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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시총서]「시향만리」(2011,제7호)<한국 현대시 창작해설>(1)서지월-'좋은 시 읽기와 좋은 시 쓰기의 실제'
◆서정주 고은 황동규 신동집 박재삼 이근배 오세영 김명인 최승호 원희석 허혜정 권혁웅 최준 정영선 이은림 조말선 박이화 강문숙 윤미전 정이랑 정경진 고희림 서하 김환식 서지월 김승해 이채운 시인
ㅡ서정주 시'滿州에서'
ㅡ고 은 시 '천은사운'
ㅡ황동규 시-'풍장-1'
ㅡ신동집 시 '행인-1'
ㅡ박재삼 시 '맑은 하늘 한복판'
ㅡ이근배 시 '겨울 自然'
ㅡ오세영 시 '矛盾의 흙'
ㅡ김명인 시-‘바다의 아코디언’
ㅡ최승호 시 '공터'
ㅡ원희석 시 '수박씨와 파리'
ㅡ허혜정 시 '밤의 스탠드'
ㅡ권혁웅 시 '굴원에게'
ㅡ최 준 시 '닭'
ㅡ정영선 시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
ㅡ이은림 시 ‘위대한 뼈’
ㅡ조말선 시 '새장'
ㅡ박이화 시 '나의 포로노그라피'
ㅡ강문숙 시 '따뜻한 종이컵'
ㅡ윤미전 시 '손님'
ㅡ정이랑 시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
ㅡ정경진 시 '웅덩이에 고인 물'
ㅡ고희림 시 '지평선에서의 하룻밤'
ㅡ서 하 시-'억새'
ㅡ김환식 시 '가시연꽃'
ㅡ서지월 시 ‘진달래 산천’
ㅡ김승해 시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ㅡ이채운 시 ‘사과알 속의 수행자’
[한국 서지월시인의 현대시 창작해설]
-좋은 시 읽기와 좋은 시 쓰기의 실제-
서 지 월 (현대시창작강의 전공, 한국시인)
좋은 시라는 것에 대한 정답은 없다. 또한 감동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작품을 좋은 시라 명명할 수 있으나 그 감동이라는 것도 꼬집어서 정의를 내리기에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 거기에는 일반적인 통념을 넘어선 전문적인 소양이 깃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전문적인 소양이라 할 수 있는 안목에도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부정하지 못하는 질적으로 우수한 작품은 분명히 존재하며 쉬이 희석되지 않은 특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인은 민족정서와 전통정서를 토대로 하여 줄곧 써 온 서정시인이다. 서두에서 첨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 자신의 시 쓰기에 있어서 서정시 즉 전통시를 쓴다는 말이지, 시 읽기에 있어서는 한국의 여러 부류의 시를 거의 놓치지 않고 세심하리만치 총망라해 읽어왔다고 말 할 수 있다. 내가 서정시를 줄곧 써 왔음에도 불구하고 꼭히 서정시 계열 아닌 작품에서 많은 매력을 느끼는 것도 사실인데, 이는 전반적으로 통털어 말하는 시라는 개념 속에서는 같은 얼굴이기 때문이리라.
이 글은 한국의 명시를 선뵈는 자리가 아니라 시창작에 있어서 보다 유익한 시쓰기를 염두해 두고 그 전제하에서 쓰여지는 것이기에 초점을 탄탄한 문장구가 및 뛰어난 상상력 등을 동반한 시편들로 꾸며 보았다.
이 땅에는 좋은 시도 많고 그렇지 않은 시도 너무나 많음을 느낀다. 그러기에,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우수하다고 보는 시편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시인의 시 위주로 소개하고자 한다. 시창작론이 따로 있겠는가. 한 편 한 편을 놓치지 않고 음미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다 보면 물미가 터져 요령이 생기고 번뜩이는 감성이 유발될 것으로 믿는다.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를 도식적으로 쓸 수 없듯이, 시 읽기의 태도나 시 쓰기의 연마 역시 무작위로 사래 긴 밭을 갈다 보면 언덕 너머의 세상이 보이는 것과 다를 바 없으리라 본다. 한글의 우수성을 말하라면, 한글로 좋은 문학작품을 생산해내는 일도 그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 현대시의 발전이 한글의 빛내는데 공헌하는 일이 될 것으로 믿는다.
부연하자면, 중국 조선족시단에서는 몽롱시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은데 이는 한국시단에서는 낯선 말임엔 틀림없다. 풀이하자면 글자 그대로 몽롱한, 불분명한 상상력의 조합으로 해석된다. 몽롱시를 새로운 시도나 기법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한국 현대시 관점에서 보면 새롭다기 보다 그저 그런 제스츄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정주시인은 시는 늘 새로워야 된다고 했고 황동규시인은 ‘시는 구체적일 때 진실과 만나다’ 고 했고 보면 어떠한 부류나 이즘이 최상일 수는 없을 것으로 안다.
먼저, 서정주의 시 <滿州에서>를 보자.
참 이것은 너무 많은 하눌입니다. 내가 달린들 어데를 가겠읍니까. 紅布와같이 미치기는 쉬웁습니다. 멫 千年을, 오ㅡ 멫 千年을 혼자서 놀고온 사람들이겠습니까.
鍾보단은 차라리 북이있읍니다. 이는 멀리도 안들리는 어쩔수도없는 奢侈입니까. 마지막 부를 이름이 사실은 없었읍니다. 어찌하야 자네는 나보고, 나는 자네보고 웃어야하는것입니까.
바로 말하면 하르삔市같은것은 없었읍니다. 자네도 나도 그런것은 없었읍니다. 무슨 처음의 복숭아꽃 내음새도 말소리도, 病도, 아무껏도 없었습니다.
ㅡ서정주 제2시집『 귀촉도』 에서, 시「滿州에서」전문.
한국에서는 단군 이래 최대의 시인이라는 찬사와 함께 '시의 정부'라까지 칭하며 어떤 말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독보적인 시인으로 접신의 경지에까지 이렀다 하는 서정주의 시이기도 하다. 미당 서정주라는 대시인의 수제자인 황동규시인 역시 고은시인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대시인으로 군림하고 있는데 황동규시인도 미당 서정주시인 팔순잔치 행사장에서,
ㅡ"이 땅에 未堂을 읽지 않고 詩를 쓴 사람 나와 봐라!"
라고 역설했고 보면, 전후무후한 시인임엔 틀림없다.「이 땅(한국문단)에 미당을 읽지 않고 시를 쓴 사람 나와 봐라!」이 말뜻은 한국에서 시를 쓴다면 미당 서정주 시에 영향 안 받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또 미당의 시를 읽지 않고 어떻게 시인이라 자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滿州에서>라는 시 역시 과연 어떻게 쓰여졌는지 분석검토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첫 구절에서 '참 이것은 너무 많은 하눌입니다. 내가 달린들 어데를 가겠읍니까.'라고 읊었다. (시 원문 표기는 당시 표기 그대로인 것 같음) '너무 많은 하눌'이란 그만큼 만주땅이 광활하다는 것을 하늘을 가지와 표현한 것도 예사의 표현이 아니다. <내가 달린들 어데를 가겠읍니까> 역시 만주땅이 너무나 광활한 벌판이기에 가도가도 맨 그 자리 머물러 있는 것과 다름아니리는 말이다. 도입부에서부터 이렇게 겉으로 보기엔 쉬운 산문문장으로 널어놓은 것 같이 보여도 未堂 특유의 필치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어지는 구절은 <紅布(홍포)와같이 미치기는 쉬웁습니다>인데 紅布(홍포)''란 붉은 옷감이니 붉은 비단으로 해석되는데 의미하는 바는 눈에 잘 띄는 즉, 유혹되기 쉽다는 뜻으로 작용함을 알 수있다. 그러니까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만주벌판을 바라보니 감개무량 하다는 의미 그 자체로 보여진다. '멫 千年을, 오ㅡ 멫千年을 혼자서 놀고온 사람들이겠습니까.'에서는 몇 천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그대로 광활한데 '혼자서 놀고온 사람' 즉 누구나 혼자 살아온게 아니라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나라를 형성하며 더불어 역사를 가지고 살아온 땅이라는 것이다. 그런 만주땅인데 벌판은 변함없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으니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이 '鍾보단은 차라리 북이있읍니다.'라고 읊었는데, '종'보다는 '북'이라 했으니 북소리가 웅장하고 멀리 울려퍼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니 만주벌판의 웅장미를 표현하자면 '종'보다는 '북'에 비유될 수 있으며, '있읍니다'라는 어미에서는 그만큼한 큰 울림의 도도한 역사가 존재한다는 의미로 느껴진다. 또한 '이는 멀리도 안들리는 어쩔수도없는 奢侈(사치)입니까.'라 의문형으로 처리했는데 너무나 광활하기에 멀리서는 들리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奢侈(사치)'라는 말이 도입됐는데 '奢侈(사치)'란 꾸밈 또는 매력포인트가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멀리서는 안들리는 너무나도 넓고 끝없는 만주땅이 사치처럼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함부로 쓸 수 없는 과감한 단어 '奢侈(사치)'를 가지고 와 마음대로 갖다 붙이면 좋은 詩語로 자램매김 되는 것이다.
