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소설
아버지의 壽衣
이원우 /<문학가 비평> 운영 이사 ‧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 국제PEN한국본부이사‧ 경기PEN운영위원 ‧한국문협 문인복지워원
내 나이 어느덧 마흔을 넘겼다. 중년 부인이 된 셈이다. 서울 근교, 경기도 어느 도시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친정 부모를 모시고 있으니, 아들 녀석 둘을 맘 놓고 두 분에게 맡겨 두고 출근한다. 누가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는데, 고백하는 건 우스꽝스럽지만 난 고등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친다. 남편은 회사원이다. 남편도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덕분에‘안심(安心)’이라는 두 글자, 그 울타리 안에서 일상을 보낸다.
그래서인지 아들 녀석들은 무럭무럭 잘 자리고 있다. 각기 중학생과 초등학생이라, 가끔 다툴 수밖에. 걱정이 안 되느냐고? 천만에 말씀이다. 우애를 두텁게 하는 과정이라며 되레 흐뭇하게 여긴다. 두 녀석의 사이에, 부모들 그러니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개입 혹은 관여, 거중 조정함으로써 우리 식구들이 좋아하는 말 그대로 매사가 해피엔딩이다.
아버지는 한마디로 별다른 사람이다. 이 말을 하면 나더러 불효 아니냐며 오해를 할지 모르지만, 아버지에겐 그 형용사가 참 어울린다. 물론 당신을 뭉뚱그려 대변(代辯)할 표현이 있을지 모르지만….예를 들어 ‘억척스러운’, ‘외골수’ 등등.
며칠 전 제헌절이었다. 제헌절을 이야기를 서두에 끄집어내다니, 우습긴 하다. 하지만 무슨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하는 나를 흉보아도 좋다. 이렇게 잡문 한 편이라도 꾸며내어 내 아버지를 향한 여럿의 의아심에 항변이라도 하고 싶다. 그래 나는 이를 악물고 컴퓨터 앞에 앉은 것이다. 학교에는 하루 연가를 내어 놓았다. 코로나 19 환자가 생겨 학교에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남편은 일곱 시 반을 조금 넘기면 집을 나선다. 자기 자동차를 한 시간 반 정도 운전해야 하는 시흥에 직장이 있기 때문이다. 한데 제헌절 아침 남편이 현관문을 여는 소리를 잠결에 어렴풋이 듣는가 싶었는데, 이어 심상찮은 소음이 내 귓전을 파고드는 게 아닌가? 나는 화들짝 놀라 운동복 차림으로 거실로 나왔다.
아니나 다르랴. 아버지와 어머니 등 두 분은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거기서 벌이고 있었던 거다. 아버지는 군복을 입고 군모를 쓴 채였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도우는 중이었고. 아버지는 이미 밑바닥을 깨끗이 닦아 놓았던 군화를 신는 중이었다. 한데 발이 부어서 그런지 잘 안 들어가 고생을 하는 모양이었다.
두 분의 그런 모습이 내게는 그런데 조금도 낯설지 않았으니, 그저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애써 편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지난 삼일절에도 현충일에도 그랬었다. 6월 25일 아침엔들 예외일 수 있었으랴. 여기서 이런 아버지를 두고 주위에서 수군덕거리는 이런 몇 마디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네 아버지는 괴짜이시다.”
이는 이웃이 하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제사 때 일가친척들이 모이면 이런 걸 화두로 삼는다. 아버지 손위인 고모나 큰아버지가 이런 농담을 곧잘 한다.
“자기가 제대한 부대 쪽으로 바지춤도 내리지 않는다는데, 네 아버지는 그 반대니 정말 희한한 사람인 것 같다.”
“명예 중사 진급 이야기가 육군본부에서 있었는데, 그걸 마다했다니 박 선생 아버지는 어쩌면 실속을 전혀 모르는 한갓 파인(巴人)인지도 모르지, 안 그래?”
내 아버지를 그렇게 폄훼(?)해도 나는 별로 불쾌하지 않다. 그저 예사롭게 그리고 건성으로 듣는다. 왜냐고? 그건 엄연한, 변명 따위로 깨부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재가 부족한 내가-나는 생물 선생이니까 더욱 그렇다.-이 ‘아버지의 수의’의 끝 자를 쓰고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읽어 주는 사람들은 이해하리라, 그 당위성을 말이다.
