우 달 25일에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 하에 성전과 그 제단이 정화된 사건(1마카 4,36-61; 2마카 10,1-9)을 기념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요한 본문의 성전 봉헌절 축제에 참여하는 유다인들은 과거의 불행한 역사와 함께 그것을 초래한 인물, 즉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신성모독적 거만에 의해 자신을 하느님으로 자처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산의 솔로몬 주랑은 사도행전에서도 소개된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온 백성이 크게 경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달려갔다.”(사도 3,11)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사도 5,12)
본격적인 의미의 성전은 “여자들의 뜰”, “이스라엘의 뜰”, “사제들의 뜰”, 그리고 성소(Sanctuary)와 지성소(Holy of Holies)로 이루어졌다. 성소와 지성소는 길이와 너비가 9m, 높이가 18m 가량이었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사제만이 1년에 한번, 즉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자들의 뜰”에는 성전의 헌금함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마르 12,41-42) “여자들의 뜰”로 들어가는 동쪽 문은 “아름다운 문”으로 불렸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사도 3,1-2)
헤로데 성전의 벽들 중에서 서쪽 벽은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다. 높이 18m, 너비 60m의 이 서쪽 벽(West Wall)을 흔히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곳을 찾는 유다인들이 기원후 70년에 파괴된 성전과 조상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기억하며 통곡하기 때문이다. 이 통곡의 벽은 현재 유다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장소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유다인들이 이 통곡의 벽을 순례하는데, 그들의 기도와 염원을 쪽지에 적어 벽의 돌 뜸새에 끼워 넣는다. 현재 통곡의 벽은 아래에서 약 열 한 번째까지의 큰 돌은 헤로데 대왕 시대의 것이고, 그 위의 중간 크기의 다섯 줄은 초기 아랍 시대, 그리고 나머지 윗부분의 조그만 벽돌들은 19세기의 것이다. 현재도 이 통곡의 벽에서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행사들이 다양하게 벌어진다.
모리아산
(Temple mount, mount Moriah)
예루살렘의 성전산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이자, 예루살렘에서 가장 의미 있는 역사적, 종교적 장소로서,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올드시티)의 1/6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을 가리킨다. 그 규모는 서쪽 길이 490m, 동쪽은 474m, 북쪽은 321m, 남쪽은 283m에 이른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모리아산(Mount Moriah)’으로 불리는 성전산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희생 제사로 바치려 했던 산이며(창세 22),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많은 관련이 있는 장소이며, 이슬람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Mecca)와 메디나(Medina)와 함께 3대 성지로 여겨진다.
구약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B.C.1000년경 다윗 왕이 성전산을 그 땅의 주인 아라우나로 부터 은 50세겔을 주고 구입하였고(사무엘하 24,18-25), 그의 아들 솔로몬이 페니키아인들의 도움으로 성전산에 화려한 궁전과 성전을 세웠다. 그러나 B.C.586이곳을 침략한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 B.C.605-B.C.562 재위)에 의해 파괴되었고,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바빌로니아로 유배되었다. 50년 뒤 바빌로니아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소규모로 성전 재건을 시작했다. B.C.516년에 완공된 이 성전을 제2성전이라고 부른다.
B.C.19년 헤롯왕(HerodⅠ, B.C.37-B.C.4 재위)이 유대인의 민심을 얻기 위해 기존의 성전을 헐고 대규모의 성전, 부속 건물, 요새 등을 세우며 과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A.D.70년에 로마의 티토(Titus)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서에 따르면 당시 성전 파괴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고 한다(마태 24,1-2; 마르 13,1-2; 루카 21,5-6). 성전 터엔 A.D.135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주피터에게 봉헌하는 신전이 세워졌으며, 비잔틴 시대에는 이곳이 유대교의 성전터라 하여 황폐하게 방치되었다.
A.D.638년부터 예루살렘을 통치한 무슬림에 의해 성전산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슬람 전통에 의하면 이곳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장소로 여겨지며 이곳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졌다. 현존하는 8각형의 아름다운 건축물인 바위사원은 우마미야조 칼리프 압둘 말리크(Abd al-Malik ibn Marwan, 685-705 재위)에 의해 건축이 시작되어 691년에 완공된 것이다. 사원의 돔 아래에는 높이 1.8,m, 폭 11m의 바위가 있다. 유대인들은 이 바위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신에게 바치려 했다고 믿는다. 반면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이 바치고자 한 아들이 이사악이 아닌 이스마엘이라고 믿으며, 또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 바위에서 승천했다고 믿는다.
통곡의 벽
하느님 현존 상징하는 유다교의 ‘심장’
성인식 등 치르는 ‘최고의 성지’
헤로데의 성전 바깥벽 일부
서기 70년 티투스에 의해 파괴돼
유다인들 내쫓기며 벽잡고 통곡
▲ 통곡의 벽 전경. 왼쪽에 황금사원이 보인다. 사원이 있는 장소가 옛 성전이 봉헌됐던 모리야 산이다.
