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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오늘(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은 민중들이 외치는 만세함성으로 가득찼다. 3.1운동의 시작이었다.
윤경로/前한성대 총장: 3.1운동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게 아니고요.
이부영/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 이사장: 3.1운동이나 혹은 임시정부는 그냥 평지돌출하듯이 생긴게 아니에요.
일제 강점 9년만에 터진 독립에 대한 열망은 한달 뒤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김희곤/안동대 사학가 교수: 그런데 그것은 어떤 계기로 만들어졌을까 깊이 생각지도 않았고 또 말해 주지도 않았어요.
강준식/몽양 여운형 일대기 저자: 일본이 학정을 해서 견디다 못해 그랬다는데 왜 하필 10년이나 지나서 그 시점에 그 날짜에 하느냐는 해석이 안되잖아요. 두 달전에 할 수도 있고 일년 전에 할 수도 있고 일년 뒤에 할 수도 있는데 그건 뭔가 강력한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에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이 3.1운동을 기획한 젊은 청년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가 지니고 갈 청원서가, 그들의 기획이 미국의 한 대학도서관에서 백년만에발견됐다. Secretary, W.H. Lyuh, ~미국에서 100년만에 발견된 청원서-독립을 얼마나 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파리에 전해야 할 한국민의 메시지
전세계에 알려야 했던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가 가는데, 그럼 우리가 들고 일어나야 되지 않느냐, 그게 대중시위고 만세시위죠.
독립열망의 메시지를 들고 각국으로 달려간 젊은 그들,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의 도화선과 계기를 만든 조직이었다-신한청년단의 그들,
중국 상하이의 입구 와이탄 항구, 백여년전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이 항구를 통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의 경제, 정치, 교통의 중심지이자 세계 각국의 청년들이 모여 정보를 교류할 수 있었다. 대규모 국제도시, 특히 이곳에 자리한 프랑스 조계지는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난 치외법권적인 지역으로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기엔 적합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독립운동을 연구중인 셰준 메이 교수, 그가 청년들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셰준 메이/화동사범대 사학과 교수: 여기는 거의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네요. 거의 변화가 없네요. 당시 민족독립을 위하여 분투했었죠.
그가 다시 찾은 이 집은 한때 중국혁명가들의 보금자리었다 (중화혁명당 상하이 총사령부 터), 그리고 이곳에서는 한국에서 망명해온 독립운동가들이 머문 곳이기도 했다.
셰준 메이: 집이 좋아졌어요. 지난 번에 왔을 때보다,
집주인: 인테리어 공사를 좀 했어요
한국에서 유학온 청년들은 그들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이들은 골방에 앉아 고국의 상황에 대해 정보를 나눴다.
셰준 메이: 그들은 상하이에서 지내면서 민족독립의 희망을 실현시키려고 했습니다. 상하이 라면 정보교류가 쉬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매주 토요일 마다 토론모임을 가지며 세계정세의 흐름을 읽었다.
몽양 여운형은 조동호, 장덕수, 신석우, 김철, 선우혁을 모으고 전투활동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매토요일 마다 상의하였다-여운형 투쟁사, 이만규저(1946)
중국 상하이(1918년 11월)
장덕수(1894년생/당시 25세): 자, 동지들, 드디어 제1차 세계대전이 끝이 났소이다
조동호(1892년생/당시 27세): 불행히도 일본이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 것 같소
김철(1886년생/당시 33세): 아직 낙담하기에는 이릅니다. 미국의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지 않습니까?
신석우(1894년생/당시 25세): 맞습니다. 식민지들의 요구가 자유롭고 공정하게 조정되어야 한다지요.
선우혁(1882년생/당시 37세): 그렇다면 우리 같은 식민지에게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여운형(1886년생/당시 33세): 그렇소, 아무튼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계속 예의 주시해 봅시다.
이 모임의 리더는 청년 여운형,
윤경로: 몽양 여운형은 실제에 1910년에 병합을 당하니까 그 후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구나 이래가지고 이제 상하이로 가죠
강준식: 그전에 자기 집안 재산을 다 정리하고 동생(여운홍)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본인은 친구인 조동호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갑니다
여운형이 상하이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17년이었다. 유학생 중심의 청년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 YMCA를 활동기반으로 삼는다. 특히 중국의 혁명세력과 교류하면서 훗날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 (1905년부터 1907년에 건축한 상해 YMCA빌딩),
셰준 메이: 여운형, 김철 등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자주 이곳에 와서 활동을 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명의상 교회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던 거죠.
이부영: 상하이에 우리 교민들이 많이 나와 살게 되니까 교민들 조직하고 교민상조회 만들고 또 인성학교 라는 우리 어린 교민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서 아이들 가르치도록 몽양 선생이 교장을 했어요.
