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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함을 받았을 때 / 잠 22:1-9, 눅 14:1, 7-14
요즘 이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일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다. 이 전쟁으로 미 대통령 클린턴의 인기가 치솟았지만 이 전쟁에서 미군이 사망하는 일이 생긴다면 클린턴의 인기는 확실히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6년전 걸프전쟁을 연상시킨다. 이 전쟁의 여파로 석유가의 급등이 예상되며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입는 피해는 석유의 80% 정도를 중동에서 사들이는데 엄청난 석유가의 손실을 볼 수가 있다. 이제 우리나라의 문제를 말씀드리겠다. 문제 하나, 공무원 정원을 감축시킨다는 정부가 경찰만은 대폭증원을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치안을 위한 것이라면 말이 없겠는데 이 증원된 인원이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할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문제 둘, 경기는 침체되고 과소비는 너무 심하고 외채 1천억불 시대가 되었다. 4-5백만불 때에는 국민 1인당 100만원 꼴로 빚이 있다면서 난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절약하며 살자고 야단이었는데 요즘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것이 문제이다. 문제 셋, 해방 그리고 건국 이후부터 지금까지 청장급 이상 고위 관료에 영남 출신이 호남 출신의 3배나 임용돼 엄청난 지역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인사 차별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의 조선인 차별보다 더 심하다는 조사가 나왔다. 문제 넷, 미니대학들이 내년부터 개교를 한다. 또한 외국의 대학들이 우리나라에 분교를 둘 수 있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기는 이제 식은 죽 먹기가 될 것이다. 다만 대학에 들어가서 얼마나 성실하게 공부를 하느냐에 따라 장래가 보장된다. 이를 계기로 학생들이 공부에만 시달리지 않고 몸과 마음이 제대로 성장했으면 한다.
성서에 솔로몬이 왕이 되어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하셨을 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하고 솔로몬은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가 마음에 맞았다. 그래서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왕상 3:11-12)고 축복하였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솔로몬은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시기 전에 벌써 지혜와 총명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이 제일 먼저고 무엇이 제일 중요하고 무엇이 중심이 되는가를 이미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에게 무엇에 대한 지혜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기도드리고 싶다. ‘제 몸을, 제 말을, ㅂ제 행도응ㄹ 어찌할가를 바르게 아는 지헤를 주옵소서.’ 기껏해야 2m를 넘지 못하는 몸, 기껏해야 100kg을 넘지 못하는 이 작은 고깃덩어리, 그러나 이 ‘자아’라는 나를 알고 나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사랑받느냐, 미움받느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결정된다. 우리는 흔히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남이 나를 우습게 본다고, 나를 배신했다고 원망하고 미워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깊이 기도하면서 생각하면 모두 내가 맞아야 할 매를 맞았고, 내가 당해야 할 배신을 당했으며,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수모였던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 모두 내가 말을 잘못했고, 모두 내가 행동거지를 잘못했고, 그래서 웃어야 할 때 울지 못하고, 울어야 할 때 함게 울지 못한데서 오는 인과응보였던 것을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신다.
오늘 본문 눅 14장에 있는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바리새인 지도자 되는 분의 집에 초대되어 점심을 대접받으시는 자리에서 행하신 말씀이다. 8-10절 “네가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들 가운데서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너와 그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 때에 너는 부끄러워하면서, 맨 끝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네가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여보게, 윗자리로 올라앉게’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새번역)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 말씀을 카네기의 처세술과 같이 우리에게 처세술을 가르쳐주는 비결이라 생각하면 성서는 성서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성서는 얄팍한 처세술을 가르치는 처세술 독본이 아니다. 이것은 보다 인간의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분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지식의 분수, 지위의 분수, 재산의 분수, 실력의 분수, 인격의 분수, 제주의 분수가 있다. 심지어는 건강의 분수가 있다. TV 광고를 보면 토코페롤 선전이 있는데 여기에[서 ‘젊은 사람 조금도 부럽지 않습니다’ 하고 광고를 하니까 칠순이 넘으신 노인이 새장가든다면 집안 망신이다. 건강의 분수를 알고 나이의 분수를 알고 사람됨의 분수를 알고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가고 행동해야 멋이 있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을 한문으로는 지분(知分)이라고 한다. 자기 분수를 지키는 사람을 수분(守分)이라고 한다. 자기분수를 알고 자기 그릇을 알아 자족하는 삶을 안분(安分)이라 한다. 지분, 수분, 안분 이것은 인생을 바르게 사는 지혜이다. 이러한 지분, 수분, 안분을 못하고 허영에 들떠 있고 착각에 빠져서 말석에 앉아야 할 사람이 스스로 나는 상석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요, 또 과분(過分)이다.
