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 온전한 사람
2023. 8. 27(주일오전예배) 누가복음 10:25-37
어떤 책이 좋은 책인가? 제가 대학을 다닐 때 교수님은 좋은 책이란 어린 아이부터 장년이 모두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교수님이 칠판에 그림을 그렸다. 높은 빌딩이 있고, 그 앞에 작은 집이 있다. 그런데 빌딩 1층에서 작은 집을 보면 마루가 보이고, 또 창문이 보인다. 그런데 5층에서 보면 비스듬한 처마와 지붕이 보인다. 그리고 10층에서 테두리에 둘러져 있는 지붕만 보인다. 마찬가지로 10살 때 읽을 때는 10살에 재미있게 읽었지만, 20살에 읽었을 때 시시한 책이 아니라, 또 다른 감동과 재미가 있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래서 어느 세대가 읽어도 재미있고 감동이 있는 책을 우리는 좋은 책이라 말한다.
그런데 좋은 사람도 이와 같지 않겠는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34) 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전하신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을 동일하게 대하는 것처럼 이웃과 원수를 동일하게 대하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온전한 사람인가? 유은정 원장이 쓴 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마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의 첫부분에 뚱뚱한 몸이 콤플렉스였던 20대 여성과 상담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여성은 취업이 어려운 것도 연애가 실패한 것도 또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모두 살 때문이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죽어라 다이어트에 매달렸지만, 살이 빠지는 속도는 더뎠다. 왜냐하면 이 여성은 너무 착해서 점심을 먹고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가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하면 또 점심을 먹었다. 이 여성은 친구가 혼자 외롭게 밥을 먹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기 의견보다는 친구들을 먼저 배려한 이 여성은 자기가 원하는 다이어트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큰 결심을 하고 친구들에게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그래서 다이어트 클리닉도 다니고 있다고 고백하자 친구들은 여태까지 클리닉을 다닌 결과가 고작 그거야? 라는 말부터 진작 말을 하지 그랬으면 이 모임에 오라고 하지 않았을텐데 라는 말까지 하였다. 그 말에 상처를 받은 20대 여성은 유은정 원장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한다.
친구들이 제가 뚱뚱하다고 무시한 게 맞죠? 저 정말 상처받았어요. 보란 듯이 날씬해져서 복수해 줄 거예요. 다시는 저를 얕보지 못하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만들 거예요.
친구들에게 상처받아서 복수하는 심정으로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20대 여성에게 유은정 원장은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유은정 원장은 바라는 것이 없으면 실망도 없다는 말을 한다. 이 여성은 평소 자신이 친구들에게 배려와 친절을 베풀었으니 친구들도 자신에게 배려와 친절을 베풀어 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배려와 친절과 다르게 말하는 친구들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상처받는 이유가 이와같지 않는가? 우리가 길을 걷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발이 밟혔다. 그때 모르는 사람이 죄송합니다 하고 인사하면 아무 문제 없이 그냥 지나간다. 그런데 친구가 실수로 발을 밟아서 미안하다고 하면 이 신발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면서 왜 그래? 하고 짜증을 낸다. 똑같이 발을 밟혔는데, 모르는 사람에게는 의외로 관대하고, 친한 사람에게는 관대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친구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집사님이 한숨 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성적이 너무 떨어졌는데, 공부는 하지 않고 컴퓨터 게임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에 중학교 남자아이들은 다 그렇다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내 아이 성적이 떨어졌는데, 아이가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중학교 남자 아이는 다 그렇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아이에 대하여서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저와 여러분은 기대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있지 않는가? 지난 8월 13일분당우리교회 주일예배는 곽규호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였다. 그때 곽규호 목사님은 예수님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바울을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혈안이 된 바울을 부르신 것이다.
그러한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일곱교회를 심판한다. 그때 예수님은 일곱교회 중에 한 교회에게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을 하신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소아시아 7교회 중에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듣는 교회였다. 그리고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듣는 교회였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듣는 교회였다.
그러면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라는 이 말씀은 어느 교회를 향하여 하신 말씀이겠는가?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역겨워하며 네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라오디게아 교회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역겨운 라오디게아 교회를 내팽개치지 않고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는가? 곽규호 목사님은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였다. 그런데 우리도 그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회개하며 눈물 흘릴 때 예수님이 나에게 다가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율법교사는 사실 2가지로 예수님께 질문하는데,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그랬던 율법교사는 이제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하고 질문한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이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 하였다. 그랬기에 율법교사는 그 예수님이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인가? 시험하였다는 것이다. 그랬던 율법교사는 예수님과 자신이 율법에 대하여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교사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율법교사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똑똑한 사람이 있으면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구! 하면서 무시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조금만 인정해 주면 잘보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도 맞아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보고 지나쳐 버렸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기름과 포도주로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밤새 간호한 후에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으리라 말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고 물으신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시겠는가? 오늘 본문 눅 10장 37절을 읽기 바란다.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 하고 물었던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고백한다. 그때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신다. 예수님은 잘난 사람을 시기하여 무너뜨리려 하지말고, 또 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강도 만난 자와 같이 억울하고 고통하는 사람의 이웃이 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사실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아는가? 사실 예수님은 29절에서 이미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였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일에 그치지 말고, 그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시고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또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가서 이와같이 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얼마 전에 감동을 주는 글귀를 읽었다.
구름은 바람이 못가고, 사람은 사랑없이 못가네.
- 구례 병천순대 -
감동이 아닌가? 오늘 설교 제목이 온전한 사람이다. 그런데 온전한 사람은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것과 같이 이웃과 원수를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그러한 사랑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에게 그러면 살리라 고 말씀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생명을 누리는 복된 성도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