강준식: 여운형 선생이 학교에 다니게 해주고 유학시켜 줬던 자제분이 기록에 보면 150명 정도 된다고 해요. 그래서 여운형 선생이 많은 사람들의 구심점이 된 거예요.
(중국 상하이 1918년 11월), 토요모임의 구심점이었던 여운형은 세계 정세에 대한 토론을 주도했다. 1918년 11월의 주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였다.
이준식/독립기념관 관장: 여운형 선생이 토론을 좋아하거든요.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론이란 걸 주장했다는데 그 내용이 뭘까 그게 우리한테 적용될까 그러면 민족자결론을 이용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김희곤: 국제정세 돌아갈 때 수없이 머리를 맞대고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것이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1918년 11월 11일), 상하이는 축제 분위기가 고조됐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자 많은 약소국가들은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평화원칙 14개조’-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외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된다.
바로 이때 윌슨의 주장을 전달하기 위해 상하이를 찾아온 대통령 특사가 있었다 (찰스 R. 크레인, 미국 윌슨 대통령 특사),
(콜롬비아대학 미국 뉴욕), 미국의 콜롬비아대학에는 찰스 크레인의 가족이 소유했던 기록물들을 보관하는 공간들이 따로 있다 특히 그의 행정에 대한 자료 중에는 윌슨 대통령과 연관된 것이 많다.
타냐/콜롬비아대 버틀러도서관 사서: 당시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크레인의 지지에 감사를 표하고 싶어했습니다. 재정적 지원은 물론 정치적인 지원도 대단 했으니까요.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는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 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타냐: 여기에 소장된 편지들을 살펴 봤을 때 윌슨과 크레인은 단순히 정치적 동맹을 넘어서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옛 영국 조계지 중국 상하이, 1918년 11월, 여운형은 크레인 방문 소식을 한 출판사에서 일하다접하게 된다.
셰준 메이: 당시 이 부근에는 출판사가 아주 많았는데 여운형은 협화시국이라는 곳에서 일을 했어요. 외국어를 곧잘 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요.
상하이 협화시국 1918년 11월, 출판사 사장은 미국인 조지 피치 박사, 여운형은 크레인에 대한 소식을 피치 박사에게 알렸다. 그의 도움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강준식: 내가 꼭 가야 되겠다. 그런데 초청장이 없이는 못들어가고 아무나 들어가는게 아니예요. 그래서 피치 박사의 아들인 비오생, 기록이 돼있는 걸 보면 한자로 비오생이라고 돼 있는데 초청장을 하나 얻어 달라고 하니까 하나 얻어줬어요.
환영회를 주최한 모임과 친분이 있었던 피치 박사를 통해 여운형은 초청장을 얻게 된 것이다. 중국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크레인 (상하이 칼튼 호텔 1918년 11월)이 등장, 그는 연설 내내 국제정세의 변화를 예견했다 특히 조만간 파리에서 열릴 강화회의를 강조했다.
크레인: 거기서는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피압박 민족에게 최적의 기회입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할 필요가 있고 전세계를 상대로 중국의 상황을 얘기해야 합니다.
파리강화회의, 1919년 1월~6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등 승전국의 대표들이 모여 전쟁에 대한 책임과 평화유지 등을 논의하기로 계획되었다. 이른바 파리강화회의, 특히 평화회의가 추구하는 민족자결주의는 여운형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더욱 부풀어 오르게 만들었다.
셰준메이: 크레인은 파리강화회의에 중국대표 파견문제를 상의하러 왔습니다. 당시 바로 저 부근 호텔에 투숙했거든요. 그때 이 근처 협화서국에서 일하던 여운형도 소식을 듣고 크레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상하이 칼튼 호텔 1918년 11월 27일), 여운형은 크레인에게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여운형: 한국민족 전체가 독립을 원한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도 강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냐 엄격하게 얘기하면 한국은 참석할 수 없죠. 그런데 윌슨의 특사는 사실 한국문제는 자기 머릿 속에 있지도 않고 그런데 한국청년이 찾아와서 한국문제를 다뤄줄 수 있겠느냐 하는데 안된다 이야기할 이유도 없고 아 그렇다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크레인: 물론 가능하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한국문제가 파리강화회의의 정식 의제가 될리는 장담할 수는 없소. 하지만 파리에 한국대표를 파견해서 청원하는 것은 문제될 게 없소. 그러니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지원하겠소.
여운형: 고맙습니다.
크레인: 천만에요.
훗날 여운형은 크레인과의 만남과 조언에 대한 감동을 털어놓았다.
000: 청년이 그 얘기를 듣고서 얼마나 감격을 했겠어요. 정말 우리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면 우리도 금방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그런 희망과 꿈을 가지게 되는 거죠.
