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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이 무슨 말씀이시오. 어찌 선생은 그렇게도 한의 왕실을 작게 보시나요. 제 생각으로는 한 고조의 공로는 주 무왕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요, 그 덕은 주의 왕실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못한 것은 서백(주 문왕의 봉호)의 세가가 아니요, 주공 같은 숙부와 소공 같은 대신과 주와 같은 8백 년의 천록이나 공자 같은 유민이 없었을 뿐입니다.
무릇 삼대 때에는 천자가 다스린 땅이 천 리를 넘지 못했고, 천백 제후들이 각각 땅을 나누어 다스리면서 대간만 아니면 천자에게 관계가 없었습니다. 천자는 25년에 한 번씩 순수를 하고, 율도와 양형을 옳게 만들 뿐이었고, 큰 역적이나 없으면 자기 처소에서 잠자코 두 손 잡고 아무런 하는 일이 없었으니, 다시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상하가 유지하고 강약이 견제되어서, 소위 발이 백이나 있는 벌레는 죽어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진ㆍ한 이래로 영토가 만 리나 되고, 필부와 필부의 기포ㆍ한난이 모두 천자의 생각 하나에 달려 있어, 천자가 생각 한번만 잘못 가져도 나라는 흙처럼 무너지고 기와처럼 깨어져서 문지방 없는 문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비록 부견의 강함과 두건덕의 꾀로도 천하의 절반을 얻었다가 일조에 자기 몸이 잡히게 되니 흥망이 덧없었습니다.
한 치 땅과 한 명의 백성이라도 반드시 천자 하나에 매이게 되었으니, 큰 운수가 아니고는 그 지위를 길이 누릴 수가 없고, 큰 제도가 아니고는 능히 진압할 수가 없었으니, 이와 같이 쉽고 어려움이 고금의 형세와 달랐습니다.
주가 일어날 때에 백이ㆍ숙제의 앞에는 태백과 중옹이 있었고, 백이와 숙제의 뒤에는 관숙과 채숙이 있었는데, 한의 왕실이 일어날 때에도 역시 이런 일이 있었는가. 그러고 보면 고제는 공로는 컸지만 그 마음이 없었고, 문제는 덕행은 있었지만 학문이 없었으며, 무제는 의지는 있었지만 식견이 없었습니다.
가석한 일은, 미앙궁은 축대도 온전히 쌓지 못하고 지형도 바르지 못한 채, 흙 한 줌 돌 한 덩이도 공장이에게 맡기지 않고 함부로 몇 길 되는 흙담을 바삐 쌓아서 3백 년 동안을 우물쭈물 지탱해 왔으니, 비유하건대 시골 늙은이가 보리밥에 오이김치로 입에 맞게 배를 채워서 도무지 홍운사(유명한 요리집인 듯하다)의 풍미를 돌아보지도 못한 것과 같습니다. 삼로 동공이 여상보다 더 어질고, 호소의 한 격문이 태서보다 나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한의 공덕에 대한 선생의 말씀은 지나칩니다. 한 고제는 처음에 백성들을 건지겠다는 마음이, 술에 취하여 함부로 고함치던 김에 아방궁을 보고서 망녕되이 일어날 뜻을 세운 데 불과하니, 이 같은 군도 중의 걸출을 어찌 주의 덕으로 일어난 데에 비하겠습니까.
만일 사적만을 가지고 공을 의논한다면, 고래로 난세의 간웅들이 모두 후세에 할 말이 있겠지만, 천하가 이미 정해지고 보면 비록 한두 가지 표현할 것도 없지는 않으나, 이 또한 때를 따라 이해와 편의를 노린 데 불과한 것이니, 소위 신하로서의 의리로야 무엇이 귀하다 하겠습니까.
항우가 한을 위하여 의제(초 회왕 손심)를 몰아내어 죽이게 한 것은 하늘이니, 만일 항우로 하여금 이러한 난처한 일을 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한왕은 천하를 3분하여 그 둘을 차지하면서도 도리어 머리를 숙이고 숨을 죽이고는 의제의 뜰에 옥과 비단과 죽고 산 새짐승을 조공해야 했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크게 웃으면서,
“청하건대 선생은 노여워 마십시오.”