다시 그날 거실 풍경.
아버지는 이윽고 정말 나무랄 데 없는 노병이 되어 있었다. 외관상으로 말이다. 게다가 얼굴 군데군데에 적당하게 번진 검버섯은 말이다. ‘노(老)’와 ‘병(兵)’ 두 글자로 이뤄진 ‘결코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언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징표이고도 남았다. 아니나 다르랴.
“Old soldiers never die. They only fade away!”
나는 두 분 앞에서 맥아더 장군의 흉내를 기어코 내고 말았다. 두 분은 흐뭇하다는 표정을 내게 보내 주었다. 나는 군모를 쓴 상반신 사진이 인쇄된 아버지의 명함을 테이블 서랍에서 한 장 꺼내어 당신 고유(固有)의 문구를 크게 읽었다.
“노병은 일흔을 넘겨야 새로워진다!”
맞다! 아버지는 일흔 살 때부터 그 복장으로 헤아리기 힘들다 할 정도로 군부대에 드나들며 장병들과 부둥켜안거나 뒹굴었다. 그런가 하면 몸은 늙을수록 아버지는 전우들을 위하는 당신 혼자만의 방안을 마련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지내왔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승을 떠나는 날엔 군 장병을 위한 특별한 제안이라도 할지 모른다.
아니 그건 추정이 아니라 나의 확신이다. 그건 당신이 항상 주장하는 병영문학(혹은 전쟁문학)의 정착 내지 확산을 도모하는 일과 관련이 있으리라. ‘전우’가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는 문학 말이다. 아동문학이 어린이의 삶을 기리는 어른(작가)들의 글임을 떠올려 보면 내 말에 더러는 긍정을 하리라.
정말 여기서 잠깐! 당신의 ‘전우’는 생사를 초월해서 적용된다. 먼저 간 임(호국 영령 내지 전몰장병)들은 물론 지금도 총검 혹은 펜을 움켜쥐거나 밤낮 없이 경계 및 작전 임무에 여념이 없는 장병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인 것이다. 당신이 어지간한 현충원이나 호국원을 찾는 것은 그 정신을 살리려는 의도된 행동이다.
잠깐 상념에 젖어 있는 동안 어머니는 곱게 보관해 놓았던 태극기를 봉(棒)째 꺼내서는 게양을 했다. 자못 엄숙한 표정의 두 분을 보자 나도 얼른 내 방에 들어가 정장으로 바꿔 입을 수밖에. 그런 소란이 아이 둘의 잠도 깨워버렸다. 두 녀석이 이 거창한 국기 게양식에 합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가 군부대에 출입하거나 행사에 참석하면서 얻어 온 하사 계급장이 달린 군모까지 아들 두 녀석이 쓰고 보니, 그럴싸하다는 분위기에 모두가 동화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곧장 이어졌다. 아버지가 말한 것이다.
“우리 오늘은 정말 제헌절 기념식까지는 못 가더라도 제헌절 노래는 부르자꾸나.”
뉘라서 아버지의 엄명을 거역할 것인가? 큰애가 피아노 앞에 앉고, 나머지 넷은 태극기 수기(手旗)를 각기 들었다. 수기? 그것 또한 마찬가지로 당신이 서울에서 열리는 각종 경축식 등에 갔다가 챙겨온 것이다. 내친김에 얘기지만, 우리 집 구석구석에 그 수기가 한가득이다.
드디어 큰애의 전주가 시작되었다, 레도솔도 미레 미미레도 솔솔라레도
비구를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삼백 예순 남은 일이 하늘 뜻 그대로였다. 오천 만 한결같이 지킬 연약 이루니/ 옛길에 새걸음으로 발맞추리라/ 이 날은 대한 민국 억만년의 터다/ 대한민국 억만년의 터
노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초인종 소리가 나길래 문을 열어보았더니 아침 청년이다. 지금은 동사무소에서 공익근무를 하는데, 한 달만 지내면 제대를 한다고 했었다. 청년의 손엔 삶은 옥수수가 담긴 쟁반이 들려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청년은 별 놀라지도 않고 쟁반을 내게 건네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그런 청년에게 잠시 들어왔다 가라는 눈짓을 했다.