이준식: 단 1퍼센트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000: 우리에게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면서도 전부 걸어보는 것, 이것이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에 전세계 식민지의 젊은 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었던 분위기였다는 것이죠.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1918년 11월 27일), 크레인은 3일 뒤에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이에 여운형은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사정을 알릴 청원서를 써서 크레인에게 전달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장덕수와 함께 진행했다.
정병준/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장덕수는 사실 와세다대학을 나온 수재였습니다. 굉장히 스마트한 인물이었고 글을 잘 썼습니다. 또한 일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일본과 국내 사정에 해박했습니다.
(1918년 11월 29일), 그들은 청원서와 편지를 이틀에 걸쳐 작성한다. 곧 바로 크레인에게 문서를 전달했지만 문서의 행방은 그동안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이 문서가 미국의 한 대학에서 백년만에 발견된다. 콜럼비아대학 도서관에는 희귀문서를 보관하는 곳이 따로 있다 (희귀필사문서 도서관), 한국의 역사학자 정병준 교수는 얼마전 이곳을 직접 방문해 여운형이 작성한 청원서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사서: 이게 23번 폴더예요. 이 상자 안에 바로 그 문서가 있습니다.
정병준: 여운형이 청원서를 건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청원서의 존재 자체를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거의 백년만에 콜럼비아대학 희귀필사문서처에서 그 문서를 열어서 보게 됐습니다. 색인에 여운형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여운형이 아니라 린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운형이 작성한 청원서 원본, 이틀만에 작성된 편지와 청원서에는 크레인에게 다급하게 전달해야 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타냐: 여운형이 윌슨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의도를 전달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때가 있는데 저는 바로 이 시점이 여운형이 크레인을 만나서 편지를 전달한 때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편지가 1918년 11월 29일에 쓰여진 거죠.
정병준: 1918년 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한국 독립에 대한 기대, 또한 우드로 윌슨에 대한 기대, 새로운 평화회의에 대한 기대가 묻어나는 그런 편지였다고 생각납니다. 굉장히 감격스러웠습니다.
청원서는 한국의 언론 출판 자유를 묵살하고, 무단통치로 폭력을 일삼고 있는 일본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윌슨 대통령의 주장에 대해 한국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홍윤기/동국대 철학과 교수: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도 그 자체가 굉장히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은 받는데 사실상 20세기 전체를 놓고 보면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은 정확히 짚었다고 봐요. 저는 그런 입장에서 청년 여운형이나 이런 분들의 정치적 사고나 판단에 있어서 일단 큰 대세를 놓치지 않았고,
그런데 이 편지 말미에는 여운형의 서명과 함께 재중국 신한청년당 이라는 조직 이름이 등장한다.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의 책에는 이 조직의 이름이 다급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강준식: 개인 자격은 안된다 이거예요 개인이 어떻게 공문서를 보낼 수가 있느냐 그런데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했는데 어떻게 공문서를 만들 수가 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왔다 갔다 하면서 들었던 상하이에서 만난 터키 청년이 있었는데 카말 파샤가 만든 터키 청년당이 터키를 근대화 하는데 일조하거든요. 그 생각이 나가지고 그럼 우리는 신한청년당이라고 하자.
신한청년당 이라는 당명은 이들이 상하이를 기반으로 교류한 터키 청년들을 통해 얻어낸 이름이었다.
정병준: 즉 신한청년당은 3.1운동이 발생하기 전에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대표를 파견하고 한국인들의 독립청원서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당입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1918년 12월), 청원서를 전달하고자 정당을 만든 젊은 그들은 이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를 정해야 했다. 얼마나 우리가 간절하게 또 어떤 이유로 독립을 원하는지 얼마나 그들을 잘 설득할 수 있느냐가 진짜 중요할 것이요 수많은 이들이 언급됐지만 여운형의 머리 속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여운형: 그렇다면 김규식 선생이야말로 최고의 적임자가 아니겠소?
정병준: 여운형은 승동교회 전도사였구요 평양신학을 다닌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김규식 역시 YMCA에서 활동하고 새문안교회 장로였습니다. 그러니 국내에서 두 사람이 기독교 전도사와 기독교 장로로 여러 번 만나고 서로 존재나 상대방을 알고 있는 관계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준식: 1917년에 중국지역에서 활동하는 14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대동단결 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하는데 그 대동단결선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김규식 선생이 상당한 정도의 위상 또는 명망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정도 인물이면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표로 활동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우사 김규식 1881년생/당시 38세).