다음 이어지는 구절이 '마지막 부를 이름이 사실은 없었읍니다.'인데 만주땅이 너무나 광활하여 끝도 안보일정도로 펼쳐져 있으니 저 멀리까지 소리쳐도 들리지 않으니 '마지막 부를 이름' 도 아예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하야 자네는 나보고, 나는 자네보고 웃어야하는것입니까' 이 대목을 보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서로 알아볼 수도 없듯이 수인사 나누며 서러 아는 척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만큼 웅장하며 광활한, 그리고 감개무량한 만주땅임을 여러 의미를 부여하는 직조해 낸 것이다.
마지막 연이 되는데 '바로 말하면 하르삔市같은것은 없었읍니다.'를 보면, 이렇게 끝도 없이 넓은 벌판은 현재도 그러하지만 '하르삔市같은' 즉, 도시문명이나 사람들에게 새롭게 형성된,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그대로인 벌판 그 자체뿐이었다는 것이다. '자네도 나도 그런것은 없었읍니다.'에서는 태초에 인간도 존재하지 않은 순수한 대자연 원시의 세계라는 것이다.
'무슨 처음의 복숭아꽃 내음새도 말소리도, 病도, 아무껏도 없었습니다.'라고 끝을 맺고 있는데 이 구절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먼저 '처음의 복숭아꽃' 이런 표현은 未堂 徐廷柱만이 구사해낼 수 있는 재간으로 보여지는데 '처음의 복숭아꽃' 즉, 처음으로 유혹이라는 것도 그리고 인간도 병도 없는 원시 그자체의 순수원시세계가 만주땅이라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는 듯하고 간직하고 있는 만주땅이라는 것이다.역시 현실세계를 직시하면서 근원은 원초적인 생명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는데 이 시의 핵심이 있다 하겠다.
서정주시인은 1939년 만주로 가서 양곡주식회사 간도성 연길시지점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해 용정출장소로 전근 갔으며 이듬해인 1940년 봄에 귀국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주에서 지내며 경험했던 사연을 가지고 또 한 편의 시로 쓴게 있는데 한국에서는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는 <新婦>라는 작품이 있다.
新婦는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新郞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新郞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新婦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 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新婦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新婦방 문을 열고 들여다 보니 新婦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ㅡ서정주 제6시집『 질마재 神話』 에서, 시「新婦」전문.
미당 서정주시인이 생전에 필자에게도 이 시 <新婦>에 대해 피력한 적이 있는데, 만주에 있을 때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재구성해 본 작품이라는 것이다. 물론 들은 이야기이니 내용으로 보면 다를 바 없겠지만 미당 특유의 문체라는데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며 아무나 그 내용을 가지고 와서 쓴다고 시의 품격을 유지하는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미당의 시 <동천(冬天)> 을 두고 한국 현대시사 100년의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하는데 어떤 이는 <新婦> 또한 수작으로 보기도 한다. 알다시피 설화를 배경으로 읊었는데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야 한 둘이겠는가.
주안점은 그 설화의 배경속에서 건져낸 정신사가 관건인 것이다. 이 설화는 민간에서도 많이 전해져 온 것으로 아는데 즉 우리 민족만이 가는 고유정서, 고유풍습이 살아숨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만이 갖는 고유정서란 무엇인가. '사십년인가 오십년'인가 하는 세월이 지나도 신부가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앉아 있'어야 하는 말하자면 평생 수절하며 살아야 하는 과거 우리 한국 여인들의 정조관념과 恨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고유풍습이란, 신부가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기다리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 > 의상이 신부를 상징하는 색채미인 것이다. 한편의 시로서의 역할을 뛰어넘어 우리민족의 얼이라 할 수 있는 고유뮨화를 보는듯 하다.
내가 알기로 서정주 이전 이런 시를 아무도 시도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느 시인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서정주만이 해낼 수 있었던 한국시 위상을 드높인 작품으로 읽힌다. 문체 역시 맛깔스러운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라는 이런 평범한 말이 조화를 이루어 더욱 찰진 문장을 구가하는데 한 몫해 내고 있는가 하면, 마지막 행에서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가 전달의 의미가 아니라 되받아서 '초록 재는 초록 재로 다홍 재는 다홍재로' 분리되어 '내려앉아 버렸다'는 이 놀라운 시각적 표현을 보라. 한 구절도 예사로 다루는 일 없이 능란한 수사(修辭)의 잔치를 벌이기도 하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그 민족의 고유정서라면 이 시 <新婦>는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먼 훗날에도 한민족의 긍지를 손색없이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리라 본다.
다음은 습작기의 고은시인이 들고 찾아온 시를 보고 서정주시인이 『현대문학』지에 추천하여 명실공히 고은시인이 한국시단에 얼굴을 내밀게 된 등단작이라 할 수 있는, 미당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시 <천은사운(泉隱寺韻)>이다.
그이들끼리 살데.
골짜구니 아래도 그 위에도
그들의 얼얼이 떠서
바람으로 들리데.
그이들 솔바람 속의
빈 산허리.
이 가을, 바위를 골라
우는 추녀 끝
뜰에 떨어지는 풍경소리에,
그이들끼리 살데.
이제 돌아와 한번 잊은 뒤,
도로 가고 싶은
그이들의 얼 바람진 산허리.
그이들은 살데. 그이들은 살데
ㅡ고은 시 '천은사운(泉隱寺韻)' 전문.
제목이 시사하듯 천은사 경내의 선경(禪景)같은 고요한 분위기를 경내의 자연을 소재로 추상적 이미지로 전환시킨 수법이 돋보인다. 김소월이나 박목월이 즐겨쓰던 자연친화적인 기법에 운율을 얹은 것에 비해 고은시인은 추상화 시켜 표현하는 기법으로 운율을 얹어 읊고 있다. 시를 잘 보는 미당 서정주시인이 놓칠 리 만무했던 20대 초반 청년 고은의 시였던 것이다.
황동규시인의 시 <풍장(風葬)>이 말하는 생의 끝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이법인데, 그냥 숨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의 노정으로 펼쳐 보이며 색다른 멋이 풍기는 작품으로 읽힌다.
내 세상 뜨면 풍장 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택시에 싣고
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化粧도 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ㅡ황동규의 시-'풍장(風葬)-1' 전문.
