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참진실의 진리를 가리는 것이 목적이니, 이 세상에 바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답 없는 세상만을 쫓으면 종국에는 망하는 길 밖에 없다.>>
생로병사의 고통과 번뇌의 삶을 떠나 완전히 평화로운 마음과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고져 깨달음의 마음 공부를 하게 됩니다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못하고 그냥 편히 살다 가겠다 말합니다.
이런 생각 저변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죽으면 끝인데 뭐하러 쓸데없이 그런 공부하냔 생각이 지배적이겠지요.
맞습니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면, 남들이야 어떻든 돈이나 많이 벌고 가족들과 인생을 즐기기나 하면서 편히 살다 죽는 게 최고인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 생각과 욕심대로 살아간다고 행복해지도록 호락호락하게 꾸며진 것이 절대 아니며, 더욱이 늙고 병들어 아픈 몸과, 죽음까지 수용하면서 고통 없이 끝까지 평화롭게 살아갈 자신이 있는 사람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냥 막연한 희망과 걱정만 지닌채 참진실은 묻어놓고 대비없이 살아가는 것이지만, 또한 죽는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고통 없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 세상과 사람의 참정체를 이해하고, 그에 따른 부수적인 노력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왜 태어나고 죽어야 하는지, 살면서 왜 마음은 항시 기쁘고 평화롭지 못한지 등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행복은 영영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우주, 이 세상이 무엇인지 그 진실을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박하거나 정신병자 취급까지 할테지만, 믿지 못하게도 이 몸과 이 세상은 존재치 않는 하나의 꿈같은 환영입니다.
지금 우리 몸 마음의 원천인 에고마음의 농간에 의해 이런 몸의 오감으로만 지각되는 허상의 세상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색즉시공인 것이지요.
우리는 신과 하나인 완전무결한 통합된 세상에서 영으로 살아가다가 잠깐의 허툰 생각, 즉 '아버지 신으로부터 분리를 해보면 어떨까?'했던 마음이 확장되면서 이로 인해 신이 벌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그 두려움을 덜어내기 위해 결국 신을 떠난 것처럼 시간과 공간으로 분리된 이 세상을 만들고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완전한 하나의 세상에서 또다른 실재적 세상을 만들 수 없기에 가짜인 유한한, 즉 소멸되어야 끝나는 환각의 세상을 만들고 몸을 만들어 몸이 나인 양 착각해 도망나와 있는 듯한 세상이 된 것이죠.
이렇게 꾸며진 세상을 사람들이 기억 못하는 이유는, 기억을 하게되면 이 환영의 세상이 유지될 수 없기에 몸이 태어난 듯 보일 때 그 전의 모든 기억을 감추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이 진실이라 믿고 밖에서 돈, 성공, 이성, 권력 등을 찾아 헤매도록 꾸며진 것이죠.
답없는 이 세상에 계속 헤매며 찾도록 꾸며야 이 에고 세상이 계속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평화 없는 갈등과 불만족 등이 지속되어야 이 환영의 세상을 유지시킬 수 있기에, 나는 잘못이 없고 남에게 잘못이 있는 듯 다른 사람에게 투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서로 비난하고 공격하는 형태로 꾸며져 있는 것이기에, 세상의 참정체를 모르고 사람이 태어난대로의 생각만으로 살아서는 번뇌와 고통 등은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에고의 농간으로 마음 안에 있는것을 밖에다 만들어 놓고 그것이 실재인 양 밖에서만 찾아 헤매는 것으로, 잠깐 잠깐의 성공과 즐거움 외에 긴 갈등 속에 살아가다 끝을 맺게 되어 있는 것이죠.
이같은 근본적 두려움이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어, 사람들은 좋거나 기쁜 순간에도 뭔가모를 덧없음과 근심, 불안, 걱정, 압박감, 무기력감, 우울한 느낌 등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평화스럽다면 감춰진 본래의 성품이 탄로나기에, 계속 번뇌 등을 느껴야 몸이 나라는 것에 의심을 두지 못하게 되면서 이 환상의 에고 세상이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러한 세상의 진실을 이해하는 것은, 삶에서 행복과 불행을 좌지우지 하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결국 삶이란 것은 잘 때 꾸는 꿈과 비슷하여, 내가 꾸는 꿈이기에 세상은 상대적 객관이 아니라 완전 주관적입니다.
마치 내가 악몽의 영화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주인공이 돼서 살아가고 있는데, 내가 이 영화의 제작자란 것을 잊은 것이지요.
태어나기 전에 영계에서 이번생 용서의 숙제로 모두 서로 합의하에 역할분담을 했다는 것입니다.
삶은 한편의 드라마라고들 하듯이요.
그래서 사람들과 세상이, 그리고 몸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 모든 것은 본래의 내가 그렇게 꾸며 놓았단 사실로, 모든 인생은 자업자득, 인과응보, 자승자박입니다.
이런 세상 돌아가는 근본적 이치를 이해하고 그에 따른 마음 공부를 할 때, 마음에 힘이 생기면서 삶이 긍정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리에 통달하는 만큼, 부수적으로 삶은 두려움 없이 점점 평화로워지고, 부유하고 행복해지며, 자유롭고 몸은 건강해지고, 매사 마음 먹은대로 서서히 삶이 개선되어짐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무한한 본성이 조금씩 드러나기 때문이죠.