유학자 엘리트 독립운동가 김규식, 그러나 그는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김수옥/우사 김규식 손녀: 이 사진은 저희 할아버지가 언더우두 박사한테 양자 비슷하게 계실 때 찍은 어렸을 때 사진이고요. (6살 무렵의 김규식), 일본 외교관계 상소로 귀양을 간 아버지와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겨우 6살에 고아가 된 그를, 선교사 언더우두가 발견한다.
000: 언더우두 선교사의 부인인 릴리어스 언더우두가 쓴 책에 보면 고아가 있다고 해서 갔더니 먹을 게 없어가지고 문창호지를 박박 긁으면서 그걸 씹고 있더라는 거예요.
선교사의 도움으로 그는 17세 무렵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준식: 앨리트 중에 엘리트죠 (로녹 대학에)입학하자 마자 워낙 성적이 좋아가지고 예과과정에 입학을 했는데 예과과정을 다안밟고 본과로 진학했다는 것도 유명하고요. 특히 뭐 어학성적은 요즘으로 치면 거의 A플러스에 가까운 아주 탁월한 성적을 거뒀고
김수옥: 옛날에는 진짜 영어 그렇게 하시는 분이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굉장히 많이 스카우트 하려고 했는데 그걸 다 뿌리치고 망명 가셔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중국으로 망명한 김규식은 1919년 1월 중국 난징에 있었다 (중국난징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추대된 그는 준비 중이던 결혼을 서둘러 진행한다. 상대는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의 김순애, (김순애 1889년생/당시 31세), 결혼식을 마치고 김규식과 김순애는 모두 신한청년당의 일원이 된다. 어쩌면 이 결혼은 독립운동을 위한 결합이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1919년 1월), 결혼식을 마친 뒤 곧 바로 상하이로 출발한 두 사람은 신한청년당에 합류해 파리에 갈 준비를 서두른다. 그러나 이들의 여정엔 많은 방해물이 있었다.
강준식: 김규식이 여권이 없거든요. 한국에서 도망 나왔기 때문에 일본 여권을 가져야 하는데 일본여권을 얻을 수가 없으니까 YMCA 중국인 인맥을 통해서 중국인 기자들을 알게 됩니다. 기자는 정치인하고 밀접하거든요. 늘 가서 취재도 하고 그러니까 그 기자가 소개를 해줘요. 여운형을 손문한테~,
손문(쑨원) 중국국민당 대표/1919년 당시: 신해혁명을 일으켰던 중국혁명의 지도자 손문, 여운형은 상하이 YMCA 시절 알게된 중국 혁명세력들과 교류하며 손문과도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이준식: 손문정부의 아마 도움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실제로 여권을 받을 때도 중국인으로 위조한 여권을 받을 때도 중국국민당 정부의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죠.
이게 김규식의 여권입니다. 정말이오? 그래서 손문도 혁명가이고 조선이 독립을 하겠다니까 도와주라고 자기 부하들을 시켜서 여권을 만들어주는 거죠.
여권은 김규식의 본명대신 중국인 이름 진중엔으로 위조 했다. 파리로 가는 기항지 마다 일본의 감시가 삼엄했기 때문이다 이제 여권은 해결됐다 다음은 배표가 문제였다(상하이 선박회사 1919년 1월), 여운형은 배편문제를 해결하고자 와이탄 항구의 선박회사를 찾았다. 이곳에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중국인 대표단의 한 여성을 만난다.
강준식: 정육수(쩡류 시우) 라고 파리 소르본대학 출신인데 중국여자예요. 그런데 광동정부의 불어통역이예요. 이 사람이 그분을 통해서 어렵게 배표를 구합니다.
정육수: 나에게 내 동료와 함께 미리 사둔 배표가 있소. 이것을 줄 테니 가져 가시오.
셰준 메이: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국가와 민족을 첫째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개인이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중국인들이 존경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의 그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1919년 1월), 모든 준비를 마친 김규식은 파리로 떠나기전 뜻밖의 제안을 한다.
김규식: 내가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은 내가 누군지 도무지 알지 못할 것이오. 김순애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외교활동에 힘을 실어줄 실질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김규식: 내가 파리에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해야만 합니다.
여운형: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외교활동과 대중시위, 외교활동과 독립선언을 결합시켜야 된다. 외교활동만으로 성과를 걷을 수 없다. 외교활동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이 독립을 원한다는 사실을 선언해야 되고 그냥 선언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줘야 된다. 그것이 독립선언과 대중시위죠.
000: 우리는 독립을 선언한다. 독립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전민족이 참가하는 선언이 필요하다. 왜? 민족자결주의에 맞추려면 그것을 유럽에서 들어주던 안들어주던 민족자결주의에 맞추려면 일단 우리 스스로 뜻을 분명히 내걸어야 한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1919년 1월), 김규식의 뜻에 따라 그리고 여운형의 주도로 단원들은 곧 바로 행동에 돌입한다. 이들이 국내 한국인들에게 전할 메시지는 두가지였다.
