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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 / 왕상 19:1-8, 엡 4:25-32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 삼위가 한분 하나님이시고 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으로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들과 함께 사시고 할동하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동안 성령이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나 성령이 존재하시는 모습은 예수님의 존재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오셔서 존재하신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의 모습으로 계시는 분이다. 우리는 성령의 존재방식을 두고 내재한다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은 ‘안에 계신다’는 말이다. 그는 개인의 마음 속에 와 계신다. 그는 교회 공동체 안에도 와 계신다. 그리고 또 중요한 사실로 성령은 이 세계 안에서 계시면서 활동하고 계신다. 우리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성령이 존재방식에 관하여 성서는 두가지로 말해주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거룩한 집이라면 만일 우리속에 하나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계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 논리적인 귀결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바울이 진지하게 생각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말했다. 고전 3:16-17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둘째로 성서는 우리가 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표현도 한다.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 인간을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말한다면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누구냐를 정의하는 데에 기준이 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롬 8:9절하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한 바울의 말은 적절하다고 본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권면을 본다. 우리가 성령을 슬프게 한다는 말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 인간과 똑같이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성령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못하면 성령은 슬퍼하신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암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면 성령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데 대하여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본문에 있는 문제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성령이 슬퍼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이 문제에 바르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누구신가 하는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이 선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치고 성령이 누구신가에 대하여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령이 어떤 분인가 하는 문제를 반성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실 때 그의 제자들에게 고별의 말씀을 하실 때 그가 떠나는 대신에 다른 분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했다. 그분이 누구신가? 그분은 보혜사라고 했다. 이 말은 이해하기 쉬운 말이 아니다.
보혜사는 영어로는 상담자를 말한다.(변호자의 뜻이 있다) 공동번역에서는 협조자라고 했다. 그 다음으로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이지만 성령은 우리를 화해시키고 하나로 만드는 영이다. 성령이 이러한 분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이 슬퍼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의 중요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성령이 우리의 협조자라고 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슬프게 하는 것이 됩니까?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우리가 약하고 부족하여 그것을 따를 수 없을 때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그것을 바로 판단하게 하고 우리를 힘을 주어 실천할 수 있게 도와주고 협력하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그러한 성령의 도움, 지시를 받고 따르기를 거부한다면 성령을 슬프게 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협력과 지도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성령을 슬프게 할뿐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떠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성령이 부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무엇이 악마의 뜻이며, 무엇이 옳은 일이고 그른 일인가를 잘 몰라 혼란 속에 있을 때, 우리가 시련을 당해서 고난을 당하여 힘들어할 때, 우리가 슬픔을 당하여 상처를 받고 있을 때, 우리가 낙심할 때, 등등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 판단을 도와주신다. 힘을 북돋우어 줄 수 있다. 슬픔을 위로하여 주신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준다. 우리가 슬픔 가운데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슬픔을 당할 때,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위로를 거부하고 계속 슬퍼하면,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건강을 잃었을 때 약해진다. 우리가 이때 정말 하나님께 매달려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낙심하고 낙망한다면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고 염려하게 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정말 시련을 당했을 때 성령이 우리의 힘을 붇돋아주셔서 그 시련을 이기게 하신다. 희망을 다시 붙여주는 분이 성령이시다. 이러한 성령의 지시, 협력, 도움을 무시하고 시련에 회의에 빠지고 불신에 이른다면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고 성령을 거스르는 결과가 될 것이다.
엡 2장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다.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다’라고 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산다고 할 때 많은 경우에 악마의 지시대로 사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리스도의 뜻을 어기고 거슬러서 사는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을 때 악마가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 악마에게 한번만 절하면 온 천하의 주권을 주겠다는 유혹 등이 찾아왔다.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유혹들을 물리쳤다. 이런 유혹이 우리들에게 찾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 성령께 기도하여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나? 우리 자신의 목전의 이해관계를 위해 우리 마음대로(실상은 악마의 뜻대로) 결정하는 때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지시대로가 아니라 악령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이 된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예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기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자신의 판단, 경험, 지식, 지혜, 힘으로 판단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정말 오늘 이길 수 없는 상황, 시련을 맞아서 우리가 기도하여 성령의 도우심과 상담을 구하지 않는다면 성령은 슬퍼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알기 전에는 악령의 지시를 따라 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그의 지시를 따라 살아야 한다. 가령 우리가 슬픔을 당할 수 있다. 우리가 어려움을 처해서 이산 저산 쳐다볼 때 아무데서나 도움이 오지 않는다는 시편 표현과 같이 우리가 슬픔에 처해서 정말 위로를 어디에서도 얻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그런데 오직 하늘과 땅을 지으신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도움과 위로가 온다는 것이다. 성령에게서 도움과 위로가 온다는 말이다. 그가 위로자인데 우리가 그 위로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진리의 영이 슬퍼합니까?