한다. 나는 크게 웃고는,
“저는 원래 노여워할 일이 없습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한왕으로 하여금 의제를 섬겨 복종하게 해야 된다는 것은, 선생이 의리를 형식으로 따지는 말씀입니다. 삼대 이상은 불가불 덕을 의논해야 할 것이요, 삼대 이하로는 불가불 공을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천명의 두터운 바로써 짧고 긴 것을 점칠 수 있을 것이니, 주와 한의 덕을 비록 같이 말할 수는 없지만, 만일 어리고 외로운 임금을 속여서 천하를 취한 데 비교한다면 어찌 천양의 차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역대 왕조의 길고 짧은 것은 공덕의 많고 적은 데 달려 있습니다.
위와 진의 보복은 진실로 선배들의 의론이 있었지만, 당ㆍ송이 천하를 차지한 뒤에 몇 대가 못 되어 왕실이 크게 어지러워져서, 천보 이후로는 가위 나라는 나라가 아니요, 임금은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양한을 여기에 비교한다면, 애제(유흔)ㆍ영제(유굉)로도 오히려 임금의 기율을 잡고 있었으며 강토도 나누어지지 않았으니, 이로써 나라를 얻은 것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데 따라 천명의 두텁고 두텁지 않은 것을 족히 증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의제가 있은 연후에 한의 공덕이 더욱 빛났으니, 당시에 의제를 받들어 세운 것은 항씨의 한때 권도에 불과한 것으로, 마침 거소노인의 졸한 꾀에서 나온 것이 당연합니다. 풍진 속에 갑자기 만든 명분을 초매의 영웅에게 의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소복을 입고 성토한 것은, 비유하건대 양쪽으로 갈려서 송사를 하는데 서로 억지 탈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한 고제가 수수에서 패해 죽었던들, 강목에서는 예대로 의제 원년에 한왕 유방이 군사를 일으켜 항우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썼을 것입니다.
의리를 형식으로 따진다면, 무왕이 미자나 기자를 받들어 세우고 자기는 물러나 번방에 처하였다면, 그가 은의 순수한 신하로서 해로운 것이 없고, 잠자리에서 눈물을 흘려 끝까지 천위를 두려워한 것은 경시의 어진 종실이 되는 데 해롭지 않았으리다. 청궁(위의 대궐 안채)을 차지하고 거처하는 것은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성제에 옮겼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어서 천천히 궁리한다면, 항씨의 집에서 높이는 의제가 한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의제를 강상 백 리 되는 나라에 봉하고 한의 손님으로 여겼던들, 백 년에 제일 가는 성덕으로 해로울 데가 없을 것이니, 의제를 처리함이 어찌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또 후세의 군자들은 의론을 세울 때 높은 체하여 한ㆍ당을 말하기를 부끄러워해서, 한의 덕을 낮게 여기고 이를 찬송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의 여러 대 임금들은 모두 대를 전해 가면서 효도와 우애를 했고, 사람을 쓸 때는 순량한 관리를 먼저 채용했으며, 백성을 지도하는 데는 농사에 힘쓰도록 장려하였는데, 이 세 가지는 천하의 근본되는 방침으로서 역대에 드문 바였습니다. 급암의 바른 것이나, 곽광의 어린 임금을 도운 것이나, 자릉의 고상한 것이나, 황헌(동한의 고사)의 모범될 만한 것이나, 제갈량의 올바른 출처라든지, 하간효왕의 예절을 좋아함과 동평헌왕의 착함을 즐긴 것은, 천하의 원기요, 역대의 미치지 못할 바입니다.
무릇 이 여러 가지 사실은 질박하고 정직하고 충성되고 간절하고 참다운 뜻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른바 마음의 덕을 행하고 사랑의 이치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것이 모두 음악을 만드는 실상으로서, 영가하고 감탄해서 대아 같은 음악이 생겨도 부끄러운 빛이 없을 것입니다.
천하의 생령들은 한의 문화에 익어서 오래도록 생각에 남았으므로, 유연(오호의 하나로 전한을 세웠다)은 이를 빌려서 안락공에 이어 종묘를 세웠고, 유유(남북조의 송 무제)가 관으로 들어가자 부로 십릉(한의 역대 왕릉)을 설명했고, 유지원(오대 때 한 고조)ㆍ유엄(남한의 고조) 들도 오히려 ‘묘금도유’ 자를 빙자해서 대호를 세웠으니, 이는 비록 전한에 아무런 소용도 없지만, 백성들의 마음은 다른 왕실이 한 번에 패해서 망한 것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한다.