예수가 죽은지 3일 만에 부활했다는 뜻이 바로 이런 것으로, 완전한 깨달음은 마음으로 다시 몸도 만들어내고 모든 세상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전지하고 전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은 밖에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마음, 진리안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보이는 보든 세상은 마음으로 만들어졌고, 그 마음으로 유지되는 환영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세상이 사실이란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밖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런 힘든 삶 때문에 종교에 의지하려는 경향성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가르침이 많아서 오히려 삶에 해가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종교란 의지하고 믿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성현들의 말씀을 교훈삼아 우리도 그 길을 따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또한 인문, 철학도 사람의 무의식적 마음까지 정리해 주지는 못하기에 행복의 끝에 다다를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깨달음 공부를 해야 현생을 살면서도 평화롭고 행복하지만, 깨달음 공부는 죽은 후까지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또한 절대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죽게 되면, 마음은 이번생에서의 배움을 모조리 가지고 영계로 옮겨가 살다가 다시 몸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는데, 이때 이번생에서의 배움을 기반으로 하여 태어나게 됩니다.
세상적 성공의 배움이 아니라 진리의 이해와 실천, 즉 세상을 이해하는 의식의 진화와, 그 이해를 바탕으로 판단치 아니하고 용서하여 비우는 마음 상태를 반영해 내생에 다시 환생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하게 되면, 현생에 공부를 완전히 끝내지 못하더래도 높아진 의식을 바탕으로 다음 공부를 향한 조건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이런 환생 시스템은 결국 마음공부를 완전히 마칠때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는데, 몸의 삶들 이라는 게 모두 그렇게 꾸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미래의 어느 생에서부터는 이 고통의 세상은 답이 없음을 인지하고, 세상에 대한 마음을 비우는 공부를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스스로 만든 에고의 숙제가 그리 가혹합니다만, 더이상 고통을 연장시킬 필요 없이 평화와 행복으로 직행하는 것이 깨달음의 마음 공부이기에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질적 차원에서 보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깨달음 공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치 또한 성립되죠.
고통의 원인인 에고마음의 자아개념이 소멸될 때 깨달음 공부가 끝나며, 이 때 하늘의 보화인 본성의 기억이 올라와 천국, 불국토에 거듭나 지극한 행복속에 영생하게 된다고 합니다.
내 마음을 포기해서 참 마음의 세상과 하늘을 얻는 것으로, 이것이 참나의 신의 자녀, 영으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허나 이런 진리의 공부를 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로 아주 좁은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파멸로 향하는 문은 넓어서 들어가는 이가 많고, 생명으로 향하는 문은 좁아서 들어가는 이가 적기 때문이죠.
세상과 자기 생각들에 속지말고 악몽에서 깨어나려 노력해야 행복합니다.
대부분 삶이 비참하게 끝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세상엔 없습니다.
밖에는 절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돈과 이성과 명예와 권력 등 사회적 성공들, 그것들이 행복하게 해줄 것 같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깊이 들여다 보질 못합니다.
죽음이 정확히 뭔지만 알아도 훨씬 두려움 없이 살 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두는 가짜이지만, 우리 모두는 완전한 하나의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것이니, 그걸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답도 없는 믿지는 장사하며 살지 말고, 영원히 무궁무진하게 남는 사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 평화와 행복을 바란다면, 가짜나를 버리고 참나를 찾는 이 길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
[마음공부의 간단한 예]
<이 우주, 이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본질의 핵심인 마음을 정리하고 비워서, 자기 마음속에 감춰진 참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깨달음 공부, 마음 공부, 진리 공부, 도 공부입니다.>
엄청 큰 거울이 내 앞에 있고, 이 거울이 신과 하나인 우리의 본래성품이라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의 본성의 거울은 영원한 평화와 행복이요, 전지전능입니다.
이 축복의 거울은 나도 비추고 실재세상을 환히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세상을 환히 비추기에 아무 고통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본래의 영적 세상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거울이 에고의 마음으로 인해 이 세상에 몸으로 투영돼 나올때부터 오염되기 시작해, 사람의 이기심, 시비분별의 판단심, 두려움, 증오, 슬픔, 기타 오욕칠정 등으로 마음의 때가 잔뜩 끼어 있게 된 것입니다.
완전히 때가 끼어 있으니 거울의 본래기능을 상실해 나와 세상을 비춰주지 못합니다.
빛이 없어 진실을 모르니 삶이 오리무중이 돼 헤매기만 합니다.
상실, 소멸 등 고통만 겪습니다.
자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요?
답은 이 거울의 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도공부, 깨달음공부, 마음수행 등등이 이 거울의 때를 닦아내는 방법입니다.
세상의 참정체를 이해해 사람들을 이기심 버리고 이타심으로 배려하며 살아가고, 모든 것을 용서하며 분리적 판단을 하지 않고, 사람을 몸이 아닌 영적 사랑으로 대하며 헛것의 환영 지각의 세상을 모두 비우는 것들이 때를 벗겨내는 하나 하나의 공부 과정입니다.
그래서 닦아 나갈수록 거울이 잘 보이게 되면서 삶은 점차 평화롭고 행복하게 변해가게 되지요.
그러다 다 닦이면 그냥 투명하게 거울에 비친 나와 세상이 하나가 되어 신의 빛으로 전능하게 세상을 살아가다가, 육신의 쓰임이 다하면 몸을 조용히 내려 놓고 신과 합일해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 마음속에 있는 참진실과 연결되어 드러난 것이 신과 하나이자 신의 확장인 것으로, 그리스도, 부처, 참나, 영 등등으로 불리우며, 이렇게 된 것을 거듭남, 구원, 해탈, 성불 등으로 불리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