진리의 영이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진리를 기억나게 하는 일, 깨닫게 하는 일, 그것을 행하도록 충동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릭가 성령이 기억나게 하고 깨우쳐 주는 진리를 무시하고 등한시하며 거스른다면 성령은 슬퍼하실 것이다. 진리에 맞는 말을 하고 행동하는 것이 성령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예수님의 구원의 진리이다. 해방의 진리라고도 예수님은 말하신다. 또 진리를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진실, 참 등을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말하고 행동하고 진리를 따라 산다고 할 때 그것은 진실된 말, 참된 말, 사실을 말하고 행동하고 그것에 따라 산다고 하는 의미이기도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직이라는 것은 생명이다. 그리스도인이 거짓말을 할 수 없다.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의례히 거짓말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는 듯하다. 특히 장사를 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밑지고 판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 을 수 없다는 것이다.
1세기 쿰란의 문서에 의하면 성도들의 거룩한 영이 악한 혀로 더럽혀져 있다고 했다. 오늘 우리들이 영과 정신과 몸이 악한 말, 불의하고 더러운 말, 폭력적인 말로 물들어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살벌한가? 우리의 언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어의 폭력이란 문제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은 형제자매에게 바보라고 욕하는 것만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교훈하지 않았는가?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시다고 할 때 우리가 과연 나쁜 말을 할 수 있을까?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다보면, 특히 사람을 만나면서 살다보면 짜증도 많이 난다. 별의별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정말 화를 내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키가 작아서 그런지 성질이 급하고 화를 잘내는 것 같다. 저도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성을 잘 내는 것은 확실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고 덕스럽지 못하다. 미국의 퀘이커 신도들은 ‘화가 나면 속으로 천천히 열 번을 헤아려라’고 한다. 그러면 그러는 사이에 화가 가라앉게 되고 감정에 사로잡혀 실수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실만을 말하고 정직해야 한다. 진실을 왜곡해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여러분도 잘 알겠지만 요즘 메스컴에서는 사실을 많이 왜곡해서 보도한다.
제가 주일학교 교사였을 때 기도가 끝나고 나서 한 아이가 ‘선생님, 저 아이가 기도할 때 눈 떳어요.’ 하고 고자질을 했다. 그래서 제가 ‘너 어떻게 아니?’ 하고 물었더니 ‘제가 봤어요.’ 하더군요. 기도할 때 눈을 뜬 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도 기도 중에 눈을 뜨고 봤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남을 헤치고 해롭게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욕설, 거짓, 비방, 싸움 등 이런 것들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고 참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성령은 화해시키고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바울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했다. 이것은 성령이 하나되게 하는 일을 하시는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 어떨 때 성령이 슬퍼할까? 우리가 싸우고 분열되고 원수 맺고 할 때 성령은 슬퍼하게 된다. 매우 불행하고 역설적인 것은 사랑의 공동체라는 교회 안에서 파당이 생기고 싸우는 일이 많이 있다. 이것은 현대에만, 한국 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초대교회, 고린도교회 안에서 분쟁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교리문제로 싸움이 있을 수 있다. 또 교회 안에 목사파, 장로파 등등 나누어져서 싸울 수 있다. 고린도교회가 그런 교회였다. 바울파, 게바파, 바나바파, 그리스도파 등등 여러 파로 나누어져서 서로 불신, 반목, 비난, 싸움을 했던 것 같다. 현대판 고린도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슬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보다도 먼저 성령을 슬프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앞의 두가지가 개인의 내면에서 개인적 삶에서 성령을 슬프게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마지막 것은 사회적 공동체적 삶에서 성령을 슬프게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하나로 만드는 것, 화해시키는 것, 일치시키는 것,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가 되는 행동의 윤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서 살든지 하나로 만드는 사람들, 화해시키고, 중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 하고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라지고 싸운다면, 성령을 아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화해시키고 하나가 되게 하지 못할 때 성령은 슬퍼하실 것이다. 우리는 한몸의 지체들이다. 그런데 이 지체를 분열시키고 해칠 때 성령은 슬퍼하게 된다. 남을 해치는 말, 화내는 일 등은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이다. 오늘 본문에서 욕설, 걱정, 분노, 고함소리, 온갖 악의의 말, 이런 것들을 경계하고 있다. 이런 말들을 버려야 하는 이유는 물론 그런 말들이 그리스도인들이이 경건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공동체를 해치고 같은 성도들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회의도 많이 하고 말들도 많이 한다. 그러나 말들을 너무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하는 이 말이 이 말을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가, 아니면 상처를 싸매주는 말인가를 그 마음 속에 질문을 한번 해보고 한다면 좋겠다. 그렇지 못할 때는 서로 시기하고 반목하고 미워하고 욕하게 된다. 이것은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은 평소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다 라고 의식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또 우리가 얼마나 이 말을 진지하게 여기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 성령의 우리가 모시고 살고 있다는 것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 자신의 존재를 아주 소중하게 아주 거룩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을 함부로 우리 마음대로 아무 일에나 내맡길 수 있는가? 우리 몸을 욕망이나 세상의 허영 같은 데에 함부로 내 맡길 수 있는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 거짓, 불의, 악, 온갖 술수를 말하고 행동하는 것, 술취함, 방탕, 음란 등등 이런 것들은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이 틀림없는 일이다. 우리 자신이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의식한다면 우리가 정말 함부로 자신을 취급하지 못함은 물론 우리가 함부로 나쁜 말을 하지도 못하고 함부로 행동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슬프게 하기 보다 기쁘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라. 오리려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힘을 쓰는 성도가 되어라. (1995-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