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월명암 부설거사와 묘화부인
부설거사와 묘화부인
경주에서 태어난 부설거사는 계행과 경학에 뛰어났으며, 도반인 영조, 영희 스님과 함께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도를 하셨던 분이다.
『부설수좌, 빨리 걸읍시다. 이렇게 가다간 해전에 마을에 이르기가 어려울 것 같소.』
『공부하는 수좌가 뭘 그리 마음이 바쁘오.』
때는 통일신라 신문왕 시절. 부설, 영희, 영조 등 세 수좌는 여름 안거에 들기 위해 전라도 변산을 거쳐 오대산으로 가고 있었다.
그 중 우리나라 거사선(禪)의 대표적 인물로 자주 거론되는 부설은 본래 불국사 스님이었다.
경주 태생으로 불국사에서 원경이란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전국 각지를 두루 돌며 열심히 수도하던 중 쌍선봉 아래 조그만 암자를 짓고 10년간 홀로 공부했다.
그러다 도반들이 찾아와 오대산에 들어가 대중과 함께 정진하자는 제의에 선뜻 자리를 털고 일어선 것이었다.
걸음을 재촉하는 두 도반과 함께 그날 밤 부설은 지금의 김제 성덕면 부설 지역의 무구원이라는 집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다.
불심이 지극하였던 무구원은 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하고 밤새 불법을 청해 듣게 된다.
무구원에게는 총명하고 미색이 뛰어난 19살의 묘화라는 벙어리 딸이 있었다.
그런데 이날 부설의 법문을 듣고 말문이 열리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음력 3월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 부설이 잠시 뜰에 나와 거닐고 있으려니 어느새 다가왔는지 주인집 딸이 옆에 서 있었다.
『스님, 언제 떠나시나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납니다.』
19세쯤 되어 보이는 묘화는 스님에게 무슨 말인가 할 듯하면서 선뜻 말을 못한 채 망연히 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가씨, 소승에게 무슨 할말이 있으신지요?』
잠시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던 묘화는 중대한 결심이나 한 듯 입을 열었다.
『스님, 떠나지 마옵소서.』
『아니, 떠나지 말라니요?』
『소녀 저녁 무렵 스님을 처음 뵙는 순간 평생 지아비로 모시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설은 뜻밖의 말에 내심 크게 놀랐으나 조용한 어조로 타일렀다.
『그 무슨 철없는 말이오. 소승은 큰 뜻을 품은 수도승이 아닙니까?』
『스님, 제가 어찌 그걸 모르겠사옵니까. 하오나….』
스님은 과년한 처녀의 심중을 헤아리는 듯 다시 일렀다.
『그대의 애끓는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허나 이 사람은 도반과 함께 오대산으로 공부하러 가는 길인데 어찌 장부의 뜻을 굽혀 그대의 청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스님의 장하신 뜻을 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장차 도통하여 많은 중생을 구하실 스님이 작은 계집 하나 구해 주지 못한다면 어찌 큰 뜻을 이루실 수가 있겠습니까?』
단정한 용모에 재기와 덕기를 겸비한 묘화는 결사적으로 애원했다.
부설은 그녀의 끈덕진 호소에 감동하여 그녀와 혼인하기로 결심했다.
부설은 묘화와 결혼하여 지금의 김제군 성덕면 성덕리 고련부락에서 살았다.
그 마을에는 이상하게도 늘 눈이 떠돌아다니므로 부설은 마을 이름을 부설촌이라 했고, 자기 이름도 부설이라 불렀다.
부설과 묘화는 부부의 연을 맺은 다음 등운과 월명을 낳았다.
그러나 부설은 아내와 함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망해사에 기거하다 내변산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수도에 전념하였다.
중생제도를 위해 환속을 하였지만, 환속 중에서도 끊임없는 수도로 깨달음의 길에 이르게 된다.
한참을 지난 후 지난 날의 도반인 영조와 영희가 오대산에서 수도를 마치고 부설을 찾아왔다.
『우리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네. 가장 공부를 잘해 장래가 촉망되던 자네가 혹이 몇 씩이나 붙은 낙오자가 되다니….』
도반들은 부설이 안됐다는 듯 측은한 어조로 말했다.
옆에서 이 말을 들은 묘화 부인은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두 분 스님께서 공부의 도가 높은 듯한데 그러면 저희집 어른과 한번 겨뤄 보시면 어떨까요?』
영희, 영조 스님은 어떻게 도를 겨루자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도 한편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선뜻 허락했다.
이때 부설은 아들 등운에게 병 3개에 물을 가득히 담아 벽에 걸어놓고는 물만 벽에 매달려 있고 병은 땅에 떨어지게 하자는 문제를 냈다.
질그릇 병 세 개에 물을 가득 채워서 대들보 위에 달아두게 한 후, 영조와 영희와 더불어 도력을 시험하게 되는데 영조와 영희가 병을 돌로 치자 물이 아래로 흘러내렸는데, 부설이 병을 치자 병은 깨어지고 물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이때 부설은 영조와 영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환신(幻身)이 생멸(生滅)을 따라서 옮는 것이 병이 부서지는 것과 같고 진성(眞性)이 본래(靈明)하여 상주(常主)하는 것은 물이 허공에 달린 것과 같다.
이렇게 부설은 자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이들에게 보이고 나서 단정히 앉아서 열반에 들었다.
이러한 부설의 삶을 목격한 아들 등운(登雲)은 충청도 일원에서 크게 법을 펼친 유명한 조사(祖師)가 되었다.
딸 월명(月明) 또한 수도를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월명이 수도한 곳이 지금 부안의 월명암인 것이다.
묘화부인 또한 부설원을 세우고 부설거사의 명복을 빌다가 용맹정진을 다해 110세 까지 장수를 누리다가 고요히 입적하였다.
이와 같이 부설거사는 그의 부인 묘화와 아들 등운, 딸 월명 등 일가족이 모두 해탈하여 호남 충청 지방에서 법을 진작시키는 크나 큰 자취를 남긴다.
가족전체가 해탈을 이룬 것은 유마거사나 방거사와는 다른 일대 사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