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9월 4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뉘다. / 論争が生じ、分裂した。
본문; 사도행전 23:6-10
행 23: 6 ○그런데 바울이 그들의 한 부분은 사두개파 사람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파 사람인 것을 알고서, 의회에서 큰소리로 말하였다. "동포 여러분, 나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바리새파 사람의 아들입니다. 나는 지금, 죽은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7 바울이 이렇게 말하니,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 사이에 다툼이 생겨서, 회중이 나뉘었다. 8 사두개파 사람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하는데, 바리새파 사람은 그것을 다 인정하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바리새파 사람 편에서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서, 바울 편을 들어서 말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조금도 잘못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만일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여 주었으면, 어찌하겠습니까?" 10 싸움이 커지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길까 염려하여, 군인더러 내려가서 바울을 그들 가운데서 빼내어, 병영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하였다.
6. パウロは、議員の一部がサドカイ派、一部がファリサイ派であることを知って、議場で声を高めて言った。「兄弟たち、わたしは生まれながらのファリサイ派です。死者が復活するという望みを抱いていることで、わたしは裁判にかけられているのです。」7. パウロがこう言ったので、ファリサイ派とサドカイ派との間に論争が生じ、最高法院は分裂した。8. サドカイ派は復活も天使も霊もないと言い、ファリサイ派はこのいずれをも認めているからである。9. そこで、騒ぎは大きくなった。ファリサイ派の数人の律法学者が立ち上がって激しく論じ、「この人には何の悪い点も見いだせない。霊か天使かが彼に話しかけたのだろうか」と言った。10. こうして、論争が激しくなったので、千人隊長は、パウロが彼らに引き裂かれてしまうのではないかと心配し、兵士たちに、下りていって人々の中からパウロを力ずくで助け出し、兵営に連れて行くように命じた。
지난 주일 본문 말씀과 설교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은 바울의 담대함은 하나님께서 내면에 채우신 양심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욕심을 따라 살면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회 칠한 무덤처럼 겉은 화려해도 속은 썩어서 악취를 풍기는 일상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채우신 양심을 따라 순종하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언제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담대하고 용감하게 향기로운 일상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그 어떤 위협과 도전도 흔들 수 없는 우리의 믿음과 은혜의 삶에 대해서 다시금 확신할 수 있는 응답을 들으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로 인해 공의회장 안이 잠시 술렁거립니다. 그 때 바울은 공의회 구성원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모두 함께 있다는 것을 떠올랐습니다. 물론 산헤드린 공의회의 권위를 생각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구성원들의 배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공동체에서 행정적이고 표면적인 영향력을 가진 그룹은 사두개인들입니다. 이들은 모세 오경만을 절대적인 권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세 오경에는 율법의 명령은 있었지만 아쉽게도 ‘부활의 약속’이나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천사’를 직접 언급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부활이나 천사, 혹은 영의 실질적인 활동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두개인들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눈에 보이는 사실에 집착하는 냉정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에 맞춰 비유를 하자면, 관료나 공직자와 같은 자리에 있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대체로 로마정부와 유대지역의 정치적인 담합과 협상을 담당했던 이들이 바로 사두개인들었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모세오경을 포함한 구약의 예언서들과 역사서, 그리고 성문서들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율법과 더불어 “계시”와 “예언”, 그리고 “천사”와 “영혼의 부활”은 매우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다고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사나 혹은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직접 당신의 말씀을 전하시고 유대공동체와 개인의 활동에 적극 개입하신다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교육자나 서기관들이 대체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울도 스승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말하는데요. 바로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영적인 일들에 큰 관심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산헤드린 공의회는 한 쪽의 의견만을 수렴하는 곳이 아니고, 유대인 공동체의 양(二つの)당파(とうは)를 모두 수용하는 최고의결기구였습니다. 의회이면서 또한 재판정이기도 했는데요. 바울의 마음에 감동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되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직관적으로 또다른 의미로 보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을 더 명료하게 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요. 뇌의 활동을 연구하는 인지심리학자가 AI와 인간 뇌를 비교하는 강연을 하다가 청중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요.
자... 여러분, 대한민국의 수도가 어디지요? (서울), 그럼 일본의 수도는? (도쿄), 미국은? (워싱턴 D.C), 자 그럼 코트디부아르의 수도는? (몰라요)... 이 때 이런 질문을 받으면 AI는 자신의 저장소에 있는 모든 데이터를 모두 검색을 한 후에 답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뇌는 자신의 모든 기억을 샅샅이 뒤져 본 뒤에 답하지 않습니다. 만일 어디서 한 번 들어본 기억이 있더라도... 바로 답할 수 없는 상황이면 고민하거나 생각하며 뇌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즉답을 하지요.