우리 말에 ‘딥다’라는 말이 있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한다. 군인은 군인다워야한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들은 이제는 성도다워야 한다. 그래서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고, 그리스도의 환한 빛이 있어야 한다. ‘답다’는 것은 분수에 맞게 산다는 것이다. 사회기관이나 기독교 자선단체, 또는 기독교 학교의 이사 선출하는 것을 보면 서로 이사를 하려고, 서로 높은 자리에 서려고 야단이다. 그런데 막상 ‘이사님, 이번에 우리 기관이 어려움에 있으니 이렇게 도와주시지요. 이사님, 이번 우리 학교에 이런 행사를 하니 얼마를 희사금으로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면 못들은체 한다. 답지 않으려면 맡지 말아야 한다. 점심대접 받을 때는 이사 노릇하고 아려울 때는 쏙 빠지는 것은 답지 않낳은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답게 살아야 떳떳하다. 부자는 부자답게 살아야 떳떳하다. 멋낼 때는 멋내고 호강할 때는 해도 남을 도울 때는 멋지게 쓸 줄 알아야 다운 것이다.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벗이여, 올라 앉으라’는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분수를 알되 분수보다 한 칸 낮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100을 가지고 있으면 50이 있는 것처럼 살고, 100을 알면 50을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100을 할 수 있으면 50을 할 수 있는 사람처럼 살라는 말이다. 그래야 원수가 생기지 않고 ‘벗이여’ 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존경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대개 사람들은 100이 있으면 200이 있는 것처럼, 100의 힘을 가졌으면 200의 힘을 가진 것처럼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얼굴만 한번 보았는데도 옛부터 아주 친한 사람처럼 군다. 아주 확실한 빽을 가진 것처럼 말한다. 여기에 허상이 있고 불신이 있고 경멸이 생겨난다. 그러면 위장하라는 말인가? 아니다. 진실로 나보다 못 가진 사람, 나보다 못 배운 사람, 나보다 힘이 없는 사람, 나보다 신앙의 연조가 덜한 사람을 생각하는 사랑하는 마음, 겸손의 마음이 저절로 울려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했다. ‘겸손’은 교양이 아니다. 겸손은 신앙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만 가능하다. 위장된 겸손은 곧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볼 때 ‘아! 하나님, 나는 죄인이옵고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그런데고 살려주시고, 그런데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자녀삼아 주셨습니까?’ 이 고백이 있기 전에는 진실한 겸손은 없다. 이 경지가 왔을 때, 나는 낮아지려고 하나 남이 높여주는 이 경지에 왔을 때 ‘벗이여, 올라앉으라’는 진정한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본문 눅 14장을 자세히 읽고 묵상해 보면 예수님이 초대받으신 잔치 자리는 바리새인의 지도자의 집이다. 초청한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굉장한 자리에 이미 놓여 있는 지식인이요, 또 정치인이었고 돈도 꽤나 있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서로 내가 상석에 앉아야 하겠다는 사람들 뿐이다. 또한 그들을 아무리 보아도 못사는 사람, 못배운 사람은 없고 하나같이 잘 살고 하나같이 잘 배우고, 하나같이 세련된 사람들만 모여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교회를 보면 대학 이상 나온 사람만 다니는 교회도 있다. 지성인 교회임을 자랑한다. 학력이 낮은 사람은 그 교회를 갖다가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떠나버린다. 이런 곳을 교회라고 할 수 있나? 없다. 모름지기 교회는 어린이로부터 시작해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배운 사람도 있지만 글을 모르는 사람도 함께 어울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교회가 교회다운 것이다. 이래야 성도들 서로 간에 사랑이 있고 화목한 가운데서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개인을 전체의 도구로 삼는다. 