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식증 /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송하연
거식증은 자주 우리에게 ‘먼 존재’로 다루어진다. 마르고 싶은 사춘기 청소년이 되었다가, 배부른 소리 하는 젊은이들이 되었다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된다. 사실 거식증자들에게도 스스로는 알기 힘든 먼 존재나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지하실에 가둬두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텐데, 나한테는 그게 ‘거식증에 걸린 나’였다. 인생에서 가장 꼴 보기 싫은 글도 그 시기에 화를 못 이기고 쓴 글이다. 지우기는 찝찝하고 읽기는 소스라치게 싫어서 몇 년간 그 글을 방치하고 살았다. 앞으로 다시는 꺼내볼 생각이 없었는데, 발제문이 너무 안 써졌다. 뭐가 중요한지 요약하는 건 물론이고 책을 이해하는 것부터 어려웠다. 거식증은 너무 옛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기까지 했다. 결국 발제문을 쓰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이 내용을 가장 잘 이해할 만한 그 시절의 나를 석방했다.
과거에 썼던 글을 읽으니 꼭 내가 과거의 나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내가 책 내용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내가 적었던 ‘아무거나 입에 집어넣고 싶다가도 끝까지 굶고 싶은 상태’라는 말을 보고서 충동이 상호전환될 수 있는 구조를 가졌다는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글에서 나는 혼자 묻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에 이렇게 굶주린 거지? 왜 배가 부르지 않은 거지? 왜 먹어도 먹어도 행복하고 지옥 같고 기분이 오락가락하지?’(문장구조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냥 그때 적었던 그대로 썼다.)
거식증자는 왜 이렇게 극단적일까: 일어문적인 무의식 구조
행복하고 지옥 같다는 이상한 말처럼, 거식증자들은 극단적이다. 본문 사례 속 그녀가 꼼꼼한 식단 계획이 틀어지자 순식간에 5일 치 칼로리를 먹어치우는 장면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거식증자들의 세계에는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으면 안 되는 음식’, ‘망한 하루’와 ‘완벽한 하루’가 나뉘어져있다.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날은 완전히 망한 하루가 된다. 내일 다시 완벽하게 살아야 하니 이왕 망한 김에 먹고 싶은 건 먹고 가자며 폭주한다. 계획이 틀어지면 다른 대안을 고안해내면 되는데, 거식증자들은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들에게는 단 하나의 기표만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일어문). 이 상태에서 만약 기표 간의 틈이 드러나게 되면, 주체는 견디지 못하고 압도적인 주이상스에 빠져든다.
거식증자는 왜 증상을 놓지 못할까: 그들만의 ‘해결책’
완벽한 통제는 불안에서부터 기인하는 것 같다. 이미 ‘굶고 싶으면서도 먹고 싶은’ 미묘하고도 위태로운 상태인데, 기표 간의 틈이 생기며 통제에 금이 가버리면 아래에 깔아놓은 불안이 해일처럼 밀려들지 않을까? 사례 속 그녀는 그 틈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폭식이라는 주이상스에 의지한다. 폭식삽화란 일어문적인 무의식구조를 지닌 그녀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기표 간의 틈을 메우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주체는 자신이 힘들여 고안해낸 증상-해결책을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경구처럼 주체는 증상을 사랑한다. 증상을 섣불리 완화시키거나 제거하려 하는 것은 더 강한 저항을 불러온다. 증상의 구조를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증상을 해체할 수 있다.
거식증자는 왜 아무리 먹어도(욕망해도) 배가 부르지 않을까: 히스테리적 욕망
어머니가 모든 욕구를 척척 해소시켜줄 때, 아이는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유지하려는 히스테리적 욕망을 갖게 된다. 결핍으로부터 생겨나는 욕망을 되찾기 위해, 아이는 필사적으로 결핍의 공간을 수호한다. 거식증 주체는 음식을 거부하는 한편 욕망을 구성하는 기표(철저한 식단, 계산된 칼로리, 변화하는 체중 등)를 먹는다. 결핍을 유지하는 것이 곧 그들이 욕망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거식증자는 어머니라는 자애로운 타자의 위협적인 배려를 거부한다. 무를 먹으면서도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효능감을 느끼는 건 그들 나름의 독립하려는 시도였을까? 처음에는 이들이 왜 다른 방식으로 욕망을 구성하지 않는지 궁금했지만, 나름대로 압도적인 어머니 앞에 ‘전면 거부’를 함으로써 저항하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거식증자들을 굶주리게 할까: 셀카와 먹방
거식증과 이미지는 떼어놓을 수 없다. 거식증자들은 다이어트를 위해 노력하는, 혹은 매력적인 자기 이미지에 매혹당하게 된다. 사람들이 칭찬하고 부러워할수록 점점 더 자신의 셀카에 매료된다. 이렇게 되면 증상을 포기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행복하고 지옥 같고 오락가락한’ 그들의 기분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미 남들의 시선에 비치는 매력적인 내 이미지에서 깊은 쾌감과 실존적 의미까지 느끼는 상황이다. 뒤에서는 언제나 그보다 더 큰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미친 듯이 고군분투해야 한다. 그렇잖아도 결핍을 느끼며 욕망을 유지하는 사람들인데 이제는 남들의 시선에서 완벽한 자신의 모습을 욕망하다니.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쓰다 보니까 굶주릴 것 같긴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식증과 또 함께 따라붙는 것이 먹방이다. 요즘은 다이어터들도 대리만족을 위해 먹방 영상을 자주 본다. 대리만족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별로 먹을 생각 없던 음식도 먹방 영상을 보면 갑자기 먹고 싶어지는 경우가 많다. 당장 저 음식만 먹으면 행복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것이 거식증자의 욕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거식증자들은 ‘살만 빼면,’ ‘다른 무엇만 하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 믿는다. 그러나 그 조건들은 끝이 없다. 욕망은 충족될 새 없이 연쇄적으로 다른 조건을 만들어낸다. 이런 끝없는 레이스를 대체 왜 하는가 고민해 볼 때, 여자들 같은 경우 대체로 그것을 인정욕구와 증명의 차원으로 연결시키며 빠져드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면 방식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그걸 왜 남에게 증명하고 싶어했을까? 정작 본인은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전대미문의 기표: “원래 별로 없다. 예정대로 되는 일 … 일정대로 흘러가는 일은.”
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거식증에 있어 전대미문까지 붙을 말이냐고 한바탕 글을 썼다가 지웠다. 저자는 ‘보잘 것 없는/하나의 기표’로 이루어진 말하기, 사소하지만 그녀의 환상을 전복시킬 만큼 결코 사소하지 않은 효과를 지닌 그 말하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증상의 응결을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식단을 어겼을 때 폭주하던 시기를 이미 지나와서 그런지 나는 저 기표가 그닥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글을 쓰고 보니, 그렇다면 내가 내 환상을 깨는 또 다른 전대미문의 기표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왜 나를 남에게 증명하고 싶어 하는지 되물었던 것처럼. 사실 아직 기표가 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모든 걸 깨부수는 전대미문의 슈퍼 기표는 더더욱 의미심장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시청자의 말에 마음속 파문을 느낀 사례 속 그녀처럼, 나 역시 글을 쓰다 비슷한 파문을 느낀 것 같긴 하다. 쓰다 보니 내 안에 공고하게 자리 잡은 환상이 갑자기 터무니없이 우습게 보였으니까.
첫댓글 경험을 토대로 거식증에 대한 세밀한 송하연님만의 발제문 놀랍습니다. 책 내용과 함께 잘 정리되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서 이제서야 답글을 다네요. 글 꼼꼼히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