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1
2021. 8. 22(주일낮예배) 요한복음 4:23-24
창원시가 코로나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를 발표하였다. 그래서 당회는 방역당국의 지침을 수용하기로 하여 현장예배를 드릴 분의 신청을 받았다. 그때 우리교회 집사님께서 제게 이런 문자를 보내었다.
코로나 4단계 격상으로 신경써야 할 부분들이 많겠지만, 지혜롭게 대처하시는 손길에 주의 은혜가 넘치길 바랍니다. 서로가 신뢰하고 조심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지체들과 교제하는 건 어렵겠지만 예배만큼은 예배당에서 드렸음하는 바램으로 신청합니다.
저는 집사님의 글이 내가 집사로서 예배의 자리까지도 양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만큼은 양보를 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 저 꼭 현장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라고 읽혀졌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는 문자를 읽는 순간 비행기를 타면 알려주는 안전수칙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면 이륙하기 전에 승무원의 안전교육이 실시된다. 그때 승무원은 시연을 하면서 안전벨트를 메는 법과 산소마스크는 어디에 있는지? 비상구가 어디 있으며 또 비상구열 좌석에 앉았다면 승무원을 도와야 한다는 것 등을 안내한다. 그런데 산소마스크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비상 상황이 발생해 비행기의 기압이 떨어지면 자동으로 머리 앞쪽 선반에서 산소마스크가 내려옵니다. 이런 경우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신속히 착용하고 아이가 동행했을 때는 부모가 먼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아이의 착용을 돕는 것이 원칙입니다.
선반에서 산소마스크가 내려오면 아이가 아니라, 부모가 먼저 착용하고 아이의 착용을 도우라고 한다.
왜 부모가 먼저 착용을 해야 하는가?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는 생명보다 귀한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내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서 마음아파한다. 그런데 비행기가 비상사태가 되어 산소마스크가 내려오면 생명보다 귀한 자녀의 입에 먼저 산소마스크를 착용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먼저 산소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칙을 지킬 때 부모와 아이가 다 살 수 있다.
그러면 신자된 저와 여러분이 꼭 지켜야 할 원칙은 없는가?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고 하면서 범죄하여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아담을 찾으셨다. 그랬던 하나님은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있느냐?(9절) 하고 물으셨다. 하나님이 열납하는 예배를 드렸던 예배자인 아벨이 보이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찾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서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과 온전한 교제를 이루고 살았던 아담이 범죄하여 하나님 앞에 서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그 아담을 찾으셨던 것이다. 아벨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아벨과 아벨이 드리는 제사를 받으셨다. 그런데 아벨이 죽었을 때 하나님은 예배자였던 아벨을 찾고 계신 것이다.
왜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시는가? 이제 오늘 본문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수가성에 사는 남편이 5명이나 되는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이다. 아마 이 여인은 사랑하여 결혼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죽었던지 아니면 버림을 받아서 혼자가 되었다. 그랬던 여인은 그 당시 사회에서 혼자서는 살 수 없었기 때문에 또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첫 번째는 실패했지만, 두 번째는 행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결혼했지만, 두 번째도 실패하고, 세 번째와 네 번째도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제 다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지만, 그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여인의 기대를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예수님이 그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어떤 사람인가? 먼저 24절을 읽어보기 바란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재철목사님은 예도례(禮) 절배(拜)를 예배(禮拜)는 예를 다하여 자신을 낮추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특히 배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고개를 숙이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완전히 낮추어 땅바닥에 몸이 닿도록 낮추는 모습이다고 하였다. 쉽게 설명하면 삼보일배라 하면 3걸음 걷고 절을 한 번하는데, 그때 절하는 모습은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엎드려 배를 완전히 바닥에 닿도록 한다.
이것이 예배이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려 하나님만을 높이는 행위가 예배인 것이다.