이때 해가 이미 저녁때나 되었고, 종일 마신 술이 각기 10여 배나 되어, 형산은 낮부터 의자 위에서 잠이 깊이 들었고, 혹정은 자주 칼을 빼어 양고기를 베어서 큼직하게 먹으며 자주 나에게도 권하는데, 나는 심히 그 노린내가 싫어서 떡과 과실을 먹을 뿐이었다. 혹정은,
“선생은 제ㆍ노 같은 큰 나라는 즐기지 않으십니까?”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큰 나라는 노린내가 나서요.”
하였더니, 혹정은 부끄러운 빛이 있었고, 나 역시 그 촉휘된 것을 깨닫고 즉시 먹으로 지우면서 이내 사과하기를,
“저는 자공처럼 사랑하진 않아도, 실정은 왕숙과 같습니다.”
제의 왕숙이 처음으로 위에 들어갔을 때에, 양고기를 먹지 않고 늘 붕어를 반찬으로 하였다. 고조가 묻기를,
“양고기가 생선국에 비해서 어떠하냐.”
했더니, 고려 왕숙은 대답하기를,
“양고기는 제ㆍ노의 큰 나라와 같다면, 생선은 주ㆍ거의 작은 나라와 같습니다.”
하였다. 팽성왕 협이 말하기를,
“그대가 제ㆍ노의 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주ㆍ거의 작은 나라를 좋아한다면, 명일에는 주ㆍ거 요리를 차려 봄세.”
하였다. 혹정이 내가 양고기를 먹지 못함을 보고서, 내가 작은 나라에 나서 큰 나라의 맛을 모른다고 놀리려고 한 것인데, 내가 큰 나라는 노린내가 난다고 대답하여 도리어 그들이 기휘하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는 무안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혹정은,
“고려의 공안(고려에 대한 공문)을 공은 아십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이것은 동파(소식의 호)의 《지림》에 실려 있는가요. 고려가 죄가 없는데 동파가 가장 미워했습니다. 고려 명신에 김부식과 부철(부식의 아우)이 있는데, 소를 사모하였으므로 그들의 이름을 지었으나, 동파는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자첨(소식의 자)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는, ‘고려가 조공을 드리는 것이 털끝만큼 있으니, 청하건대 서적을 사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했습니다. 그러나 《책부원귀》는 그때 나간 것인데, 귀국에서 널리 인쇄되지 않았는지요.”
한다. 나는,
“동파의 상소는 실언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작은 나라가 중국을 사모해서 사간 것을 하필 이해로 따졌을까요.”
하였다. 혹정은,
“그렇습니다. 송의 정화(송 휘종의 연호) 연간에 고려 사신을 올려서 국신(지금의 대사격)으로 삼아 하국의 윗자리에 있게 하고, 인반ㆍ압반을 고쳐서 접송ㆍ관반이라 불렀는바, 고려는 요를 섬겼다가 금에게 신하 노릇을 했기 때문에 중국의 예의를 많이 저버려서, 송 고종은 심히 한스러워했습니다. 고려가 조공하던 길은 항상 명주ㆍ명월 지방을 경유하므로 공급에 곤란했고, 중국에서 맞이하는 비용이 여러 만 냥으로 계산되어, 회ㆍ제(강소 절강) 지방은 이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옛날 형남의 고계흥은 오대 시절의 절도사로서, 당시에 한 개의 고을을 웅거한 자는 그 지방의 패권을 쥐지 않은 자가 없었지만, 고씨는 이런 비용을 받고자 일부러 자신을 낮추어 외번으로 자처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고무뢰’라고 지목했습니다.
송 나라 시절에 회ㆍ제에서도 역시 고려를 ‘고무뢰’라고 불렀으니, 대개 그 비용을 부담하기에 괴로웠던 탓이요, 소씨의 다섯 가지 해로움이란 말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사 호순척과 시어 오불 등도 모두 이것을 말했으니, 비단 폐단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그 허실을 탐지하는데, 실상 금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한다. 나는,
“이것은 진실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사모하는 것은, 곧 그 천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21대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신라와 고려로 국호를 삼은 상하 수천 년 동안에 아직 한번인들 귀국의 국경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조선이 한의 사신을 죽인 것은 곧 위만의 조선이요, 기자의 조선이 아니며, 수나 당에 대하여 항거한 자는 곧 고씨의 고구려요, 왕씨의 고려가 아닙니다.
