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유학을 향한 나의 꿈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외국을 향한 나의 꿈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외국 상선을 타고서라도 외국이란 나라들을 탐구하고 싶었다. 그 당시 좌절됐지만 대학교에서 유학하여 돌아온 교수님들의 박식과 학식을 통해 그 꿈은 구체적으로 살아났다. 결혼한 후 마침내 이룬 유학의 길은 오랜 세월을 보냈다. 유학을 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나 외에 다른 민족과 문화에 속한 사람들의 실상을 알고 싶었고, 그리스도교 문화와 신앙이 한국 문화에 낯설었을 텐데, 지금도 낯설지만, 어떤 자세와 의식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관한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신학 교수직무를 수행하면서 난 많은 충격을 받곤 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난 외국 문화에 젖혀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충격이었다. 아직도 한국 문화와 갈등을 빚고 있지만 귀국 당시엔 어땠을지 독자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난 변화된 나 자신보다도 변화된 한국 문화에 적응하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아직도 그렇다. 도대체 한국 문화가 무엇인지 설명하라면 딱히 누구를 통해 알 수 있고, 실제로 그 설명이 현실적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선 규정할만한 답변을 듣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한국 문화가 많이 변화됐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한국 문화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문화만 아니라 정신의 의식도 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은 변화 없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합의를 유출해 내는 재간이나 험담하는 교활함이나 극단적 이기심은 문화든 의식이든 언제나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문화는 어떨까? 신앙이 시대마다 바뀌어야 하나? 20세기 철학자 샤르트르는 격동의 세계 변화를 경험한 자이다.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세상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인류는 그 바다에서 생존하기 위해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세상살이는 문화나 현상의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그래야 더 편하고 유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신앙도 그래야 하나? 신앙이 시대에 순응하고 개인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달아야 하나? 난 역사를 공부하는 학도로서 아니라고 본다. 신앙은 영원불변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시대마다 변하는 족장 시대, 광야시대, 정복시대, 왕국시대, 포로시대였던가? 불변하게 요구하거나 실행해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변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오두방정을 떨지만 불변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규율과 규정을 따라 규칙적으로 살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도 아니고 신념도 아니다.
난 한 개인으로서 불변한 신앙 원리와 삶을 추구해 왔다. 내가 그런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실제 역사에 민감했다. 도서관 지식을 팔아먹는 장사치가 아니라 실제로 경험한 것을 될 수 있으면 명시하고 따르려고 노력했다. 여전히 그 갈망과 미흡함을 느낀다. 언제나 채워 만족할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양심의 가책이 덜 한 정도로 살아가고 싶다. 그 가책에서 자유한다는 것은 세상살이에서 불가능하지만 가능하다면, 이상과 현실의 간격을 좁히고 싶은 생각을 늘 한다.
신앙은 실제이지 이상이 아니다. 신앙은 불변하지 기투가 아니다. 신앙은 진리를 추구하지 유익을 따르지 않는다. 신앙은 영원의 하나님을 소망하지 세상의 영예를 따르지 않는다. 신앙은 타락성과의 전투를 치르는 것이지 안정과 평정을 누리려 하지 않는다. 신앙은 하늘의 삶을 목적지로 삼는 것이지 세상의 안락을 꿈꾸지 않는다. 신앙은 늘 배워서 진리가 체득하게끔 하는 것이지 단회적으로 살지 않는다. 신앙은 분명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지 구렁이처럼 대충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