풍장으로 귀결되는 이 작품은 ‘옷은 입은 채로 /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그리고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결국 살을 말려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육신인 것이다. 황동규시인의 초탈의 세계는 이렇듯 문명의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데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시의 품격 가운데 그 하나가 표현력에 있다면 황동규의 시에서는 뛰어난 언어구사가 돋보이는데 이 작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손목시계 부서질 때’는 정지는 시간 즉 죽음의 의미이며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조각도 /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달라고 했으니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그 하나하나의 몫이 언어조직 속에 구체화 되어 나타나고 있다. 언젠가 황동규시인이 한 말이 기억난다. ㅡ'시는 구체적일 때 진실과 만난다'라고 했고 보면 말이다.
해방 이후 대구를 대표하는 신동집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해 본다.
길을 가다 발이 무거워 한동안 나무 그늘 돌 위에 쉬어본다. 이마에 밴 땀을 씻으며 아래켠으로 눈을 돌리면 들판을 건너가는 사람의 흰옷이 간혹 조만하게 아른거리고 있다. 이웃 마을이나 읍내로 잠시 나들이 가는 길인지, 그런데 이들은 왜 하나같이 가면은 다시 안 올 행인으로만 보일까. 길은 분명 같은 길이요 내키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길인데.
한동안 나는 생각해 본다 . 지난날 인연 있던 사람들의 일을. 바람이나 잠시 쏘이러 또는 장에나 가듯이 가벼운 인사말로 떠난 사람도 알고 보면 다시 못 올 헤어짐이 될 줄이야. 내일 또 만나자던 웃음 먹은 얼굴이 지금은 해밝은 하늘에만 걸려있는 사람도 있다.
쉬었던 몸을 일으켜 발을 다시 옮기면, 아른거리며 가는 저 들판의 사람 눈에 나도 또한 가면은 아니 올 행인으로나 보일까. 기우는 해그늘에 제비는 돌아가고 철교에 느릿이 화물차는 지난다. 오는지 가는지 구별도 없이.
ㅡ신동집 시 '행인 1' 전문.
'길은 분명 같은 길'이지만 '내키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데 이 시의 핵심이 있다. 바로 '나도 또한 가면은 아니 올 행인으로나 보'이는 것이다. 시인은 관조의 눈으로 세상풍경을 보고 있는데, '행인'이라는 어휘자체가 인간은 누구나 이 땅위에 잠시 머물렀다가는 존재인 것이다. '바람이나 잠시 쏘이러 또는 장에나 가듯이 가벼운 인사말로 떠난 사람' 뿐만 아니라, '내일 또 만나자던 웃음 먹은 얼굴이 지금은 해밝은 하늘에만 걸려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영원한 헤어짐이 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펼쳐지는 풍경이 시인에게는 예사로 비치고 있는게 아니다. 이런 시인의 원숙된 달관의 경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해그늘에 제비는 돌아가고 철교에 느릿이 화물차가 지나는 풍경'이 존재해 있는 지금의 상황이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그 좋은 예라 하겠다.
김소월 서정주 박목월 이래 가장 한국적인 정한을 잘 살린 한의 정서를 가진 시인으로 꼽히는 박재삼시인의 시 <맑은 하늘 한복판 >을 보자.
맑은 하늘 한복판
새소리의 무늬도 놓쳐버리고
한 처녀를 사랑할 힘도 잃어버리고
너댓 살짜리 아기의
발 뻗는 투정으로 울고 싶은 나를
천만뜻밖에도 무기징역을 때려
이만치 떼어 놓고
환장할 듯 환장할 듯
햇빛이 흐르나니,
바람이 흐르나니.
ㅡ박재삼 시 '맑은 하늘 한복판' 전문
'맑은 하늘 한복판'이라면 허공을 뜻하는데 이후 많은 시인들이 비어있는 하공 또는 공중에 대한 시를 썼는데 박재삼시인은 아무것도 없는 맑은 날의 허공 즉 무한대 우주 속에 한 인간의 무기력함을 시인 특유의 서정성 짙은 가락으로 잘 변주해 내고 있다. '한국의 가을 하늘'이 한국인이 누리는 보배이듯이 대자연의 신비가 이처럼 명징하게 울림을 안겨줄 줄이야.
이근배 시 <'겨울 自然>은 어떤가 보자.
나의 자정에도 너는
깨어서 운다.
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
들은 끝없는 눈발 속을 헤맨다.
나의 풀과 나무는 다 어디 갔느냐.
해체되지 않은 영원
떠다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
나의 자정을 부르느냐.
따순 피가 돌던 사랑 하나가
광막한 자연이 되기까지는
자연이 되어 나를 부르기까지는
너의 무광의 죽음,
구름이거나 그 이전의 쓸쓸한 유폐
허나 세상을 깨우고 있는
잠 속에서도 들리는 저 소리는
산이 산이 아닌, 들이 들이 아닌
모두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쁨 같은 울음이 달려드는 것이다.
ㅡ이근배 시 '겨울 自然' 전문.
원시의 대자연의 웅혼함이 여기 있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그래서 다시 시작되는 우주와 생명의 탄생, 그 신비의 세계는 겨울 자정인 한밤, 천지가 흰눈으로 덮어있는 세계인 것이다. 꽃도 나무도 새도 그 모든 형상들마저 흰눈 속에 침묵하며 엎드려 있을 때인 자정은 새로운 세계로 열리는 것이다. 조물주가 만들어낸 화려한 빛깔이나 욕망들을 모두 잠 재운 엄숙한 대자연에 대한 관조적인 시인의 문체가 티없이 번뜩이며 빛난다.
오세영시인 빚어낸 그릇의 시 <矛盾의 흙> 을 보자.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人間은 한번
죽는다.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있는 흙,
누구나 人間은
한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絶對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矛盾의 그릇.
ㅡ오세영 시 '矛盾의 흙' 전문.
'흙이 되기 위하여 / 흙으로 빚어진 그릇'이라 했다. '人間은 한번 죽'듯이 ''깨지는 그릇'의 비유가 참신하다. '인간은 한번 죽'듯이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 순간에 / 바싹 / 깨지는 그릇'이라는 표현이 설득력을 높혀준다. 또한 그릇을 시인은 '살아있는 흙'이라 역설했다. 그릇만이 그러하겠는가. 이 세상 모든 형체가 있는 것은 모순덩어리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데 이 시가 갖는 의미인 것이다.
김명인시인의 ‘바다의 아코디언’을 보면 문장을 휘감는게 예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노래라면 내가 부를 차례라도
너조차 순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리 절며 혼자 부안 격포로 돌 때
갈매기 울음으로 친다면 수수억 톤
파도소리 긁어대던 아코디언이
갯벌 위에 떨어져 있다.
파도는 몇 겁쯤 건반에 얹히더라도
지치거나 병들거나 늙는 법이 없어서
소리로 패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수시로
저의 생멸(生滅)을 거듭할 뿐.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한생애의 내력일 것이니.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
채석에 스몄다 빠져나가는 썰물이
오늘도 석양에 반짝거린다.
고요해지거라. 고요해지거라.
쓰려고 작정하면 어느새 바닥 드러내는
삶과 같아서 뻘 밭 위
무수한 겹주름들.
저물더라도 나머지의 음자리까지
천천치, 천천히 파도소리가 씻어 내리니,
지워진 자취가 비로소 아득해지는
어스름 속으로
누군가 끝없이 아코디언을 펼치고 있다.
ㅡ김명인 시-‘바다의 아코디언’ 전문.
바다의 아코디언이라? 무얼 의미하는가. 쉴 새 없이 주름을 데리고 와 해변가에 부서지는 겹겹의 파도물결를 오래 바라보지 않고는 잘 떠오르지 않는 착상이리라. 파도물살만 데리고 오는 게 아니라 그 물이랑 사이로는 해조음까지 스며들어 함께 오고 있는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천 년 수만 년을 아코디언을 켜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헛된 주름만 수시로 / 저의 생멸(生滅)을 거듭할 뿐'이라 했는가 하면,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 한 생애의 내력일' 것이나, 한 생애에 극한된 몸짓이 아니라는데 있다. 뒷받침해 주는 아주 고급적인 표현으로는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인데, 강한 역설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생멸을 관조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바다를 읽을 수 있다.