아버지는 식탁에 앉은 청년에게 녹차 한 잔을 달여서 대접을 했다. 정약용이 갈파한 ‘차를 마시는 국민은 흥한다’는 이야기를 청년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던 터다. 말하지만 아버지의 차(茶) 제자이기도 한 청년이다. 다소곳한 자세로 차 한 모금을 마신 청년은 조심스럽게 아버지께 한마디 했다.
“할아버진 정말 대단하세요. 몇 년째 댁에서 이런 간이 기념식 혹은 경축식을 올리다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던걸요. 동대(예비군 중대를 말하는 듯)에서도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가? 혹시 비정상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진 않던가?”
“그러기에는 할아버지의 일상이 너무나 군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이웃이나 친구가 있다면 그가 정신이 아니지요.”
“그건 그렇고. 자네 언제 25사단 대대에 갈 텐가? 파주 말일세. 나와의 약속이 있으이. 옛날 ‘장마루촌의 이발사’라는 영화가 있었다고 했는데 기억나는가? 자네가 그 부대에 복무할 때, 면회 가서 점심 사 주기로 약속했었는데, 그걸 못 지켰네.”
“저도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할아버지가 그 시절 이후의 몇 십 년 세월을 소재로 글을 쓰겠다고 하셨습니다. 제대하면 제가 모시고 갈게요.”
“그러게나.”
그랬다. 내가 나기도 전, 아버지는 그 영화를 엄마랑 같이 감상했다고 했다. 주인공이 잔장에서 싸우다가 척추엔가 부상을 입고 의병 제대를 했는데, 성 불구자가 되었던 것! 그러나 둘 아이엔 약간의 오해만 있었을 뿐 둘은 헤어지지 않았더라나?
참 앞집 청년은 25사단 예하 대대에 일병으로 복무할 때 허리를 다쳐 귀휴 조치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서 일정 기간의 치료를 받았다. 예후가 좋아 이번에 군 복무를 동대(洞隊)에서 마치게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나도 들어서 대강은 알고 있다.
총각이 돌아가고 난 뒤에 아버지가 말했다.
“알아 둬야 할 상식이야. 제헌절 노래는 정인보 선생이 작사하신 거야. 독립운동가요 한학자이셨어, 그분은. 우리가 놀랄 일 하나. ‘삼일절 노래’ , ‘제헌절 노래’, ‘광복절 노래’, ‘개천절 노래’ , ‘한글날 노래’ 들 중 마지막 ‘한글날 노래’만 빼고 그분이 작사하셨다는 사실….‘한글날 노래’야 최현배 선생이 작사하셨고. 그 두 분이야말로 의식가(儀式歌) 하나만으로도 우리 국민의 나라 사랑에 깊은 영향을 미치셨지.”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군요.”
“그분에 못지않은 분을 더 들라면 ‘비목’의 한명희 선생이셔. 너희들 알지? 그 가곡 말이야. 우리 국민 애창 가곡 1위에 등극했던 기간이 상당히 오래였던, 온 국민의 심금을 적셨던….”
그러더니 당신은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두드리며 ‘비목’을 당신의 목청에 싣는 게 아닌가? 내가 삼가야 할 말이지만, 일찍이 서로 관련이 없는 노래를 열창하는 일은 거의 없어서 의아해 했다. 어머니와 나도 따를 수밖에.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碑木)이여/ 먼 고향 초동(樵童) 친구 두고 온 하늘가/ 서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어때 눈물 나지 않아? 아버지가 이윽고 큰일 하나와 맞닥뜨릴 거야. 상당수의 사람들이 경천동지할…. ‘비목’의 작사가 한명희 선생을 뵙기로 했지. 전쟁문학회 H회장이 동행할 거야.”
“인터뷰세요?”
“뭐, 그런 성격도 띠고 있지만, 그때에야 밝힐 비밀이야. 허허. 조금은 기다려 보려무나.”