그것을 보면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생긴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어지고 있는 것도 견딜 수 없는 모욕으로 느껴진다. 결혼을 하고도 이혼하는 사람 중에 혼수 예물이 적다고, 또는 맘에 안든다고 싸우고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 물질, 돈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되고 미쳐버렸나? 대학의 원조였던 독일의 대학은 철학, 신학, 의학이 없이는 대학이라 부르지 않았다. 인간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생명을 소중히 아는 데가 대학이었다. 그래서 돈을 벌든 못벌든 학문에 취하고, 사랑에 취해서 공부했다. 그래서 순수학문을 하기를 좋아했으나, 이제는 돈을 위한 공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남에게 주었으면 반드시 받아야 하고, 또 받았으면 갚아야 하고, 또 주지 않았으면 받지도 않아야 한다고 말하며 이래야 똑똑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라고 충고하고 계신다. 제자 베드로는 선생님이 대야에다 물을 떠다가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씻기니 ‘내 발을 씻기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내가 씻어준 일이 없으니 나도 씻김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똑똑한 제자요, 경우 바른 제자이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않으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 하셨다. 관계, 그것은 사랑의 관계요, 은혜의 관계이다. 본래 은혜는 초자연적이고 초이성적인 것이다. 이치에 맞고 사리에 맞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인이 복을 받는 것은 합리적이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죄인이 복을 받는 것은 진정한 은혜요, 복이 되는 것이다. 공부 잘한다고 밥주고, 공부 못한다고 굶기는 부모는 없다. 부모는 벌써 그런 산술치를 넘어선 사랑의 경지, 은혜의 경지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보상을 요구하고 갚음을 요구한다. 여기에 실망이 있고 눈물이 있다. 주었으면 그만이고, 베풀었으면 그만이지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고 기어코 신문에 내고, 기어코 상받기를 원하고, 기어코 TV에 나오기를 원한다. 그래서 신앙도 내가 몇 년 믿었는데, 내가 기도했는데, 내가 금식을 몇 번 했는데 왜 이 모양이냐고 한다. 신앙은 그저 사는 것이 감사하고, 지금 숨쉬는 것이 감사하고, 지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지, 무엇을 받겠다고 어쩌면 요구가 그렇게 많은가? 그저 기도드리고 그저 예배드리고 그저 바쳐보라.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시는 하나님이 부활의 날에 만배로 갚아주신다고 한다. 우리는 살아있을 때 동상을 만드느라고 모금을 하고 제막식을 하고 난리이다. 그러나 죽으면 또 부숴버리느라고 야단이다. 왜 이렇게 얄팍하고 급한가? 백년 후에 하고 2백년 후에 해도 늦지 않는데 남에게 친절 하나 베풀고 금방 되돌려 받겠다고 야단이다. 손님을 대접하는 일도 적거니와, 대접하면 갚을 수 있는 사람, 곧 이익이 있는 사람, 그래서 본전 뽑겠다고 초청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내가 자격이 있어서 이렇게 대접할 음식이 생긴 것이 아니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은 일에, 사랑의 일에 쓰라고 주신 것이니, 그저 주는 것이요, 그저 대접하는 것이다. 이런 담담한 마음, 이런 깊은 신앙의 마음으로 남을 대접하고 살아라. 그리하면 부활의 날에 반드시 하나님이 갚아주시며 또한 세상에서 너희를 높여줄 사람들이 반드시 생겨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며, 내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인 것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주님은 오늘 말씀하시고 계신다. 겸손한 마음으로 분수를 알고, 겸손한 사랑으로 남을 섬길 때 여러분은 전혀 다른 사람, 곧 낮은데 있으나 높은 곳으로, 비천한데 있으나 부한 곳으로, 죽음에 있으나 부활의 자리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옮겨주시고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