최승호의 시인의 <공터>보면 미묘한 표현들을 만날 수 있는데 눈여 보자. 그리고 공터가 깆는 의미도 함께 느껴 보자.
아마 무너뜨릴 수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 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다
공터에 지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늘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발자국을 남긴다해도
그렇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을 자리에 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ㅡ최승호의 시 '공터' 전문.
고요가 공터의 왕이라 했다. 이보다 텅 빈 공간은 없을 것이다. 공터에 풀씨들이 날아와 꽃을 피우고 늙고 시들고 하지만 공터는 ’아무런 말 없’으니 무소유가 따로 있겠는가. 즉, ‘베풀어 주고‘는 거둬들이려 하지 않는 마음과 같이 도마뱀, 새 발자국, 하늘의 빗방울들, 등 놀게 하니 넉넉한 마음 가이 짐작이 가며 공터의 본분인 그 ’흔적 오래가지 못하며 지우고 있다‘했는데 그게 공터가 공터로 서 존재하는 이유 아니겠는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시가 깊은 울림을 준다면 주저할 것 없이 이 작품이 아닌가 한다. 공터는 공터일 뿐인데 '바람', '풀씨', '꽃', '도마뱀', '새발자국', '빗방울' 등이 자유자재하게 놀다가는 포용성마저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고요가 / 공터를 지배하는 왕'이라고 시인은 힘주어 말한다.
이만한 통찰력과 이만한 그릇의 존재를 인간세상에서 찾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 시에서 보여주는 순간적인 색(色)의 세계와 영원한 공(空)의 세계를 통해 만물의 존재라는게 덧없을 수도 있는 것이며, 변함없는 공터가 자리매김 됨으로서 시간의 역사는 말없이 흐르는게 아닐까.
원희석시인의 시'<수박씨와 파리>는 어떤가 보자.
수박씨 위에 파리가 앉았다 나는 누가 살아있는 것인지 잘 모른다 눈이 멀어지고 있다
수박씨 겉면이 딱딱하다고 파리의 날개가 부드럽다고 지나가는 햇빛들은 말하지만 누가 산 것이고 누가 죽은 것인가
파리가 수박씨를 깔고 앉아 손바닥에 묻는 더러움을 싹싹 떨어내고 있는 저 죽음에 대한 기도를 수박씨는 가만히 듣고 있다
수박씨가 파리를 끌어안고 있다 내몸의 달콤한 사랑을 곧 죽을 너에게 주노니 난 그리하여 다시 파란 생명을 이어가노니
ㅡ원희석 시 '수박씨와 파리' 전문.
한낱 미물에 불과한 파리와 수박씨, 두 존재의 정황을 풍자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는게 돋보인다. 기발한 상상력과 거기에 절묘한 표현이 가미되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수박씨 위에 파리가 앉았'는데 '누가 살아있는 것인지 잘 모른다 눈이 멀어지고 있다', 거기다가 '누가 산 것이고 누가 죽은 것인가'.시인의 직관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저 죽음에 대한 기도를 수박씨는 가만히 듣고 있다'인데, 수박씨의 입장에서 보면 괘씸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수박씨 위에 파리가 앉았다'에서 수박씨가 파리를 끌어안고 있다'로 반전을 거듭하며 효과를 얻고 있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 파리와 수박씨간의 상응관계를 예사로 보지 않는 시인의 안목이 놀랍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이여!
◇ ◇ ◇ ◇ ◇
젊은 시인들의 신선한 감수성을 가진 시편들을 따라가 보자.
먼저 놀라운 시각과 상상력을 겸비한 허혜정 시 '밤의 스탠드'를 보자.
이 아름다운 스탠드는 우리가 고른 것이다
작은 유리구슬을 당기기만 하면 부드러운 빛이 퍼진다
텅스텐 필라멘트처럼 위태롭게 깜빡이며
잠옷 위로 흐린 그늘을 만드는 빛
벽 위에 어슴프레 번져가는 그림자의 금
하나의 시공간에 엄연히 두 개의 삶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
하긴 어떻게 두 사람이 다 만족하는 사랑이 있는가
나날의 타협으로 쌓아올린 흐린 유리성
두 개의 상처를 이어 붙인 솔기처럼
하나의 행은 끝없이 이어진다
밤의 불빛 속으로 다가오는 피로한 얼굴
한 사람은 곯아떨어지고 한 사람은 깨어 있는 침대
이상한 슬픔이 몰려오고 갑자기 섬뜩하도록 차가운 정적
집이 텅 빌 때 느껴지는 그러한 정적
사랑. 누가 그 처음의 뜨거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서서히 식어가며 함께 누워 있는 욕조처럼 편안해지는 것
그리고 창백한 타일 위에 고여 있는 물방울처럼
싸늘하게 말라가는 외로움
사랑을 끝내기는 힘든 일이다
어쨌든 인정해야 한다
나는 이상한 그늘 아래 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생활 그렇게 사실적인 그렇게 정확한
마시고 먹고 대화하는 식탁의
그 침대의
그 불빛의
그 외로움의 그늘 아래
ㅡ허혜정 시「밤의 스탠드」전문.
사랑은 하나라 하고 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다. 그러나 삶이란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하나의 시공간에 엄연히 두 개의 삶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며 그러기에 또한 '한 사람은 곯아떨어지고 한 사람은 깨어 있는 침대'가 되는 상황인 것이다. 밤의 스탠드 그 이분법을 통해 보여주는 부부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이 다 만족하는 사랑이 존재하기란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신선한 작품으로 읽혔다.
또한, 권혁웅시인의 시 <굴원(屈原)에게>는 세태에 대한 관조가 눈에 띈다.
1
햇살 속으로 망명하고 싶다
저기 하교길의 여자아이들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까르르 웃으며
거품처럼 부서지는 햇살에
파묻힌다
숨쉬기 너무 버겁구나
좌판에 올라 누운 얼음 물고기
힘겹게 아가미를 뻐끔거린다
累代에 허물이 켜를 이루어
짐작했는가,
그대가 버린 이생에서는 아직도
새털보다 가볍게 떨어지는
젊은이들이 있다
먼지의 무게를 짊어지고
한 시절을 投身하는 이들이
2
소외가 길을 만드는지
회색 담벼락이 낸 길이 저렇게
햇볕을 가득 안고 흘러가는구나
질경이, 쑥부쟁이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황토길을 이끌어 간다
길가의 풀들이 생채기 같다
어떤 이는 제 손을 들여다보며
길을 짐작하기도 한다
어디가 나가는 門인가?
물 속에 길이 있었는가?
3
나는 물수건으로
창에 묻은 햇살을 닦아낸다
漁腹에 장사 지낼지언정
티끌을 묻힐 수 없다던 그대 말 기억한다,
하지만 눈부신 햇살도 이처럼
많은 먼지를 묻혀오는 것이다
저 햇살, 저 紅塵 속에
가장 오래 걸어야 할 인간의 길이 나 있다,
그 길은 사랑하는 어둠, 사랑하는 옛 상처,
사랑하는 눈물과 함께 하는 길이다
4
모래들, 바람이 가르쳐주는 대로
그대 지나간 地上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ㅡ권혁웅 시 '굴원(屈原)에게'전문.
아, 굴원이 가고 없는 시대에 우리는 시를 쓰고 있다. 먼저 나 자신에게도 되묻거니 굴원처럼 위대한 시를 쓸 수 있을까, 그리고 굴원처럼 처절하게 자신을 버릴 수 있을지. 필자가 잠시 생각해 본 넋두리다.
