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
광희문은 농한기에 맞춰 12만 명의 인력을 동원해 49일 만에 공사를 끝낸 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한양 인구가 5만 여명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력을 동원한 것이지료, 광희문을 남소문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남소문은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있었다고 합니다. 풍수가들이 경복의 남동방향으로 왕가의 황천문이 된다고 하여 폐쇄하였다고 합니다. 광희문은 일제가 서울 성곽을 철거할 당시에도 본래의 자리에 남아 있었으나 1976년에 도로를 내느라 본래 자리에서 남쪽으로 15m 옮겨 지었다고 합니다.
금강산 신계사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에서 신계사를 만났습니다. 6.25전쟁으로 삼층탑 하나만 남아 있던 폐허에 13개 전각이 복원되어 옛 대찰의 영화가 되살아났습니다. 절 앞으로 소나무 군락이 천만병사로 도열하였고, 그 너머로 금강산 집선연봉이 병풍처럼 장대하게 둘러섰습니다. 이처럼 기락힌 구도를 만나는 기회가 펜화가의 일생에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펜촉 60여 개를 갈아가며 대략 200만 번이 넘는 펜선을 긋는 동안 집선연봉의 기운이 함께 하여 피곤을 잊었습니다.
함양 농월정
이 달바위에 소나무 숲을 등지고 앉은 농월정은 예초참판을 지낸 박명부가 즐겨 찾던 곳에 후손들이 세운 정자입니다. 이 또한 거대한 암반을 주춧돌로 삼고 그 위에 자연목을 누하주로 세운 누각입니다.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바람막이 작은 방을 두었고, 걸터앉을 수 있도록 3면에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추녀 네 귀에 활주를 세워 넓은 지붕을 안정되게 하였습니다. 대들보에 황룡과 청룡의 모습으로 얹은 충량도 멋지고 천장 우물반자에 그려넣은 학도 보기 좋습니다.
합천 해인사 일주문
해인사는 가야산의 강한 기운으로 팔만대장경을 보호하는 절입니다. 건물들도 딱딱한 분위기여서 두도를 찾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마음에 드는 구도를 찾았습니다. 일주문을 뒤에서 본 구도로 여태까지 그렸던 그림들과는 사뭇 다른 구도입니다. 그림은 1920년대 사진을 참고하여 고쳐 그렸습니다. 지금은 '가야산 해인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나 사진에는 '해인사 홍화문'이라고 쓴 편액이 있었습니다. 문 좌우에 폭 7자쯤 되는 낮은 담도 있었습니다. 일주문은 사찰의 경내와 밖을 구분 짓는 상징적 건물인데 담장이 있으니 그 뜻이 명확해지고 정감이 있어 보입니다.
서울의 성문 중 동대문이라 부르는 흥인문에만 옹성을 두른 이유를 아십니까? 조선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고 2년 뒤 성곽을 쌓습니다. 성벽은 주산인 북악산(높이 342m) 능선을 따라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의 남산(265m)으로 이어지는데 동쪽의 낙산(125m)이 가장 낮습니다. 그 낙산 끝자락에 세운 흥인문 자리는 넓은 평지여서 적의 공격에 취약한 곳입니다. 그래서 성문 앞에 반원형 옹성을 둘러 쌓아 성문으로 들어오는 적을 앞 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