강준식: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야 되는데 활동하게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다 두가지가 제일 먼저 해결이 돼야겠다 그래서 일어나시오 돈을 거둡시다. 이 두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거예요.
당원들은 주도면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파 장덕수는 도쿄,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여운홍은 도쿄에 합류, 김순애와 사병호는 부산을 거쳐서 서울로, 선우혁은 북쪽으로 진입하여 평양, 여운형은 길림을 거쳐 연해주까지 긴 여정을 선택한다.
이준식: 그 배라는 게 여러 기항지를 거쳐서 가거든요. 경유해서 가는데 그 경유하는 것이 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들입니다. 근데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거죠. 왜냐하면 일본과 서구열강은 당시만 해도 한편이니까요. 그런데 그 불안과 초조의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우리에게는 독립의 희망이 있다는 믿음,
(히비야 공원 일본 도쿄), 일본 도쿄의 히비야 공원, 백년전 이곳에선 일본 유학생 5백여명이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독립선언 5일전인 2월 3일, 이 부근에 장덕수가 도착한다.
정병준: 장덕수가 일본에 파견되어서 도쿄에 가서 자신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동경 유학생들을 만나는게 제일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장덕수 심문조서에는 조소앙(조용운)을 만났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진술이었다고 생각이 들고요. 아마 자신이 접촉한 동경측 유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일본 도쿄 1919년 2월 3일), 도쿄 유학생 대표 최팔용과 만난 장덕수,
강준식: 장덕수가 여운형이 보내서 동경에 도착이 된 거예요. 도착이 돼서 최팔용이를 만나가지고 얘기를 하니까 우리도 청원서를 보내려는 얘기를 좀 하고 있다고 하니까 무슨 소리냐 지금 파리강화회의에 이미 우리 대표가 갔다 이겁니다.
장덕수: 이미 김규식 동지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금 파리로 향하고 있소.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건 김규식 동지가 꼭 성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을 실어줘야 하지 않갰소?
장덕수가 전달한 메시지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일본 유학생들의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필요하다는 것,
강준식: 그래서 서두르는 겁니다.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고 움직여야 되겠다 그래서 회합을 해가지고 독립선언을 이광수가 썼어요. 등사판으로 밀었어요. 밤새도록 밀어가지고 그거를 당시에 일본정부 일본국회, 일본 각신문사, 각 대사관 조선총독부에 쫙 뿌립니다.
(도쿄 YMCA 2019년 2월 8일), 2019년 2월 8일, 도쿄 한 복판에 태극기가 게양된다.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 재일본 한국 YMCA에서 열린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 행사, 2.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 이전 개관식, 100년전 일본 제국주의 심장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의 기록을 보관해 왔던 자료실이 자리를 옮겨 새롭게 정비된 것을 축하하는 것으로 행사가 시작됐다. 이 자리에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연구하는 오노 교수도 함께 했다.
오노 야스테루/규슈대 조선사 연구실 연구교수: 장덕수는 2월 3일에 일본에 도착하여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도 만났는데 이는 2.8독립선언 계획의 진행상황을 확인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특사파견에 관한 소식이 2.8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춘원 이광수 (1892년생/당시 28세) 또한 신한청년당 당원이었다. 그가 쓴 선언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아시아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언급했다.
000: 선언서 중 이 부분에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선진국을 본받아 신국가를 만들게 되면 세계 평화에도 공헌할 수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2.8 독립선언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원칙을 조선에도 적용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는데요. 만약 조선이 독립을 하고 민주주의 국가를 운영하게 되면 전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민주주의 확대에 공헌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기념식의 하일라이트는 선언문 낭독이었다.
박승훈/재일한국유학생 연합회: 오늘 영광스럽게 낭독문을 읽게 돼서 많이 긴장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2.8 독립선언서
전조선청년 독립단은 아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일본이 만일 오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오족은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
강준식: 간다에 있는 YMCA, 그 곳에서 유학생들이 낭독을 하고 대부분은 다 잡혀가죠 또 일본 경찰이 가만놔두지 않으니까 그중에 일부는 그렇게 잡혀갈 걸 미리 알고 빠져나와서 국내에 전파를 하러가요.
(평안북도 평양 1919년 2월), 연변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간 신한청년당원
000: 선우혁이라고 하는 분이 평안북도 출신의 기독교계 인물인데 이분도 신한청년당 대표로서 북쪽으로 들어와서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게 되고 이번에 윌슨의 특사가 다녀갔는데 이렇다 이렇게 우리가 준비를 한다. 일어나야 합니다. 자금도 모아야 합니다. 그렇게 두차례나 들어와서 선언서를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진행을 하게 되는 것이죠.