굴원이 가고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풍정을 읊은 이색적인 작품으로 읽힌다. 굴원의 죽음은 원통하며 한 많은 삶 그대로였다. 시인이 굴원을 잊지 못하는 것도 정의가 묵살되는 오늘날의 세태을 개탄하며 굴원에게 되묻는 것이다. '물속에 길이 있었는가?'라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까르르 웃으며' 길 가는 '하교 길의 여자아이들' 의 그 청순함은 비극적 삶을 살다간 굴원과 잘 대비를 이루고 있다. 또, 시인은 '좌판에 올라 누운 얼음 물고기 / 힘겹게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장면을 만나게 되는데 '숨쉬기 너무 버거'웠던 굴원의 이승에서의 삶 다름아닌 것으로 읽힌다. 시인은 또 담담하게 '눈부신 햇살도 이처럼 / 많은 먼지를 묻혀오는 것이다'라며 세상사에 대해 어쩔수 없는 정의를 내린다.
인간세상은 언제나 정의와 불의, 청결과 혼탁이 공존함을 시인은 넌지시 굴원에게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굴원이 멱라에 투신하여 삶을 마감했다고 해서 이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님을 인식시켜 준다.
다음은, 최준 시 <닭>이라는 작품이다.
닭은 행복하다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파헤쳐져 텅 빈 몸뚱아리로
죽어서도 아이와 함께 유모차를 타고
비닐봉지에 뚤뚤 말려 젊은 여자의 손에
이끌려 가고 아이가 흔드는 요령소리 따라
저 많은 닭들이 호곡하는 가운데
유유히 떠난다 풍진세상, 한도 많았다
눈알이 빠알간 닭들이 무한정으로
대량학살을 당하는
닭집 골목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5분
역겨운 비린내 속에서의
5분간의 보행 중
나는 본다 닭장에갇힌닭껍데기가 벗겨진
닭내장을드러낸닭대라기가 없은닭깃이빠
진닭눈꼽이낀닭다리가잘린닭비쩍마른닭
살이오른닭벼슬이붉은닭트럭에과적된닭
승용차에올라탄닭목욕하고있는닭윤간당하는
닭시위중인닭절규하는닭분신하는닭,닭닭
닭닭들의
5분간이다 골목을 지나는,
비린내로 울렁거리고
털이 너저분한,
그것도 이웃이라고 함께 세상 뜨자며
눈알이 빨갛게 울어들 대는
ㅡ최준 시 '닭' 전문.
역시 시인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라,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파헤쳐져 ‘텅 빈 몸뚱아리’로 비닐봉지에 싸여 팔려가는 생닭의 죽음을 ‘행복하다’고 긍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는가 하면, 젊은 아낙과 아이 실은 유모차가 장을 보고 돌아가는 모양인데, 아이가 흔드는 장난감의 소리 또한 저승갈 때 상여 앞을 이끄는 ‘요령소리’라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시장 난전에 살아있는 닭들의 소리를 ‘호곡’한다고 했다. 시인은 이제 그 생닭을 ‘유유히 떠난다 풍진 세상, 한도 많았다’고 귀결 짓는 것이다. 이는 짐승이나 인간이나 살아있는 동안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음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광경의 구체화된 표현의 시간적 거리는 걸어서 5분 걸리는 시장통의 닭집 골목인 것이다. 이 5분간이라는 짧은 시간의 흐름이지만 삶과 죽음이 뒤범벅 되어 연출되는 시장의 닭집 풍경은 인간세상의 풍경 다름 아님을 적나라하게 잘 말해준다 하겠다. 게다가 제2연에서는 너무나 많은 닭들이 즐비해 있는 풍경들이기에 띄어쓰기 조차 거부하며 나열하는 방식도 주의깊게 볼 일이다.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는 여성시인 시를 소개하면 먼저 정영선시인이 있다.
내 손안에 든 돌멩이 하나, 빤질빤질한 이마를 하고 있다. 깜깜하게 눈 감고 있다. 나는 돌멩이에게 말 건다. 내 말들을 잡아먹고 묵묵하다. 침묵을 거느린다. 침묵이 거느리는 둘레는 무겁다. 둘레는 둘레의 그림자를 거느린다. 그 둘레 안에 나는 산다. 몸을 오므린다. 돌멩이가 꿈꾸는 꿈을 꾼다. 돌멩이가 피리 불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는 꿈을 꾼다. 오래 깨고 싶지 않아 몸을 더 오므린다. 장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아침마다 내 마음 울타리에 한 송이씩 속엣말을 빨갛게 토하는 덩굴장미. 울타리 가득 번지는 붉은 말들의 잔치 흥겹다. 나는 돌멩이를 버리고 싶어서 돌멩이를 꼬옥 쥐고 꿈꾼다.
ㅡ정영선 시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 전문.
현대시의 품격을 이만큼 높여준 시인이 또 달리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영선시인은 나이답지 않게 풋풋함 상상력을 소유한 시인이다. 그러면서 치밀하고 섬세함도 놓치지 않으니 그 본보기로 읽히는 시가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가 아닌가 생각하는 갓이다.
장미와 돌멩이라? 이같이 전혀 부합되지 않을 것 같은 사물들을 끌여들여 한 통속을 이룬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강가를 거닐다가 무연히 쥐어든 ‘돌멩이’를 통해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장미’와 같은 생명체의 부활을 꿈꾸는 존재로 명명하며 상징화시키는 일, 가상하지 않은가. 꿈이 있다는 것, 꿈을 가진다는 것, 하찮은 돌멩이도 꿈이 있고 화려한 장미도 꿈이 있으니 ‘붉은 말들의 잔치’를 하는 것이고 보면,‘돌멩이를 버리고 싶어서 돌멩이를 꼬옥 쥐고' 있겠는가 말이다.
역시, 범상치 않은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죽은 가수의 노래 들으며 늦은 점심을 먹는다 멀건 곰탕 국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음표들, 푸른 동맥 헐떡이는 손으로 휘휘 저어본다 나귀방울처럼 짤랑이는 가버린 이름의 목소리 곰탕 국물처럼 천천히 식어간다
처음에는 투명한 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낯선 존재 하나, 너덜한 살점 달고 들어온 굵직한 뼈를 물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게 섞여갔다 엉켜있음으로 해서 얻은 이름 지켜 나가기 위해, 뜨겁게 서로를 달구었던 것이다
낡은 스피커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생생한 음표들 뱉어내는 죽은 가수들이 살고 어느 사이 그들을 닮아가는 모습의 우리들이 식당 곳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음을 본다 목소리만 살아남은 그들처럼 살과 피를 끓는 물 깊숙이 빠뜨리며 중얼중얼 흘러가는 우리들, 죽은 가수들이 떨구고 간 발자국 주우며 그렇게 먼 나라로 향하는 길 위에 선다 위대한 뼈 하나 남겨 두고
ㅡ이은림 시 ‘위대한 뼈’ 전문.
곰탕도 곰탕이지만 곰탕의 뼈가 의미하는 것은 죽은 ‘가수들이 떨구고 간 발자국’ 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또한 ‘목소리만 살아남은 그들처럼 살과 피를 끓는 물 깊숙이 빠뜨리며 중얼중얼 흘러가는’ 인간들인 것이다. 죽은 가수가 남긴 노래와 곰탕을 먹으며 떠올린 생각이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위대한 뼈’란 흔적의 의미이다. 생이 이러할진데 산 목숨이니 ‘늦은 점심’이지만 허기는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조말선시인의 경우는 새롭게 인식되는 특장을 갖고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시 <새장> 소개한다.
창가에 악기 하나를 걸었네
빨간 부리가 창살을 쪼아대면
악기는 통째로 공명되었네
창살 하나하나가 건반이었네
악보는 없었네
슬픔의 플러그를 꽂고
인공감지기능으로 노래하였네
내가 던져주는 모이의 힘은
노래하는 데 바쳐졌네
세상의 악기는 감옥이었네
소리는 악기 속에 갇혀
꿈을 조율하였네
아름다운 노래는 그때
탈옥을 꿈꾸는 자의 탄식이었네
창가에 감옥 하나를 걸었네
ㅡ조말선 시 '새장' 전문.
