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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 연보
1491년(성종 22) 1세 3월 父 삼괴당 신종호(三槐堂 申從濩, 1456~1497) 36세 때 母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 4남 2녀 중 4째 아들로 출생
1497년(연산 3) 7세 3.14 父 사망
1502년(연산 8) 13세 祖母 淸州韓氏 사망
1507년(중종 2) 17세 큰형 고원위 신항(高原尉 申沆, 1477~1507) 사망
1533년(중종 8) 23세 8.20 진사시 장원급제
1519년(중종 14) 29세 4.13 현량과(賢良科)에 급제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제수
-6.2 기사관(記事官)의 직을 수행
-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남
-12.7 한림(翰林,예문관(藝文館) 검열)의 직을 수행
※ 현량과(賢良科) ; 1519년(중종 14) 천거제에 의거하여 실시하던 충원시험
※ 검열(檢閱) : 예문관에서 사초(史草)를 꾸민 정9품 벼슬
※ 한림(翰林) : 조선 때, ‘예문관(藝文館) 검열’의 별칭.
※ 賢良科가 파방(罷榜)되자 靈川子가 시를 지음
紅牌已收白牌失 홍패이수백패실 홍패는 회수되고 백패도 잃었으니
翰林進士摠虛名 한림진사총허명 한림과 진사가 모두 허명이로다
從此峨嵯山下老 종차아차산하노 이제부터 아차산에서 늙어가리라
山人二字孰能爭 산인이자숙능쟁 산인이란 두 글자야 어느 누가 시비하랴
※ 파방 (罷榜)-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하던 일.
1520(중종 15) 30세 3월 길 가던 중 생일을 맞이함(道中値吾生辰 도중치오생신 )
1521년(중종 16) 31세 10월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남
10.21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에 유배되다.
※ 유배지에서 17년 동안 시문집 관산록(冠山錄, 고령세고속편)을 짓고 노진(盧禛), 백광홍(白光弘), 김윤(金胤), 임분(林賁) 등을 가르치다.
1522년(중종 17) 32세 1.28 의금부의 “은동에게 시를 지어 주며 이별하다(贈別銀同증별은동)” 시를 지음
7.2 “큰비를 만나다(大雨)”시를 지음
-양팽손(梁彭孫)이 유배지 장흥을 방문하다.
1523년(중종 18) 33세 귀양지 장흥에서 “팔월 보름밤에 비로 인해 달을 보지 못해 드디어 장문을 써서 울회를 서술하다(야이우불견월수서장운이서울회,夜以雨不見月遂書長韻以敍鬱懷)” 시 지음
1537년(중종 32) 47세 겨울에 長興都護府에서 양주(楊州, 峨嵯山)로 유배지가 옮겨지다.
1538년(중종 33) 48세 가을 양주 유배에서 풀려나다.
1539년(중종 34) 49세 전 사성 정옥(司成 張玉), 학관 심의(學官 沈義), 전 검열(檢閱) 남규년(南虯年), 생원 신잠(生員 申潛), 진사 김인후(進士 金麟厚) 등과 함께 제술관(製述官)에 차출되다.
4월 모친 전주이씨(母親 全州李氏, 의창군 강(義昌君 玒)의 딸) 사망.
※ 제술관(製述官)-조선 시대 승문원(承文院)의 한 벼슬. 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동행하는 수행원의 하나. 보통 글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전례문(典禮文)을 전담하여 짓게 하였음.
1541년(중종 36) 51세 4월 모친 전주이씨 탈상(全州李氏 脫喪)하다.
4.30 시묘살이를 마치고 부친 三槐堂(종호從護)과 모친 전주이씨 묘소에 화관비, 상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등 석물을 만들어 설치하다.
1543년(중종 38) 53세 3.14 영사 홍언필(洪彦弼), 성세창이 申潛을 승문원에 소속시켜 이문(吏文)과 한어(漢語)에 관한 일을 맡기도록 중종에게 진언하다.
11.26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윤인경(尹仁鏡)의 진언에 의하여 6품직을 부여하도록 중종으로부터 허락받다.
11.29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 에 제수되다.
12월 泰仁縣監에 제수되다.
※ 임기 6년 동안 청렴(淸廉), 신중(愼重), 근면(勤勉)을 생활신조로 삼고 5학당을 세우다.
1548년(명종 3) 58세 5.15 태인현감을 잘 했다고 한 자급을 올려 포장(褒獎)을 받다.
-서자 수용(庶子 秀溶)이 출생하다.
1549년(명종 4) 59세 1월 고령세고(高靈世稿) 편저 발간 후 순은공(덕린(德鄰) 배위 광주정씨(光州鄭氏) 할머니 등 선조께 고유제를 올리고, 신영원(申永源)과 신담(申湛)에게 면포 150필을 주며 절사(節祀)하라 하다.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제수되다.