이처럼 사람의 뇌는 기계와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욕구에 의해서 보는 것을 결정합니다. 말하고 답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즉시 결정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뇌활동의 구조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직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을 여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은 이런 직관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직관이 그를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직관적으로 보게 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인데요. 성령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주관하시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특히 오늘 본문의 바울처럼 곤경이나 분쟁, 혹은 논쟁의 자리에 섰을 때에도 그 말할 것을 성령님이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이미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눅 12:11-12)
바울은 당파와 교리의 해석으로 갈라져 평소에도 언쟁이 끊이지 않던 탐욕스런 유대인 지도자들의 고질병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 당파싸움의 피해자인 것을 이야기하며 변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양 당파 사이에 잠시 가라앉아 있던 다툼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 7절에 그들 가운데 “다툼이 일어나, 회중이 나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런 모습은 당시 유대인들 공동체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분쟁과 다툼, 그리고 파당과 정쟁이 있잖아요. 전쟁이 일어납니다. 서로를 욕하지요. 분파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를 따돌립니다.
심지어 교회들과 크리스천들도 그런 당파와 진영으로 나뉘어 갈등하고 미워하는 모습의 역사가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을 보며 뼈저리게 반성하고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초기 기독교에도 그런 면모가 있었음을 성경은 있는 그대로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한 파벌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당파가 생기기 시작한 것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전 1:11)
12절~17절까지 바울은 교회가 분열하고 파당을 만드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뜻과 맞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파당을 만들고 분열하며 다툼을 행하는 것은 아직 믿음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 3:3)
바울이 이렇게 파당과 분열과 다툼에 대해서 노여워하는 것에는 오늘 본문의 경험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 칠한 무덤과 같은 욕심으로 가득 찬 외식적인 종교생활은 자신들의 교리와 전통을 지키느라 서로의 교리를 폄훼하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정쟁으로 나타난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단지 유대인들의 문제도 아니고, 세속의 정치와 혹은 국제관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이 땅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정말로 중요한 것으로 하나되지 못하여, 파당을 짓고 분파(파벌)를 만들어 분열하고 분쟁하기에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코 행복하고 지혜로운 일상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3)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복음으로 평화롭게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이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 말씀을 소홀히 여긴다면 우리도 유대인 지도자들과 마찬가지 욕심에 이끌려 사는 회칠한 무덤처럼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외식하는 신앙에 매몰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을 받습니다. 바울은 성찬, 즉 주의 만찬을 받을 때에는 파당과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고전 11:19-20)
이 말씀은 파당과 분열을 당연히 여기고, 오히려 그렇게 분열되는 것이나, 자신의 분파만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교회에 생기면 참된 성찬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복음으로 주님과 한 몸이 되고, 지체들과 하나 되었다는 믿음을 지키지 못하면, 주의 만찬인 성찬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성찬을 받는 것은 단지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신비로운 일을 경험하기 위한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찢기신 희생으로 완성된 구원의 약속인 복음에 동참한다는 의미와 함께 복음의 영역 즉 구원의 자리에 나를 포함시켜 주신 주님의 그 몸인 교회가 서로 하나된 것을 지킨다는 결의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유대인의 분열을 활용하여 곤경에서 벗어났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눈과 귀와 입을 열어 주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가 분열하더라도 복음을 믿는 구원의 방주인 교회는 분열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된 것을 굳게 지켜야 함을 다시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울이 유대인 지도자들의 분열하는 틈에서 벗어나 자신의 소명을 따라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처럼, 우리도 이 분열하고, 정쟁하고, 시기하고, 분쟁하는 시대의 흐름 안에서 벗어날 길을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2,000여년 전에 바울이 담대하고도 넉넉한 마음으로 지켜냈던 소명과 사명의 길에 함께 동참하고 동역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분쟁과 논쟁, 그리고 분열과 당파의 갈등 가운데 섰습니다. 하지만, 그 갈등이 오히려 바울의 길을 더욱 분명하게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때론 성도의 삶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과 정쟁, 그리고 진영논리의 분쟁과 반목으로 인해 괴로움과 고통의 한 가운데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도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임재하심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다툼과 갈등의 현장에도 주님의 은혜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바울에게 유대인 간의 갈등이 선교의 문을 열어 주는 촉진제가 된 것처럼,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갖가지 갈등과 분열과 논쟁과 분쟁도 우리의 선교적 삶과 사람답고 아름다운 삶의 길을 여는 원동력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다만 저와 여러분은 오늘 바울이 보여준 용기를 배워 성령께서 하실 말씀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살며, 행복한 인생을 주님 앞에 하루에 하루만큼 쌓아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