(경상남도 부산 1919년 2월), 국내에 당도한 또 다른 신한청년당원, 김순애와 서병호가 부산에서 거액의 독립자금을 받은 후 대구와 서울에 도착해 김규식 대표 파견 소식을 전한다. 김철은 천도교 인사들을 만났고 여운형은 연해주에서 교포들에게 거액의 독립성금을 받는다.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파리),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베르사유 궁전, 이곳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이장규 박사가 강화회의 현장을 찾았다.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약 일년여 동안 벌어졌는데요.
이장규/파리7대학 한국학연구 교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내걸었던 14개 조항, 그러니까 민족자결주의에 크게 동의했죠. 전세계 피압박민족의 지도자들은 그래서 한국에서도 신한청년당을 조직해서 김규식 박사가 파리로 오게 되지 않습니까
회의장을 드나들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
아마 저 바깥까지 왔을 것 같아요. 여기는 군인들이 사열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규식 박사가 애석하게도 여기 군인들이 있고 해서 이 바깥에서 멀리서 보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3월 13일에 프랑스에 도착한 김규식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회의장에 전달할 메시지를 작성할 공간이었다.
(샤토당 38번지 프랑스 파리), 한국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프랑스 부부의 도움으로 파리시내 한 복판에 거처를 마련하게 됐다.
이장규: 그래서 이제 한국통신국을 여기에 설치했죠. 자료에 보면 항상 문 앞에서 타이핑 소리가 울려퍼졌다 라고 하는 거보면 모든 홍보물들이 여기서 다 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번역을 지원해준 프랑스인의 지원으로 프랑스 정부관리와 각국 대표단에게 보낼 청원서와 편지를 작성하는 김규식,
파리 7대학 프랑스 파리, 파리 7대학에는 이곳에서 활동한 신한청년당원들의 수많은 기록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한불역사학회<리베르타스> 이장규 박사가 속해 있는 한불역사학회의 리베르타스, 이들은 최근 김규식에 대한 새로운 흔적과 자료들을 발굴했다. 특히 이들이 집중하는 것은 프랑스 언론이 다룬 김규식에 대한 기록이다.
마리오랑쥬 리베라싼/파리7대학 한국학과 교수: 1919년 초순에서 중순까지는 아주 특별한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 언론에서는 너무나도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많이 다루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김규식은 세번이나 언급되었습니다.
이들이 처음 발굴한 기사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망언에 관한 것이었다. 1919년 4월 가토 자작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을 비하했다. 그런데 이 망언을 비판한 기사를 쓴 사람이 뜻밖에도 프랑스 언론인 르베르 브뤼셀, 그는 신한청년당의 파리활동을 눈여겨 보고 김규식을 지지하고 있었다.
마리오랑쥬: 브뤼셀은 정치적인 글이 아니라 일본측 입장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그 당시 일본의 주장은 한국이 독립하면 안된다는 거였죠. 김규식은 이를 계기로 그 신문사에 편지를 보냅니다. 약간 가벼운 비평 톤이었고 김규식의 글로 인해 일부에서는 한국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게 됐습니다. 어찌보면 그런 기자들이 김규식을 도와 한국에 대해 얘기할 기회를 준 것이죠.
(브뤼셀에게 쓴 편지 1919년 5월 19일), 이를 계기로 김규식은 브뤼셀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우리의 독립요구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브뤼셀 국장이 보내준 지지편지는 우리에게 소중한 격려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민들도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주권을 회복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처럼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얻어내 행사할 수 있을까요?
이 편지는 前프랑스 교육부 수석장학관 크사비에 시종이 우연히 고서점에서 발견했다. 그는 최근 편지의 원본을 한국 외교사료관에 기증했다.
크사비에 시종/前프랑스 교육부 수석장학관: 당시 한국의 상황이 아주 어려웠음에도 김규식은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고 주장했던 점에 대해 감동 받았습니다.
하지만 강화회의가 진행될수록 열강들은 약소국을 외면하기 시작했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주장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전상숙/광운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회의장 근처에서 서성이는 거예요. 누구라도 만나려고 마주치면 가서 얘기하고 전해달라고 부탁하려고 그런데 그것도 안받아갔다는 거잖아요.
이준식: 대표 자격을 인정해 달라고 계속 편지를 쓰죠.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주로 대통령 또는 수상 앞으로 편지를 열심히 써서 보냈는데 그러면 주로 비서들이 답장을 보냅니다.
답장 내용이 거의 천편일률적인데요. 당신의 편지는 잘 받았다. 그걸로 끝이에요.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파리), 회의는 막바지에 다달았다. 거울의 방, 베르사유 궁전, 회의 결과문이 작성된 장소는 궁전의 2층에 있는 거울의 방, 지금은 관광객들만 가득한 곳이다.