아침을 챙겨 든 아버지는 이발을 하러 미용실에 간다며 집을 나섰다. 한참 있다가 어머니 휴대 전화의 신호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두 분의 간단한 대화가 바로 이거다.
“여보 나 오늘 머릴 좀 짧게 깎아야겠어.”
“그러세요. 여름이니 그게 좋겠어요. 당신 장발(長髮)은 아닌 게 아니라 이 한여름에 남들에게도 무더위 그 자체예요.”
한 시간쯤 지났을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아버지를 보고 식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으니….당신의 머리카락은 훈련소 신병(新兵)보다 더 짧았기 때문이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아니 어느 정도지 그게 뭐예요? 당신 나이도 생각하지 않고. 당신이 일등병인 줄 아나 보구려.”
아버지는 한참 있다가 어떤 사실 하나를 밝혔다. 내일 수원의 어느 방송에 출연하기로 했는데, ‘군복 차림’을 약속했다는 게 아닌가? 이왕지사라 마음먹으니 머리까지 부사관 수준으로 다듬어야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조금 설왕설래가 있었을 뿐, 어머니는 이윽고 옷장을 열고 군복을 챙긴다. 침을 뱉어가며 군화에 광을 내었다.
조금 있으려니 등기 우편이 하나 날아들었다. 발신인은 보병 제 5* 사단(향토 사단) 부사단장 K대령이었다. 아버지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 듯한 표정으로 봉투를 뜯었다. 어머니가 내용물이 뭔지 물어 보아도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겹겹이 포장한 걸 모두 벗겨내고 보니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책상 위에 떨어진 것은 놀랍게도 군번인식표와 군번줄이었다. 모두 네 개!
아버지가 설명했다.
“며칠 전에 부사단장에게 부탁했지. 이번에 여섯 번째 큰 행사에 참여하니, 얘들을 좀 보내 달라고 말이야. 왜 네 개냐고? 내가 이등병 때 군번이 51021281이었어. 하사 계급장을 달자 80054895라는 군번을 다시 하나 부여하는 거야. 내가 가끔 이걸 자주 잃어버리니까 부사단장이 아예 두 개씩 만들어 준 거야.”
그러면서 아버지는 군번 인식표를 군번줄에 끼워서는 의기양양하게 목에 거는 거였다. 그러곤 두 개의 모부대 8사단과 26사단의 구호를 외쳤다. 돌격! 공격! 그러면서 당신은 만면에 웃음을 띠우곤
“우연의 일치 치고는 진짜 몇 천 분의 일에 해당하는 우연의 일치야. 26사단이 8사단에 통합되었는데, 26사단의 구호가 ‘공격(攻擊)’이었잖아? 전군(全軍)에서 유일했어. 그런데 8사단은 ‘돌격(突擊)’이란 말이야. 그것도 유일했어. 유일 두 개가 모였으니, 유일무이(唯一無二)라 해야지. 이번에 실은 8사단 본부대 행정 계장 이 중위의 권유대로 본부대 이발관에서 간부(幹部)(?)의 신분에 맞게 이발을 하려 했는데, 코로나 탓에 물거품이 되었지. 하사 이상은 간부야.”
그러고 보니, 아무리 팁 포함 3만원을 치르고, 그것도 미용실에서 다듬은 머리 치곤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는 그날 밤 늦게까지 거울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곤 하였다.