-태인현감 때 가자(加資)하고 간성군수(杆城郡守)로 감
※ 가자(加資) : 근무성적이 좋은 경우 품계를 올리는 것
※ 태인 현민들이 성황산(城隍山) 아래 생사당(生祠堂)을 짓고 선생과 가족, 호랑이를 나무로 조각하여 영상(影像)을 봉안하고 향사(享祀)하였다고 한다.
-봄 소세양(蘇世讓)이 신잠선정비(申潛善政碑)를 짓고 현민(縣民)들이 뜻을 모아 세우다.
영천 신 선생 비문(靈川申先生碑文)
내가 한가로이 고향[전리(田里)]에 거주할 때 인적이 드물어 대문 앞에 새그물을 펼칠 만 하였다. 하루는 대나무 사이의 작은 집에 앉아 있는데 포의(布衣)를 입고 띠[박대(博帶)]를 두룬 풍채 좋은 어떤 두 명의 유생이 품에서 작은 명함을 꺼내며 만남을 청하였다. 바로 성균관 진사[상상(上庠)] 김원(金元)과 성균관 유생 백삼구(白三龜)였다. 두 유생이 말하길 “저희들은 대대로 태인에 거주하였습니다. 청컨대 저희 태수 신 현감의 위정(爲政)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고을은 수레바퀴와 말발굽이 모이는 지역으로 사람은 드물지만 일이 많고 역이 번다하며 부세가 많아 느슨히 다스려도 숙식과 거마(車馬)를 제공해야 하고 급히 다스리면 원망하고 한탄하여 두 가지를 모두 병통으로 여겨 살아갈 방도가 적었습니다. 신 현감이 1544년(갑진) 초에 제수 받아[分左符] 부임해 온 날 먼저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오랜 폐단을 물어서 개혁하여 없애고, 위로하여 달래기를 부지런히 하고, 송사를 결단함에 상세하게 따졌으며, 자신은 엄하게 다스리고 타인은 어질게 대하니, 백성들이 이에 기쁜 마음으로 복종해 공덕을 칭송하는 노래가 바야흐로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신 현감께서는 ‘아직 아니다. 자유(子遊)가 무성(武城)의 읍재가 되어 예악(禮樂)으로 가르치자 공자께서 기뻐하셨다. 이것이 바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목민관의 양법(良法)이지만 이후로 덕교(德敎)의 은택이 퍼지지 못해 대략 형법만을 가지고 속박하며 단속하였다. 그러니 순박하고 아름다운 풍속이 드물게 혹 보여 지기도 했으나, 나는 단지 법도의 말단에만 급급했을 뿐이지 않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개연(慨然)히 학문을 흥기시켜 풍속을 변화시킬 뜻으로 마을[坊曲]에 명하여 각지에 서당[局堂]을 설치하고 즉시 서책(書冊)을 인쇄하여 간직했으며, 풍부한 재정 지원[餼廩]으로 마을 사람 중에 준수한 사람들을 모아 스승을 택해 그들을 가르치게 하고, 고아와 과부를 보살피고 절의(節義)를 숭상하며 염치(廉恥)를 권면하고 순수하고 독실한 행실을 몸소 하시며 바야흐로 교화의 도를 밝히시니 교활한 서리(胥吏) 또한 고개를 움츠리고 마음을 고치지 않을 수가 없어 즐거이 선으로 나아가려 하여 1년이 되지 않아 온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일찍이 퇴근하고[퇴식(退食)] 머무는 당(堂)을 삼사(三事)당이라고 편액했으니 대개 옛 사람의 관직을 맡는 법에서 취한 것으로 오직 청렴(淸), 신중(愼), 근면함(勤)만이 있을 뿐이라며 크게 세 글자의 뜻을 벽 위에다 써서 자신을 단속하고 또 훗날의 군자들도 힘쓰게 하였습니다. 당의 동쪽에 몇 칸의 초가집을 짓고 한가한 날이면 거문고 타며 학을 감상하고 쓸쓸히 속세를 벗어날 생각을 하니 옛 신라 말의 최 문창(文昌) 고운(孤雲)이 일찍이 우리 읍에 현감으로 계실 때 그 유풍(遺風)의 남은 여운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니 우리 현감의 문장과 품격은 천 년 전 고운과 함께 논할 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모하며 그리워하여 차운한 절구가 많은 것이니 고운도 혹 (신 현감 보다) 앞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현감의 이름은 잠(潛)이고 자는 원량(元亮)으로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공신이자 정승을 지낸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이고 세 번 장원을 한 삼괴(三魁) 선생 신종호(申從濩)의 아들입니다. 일찍이 집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능히 가업을 이어 문장과 서화가 세상에서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습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오는 이로 집에는 항상 신발이 가득하고 매번 일을 처리하기를 단숨에 많은 종이에 휘둘러 써나가며 대략 막히는 것이 없으셨으니 비유하자면 푸줏간 백정이 소를 바르는 듯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 매우 익숙하고 뛰어났습니다. 