그런데 완전히 엎드린다는 배(拜)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알려면 악수의 유래와 비교해 보아야 한다. 악수에는 몇가지 유래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중세시대가 끝나고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될 무렵의 이야기이다.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속에 유럽은 부패와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성전의 기사단이 생겼다. 기사단은 혼돈과 악을 심판하여서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는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런데 부패한 사회에서 기사를 흉내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 중에는 사회정의를 위하는 기사단도 있었지만,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거짓기사단도 있었다. 그러므로 길을 가다가 칼을 찬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이 기사단인지? 아니면 기사단 흉내를 내는 강도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칼을 잡는 오른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도 칼을 차는 오른손을 내밀어 잡으면 이 사람은 안전한 사람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수를 할 때 손을 흔드는 이유는 옷깃에 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예배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린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죽이면 나는 죽어야 하고, 하나님이 나를 일으키면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이다. 예배는 무장해제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행위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나를 맡기는 예배자가 되어져 있는가? 레위기가 기록한 제사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우리가 잘 아는 번제는 모든 것을 다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또 헌신을 의미하는 소제는 곡식을 아주 곱게 빻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무슨 말인가? 제사는 자신을 다 태워서 하나님께 바쳐드리는 것이고, 또 하나님 앞에 자신을 곱게 빻아서 가루가 되는 것이 제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사의 의미를 잘 보이는 것이 화목제이다. 화목제사를 드리면 제물의 앞가슴살과 오른쪽 뒷다리는 제사장이 먹는다. 그리고 그 남은 고기는 저녁이 되기까지 이웃과 함께 다 먹어야 한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소한마리의 무게가 700Kg 정도 되는데, 껍질과 내장, 그리고 제사장이 먹는 앞가슴살과 오른쪽 뒷다리를 빼도 300Kg 정도 된다. 그런데 그 많은 고기를 해가 지기 전까지 다 먹는 것을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이웃을 불러서 함께 먹는데, 그때는 친한 사람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나와 사이가 나쁜 사람도 다 불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가 지기 전까지 그 고기를 다 먹기 위하여 나와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에게 부탁하며 우리 집에 와서 함께 고기를 먹자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존심과 내가 옳았다고 하는 고집과 생각도 다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예배자가 되어져 있는가? 마이크 파나가 쓴 누가 우리 교회를 옮겼는가? 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날 하나님이 조용한 곳에 있던 교회를 환락가 한복판으로 옮겼다. 그리고 천사들에게 교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서 리포트를 써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천사들이 교인들의 행동을 조사했는데, 크게 3가지로 반응하였다.
첫 번째 교인들은 교회가 환락가 곁에 있는 것을 보고 불평하고 교회를 떠나갔다. 이 사람들은 교회는 거룩한 곳인데, 거룩한 교회가 환락가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교인들은 하나님이 교회를 환락가 중심에 옮긴 것은 저들을 변화시키라는 사명이다고 여겼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콘돔을 나누어 주고, 피켓을 만들어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것도 전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저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마약하는 사람도 교회로 받아들이고, 창녀도 받아드리기 위하여 교회 이름도 복지재단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열심히 사역하는 가운데 교회 안에는 청년들이 마약을 하고, 또 교인과 창녀와 문제가 생겨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교회는 몰락하고 말았다.
세 번째 교인들은 말씀을 더 배우고, 깊은 사랑의 공동체로 교회를 세워갔다. 그래서 철저하게 말씀으로 훈련받고, 또 그 말씀을 삶에 실천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로 세워나갔다. 그랬더니 교인들의 삶이 새로워지고, 또 변화된 성도의 삶과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주변 사람들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 모습을 본 천사가 보고서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다. 진정한 교회란 건물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 속에 들어와 계신 예수님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여러분 생각에 어느 것이 참된 교회로 보이는가? 참된 교회는 주변이 거룩하지 않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교회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교회는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나 자체의 존재 이유와 목적까지 다 버리는 교회도 아니다. 교회는 말씀 앞에 자신의 자존심과 고집과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말씀 안에서 나의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세워져 가야 한다. 이렇게 변화되어질 때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졌던 여인은 ➀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는 사실과 또 ➁이 사실을 알려주신 분이 메시야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 들어간다. 그리고 이 여인이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절) 하고 고함을 친다. 물론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는 말은 이 여인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확고하게 깨닫지 못했음이 옳다.
그런데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을 향하여 뛰어가는 여인의 모습을 보기 바란다. 여인은 물을 구하기 위하여 물동이를 들고 왔다. 그런데 이제 내가 물이 필요하다는 그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 5명이나 되었지만, 행복을 찾지 못했던 여인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정오에 물을 구하려 우물에 왔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제 여인은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말하는지, 또 내가 얼마나 우울한 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여인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그 기쁨을 전하기 위하여 마을을 향하여 달려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예배자의 모습이 아닌가? 자신의 삶을 얽어매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된 기쁨과 감격을 수가성여인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쁨과 감격을 세상에 나타내 보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올 때 예수님은 요 4:35-36로 말씀하신다.
(요 4:35-36)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을 통하여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복음의 씨앗을 심은 자와 그 복음을 추수하는 모든 자가 기뻐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추수의 즐거움의 출발이 어디에 있는가? 예배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신이 미워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높이는 그 예배를 통하여 이런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이런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하나님은 언제나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그 예배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추수의 기쁨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그 기쁨에 동참하고 또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 생각과 고집에 얽매여 살지 말고, 말씀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예배자의 삶을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