중국의 사전에는 문득 구 자를 뽑고, 마 변을 없애서 ‘고려’라고 통칭했으니, 이것은 왕씨가 나라를 세우기 전부터 있었던 이름인데, 앞뒤가 뒤바뀌고 명실이 혼돈되었으니 족히 한심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삼국 시대에 신라가 가장 먼저 당을 사모하여, 수로로 중국을 통하면서 의관과 문물은 모두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가위 이가 변하여 중화가 되었습니다. 왕제(《예기》의 편명)에는 동방을 ‘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뿌리박는다는 뜻이니, 곧 성품이 어질므로 생물을 좋아해서 만물이 땅에 뿌리박고 자라나는 것을 말한 것으로, 천성이 유순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려는 신라를 계승하여 5백 년 동안에 비록 왕위를 잇는 데 예닐곱 번 잘못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중국을 사모하는 정성은 바뀌지 않아서 몽매간이라도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좋은 글을 얻을 때는 반드시 손을 씻고 받들어 읽다시피 하였습니다. 두 의원이 돌아올 때 가만히 음우의 경계를 가지고 온 일이 있었는데,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역사에 남김없이 기록되었으니, 이는 곧 중국에 마음을 주고 존화양이의 정성이 지극한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당시 사대부들은 고려의 본심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이웃 나라의 간첩으로 의심했으니, 또한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건염 천자(건염은 남송 고종의 연호)는 설분에 대한 대의는 잃어버리면서 양응성의 옹졸한 계책을 쉽게 믿고, 지름길을 빌려서 황제를 업고 도망치려다가 필경 장수 적여문의 선견대로 맞았으니, 송고종 2년에 절강로마보도총관 양응성이 상주하기를,
“고려를 거쳐 여진까지 가기에는 길이 심히 빠르니, 청하건대 제가 삼한에 사신으로 가서 계림과 약속을 맺어 두 황제를 맞아 오겠습니다.”
하매, 곧 응성을 임시 형부 상서로 삼고 국신사로 임하였더니, 절강 장수 적여문이 말하기를,
“만일에 고려가 금인들과의 관계로 거절을 하거나, 또 이를 기회로 길을 묻는다고 빙자하여 중국의 남방을 엿보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였다. 응성이 고려에 이르자, 과연 적여문의 말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드디어 약한 나라로 하여금 감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일러, 고려의 공안이 아니라 고려의 원안이라 하고 싶습니다.
왕씨는 본래 거란 때문에 통로를 끊기고 중국에 다닐 길이 없어, 비록 들어오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변경과의 문화 교류는 앉아서 이룬 것이 아니라, 험한 먼 길을 가리지 않고 뱃길로 만 리를 왕래했으며, 신라가 다니던 옛 자취를 찾아서 무서운 고래와 악어를 밟으며 앞 배가 넘어지면 뒷 배가 잇달아, 만 번도 더 죽을 뻔한 고비를 무릅쓰고 성의를 다했던 것이니, 이것은 작은 나라로서의 떳떳한 직분이요, 어찌 이것을 큰 나라에 대하여 잇속을 노리는 짓으로 보겠습니까.
변변하지 못한 토산물품이야 천자의 뜰에 갖출 수 있는 것이 못 되지만, 그래도 옛날을 회상하면 인사 차리는 범절을 어김없이 하여 누르고 붉은 꾸러미를 보에 싸서 보내니, 이나마 중국을 사모하는 정성인데, 어찌 이것을 상국에 잘 보이려는 수단으로만 보겠습니까.
고려가 비록 나라는 작고 백성은 가난하다 하지만, 기름진 곡식들은 족히 조상께 제사를 모실만하고, 실과 삼은 족히 제복을 갖출 만하며, 산에서 나는 쇠와 바다에서 구운 소금은 남의 나라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지낼 수 있으니, 어찌 상국의 재물에 욕심을 내고 천자의 유사들에게 시끄럽게 했겠습니까.