지금 임기가 끝나 돌아감에 노잣돈 주머니는 비고 거문고와 칼, 도서(圖書)만 몇 바리 싣고 가니, 읍의 노인과 아이들이 못 가게 만류하고[반원(攀轅)] 등자를 끊어도[절등(截鐙)] 이미 만류할 수 없으므로 돌을 채취해 다듬고 정리해 선정(善政)을 새길 것을 의논하여 길가에 세워 후세에 무궁하게 전하여 보이고자 합니다. 원컨대 선생을 찬양한 문장을 얻기를 감히 와서 청합니다.” 내가 듣고는 탄식하며 “정말 이러하구나. 원량이 정치를 행함은 이른바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였다. 한나라의 공경(公卿)이 대부분 어진 2,000석에서 나온다고 하더니 그대는 그러한 사람이구나!”라고 말하였다. 다만 내가 늙고 졸렬하여 글을 잘 짓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지만, 어찌 족히 여러분들의 소망을 막겠는가? 비록 그러하더라도 원량은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나의 문생(門生)이다. 시산(詩山)과 내 집의 거리가 꽤 멀지만 훌륭한 정치가 백성들에게 미쳤다는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데 이와 같이 입을 다물고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면 도인(道人)의 훌륭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태사(太史)가 모두 큰 붓을 들고서 특히 역사[簡策[를 쓴 것이 한 두 번이 아닌데 어찌 내 글만을 기다리겠는가. 우선 나와 그대들이 서로 말한 것으로 부로(父老)들에게 남기고 또한 이어서 부임할 수령들이 모범으로 삼도록 할 것이다.
좌찬성(左贊成) 소세양(蘇世讓) 쓰다.
※ “...申潛이 전에 태인 현감으로 있을 때 누적된 폐단을 제거하고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다. 백성들이 그의 은혜를 생각하여 부모처럼 우러렀으며 체직되어 돌아온 후에도 모두 사모하여마지않다가 이민(吏民)이 함께 의논해서 善政碑를 세웠다...” 『명종실록』 (명종 7년(1552년) 5월 11일)
1549년 겨울 강원도 간성군수(杆城郡守)에 제수되다.
1550년(명종 5) 60세 8월 10일 수성(水城)의 영월루(詠月樓)에서 아래의 시를 짓고 쓰다.
虎春龍文孰不驚 호춘용문숙불경 호적과 용문과 같은 자질에 누가 놀라지 않으련만
一生寥落謾知名 일생요락만지명 일생동안 쓸쓸히 지내어 겨우 이름만 알 뿐이네.
逢君仙境還分袂 봉군선경환분몌 선경(仙境)에서 임을 만나 노닐다 헤어지니
碧海淸秋有機情 벽해청추유기정 푸른 바다와 맑은 가을이 무슨 정이 있으랴!
출처 : 송계시권(松溪詩卷)
1551년(명종 6) 61세 11월 강원도 관찰사 유지선(柳智善)의 추천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다.
1552년(명종 7) 62세 4.25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제수되다.
11.4 임금으로부터 향표리(鄕表裏) 1습(襲)을 하사받다.
※ 상주목사 재임 중 18개 서당(書堂)을 세우다
하곡(霞谷), 도곡(道谷), 석문(石門), 수양(首陽), 노동(魯東), 수선(修善), 용문(龍門), 영빈(穎濱), 매악(梅嶽), 오산(梧山), 고봉(孤峯), 봉성(鳳城), 백화(白華), 봉암(鳳巖), 송암(松巖), 지천(智川), 죽림(竹林), 근암(近嵒)
1553년(명종 8) 63세 8.4 경상도 관찰사 정응두(丁應斗)가 조정에 글을 올려 흉년에 최선을 다한 성적을 보고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차하다.
1554년(명종 9) 64세 12.2 질병에 걸리다.
12.4 현직에서 사망하다.
12월 옥계 노진(玉溪 盧禛)이 영천자 신잠의 행장을 짓다.
1555년 3월 아차산(峨嵯山) 임좌 병향에 장사하다.
※ 병향-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 15번지 아차산
1563년 9월 영천자의 처남이자 제자인 옥계 노진(玉溪 盧禛)이 영천자(靈川子)의 유고(遺稿)를 모아 고령세고속편(高靈世稿續編)을 발간하다.
1631년 상주 옥성서원(玉成書院)에 배향되다.
1668년 장흥 예양서원(汭陽書院)에 배향되다.
1696년 2월9일 泰仁縣 泰山祠에 최치원(崔致遠), 신잠(申潛),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 김관(金瓘)이 배향된 서원에 숙종대왕(肅宗大王)이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윤허(允許, 賜額)하다.
2016년 4월 19일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 15번지 부친 삼괴당(三槐堂, 諱휘 從濩종호 ) 묘소 아래로 이장하다.
정리 : 서양화가, 문화관광해설사 청강 김성실
첫댓글 무성서원 신잠 검색하다 좋은 카페 구경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