이장규: 벽면에 이제 27개국 정상들이 앉아서 서명을 했던 장소가 바로 이쪽이고 나머지는 초청받은 정부 관료들이나 내외신 기자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꽉 차 있었습니다.
(파리강화회의 종료 1919년 6월 28일), 회의결과는 애초부터 승전국들의 잔치였음을 확인해 줄 뿐이었다.
이준식: 생각해 보면 열강 입장에서는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을 독립시키면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도 독립시켜야 되고요.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도 독립시켜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본과 영국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거죠. 그러니까 한국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요.
김규식이 파리를 떠나던 날의 기사, 기사에 담긴 그의 연설 내용을 보면 그가 프랑스 정부의 이중성을 통렬하게 비판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오랑쥬 리베라싼: 한국에서 무자비하고 극단적인 통치방식을 통해 유지되고 있는 일본의 행태를 상기시키면서 프랑스 외교통상부 즉 프랑스 외무부의 정치적 태도를 비판한 겁니다. 그건 자유, 평등, 박애 라는 프랑스가 추구하는 이상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죠. 동시에 프랑스가 소유한 식민지 베트남 문제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죠.
(빌라 데 고베용 프랑스 파리), 파리 시내에 한 빌라에는 김규식이 1919년 3월부터 8월까지 단 5개월 동안 수십번의 문서와 수백건의 기사를 만들어내는 활동을 지켜보던 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바로 베트남의 청년 독립운동가 호치민, 호치민(응위엔 신 꿍 베트남 독립운동가/당시 30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하고자 그 또한 파리를 찾아와 활동하고 있었다.
마리오 랑쥬: 두번째로 발견한 기사는 김규식과 호치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시기에 파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절친한 관계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선 경찰의 기록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파리에 체류했던 호치민의 일거수일투족이 담겨있는 프랑스 경찰의 사찰보고서, 이 문서가 최근 발견된 것은 리베르타스의 연구자들의 연구 덕분이었다.
마리오랑쥬: 경찰자료에는 호치민과 김규식의 만남에 대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자료에서 한자로 기록되어 있기까지 한 김규식의 이름을 발견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보고서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이 호치민의 활동의 근거가 됐고 나아가 호치민은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리오랑쥬: 김규식과 호치민 중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관심분야가 같았고 서로 많은 것들을 주고 받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쨌든 3.1독립선언이 먼저 일어났고 이 사건이 호치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파리에서 활동했던 김규식은 3.1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준식: 3월1일날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김규식 선생은 한 달이 더 지난 다음에 그 소식을 듣거든요.
프랑스 여비서: 뭐가 잘못됐나요?
김규식: 이게 상하이에서 온게 맞나요?
비서: 예, 상하이 맞아요.
이준식: 그 당시 통신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렇게 쉽게 연락을 주고 받지는 못했을 것 같고요.
상하이에서 출발하기전 자신이 제안한 독립선언이 그대로 실행됐다. 신한청년당원들이 일본과 한반도에 전달한 메시지는 한국민중들의 외침이 돼 결국 파리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부영: 김규식 선생은 이미 이름이 많이 난 분이에요. 그분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됐다는게 이게 청천벽력 같은 엄청난 소식이라고요. 그래서 3월 1일, 독립운동의 충분한 불쏘시개가 생긴 거예요.
신한청년단이 1918년 12월에 기획한 독립시위가 단 3개월만에 실현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상해에서 남경, 파리, 사천, 광동, 광서에서 3.1절을 맞을때 마다 명년에는 한성에서 이 날을 맞이하자 하였소이다. 지금은 소원성취를 하였습니다마는 내 흙을 밟고 서게 되었습니다마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소이다. 나 조소앙은 여러분께 맹세합니다. 우리나라를 독립국으로 하오리다. 우리 도포로 하여금 자유민이 되게 하오리다. 대한독립 만세! 임시정부 만세!
신한청년당 당원 조소앙 해방후 첫 3.1절 기념식 기념연설
(KBS 3.1운동 100주년 특집-“신한청년단의 젊은 그들”에서 정리)
① 1918.11.11.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식민지 국가들은 희망을 갖게 됐다. 특히 한국은 일제의 무자비한 무단통치로 더 윌슨을 지지했다. 바로 이때 윌슨 대통령의 크레인 특사가 상하이를 찾아온다. 이때 조선의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상하이에 있었다.
② 1918.11.27. 크레인 특사는 파리강화회의에 중국대표 파견문제 상의차 왔다. 여운형은 크레인을 만나, 전체 한국민족 독립 원한다. 한국도 강화회의 참석 가능하냐, 크레인 대답: 장담할 순 없지만 참석 가능하다, 한국대표 독립 청원 문제될 게 없다, 도울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돕겠다.