송의 여러 황제들은, 관곡이 허비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멀리 찾아온 수고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뜻은 다른 나라보다 더했습니다. 오래 전해 온 기자 같은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 하여 본래부터 예의의 나라로 불려서 대우가 심히 두터웠으니, 중국의 부유하고 포용력이 큰 것을 볼 수 있는지라, 어찌 사해의 부력을 가지고 한 개 사신의 비용을 아끼겠습니까. 천자의 높음으로 옥백의 모임에 이해를 따지겠습니까.
자첨은 학식이 천단해서, 후하게 주고 박하게 받는 뜻을 알지 못하고, 갑자기 조그마한 이익과 다섯 가지 손해를 말하여 장사치들이 장단을 다투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로써 장사꾼의 도로 사방과 사귀어서 만국의 오는 정을 끊어 버렸으니, 저는 일찍이 소식의 상소문은 당시 조정의 수치라고 말했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후세에서 의논할 때는 대체로 어긋난 일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당시를 헤아려 볼 때는 매우 심장한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자는 촉당(소식의 당)과 낙당(정호ㆍ정이의 당) 때문에 극도로 자첨을 비방하여, 오히려 공문중이 정자(흔히 숙정자 정이를 가리킨다)를 비방한 것보다도 심해서, 다섯 귀신 중에 괴수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진관(촉당의 한 사람. 자는 소유)ㆍ이천(송의 문학가. 촉당의 한 사람)의 무리를 경솔하고 허탄한 도배로 지목하면서, 남헌과는 교의가 친하다 하여 장준을 추존했으니, 군자가 파당에 가담하지 않는 것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 선생은 주자의 정론을 끼고 소를 배척하는 품이 오히려 주자보다도 엄하니, 고려를 위한 감정풀이를 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고는, 이내 크게 웃는다. 나도 웃으면서,
“원통한 것을 호소했다고 하면 그럴 법하지만, 어찌 감정풀이라고야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애오라지 농담이었습니다. 천고에 공적이 옳은 일이나 공적이 옳지 아니한 일에는 인정이 대동할 터인즉, 누구로 하여금 권하게 하며 누구로 하여금 막게 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웃으면서,
“주자와 같은 당이라 함은 진실로 감심하는 바입니다만, 대면해서 착오를 하시니 아직 지독한 촉당인데요.”
하였다. 혹정은 크게 웃으면서,
“아닙니다, 아니어요. 민호는 주자 문하의 자로입니다.”
한다. 나는,
“성인의 문장에까지 이른 모양이니 불러들이지요.”
했더니, 혹정은,
“주자와 같은 당이면 세상에 드문 한아이겠군요. 한아가 문약한 것은 주자의 책임에 불과합니다.”
한다. 나는,
“주자가 전고에 의리를 지키는 주인인데, 의리가 이기는 곳에는 천하에서 더 강할 수 없겠거늘, 문약한 것을 무얼 걱정합니까.”
했더니, 혹정은 ‘세상에 드문 한아’란 구절을 찢어 화로 속에 던지면서,
“일부러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자연히 알게 되겠지요.”
하고는, 혹정은 또 말하기를,
“《홍간록》 군서목에는 정인지가 지은 《고려사》가 들어 있는데, 선배 고령인(고염무)은 역사가의 문체를 갖추었다고 칭찬했으나, 나는 아직 얻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무석 왕안이 초출한 《고려기략》에는, 외국의 국가 정통의 대의를 몰라보고 고려 건국 초기의 사건에 관계된 연호를 쓰면서 첫머리에 역적 양(오대의 후량. 주온이 세운 나라)의 가짜 연호를 걸었다고 이것을 배척했습니다.”
한다. 나는,
“고려가 처음 일어난 것은 주량의 정명 4년(918)으로서, 중국에는 아직 일통한 천자가 없었으니, 외국의 연호를 무엇으로 붙이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난신과 적자가 어느 대인들 없으리오만, 한때나마 거짓으로 나라를 정한 것은 모두 선왕들을 본뜬 것으로, 주온의 내력은 순전한 도적입니다. 황제의 위를 찬탈한 순서로 황제의 정통으로 떠받든 자는 홀로 사마광 한 사람뿐입니다.
공명(제갈량의 자)의 광명정대한 식견으로써 유 예주(유비가 일찍이 예주목이 되었다)를 제실의 후손이라 했으니, 당시 견문의 확실한 것을 어찌 후세에서 도보만 따지는 데 비할 수 있겠습니까.