새장을 악기라고 했다. 그러니까 새는 그 악기의 연주자인 셈이며, 창살 하나하나가 건반이 되는 것이다. 악보는 달리 필요 없으며 인공감지기능으로 노래하는 새장은 공명통이 되어 울려퍼지는 것이다. 그러나 보라. 그게 아름다운 새소리 자체의 매력을 넘어서서 '탈옥을 꿈꾸는 자의 탄식'처럼 새는 우짖는 것이며 새장이란 감옥 다름 아닌 것으로 변용되어 읽힌다. 시인의 이 번뜩이는 감수성이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잘 말해주고 있는 듯 하며 또는 인간의 삶 또한 이러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조말선시인의 남다른 상상체계가 한국 현대시의 위상을 신선하게 하고 있다는데 늘 놀라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육감적인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썩은 사과가 맛있는 것은
이미 벌레가
그 몸에 길을 내었기 때문이다
뼈도 마디도 없는 그것이
혼신을 다해
그 몸을 더듬고, 부딪고, 미끌리며
길을 낼 동안
이미 사과는 수천 번의 자지러지는
절정을 거쳤던 거다
그렇게
처얼철 넘치는 당도를 주체하지 못해
저렇듯 달큰한 단내를 풍기는 거다
봐라!
한 남자가 오랫동안 공들여 길들여 온 여자의
저 후끈하고
물큰한 검은 음부를!
ㅡ박이화 시 '나의 포로노그라피' 전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처럼 인간존재 가치의 존귀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누구는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는데 첫째 뚜렷한 소신이 있는 사람, 둘째 미래의 설계를 확고히 갖고 사는 사람, 셋째 충만된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당위성의 의미들을 편집한 말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실상인 즉, 공감대를 이루는 말임엔 틀림없다. 이러고 보면 <나의 포로노그라피 > 의 시인 역시 첫번째와 두번째는 몰라도 분명히 세번째 항목에 해당하는 충만된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 행복한 사람임엔 틀림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한 편의 시란 실제경험이나 체험을 토대로 씌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해도 그만큼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 사정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보가 어떻게 옳은 판단을 하며 장님이 하늘을 나는 새를 볼 수 있겠는가.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는 말이 있는데 농훌치는 사랑의 진미(眞味)를 모르고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 할 수 있겠는가. 이 시에서 말하는 시인은 앞에서 잠깐 예시한 '훔친 사과'가 아닌 '썩은 사과'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썩은게 아니라 적당히 썩은, 아니 무르익어 잘 길들여진 맛을 내는 사과로 해석된다. '한 남자가 오랫동안 공들여 길들여 온 여자' 즉 그런 '사과'라 했다. 여자라고 해서 모두 이런 사과일까? 생각해 봄직도 하거니와 지금, '뼈도 마디도 없는' 이라는 사과벌레의 표현감각도 예사롭지 않지만 사과의 '몸에 길을 내었'다는게 한두 번이 아니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 수천 번'의 길을 냄으로서 사과 역시 수천 번 자지러지는 절정을 거쳤던' 것이다.
무엇이든 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바라보는 시각이나 사유하는 몫이 일반적인 보편성이나 논리를 뛰어넘어야 한다. 초점이 흐리면 물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막연한 사랑타령이나 섹스타령이 되어서는 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속물적 근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는 흔한 그리움이나 달콤한 사랑따위를 넘어서 있다는데 주목에 값한다 할 수 있다. 문장표현에 있어서나 구성 역시 잘 짜여져 완벽한 언어구사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특징으로 꼽힌다. 튀어나 보이거나 설익어 보이거나 난삽함마저 전혀 배제된 무르익은 문장구가(무르익은 섹스처럼) 라는 것도 쉽지 않은게 요즘 시단의 현실이고 보면 말이다.
2010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작품인 강문숙시인의 시 <따뜻한 종이컵>에 주목해 보자.
종이컵이 따뜻하다.
공원 한 귀퉁이에 허름한 중년처럼
앉아 있는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마시다가, 문득
객쩍은 생각을 해 본다.
짚둥우리 속에서 막 꺼낸 달걀은
암탉의 항문으로 나온 게 안 믿어질 만큼
희고 따뜻하다, 매끈하다.
혓바닥 아래 고인 침처럼 상긋하게
피어난 옥잠화의 흰 살결.
벌의 항문을 거쳐서 피어난 꽃들,
그 향기도 대저 항문의 그것이니
쿰쿰한 엄마를 열고 나온
신생의 애물단지들아.
희고 아름다운, 향기롭고
따뜻한 것들의 떠나온 문은 하나다.
종이컵을 내려놓고 슬쩍, 만져본다
ㅡ강문숙 시 <따뜻한 종이컵> 전문.
사물에 대한 생명의 근원적 모성애를 공원 한 귀퉁이 자판기의 '따뜻한 종이컵'에서 발견한다.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상상력을 극대화 시키면 '종이컵' 뿐만이 아니다. '옥잠화'는 '벌의 항문을 거쳐서 피어'나며 '달걀'은 어떤가. '암탉의 항문으로 나온' 것이다. 이런 것들을 시인은 생명에 대한 외경심으로 '엄마를 열고 나온 / 신생의 애물단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희고 아름다운, 향기롭고 / 따뜻한' 이런 '것들의 떠나온 문은 하나다'라 했듯이 시인은 공원 한 귀퉁이에 허름한 중년처럼 / 앉아 있는 자판기'의 '커피 한 잔 뽑아 마시다가' 생각해 낸 편린들을 예사롭지 않게 풀어내고 있는데 그게 생명의 근원을 찾아가는 시인의 싱싱한 상상력인 것이다. '시인은 어딜 가나 시인이다'라는 말이 강문숙시인을 통해서 성립된다 해도 과언은 아닌 줄로 안다. 단순하지 않는 상상력의 체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커피를 뽑아든 '따뜻한 종이컵'에서 우주의 질서와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시인은 기발하게 감지해 것이다.
윤미전시인의 시 <손님> 을 보자.
연락도 없이 불쑥 내 창가로 찾아든게 미안한 듯
방울새 한 마리 주검인 채로 제 날개
가지런히 모우고 있다
처마 끝에 고여있던 물방울이 호기심에
그 싸늘한 맨발을 톡톡 건드려 본다
도대체 영문이 뭐냐며 작은 풀잎 하나 다가와
물어봐도 대답하고 싶지 않는 그는
심심해 하던 창공과 함께
춤 추던 날개짓 잊지 않으려
혼미한 동공에 조각구름 담아 본다
문상 온 하늘이 상주(喪主)인 양 앉아있는
빈 종이컵에
햇살을 한 잔 가득 부어주고 있다
어제 만난 바람이 지나칠 때마다
미처 부르지 못한 노래가
부리 안에서 옹알옹알 자라고 있다
더 이상 날지 않아도 되는 그는
내 마음 한 켠 세를 내어 둥지를 튼다
계약서 한 장 쓰지 않았다고 미안해 하지마라
나도 누군가의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것을
ㅡ윤미전 시 '손님' 전문.
이 시가 참신한 것은 우선 손님이라 표현한 데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첫번째 손님은‘방울새’이다. 즉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라는데 더욱 매력적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 손님은 시인 자신이다. 이 얼마나 흥미로우며 의미있는 대목인가. 시가 지녀야 할 기능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제의식이 분명해야 하듯, <방울새 한 마리>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도 그것과 다름없다는 인식체계가 이 시를 저 높은 세계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는 대목이 나오는데 죽은 '방울새' 옆에 놓여있는 빈 '종이컵'의 등장이다. '종이컵'은 옛날에는 없었던 것으로 문명사회를 말해주는 증거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것도 그냥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상주인 양 앉아 있다’는 것이다.