③ 크레인 떠나기前, 여운형 장덕수와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 청원서 크레인에게 전달, 편지 말미 여운형 서명과 재중국 신한청년당 이름 등장,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 한국인 대표 파견 독립청원서 전달 위해 급히 만들어진 정당, 1918년 12월, 여운형 파리 대표로 김규식 결정,
④ 1919년 1월, 김규식 떠나기前 제안, 내가 파리에 파견되는데 서구인들은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파리에서 일제 학정 폭로하고 선전하는 것 인정받기 위해서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선언 해야, 외교활동 성과 거두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의 독립선언과 대중시위 절대 필요,
⑤ 김규식의 뜻과 여운형 주도 단원들 바로 행동 돌입, 국내에 전할 메시지는 두가지, 파리 대표 활동자금과 국내외 독립선언 후 시위, 두가지 한꺼번에, 일본 유학파 장덕수 도쿄, 미국 유학 여운홍 도쿄, 김순애와 서병호 부산 거쳐 서울, 선우혁 북쪽진입 평양, 여운형 길림 거쳐 연해주,
⑥ 1919. 2. 1, 김규식 파리행 배에 올랐고, 2월3일 장덕수 일본 도쿄에 도착, 유학생 대표 최팔용 접촉,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참석 위해 파리 향하고 있다. 이 시점 김규식 활동 성공하도록 우리가 힘을 실어줘야, 그건 일본 유학생들 독립선언과 대대적인 시위가 필요하다는 것,
⑦ 이광수 도쿄 2.8독립선언서 작성,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조선에 적용해 줄 것 요구, 조선이 독립하고 민주주의 국가를 운영하면 전체 아시아 국가에 대한 민주주의 확대에 공헌,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신국가를 만들면 세계 평화에도 공헌,
⑧ 1919. 3. 13. 김규식 프랑스 도착, 파리시내 거처, 한국통신국 설치, 회의장 메시지와 홍보물 제작, 파리위원부에 3월 이관용, 6월 조소앙과 황기환, 7월 여운홍 합류, 함께 청원서와 한국의 상황 담긴 홍보물 제작, 파리강화회의 참석 대통령과 수상들 만나기 위해 쉴새없이 돌아다님,
⑨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 다양한 방면에서 조선 지배가 얼마나 야만적인고 가혹한지 설명,그것에 맞서 한국인들 오랜 독립의 역사를 가져 왔고 역사적 문화적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주장하고 호소,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 전달,
⑩ 1919.3.1 서울 독립선언과 만세시위 김규식 한 달이 지난 다음에 소식들음, 상하이 출발전 자신이 제안한 독립선언 그대로 실행, 신한청년당원들 일본과 한반도에 전달한 메시지 한국민중들의 외침이 돼 파리까지 도달, 신한청년단 1918년 12월에 기획한 독립시위가 단 3개월만에 실현,
⑪ 여운형이 윌슨에게 쓴 독립청원서 일제 한국의 언론 출판 자유 묵살, 무단통치로 조선인 무자비한 사살분노고통, 일본 신랄하게 비판, 윌슨 대통령에 주장 한국 필히 포함되어야, 1918년 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한국 독립기대, 민족자결주의, 새로운 세계평화회의를 기대하는 편지,
⑫ 조선인 청원서 채택될 수 없는 이유, 일본 식민지 한국 독립시, 영국 식민지 인도와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도 독립시켜야, 그런 의미에서 일본과 영국 프랑스 이해관계 일치, 한국 주장과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회의는 애초부터 승전국의 잔치, 파리강화회의 종료 1919년 6월 28일,
⑬ 1919년 3.1운동 대폭발은 별 볼 일없는 신한청년당 청년들이었지만 3.1운동이 끝나고 임시정부수립후 독립운동 중요한 청년지도자, 한국역사에 독립운동가로--여운형 임시정부 외무부차장, 김규식 임시정부 외무총장, 조동호 임시정부 국무위원, 선우혁 임시정부 교통과장, 김철 임시정부 재무위원, 조소앙 임시정부 외무부장, 이광수 임시정부 공보국장, 서병호 임시정부 내무위원--신한청년당 1922년 12월 스스로 당 해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추적 역활 담당,
⑭ 1918.11.29 여운형이 크레인에게 전달한 편지와 독립청원서 문서 행방 그동안 알 수 없었다. 2018년 최근에 한국의 역사학자 정병준 교수 미국 뉴욕주 콜럼비아대학 도서관 직접 방문, 대학도서관 희귀문서 보관소에서 백년 전에 여운형이 작성한 청원서를 찾아내는데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