후세에 역사를 짓는 자는, 공명의 말을 믿지 않고 어디에서 대의를 취하였던가요. 구란 것은 남몰래 남의 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도둑질하는 것을 말함인데, 공명은 제실의 종신으로서 자기 스스로 자기 집에 들어가서 다른 도적을 쫓아 잡으려던 것이니, 천하에 어느 사람이 이것을 잘못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제갈자(제갈량을 높이는 말)를 구라고 한다면, 천하의 문헌으로부터 의 자를 모두 깎아 버려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의 말을 한 번 씹어 보자면, ‘소열(유비의 묘호)은 비록 중산정왕(유승)의 후손이라 이르지만’이라고 했는데, ‘비록 이르지만’이란 말은 더구나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합니다. ‘비록 이르지만’이란 말은 도청도설의 믿을 수 없는 말을 이름인데, 누가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극온이나 그런 말을 했겠습니다.
이변은 본래 권신의 가짜 아들로서, 교묘하게 양(양행밀)ㆍ서(서온)의 기업을 빼앗고, 그 뜻을 얻은 후에는 또 찬탈한 자취가 부끄러워서 죽은 의부를 배반하고 조상을 문황에게 의탁시켰으니, 천하의 이씨가 비단 농서뿐이 아닐 터인데 널 앞에서 왕조를 계승한다고 했습니다.
막길렬도 이와 같은 자입니다. 그(사마광)는 곧 역적 양에게 정통을 내주면서 당당한 제실의 후손(유비)에게 비하였으니, 무슨 배짱으로 주씨(주온)로 당을 대신하여 온 사방이 산산이 흩어지게 했으며, 주사가 변경에 들어온 것을 신(왕망의 나라)에 비교하여 국운이 끊어졌다고 한탄했겠습니까.
강목에 연대를 쓴 예는 비록 대단히 정당한 자리에 섰다 할 수 있으나, 아직도 익도(산동성 청주) 종 상서 이름은 우정이다. 가 그 권형을 얻은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정통론 중에는, 준열하게도 사마광ㆍ구양수의 잘못된 이론을 배척하면서 삼대와 한ㆍ당ㆍ송을 정통이라 하였습니다.
바르고도 통일을 못한 자는 동주군(주의 말주로서 혜왕의 아들)과 촉한의 소열제, 진의 원제(사마예), 송의 고종이요, 통일은 했지만 바르지 못한 자는 진 시황ㆍ진 무제(사마요)ㆍ수 문제 등이라 하였습니다.
비록 정통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상을 오랫동안 비워 둘 수는 없고 보니, 역사를 만드는 자는 할 수 없이 제라고 하였습니다. 조비(조위의 문제)와 왕망과 주온 같은 자들은, 이미 의리도 바르지 못하고 형세도 같지 않다고 운운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장주(강소성에 있다) 송실영이 양의 연호를 엄격하게 배척한 논평만 같지 못하니, 그는 왕망에게 ‘신’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안녹산에게 ‘연’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면, 누가 전충(주온의 또 다른 이름) 같은 흉악한 역적에게 양의 이름을 줄 것입니까. 하물며 당시에 진ㆍ기ㆍ오ㆍ촉 등의 여러 왕들이 격문을 돌려 당을 회복하고자 하였던들 당의 왕실이 망하지 않았을 것이며, 모두 천우(당 애제 때의 연호)란 연호를 20년이나 오래도록 붙여 왔으니 당의 왕조는 아직 존속했던 것입니다.
진은 비록 당이 사성한 나라지만, 그는 제후들 중의 종맹국으로서 자기 임금의 원수요, 나라의 역적을 자기 손으로 베어서 소탕했은즉, 세상에서 일찍이,
“전충의 양이 없었다.”