탁월한 문장구사 및 연쇄적인 의미망 접목의 효과가 더욱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음이 도처에 확인 되는데 클라이막스는 죽은 방울새를 향하여 시인의 집 창틀에 와서 불귀의 객이 되어 죽은 방울새를 보고‘미안해 하지마라’라는 독백을 부여하고 있는 대목이다. 시인 자신도 ‘누군가의 손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같은 생명체로서의 동질성과 유한성을 접목시키고 있다는데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언젠가 새의 죽음과 다름 아니라는 진리를 잘 말해 주는 한 편의 시라 하겠다.
정이랑시인 시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을 주의 깊게 보자,
나는 남편과 말다툼 끝에 그곳을 나왔다
여자란 결혼하고 나면 갈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버스정류소 앉아 나뭇잎 한 장 주워 잎맥을 살핀다
손바닥의 손금과 흡사한 길들이 선명하다
지나가는 저 사람 또 스쳐가는 이 사람의 길
바라보고 있으려니 정작 나의 길을 분별하지 못하겠다
횡단보도를 건너 갈 것인가 724번 버스 타고
관음동에 닿으면 가야할 길이 보일 것인가
나뭇잎들도 가야할 길 따라 떠나는 10월,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 나는
잠시 결혼한 것을, 아이 낳은 것을, 10년의 세월을
원망하고 억눌러 보지만 소용없이 넘쳐나는 눈물방울들
꺼이꺼이 나를 보고 울고 있는 가로등 불빛마저 희미하다
나는 안다, 골목길 구석구석 그가 찾고 있을 것이란 걸
애타게 걸어가고 있는 발걸음 소리가 보인다, 공벌레처럼
몸을 말아 앉아 있는 나를, 그가 발견해 준다면 좋겠다
인적이 끊기고 버스도 잠들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고
결국 내가 돌아갈 곳은 남편과 아이가 있는 그곳
전봇대와 나란히 서서 열어놓고 잠들어버린 대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ㅡ정이랑 시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전문.
초기시의 전통서정과 토속적인 시어의 정겨움에서 일탈한 현실에 대한 리얼한 삶의 세계를 보여주는 전형으로 읽혔다. 모처럼 정이랑시인의 여러 시적 장치를 두루 갖추고 있는 면모를 확인 하는 좋은 계기로 보여졌음도 사실이다. 정이랑시인이 잘 쓰는 놀라운 표현들을 이 시에서도 만날 수 있는데 일상성을 소재로 하면서도 여자로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뇌가 질퍽하게 잘 녹아 있음이 확인 되었다고 할까. 남편과 말다툼 끝에 나온 곳이 버스정류소이며 여기서 '나뭇잎 한 장 주워들며 잎맥을 살핀다'로 시작 되어 그 나뭇잎 한 장에서 '손바닥의 손금과 흡사한 길들이 선명'함을 인식한다. 그러나 '정작 시인 자신의 길을 분별하지 못하겠다'는 의지적 표현이 사려깊게 읽혔다. '나뭇잎들도 가야할 길 따라 떠나는 10월,'이라는 계절적인 감각과 '10년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결혼생활인 그것이다. 거기다가 '꺼이꺼이 나를 보고 울고 있는 가로등 불빛마저 희미'해지고 '공벌레처럼 몸을 말아 앉아 있는' 시인 자신의 초라한 모습, 그리고 '인적이 끊기고 버스도 잠들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는 절창의 표현들로 엮어져 있듯이 시인 자신도 결국 '돌아갈 곳은 남편과 아이가 있는 그곳'이라는 여자로서의 숙명적인 삶의 정점 앞에 왔을 때는 '전봇대와 나란히 서서 열어놓고 잠들어버린 대문'이 다가서 보였던 것이다.
어쩌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끈끈한 긴장력과 틈새를 보여주지 않는 기법의 행간을 꽉 채워주는 의미공간 설정, 적절하게 잘 등장시키고 배치시킨 버스정류소, 나뭇잎 한 장, 724번 버스, 가로등 불빛, 골목길, 공벌레, 전봇대 등의 종연들의 훌륭한 연기가 돋보였음은 물론이다. 시제목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에서의 끝에 찍힌 쉼표(,)와 본문의 끝행 끝부분의 '나는'를 주시해 보면 제목을 붙이는데도 내공을 들였음이 확인 된다. 유연한 문체와 리얼한 표현의 문장구가가 돋보인다.
정경진시인의 시 <웅덩이에 고인 물>을 보자.
말이 없는 웅덩이에 고인 저 물은
잃어버린 기억 속을 배회하고 있다
지난 날 울부짖던 천둥소리와
안타까워 바라보며
가슴 쥐어짜던 벼락
아득한 세월 내려놓고 살아가고 있다
설거지 끝난 불 꺼진 부엌
그릇들과 씨름하던 수돗물
제 갈 길 찾아 흘러 갔을까
어디로 가서 발 뻗고 몸 누이는가
웅덩이에 고인 물
훨훨 날개짓 그리며
하늘의 흰 름 한 송이 띄어 놓고
그네를 탄다
ㅡ정경진 시 '웅덩이에 고인 물' 전문.
지난해 한국 대구문학상을 수상한 고희림시인의 시 <지평선에서의 하룻밤>이 주목을 끌었다.
들은 텅 비었으나 경운기 소리로 꽉 차 있었다
냇물은 불었으나 갈길을 막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나를 붙드는 것일까 이런 생각 뿐이었을 때
들판에 꽉 찬 신기루가 말했다
나는 사람들보다 소리가 더 가까운, 외딴 풀밭이다
설계 명랑한 집, 비닐하우스다
개울이 커튼처럼 흘러내리는 농로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배역이다
제목은 '철새공화국' 이다
나는 물 아래 소리와 물 위 소리 사이에 누워 있다
나는 저 모든 지상의 것들을 위한 희생자다
대지의 자궁 속에 뼈처럼 산처럼 쌓여 있는 길고 예리한 뿌리들이다
나는 땅 밑에서 올라와 땅 위를 미친 듯 돌며
깊고 뜨거운 그 많은 길을 견뎌온 늙은 왕자의 달을 잉태 하였다
어쩌랴 어쩌랴
내일 아침이면 그 실루엣의 배가 지평선 위로 불룩 솟아 오를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도 생산일 것이다
생산이 끝난 벌판에 바람이 일듯
ㅡ고희림 시 「지평선에서의 하룻밤」전문.
사유의 목소리가 힘을 더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힌다. 평범하지 않은 시인의 내면의 소리가 자연과 융화되어 번져나온다.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문체는 '오히려 내가 나를 붙드는 것일까 이런 생각 뿐이었을 때', '나는 물 아래 소리와 물 위 소리 사이에 누워 있다', '실루엣의 배가 지평선 위로 불룩 솟아 오를 것이다' 등인데 지평선은 우리네 삶의 근원적인 토양으로 배경을 보면 청도 넓은 들쯤 될 것이다. 고희림시인이 말하는 땅 혹은 대지, 지평선은 버려진 땅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삶의 수단이라 할 수 있는 농경사회(인간 본래의 삶, 또는 자연친화, 환경보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와서 무슨 경운기 소리, 철새, 신기루, 풀밭, 농로냐고 할지 몰라도 환경이 파괴되면 인간이 살아갈 마지막 땅을 잃는 것이며 '내일 아침이면 그 실루엣의 배가 지평선 위로 불룩 솟아 오'르지 않을 것이고 보면 말이다.
도시적인 감수성의 현대시들, 또는 누구나 써먹는 발랄한 제스츄어의 기교적 표현들이 난무한 시대에 고희림시인의 시는 이렇게 안온함과 넉넉함을 안겨주는 동시에 진정한 인간의 삶이 어디에 놓여있어야 하는가를 넌지시 제시해 주고 있다 하겠다. 이렇게 시인 특유의 문체로 잘 육화되어 놓여질 때 한 편의 시가 갖는 매력과 울림은 남다른 것이리라.
서하시인의 시 <억새>를 보면 역시 놀라움이 발견된다.