이튿날 오후 한 시쯤 아버지께 카카오톡 택시를 불러 태워 드렸다. 도무지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기가 두려워서임은 말하나마나. ‘왕복 교통편과 대담’ 녹화에 네 시간 정도 소요됨을 아버지는 넌지시 우리에게 일러 주고 떠났다. 아버지는 그날 일곱 시가 지나서야 귀가했다.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에게 3천원을 봉사료라며 손에 쥐어 주었더니, 기사는 무척이나 당황해하더란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에 ‘쾌척’을 하는 손님은 극히 드물다는 말을 덧붙이더란다. 알고 보니 그는 해병대 출신이었더라나? 아버지도 해병대가를 아는 터 둘은 씩씩하게 불렀다. 우리들은 대한의 바다의 용사/ 충무공 순국 정신 가슴에 안고/ 태극기 휘날리며 국토 통일에 힘차게 진군하는 단군의 자손…
그런데 기사 아니 그 전우는 정작 현역으로 복무할 때는 ‘해병대가’보다 ‘해군가’를 더 많이 접했다기에 둘은 다시 그걸 제창했다(해병대는 해군 소속이다).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이틀이 지나서였을까? 방송 전량이 영상으로 카카오톡에 실려 아버지의 스마트폰에 떴다. 우리 아버지라서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호탕한 목소리와 풀을 먹인 군복속의 당당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미지는 역전의 용사처럼 보였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고 하자. 근래 당신은 체중 조절을 한답시고 열심히 걷고 절식을 한 덕분에 살져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진행하는 앵커가 분위기를 잘 이끌어 나갔다. 군번을 끄집어내어 흔들게 하는 재치가 돋보였다. 게다가 말이다. 노래 몇 곡을 몇 소절씩 선보이게 하는 게 아닌가!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는 채명신 장군 묘역 옆에서 부른 ‘전선 야곡’과 ‘비목’이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그분 묘역에 병사들이 같이 묻혀 있습니다. 그렇게 목메 설음을 토하노라면 눈물이 흐릅니다.”
당신이 이승을 떠나기 전에 장기 및 사체 기증을 서약했었던 게 지켜졌으면 한다고 할 때는 숙연해졌다. 딸로서 아버지의 그 말에 동의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당신은 절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면역이 되어 있어서 백 번을 들어도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의 말씀을 일부 전하려니 다시 한 번 전율을 느끼게 된다.
“내 기도는 이렇습니다. 몇 년 사이에 세상을 떠나되 뇌사 상태에 빠지는 과정이 있도록 해 주십사는….오래 이 세상에 머무른다면 내 장기는 설사 뇌사를 거친다 해도 쓸모가 없어져요. 미확인 보도에 의하면, 어느 추기경의 각막을 이식받은 이가 시력 회복을 못 했다더군요. 내 장기 중 심장, 신장, 각막 등은 아직 튼튼합니다. 전장에서 부산당한 전우들에게 이식하게 하고 싶습니다. 설사 사체로만 남아도 그게 그런 전우들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 자료-해부 등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로 쓰였으면 합니다.”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당신에게는 군을 위하여 모든 걸 바칠,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저승에 있는 당신의 혈육 1촌이 이승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군 시절이었다는 걸 써 놓고 숨을 거두었다는 것으로 설명을 줄이자.
우리는 그 대목에서 울었다. 이어 당신이 노래하는 장면이 안 나왔다면, 내 눈물이 방바닥을 적셨으리라. 그만큼 아버지는 노래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상쇄시킨다. 다만 가창(특히 가곡) 기본 요목 중의 하나인 구형(口形) 즉 입모양에 신경을 덜 쓴 듯해서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방송은 ‘멋졌다’는 세 음절로 찬탄(讚嘆)을 받아도 좋을 만했다.
그리고 천려일실(千慮一失)이란 말이 있듯이 편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앵커가 빠뜨렸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여기 옮긴다.
“글쎄 말이다. 도중에 삭발한(?)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그게 시쳇말로 편집되었지 뭐니? 물론 군모(베레모)를 눌러썼으니 머리카락이 얼마나 짧은지 외관상으로 표시가 전혀 나지 않지만, 그동안의 이발관 혹은 미용실에 얽힌 이야기도 한 둘이 아닌데, 쯧쯧.”
사실 그랬었다. 아버지는 삭발과의 특별한 일화를 수없이 가지고 있다. 결혼식 때도 아버지는 스포츠머리를 고집했던 걸 필두로, 남들이 배꼽을 잡을 정도로 변형에 변형을 거듭한 하나의 역사가 그 바탕이다.
그러다 마침내 아버지는 십 수 년 동안 머리를 길러 왔다.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모습이 아버지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군부대와의 행사가 있을라치면 당신은 망설임 없이 바리캉을 머리에 대게 했던 거다,
아버지는 군과 관련된, 아니 당신 자신이 군복을 입은 장면을 녹화한 영상의 조회 수에 관심이 많다. 저 유명한 연예 병사 Y 일병이 조연을 한 어느 프로그램(국방 TV)이 1만 7천여 회를 돌파했음을 당신은 큰 자랑으로 여긴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 식구들에게 유언처럼 강조한다. 당신이 숨을 거두면 그런 영상이 몇 개가 되니, 그 모두를 편집하여 하나로 만들어 빈소에서 틀어 달라는 것.