운운했습니다. 당시 외번들은 중국에서 열립한 임금의 진위를 알지 못하고, 혹은 중국을 사모하는 극진한 정성으로나, 또는 자기 나라의 국경을 방위하기 위해서나, 대국과 결탁해서 우리를 진압시키기 위하여 굽실거리면서, 외번으로 자처하고 그 연호를 받드는 것도 이치에 괴이할 것이 없지만, 다만 후세에 역사를 쓰는 자로서 의논한다면, 진위가 밝아지고 득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땅에서 문헌들이 해마다 압록강을 건너서, 교화는 태사(기자)를 따르고 학문은 자양(주자의 별칭)을 표준하여 ‘예의의 나라’라 일컬어 오는 터에, 천 년의 춘추대의는 어진 자의 책임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비록 온공(사마광의 봉호) 같은 어진 이로서도 출척하는 일에는 오히려 이런 과실이 있었거든, 하물며 외국이겠습니까. 저의 나라는 비록 한 집이나 다름없지만, 오히려 중국에게는 벽을 뚫고 불빛을 빌리며 얼굴을 가린 채 더듬어 찾는 것과 같거든, 하물며 식견이 여기에 이르지 못함이겠습니까.
이제 선생의 양을 배척하는 의론을 들으니, 모르는 사이에 상쾌해서 망연자실할 따름입니다. 그런즉, 고려사의 연호는 마땅히 어디에 매어야 되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이것은 당시의 진ㆍ기ㆍ오의 예로 상고해 보면 정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더니, 드디어 일어나서 탁자 위에 있는 조그만 가죽 상자를 열었다. 형산은 코를 우레처럼 골면서 가끔 머리로 병풍을 건드린다. 혹정은 웃으면서 높은 소리를 질러 읊기를,
“목침십자열.”
하니, 형산은 코 골던 것을 즉시 그쳤다가 이내 또 시작한다. 나도 이에 큰 소리로,
“목침십자열.”
하였더니, 혹정은 손에 조그만 책을 들고 눈을 크게 뜨더니,
“알아 듣는군.”
하니, 그것은 내가 능히 한어를 안다는 말이다. 작은 책은 과거보는 사람들이 갖는 역대 기년을 적는 책이다. 혹정은 후당 장종의 연대를 훑어 본 뒤에, 동광 원년(923) 갑신(계미의 그릇된 것)으로부터 거꾸로 세어 양의 균왕(양 말제의 봉호) 우정(균왕의 이름)의 정명 4년(918)을 가리켜,
“고려의 건국은 당의 소선제 천우 15년(918) 무인인 듯합니다. 천우 4년(907)에 전충이 황제를 폐하여 제음왕으로 삼았다가 그 다음해 무진에 죽음을 당했으나, 당의 정삭은 오히려 당시의 제후들에게 쓰인 지 16년이 되었으니, 이것은 역시 공이 건후(하북성의 지명)에 있다는 뜻입니다.”
한다. 나는,
“지금 해내의 학문으로 주ㆍ육 중에서 어느 편을 숭상하나요.”
하였더니, 혹정은,
“모두 자양을 존숭합니다. 모신과 같은 사람은 글자마다 주자를 반박했지만, 그는 천성이 왕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주자를 반박하는 것이 옳은 데는 적고 억지가 많았는데, 그 옳다는 것도 반드시 유문에 공이 있는 것이 아니요, 그의 억지는 도리어 세도에 해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죽이려 하는 자가 도리어 지기가 되고, 때리지 않으면 정을 알지 못한다 하여, 조사를 욕하는 것은 도리어 그 근본을 사랑하는 것으로, 모가 주자를 반박한 것은 비록 공신으로 자처하지만, 때리면 피를 보는데야 누가 그의 사랑을 믿어 주겠습니까.
주자의 문생들은 이웃을 맺었으므로, 마땅히 부득불 바삐 임안부(남송의 수도)로 가서 한 소장을 내니, 포염라는 곡직을 불문하고 모신을 잡아다가 먼저 죽비 30대를 때렸으나, 모신은 참고 이내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으며 자꾸만 더 때리라고 소리쳤습니다.
포공은 크게 노해서 다시 건장한 자들을 불러 더 사납게 때렸으나, 모신은 마침내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모신은 평생에 자기를 알고, 자기를 죄줄 점이 모두 주자를 공박한 데 있다는 것을 자인했습니다.
주자는 홀로 춘추에만 손을 대지 않았으니, 이는 통달한 사람이나, 보망 한 장으로 인하여 소아배의 허다한 말썽이 되었고, 소서를 모두 깎아 버려서 독한 노권의 맛을 본 셈입니다. 《참동계》 주에 …… ”
날이 저물어 파해 일어서느라고 끝을 맺지 못했다.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