유다교 최고의 성지는 통곡의 벽이다. 늘 붐비는 곳이지만, 특히 월·목요일은 성인식으로 떠들썩하다. 십대 초반에 이미 어른의 자격을 받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꼬맹이들이 기특해 보인다. 가족·친지들은 신나는 북소리에 춤을 추고, 이웃에게 사탕도 던지며 흥을 돋운다. 여자아이는 만12세, 남자아이는 13세에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는 성년으로 인정받는다. 통곡의 벽에서 성인식을 하는 까닭은, 그 위로 연결된 모리야 산에 서기 70년까지 성전이 봉헌돼 있었기 때문이다. 곧, 옛 성전 가까운 곳에서 일생일대의 사건을 기념하고자 한다(독립 기념일, 군인 선서식 등도 통곡의 벽에서 치른다).
▲ 통곡의 벽으로 향하는 성인식 행렬. 앞에 선 어린이가 주인공이다.
성전을 마지막으로 보수한 이는 건축왕 헤로데였다. 기원전 20년 그는 모리야 산을 평평하게 깎아 오백 미터 길이의 광장을 만들고, 그 위로 성전 개축을 시작했다. 무너진 성전을 통감하게 하는 통곡의 벽을 보노라면, 예루살렘을 우러러 한탄하신 예수님의 눈물이 떠오른다(마태 23,37-39). 강도들의 소굴로 타락한 성전이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 예고하셨듯이, 서기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는 열혈당원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성전을 파괴했다. 이 사건은 유다인들에게, 우리가 명성 황후 시해나 불탄 숭례문에서 느끼는 아픔에 버금가는 고통을 주었다. 이제 성전은 유적도 거의 없고, 모리야 산을 사각으로 감싼 바깥벽들만 남았다. 그 가운데 서쪽 벽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솔로몬이 첫 성전을 봉헌하며 ‘이곳에서 바치는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십사’ 청했기에(1열왕 8,30), 유다인들은 지금도 성전과 가까운 서쪽 벽으로 모인다. 다른 쪽에도 벽이 있지만, 옛 지성소가 바라보던 방향인 서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통곡의 벽은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해 주는 심장 같은 곳이다. 벽 길이는 오백 미터에 달하나, 우리가 사진에서 보는 통곡의 벽은 전체의 1/8 정도에 해당한다.
▲ 남자 구역 동굴 내부에서 종교서적을 읽는 유다인. 그 옆으로 지성소가 보인다.
통곡의 벽 이름은, 유다인들이 로마에 거슬러 일으킨 2차 반란에서 유래했다. 서기 66년 발발한 열혈당원들의 1차 반란 뒤, 132년에는 바르 코흐바 혁명이 이어졌다. 두 번에 걸친 반란에 분노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내쫓았고, 나중에야 그들은 아브월 9일(성전파괴일)에만 예루살렘 출입 허가를 받는다. 그날 유다인들이 이 벽을 붙들고 통곡하다가, 울면서 떠났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전이 무너지던 날 벽이 이슬에 젖어 우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통곡의 벽이라고도 전한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방문해 간절한 기도문을 벽에 꽂는다.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도 눈길을 끌었다. 다만, 오십 년 전만 해도 통곡의 벽은 유다인들에게 그야말로 화중지병, 곧 그림의 떡과 같았다. 통곡의 벽을 포함한 동예루살렘이 요르단 영토라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1967년 일어난 6일 전쟁 뒤에야,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통합에 성공한다.
통곡의 벽은 역사도 흥미롭지만, 전통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장소다. 유다교는 남녀가 유별하므로, 회당이 남자 층, 여자 층으로 구분되어 있듯이 통곡의 벽에서도 따로 기도해야 한다. 가부장적 전통에 따라, 남자 구역이 몇 배 넓다. 토라 두루마리를 보관하는 지성소나 독실한 유다인들이 사용하는 도서관도 남자 구역 안에 파인 동굴에 있다(게다가 동굴 내부에는 밖에서 볼 수 없는 서쪽 벽 일부가 계속 이어진다). 성당에서는 남자들이 모자를 벗지만, 유다교는 반대다. 이방인도 통곡의 벽에서는 ‘키파’라는 정수리 모자를 써야 한다. 여인들은 민소매 등의 짧은 옷을 입을 수 없다.
▲ 통곡의 벽(남자 구역)에서 키파를 쓰고, 신명 6,8의 율법대로 이마에는 성구갑, 팔에는 끈을 묶은 유다인들.
통곡의 벽에서 사람 구경을 하다 보면, 앞뒤로 몸을 흔들며 기도하는 유다인들도 포착된다. 졸면 안 되니까 흔드느냐는 질문도 나오고, ‘흔들어 바치면 두 배’이기 때문이라고 재미있게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온몸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몸을 흔들며 모세오경을 읽는 모습은 꽤 신실해 보인다. 차 안에서 책을 읽어도 어지러운데, 온몸으로 토라를 봉독하는 모습은 나름의 신앙을 오라처럼 발산한다. 기도 뒤에는 지성소에 계실 하느님께 등을 보이지 않도록 뒷걸음을 친다. 조심스럽게 물러나오는 유다인들을 볼 때마다, 2000년 전 통곡의 벽 위에서 위엄을 떨쳤을 웅장한 성전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동 5.18 기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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