영상 조회 수의 증가도 순조로웠다. 꺾은선그래프를 그려 보니 삽시간에 치고 올라가더니 열흘이 안 되어 1,200회를 돌파했다. 당신은 말한다. 그렇게 애태우는 목적은 시청자 나아가 국민에게 군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정신을 함양시키는 데에 있다고. ‘나라 사랑’이란 거창한 네 음절 대신, 우리 국민은 모두 군과 관련을 맺고 살다가 죽는다고 강조하는 거다.
다시 한 달 반이 흘렀다. 현역 부사관이나 초급 위관 장교들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자랐다. 보기에 참 좋다. 이제 하사 계급장이 달린 모자를 써도 좋고 벗어도 좋다. 어느 경우든 당신은 대한민국 간부 예비역의 풍모가 여실하게 드러나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어제 아버지가 가족들을 모아 놓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는 게 아닌가?
“머릴 다시 깎아야 할 일이 생겼어. 이번에야 말로 내 고집의 정점을 찍을 때가 되었어.”
모두 어리둥절해 있는데 어머니가 뭔가 짐작이라도 간다는 듯한 표정을 보이더니 반문하는 거였다. 또 아버지가 무슨 일을 벌이는 모양인데, 그 결심을 뉘라서 꺾겠느냐고.
한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한 번만 더 고려해 보라는 게 아닌가? 바리캉을 대지 말고 가위질만으로 다듬어 달라고 부탁하라는 거다, 미용원 원장에게 말이다. 어느 때인지 모르지만 앞으로 보름 안이면 가장 보기 좋은 헤어스타일이라고도 어머니는 덧붙였다. 그제야 아버지는 싱긋 웃더니 어머니의 말에 동의를 했다.
각자의 잠자리에 들 무렵 아버지는 말했다. 가족들을 모두 모으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 순간의 표정은 워낙 진지해서 필설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하자.
“한명희 선생을 만나 뵙기로 했어. ”
“갑자기 한명희 선생은 웬 말씀이세요?”
“우리 가족은 막내(초등 1)까지 알다시피 ‘비목’을 작사하신 분이잖아? 남양주 시인협회 명예회장이 주선을 했는데 말야, 8월 하순 경에 그분 앞에서 ‘비목’을 부르기로 했어.”
“아, 정말 영광이군요. 유튜브나 방송을 통하여 그분의 ‘비목’을 수도 없이 시청했었는데, 전설의 노병 아버지가 그걸 부르시다니 말이에요.”
“누가 아니라니? 여담인데, ‘비목’을 그분 앞에서 직접 부르는 것은 내기 처음일지 모른다는 데에 방점을 찍어야겠지. 전무후무(前無後無)라는 사자성어가 있지. ‘후무’는 모르지만 전무 前無)했다는 건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야.”
“반주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큰 공간은 아니니, 무반주도 괜찮을 거야. 내 생각으론 내가 가끔 들르는 음악 학원 원장에게 피아노 반주를 녹음으로 해서 MR처럼 쓰면 될 거 같아. 휴대 전화에다 말이야.”
우리 기족들은 박수로써 아버지의 ‘비목’ 독창에 환희의 박수를 보냈다. 멋도 모르는 막내가 작은 소리로 ‘야호’를 연발했고.
그러고 나서 아버지가 하는 말을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으니,
"저 군복을 내가 영면에 들 때 수의로 입고 저승으로 떠나고 싶구나. 함의를 알 것 같니?"
아직도 우리는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첫댓글 비목!!
저도 듣고 싶습니다.
맹기호 회장님, 이 카페를 찾느라고 혼이 났습니다. 천신만고--(웃음)
<문학과 비평>에 드나들어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MR을 여러 개 만들어 어디서든 가곡을 불러 올리겠습니다. '기교 혹은 솜씨< 열정'이라는 부등식을 앞세우고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