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가치를 담은 문화
2024. 8. 15(주일낮예배) 사도행전 2:41-47
한국교회사를 보면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승동교회 이야기이다. 18934년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지금의 을지로 1가에 곤당골교회(고운담 마을)를 개척한다. 그리고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양반은 물론이고, 중인과 천민까지 다 전도를 하였다. 그때 백정 박씨는 자신은 비록 백정의 인생을 살지만, 자기 아들은 백정의 신분을 벗어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공부만 하고 예배는 하지 마라고 당부한다. 그래서 백정 박씨의 아들ㅇ느 교회에서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는데, 백정 박씨가 콜레라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된 것이다. 그때 박씨의 아들은 사무엘 무어 선교사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였고,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당시 고종의 주치의였던 올리버 에버슨(Oliver R. Avison)에게 부탁하여 백정 박씨를 치료하게 한다. 그래서 살아난 백정 박씨는 자신과 가족들을 데리고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백정 박씨에게 박성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자 곤당골교회 다니던 양반들이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교회를 나가 따로 홍문수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성도의 절반 이상이 교회를 나가버리자 박성춘은 백정도 사람취급해 주는 곳이 교회라고 하면서 전도하였다. 그래서 곤당골교회는 백정들로 가득차게 되어서 백정교회로 불리웠다고 한다.
그런데 1898년 백정들이 모여 예배하는 곤당골교회에 불이 나서 곤당골 교회는 인사동에 새롭게 교회당을 짓게 되었다. 그렇게 새롭게 교회당을 짓고 있을 때 홍문수골교회 양반들이 돌아와서 함께 교회를 세운다. 그 교회가 바로 승동교회이다. 그리고 1911년에 승동교회는 최초의 장로를 세웠는데, 그때 피택된 장로가 백정 박성출이었다. 그리고 박성출의 아들 박봉출은 1900년에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에 졸업하여 한국 최초의 양의사 7명 중에 한명이 된다. 그리고 두만강 위 간도에 숭신학교를 세우고, 대한국민회에 소속되어 군사령부 유일한 군의관으로 일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한국교회사에 나온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한국의 기독교는 조선에 있었던 양반과 쌍놈의 계급사회를 철폐한다. 그래서 쌍놈도 공부하여 의사가 되고, 또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한국의 기독교는 이화학당을 세워서 여성에게도 배움과 역할을 주었다. 이것이 한국의 기독교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 사회를 새롭게 하는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면 지금도 한국교회는 세상을 새롭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빛을 만드셨다.
왜 하나님은 빛을 제일 먼저 창조하였겠는가? 시력이 가장 좋은 동물은 타조라고 한다. 초등학생의 주먹보다 더 큰 안구를 가지고 있는 타조의 시력은 20.0으로 4Km 밖에 있는 동물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시력이 좋은 동물은 매이다. 9.0의 시력을 가진 매는 높은 하늘에서 먹잇감을 발견하여 사냥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타조와 매에 비하면 사람의 시력은 형편없다. 보통 사람은 1.0의 시력이면 불편함 없이 살아가지만, 몽골사람 중에는 4.0-6.0의 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정도는 5.0의 독수리의 시력보다 더 좋은 것이다.
그런데 시력이 좋다고 다 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빛이 없으면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아무 것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빛을 만드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된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만든 것을 보고 하나님의 크고 위대함을 알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일 마지막 날에 아담을 만드시고 그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다섯째날에 물고기와 새들을 창조한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22절)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스리라는 명령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고 오직 아담에게만 하였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다스린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는 마샬과 라다(רָדָה)가 있다. 마샬은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주권으로 다스릴 때 사용하는 단어이고, 라다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피조물을 다스릴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쉽게 설명하면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보고 아는 아담은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만물을 다스려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아담의 이 사명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창세기 6장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고 기록한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하나님이 주신 만물을 잘 다스리는 사명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욕구를 채우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때를 성경은 죄악이 관영한 시대라고 말씀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을 물로써 심판하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사사기도 나타난다.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족속에게 고통을당해야 했던 이유는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가나안 땅을 다스려야 했다. 그런데 사사시대 이스라엘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주변국가로 인하여 고통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고, 또 사사시대에 나라가 고통을 당한 이유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의 삶의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징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한 신자가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옆에 앉은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었는데, 옆에 앉은 사람은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하였다. 그래서 신자는 혹시 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를 물었더니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은 고리타분한 성경을 왜 읽느냐?고 빈정거렸다. 그렇게 빈정거리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신자는 그러면 기독영화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돈만 있으면 재미있게 사는 세상에 쓸데없이 재미도 없는 기독교 영화를 왜 보겠냐?고 했다. 이 말을 듣던 신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무시론자이군요.
그러면 교회가 세상에서 무시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보시기 바란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은 새 술에 취하였다고 그들을 조롱하였다. 그렇게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롱할 때 베드로는 일어나서 설교하자 그들은 형제여 어찌할꼬? 하면서 베드로에게 나아온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의 말에 따라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3천명이나 되었다(41절). 그리고 우리 성경에는 없지만, 42절은 δὲ(그러나)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그리고 43절, 44절, 47절 중반에도 계속하여 δὲ가 기록된다. 누가가 δὲ 라는 접속사를 반복한 것은 앞의 이야기보다 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합니다 라는 강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42절, 43절, 44절, 47절을 읽기 바란다.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2)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 2:44-47上)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행 2:47하)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47절下 기록된 주께서 구원 받은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하기 위하여 ①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고, 떡을 떼며, ②오로지 기도하였고, 또 ③사도들을 통하여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고,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자기의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그러한 삶이 있었다는 것이다.
저는 이것을 문화라고 부르고 싶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최고의 가치인 복음을 가진 교회공동체 안에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고 떡을 떼는 문화가 있었고, 또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이 능력이다는 것이 나타나는 문화가 있었고, 또 모이는 문화,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모습인가? 그 당시 유대인들도 구제를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사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구제함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었다. 그런데 초대예루살렘교회는 자기의 의가 아니라, 말씀에 따라 서로의 필요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당시 유대사회와 교회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회가 최고의 가치를 가치되게 하는 교회가 아니겠는가?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개사한 노래가 있다. 먼저 들어보기 바란다.
유튜브 구독자 수 많지 않고, 소향같은 고음은 없어도
행복 주택은 떨어지고 당장 내 월세가 없어도
밥 잘사는 주는 오빠없고, 결혼할 남자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이것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 사람의 삶이 아니겠는가? 최고의 가치를 가진 사람은 어떠한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기쁨으로 모이기를 기뻐하고, 또 내 필요가 아니라, 형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헌신하는 모습이 있는 것이다.
이번 명절에 이러한 최고의 가치를 가진 사람의 문화를 누리고 전파할 수 있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이제 최고의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내어야 하는 아름다운 문화를 세워가는 자여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