다소 억측스럽지만
한 때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빈손으로 하늘을 사려고 했다
살아보니 정말 그랬다
빈손이 가장 무거웠다
구름이 맨주먹으로
햇살을 따갑게 못질할 동안
훅 멈출 수 없는 바람 불더니
억! 하며 가슴 결리는 것들
새처럼 날아가고
비로소 세상은 한 통속이 된다
무한천공 일렁이며
기립박수 치는 저것들도
다 빈손이다
ㅡ서하 시 '억새' 전문.
단번에 반하는 시 잘 없는데 이 시를 처음 대하는 순간 고은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놀랍구나!' 로 와닿은 작품이다. 가을날 들녘에서 하늘을 수놓는 억새꽃을 지나쳐보지 않은 사람 없을 것이다. 그 풍경을 두고 '빈손으로 하늘을 사려고 했다'는 이 놀라운 표현을 보라. 그리고 '빈손이 가장 무거웠다'라고 했는데 빈손(억새꽃)이 하늘을 모두 차지했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그러나 소유라는 것이 욕망이며 잠시잠깐의 일임을, 흰꽃들은 바람에 시달려 비질이 된 듯 '새처럼 날아가고 비로소 세상은 한 통속이 된다'에서 읽을 수 있다. 그게 '다 빈손'으로 돌아간 것이다. 잘 보면 미학적 표현만 뛰어난게 아니라 사려깊은 사유의 목소리로 탄탄한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다는게 확인된다. 억새뿐이겠는가. 욕망도 물처럼 흘러가면 아무것도 아니듯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철학을 시인은 잠시 가을 날 하늘을 수놓는 억새를 통해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중국 조선족 시단에서 말하는 <몽롱시>와 같은 애매모호한 발상이나 이미지의 불투명함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좋으리라 생각된다.
김환식시인의 시 <가시연꽃>을 보면,
꽃 한 송이 때문에
온몸에
수천 개의 바늘을 꽂아놓고 살았다
지나친 사랑은 집착일 뿐인데
애증의 무게 중심이
이미 한 쪽으로 옮겨 앉은 것이다
첫눈에 사유의 중심을 잃어버린 까닭에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버려야 할 삶의 앙금들도
뒤주에 숨겨놓고 살아온 것이다
일탈을 꿈꾼 나는
우포늪에 뿌리가 갇힌
가시연꽃 같은 사람이다
오늘도 그의 곁을 서먹서먹 지나갔다
사유의 그림자가 완고할 뿐이다
서녘하늘에 화염이 번졌다
첫사랑도 그렇게 불탔을 것이다
가시연도 삶이 답답할 때면
가슴속 불씨를 살려 모닥불을 피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시연꽃을 사랑했다
ㅡ김환식 시 <가시연꽃> 전문.
'가시연꽃'을 통해 본 시인의 삶이 설득력 있게 와 닿는다. 평볌하지 않은 표현으로 '꽃 한 송이 때문에 / 온몸에 / 수천 개의 바늘을 꽂아놓고 살았다'라 했는데 이는 비단 가시연꽃 뿐이겠는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데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는 말이다. '애증의 무게 중심이 / 이미 한 쪽으로 옮겨 앉은 것', 또는 '사유의 중심을 잃어버린 까닭에 /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든지 '버려야 할 삶의 앙금들도 / 뒤주에 숨겨놓고 살아온 것'이라는 가시연꽃의 가시에 대한 이런 형용들은 인간사가 그와 다름 아니라는 변증법적인 접근으로 보인다. 여기서 시인은 가시연꽃을 대상으로 하면서, 서녘하늘의 노을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화염'의 세계로 인식함과 동시에 누구나 그러하듯 과거시간들 중에 가장 불탔던 '첫사랑'을 떠올려 본 것이다. 시적 효과를 절정에 이르게 하는 이런 대비가 역동적임엔 두말 할 나위없다. 가시연이 '가슴속 불씨를 살려 모닥불' 즉 꽃을 피우듯 인간도 자신의 내면의 꽃을 피우지만 변명이나 사변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혼신을 힘으로 가시를 돋게 하는 '가시연꽃'에 대한 치밀한 내면세계가 시인의 자화상으로 그려진다. 견고한 상상력의 퍼레이드가 시적 긴장과 사유의 폭을 넓고 깊게 펼쳐줌으로써 압도적으로 와 닿는 좋은 예의 작품이라 하겠다.
그럼, ‘표절이냐 모방이냐’를 두고 운운된 바가 있었기에 아래의 두 작품을 소개해 본다.
진달래꽃 속에는 조그만
초가집 한 채 들어 있어
툇마루 다듬잇돌 다듬이 소리
쿵쿵쿵쿵 가슴 두들겨 옵니다
기름진 땅 착한 백성
무슨 잘못 있어서 얼굴 붉히고
큰일난 듯 큰일난 듯 발병이 나
버선발 딛고 아리랑고개 넘어왔나요
꽃이야 오천년을 흘러 피었겠지만
한 떨기 꽃 속에 초가집 한 채씩
李太白 달 밝은 밤 지어내어서
대낮이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어머니 누나들 그런 날의 山川草木
얄리얄리 얄랴셩 얄랴리 얄라,
쿵쿵쿵쿵 물방아 돌리며 달을 보고
흰 적삼에 한껏 붉은 진달래꽃물 들었었지요
ㅡ서지월 시 ‘진달래 산천’ 전문.
소백산엔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
푸른 사과 한 알, 들어 올리는 일은
절 한 채 세우는 일이라
사과 한 알
막 들어 올린 산, 금세 품이 헐렁하다
나무는 한 알 사과마다
편종 하나 달려는 것인데
종마다 귀 밝은 소리 하나 달려는 것인데
가지 끝 편종 하나 또옥 따는 순간
가지 끝 작은 편종 소리는
종루에 쏟아지는 자잘한 햇살
실핏줄 팽팽한 뿌리로 모아
풍경 소리를 내고
운판 소리를 내고
급기야 안양루 대종 소리를 내고 만다
어쩌자고 소백산엔 사과가 저리 많아
귀 열어 산문(山門) 소식 엿듣게 하는가
ㅡ김승해 시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전문.
필자의 시<진달래 산천>은 정확히 말해서 2001년 4월 4일, 오세영시인에 의해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게재된 작품이며, 김승해 시는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시다. 문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표절이냐 모방이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표절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시를 쓰다 보면 잠재적으로 엇비슷하게 문장이 구가되는 경우가 있기는 한데 하나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맥락을 같이 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견해다. 나는 김승해시인이 <진달래 산천>을 열심히 읽지 않았기를 바라며 그게 조금의 모방은 했을지라도 표절은 아니었기를 또한 바라는 뜻이었다.
먼저 <진달래 산천>을 보면, 대개의 전통서정시가 그러하듯 외형적으로는 밋밋하게 읽히는게 상례로 알고 있듯이 별다른 데가 없어 보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한순간에 씌여진 시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이미지 동원과 시적 장치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분석해 보면 이렇다. ‘산천’에 ‘진달래꽃’이 피었는데 ‘진달래꽃 속에는 조그만 / 초가집 한 채 들어 있’다고 했다. 그 속에 연상작용의 일환으로 ‘다듬잇돌 다듬이 소리’가 들린다고 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3연에서 말하는 ‘한 떨기 꽃속에 초가집 한 채씩’으로 ‘대낮이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인 것이다. 그래서 ‘얄리얄리 얄랴셩 얄랴리 얄라,‘와 같은 흥의 소리로 빚어져 나와 온 ’山川草木‘을 쩌렁쩌렁 울렸던 것이다.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인 김승해시인의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를 보면, ‘소백산엔 /사과나무’가 있으며 그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고 했다. 나아가서 ‘한 알 사과마다 / 편종 하나 달려’있다고 했다. ‘종마다 귀 밝은 소리 하나 달려는 것’으로 시인은 ‘ 편종 소리’로 표현했으며, ‘풍경 소리를 내고 / 운판 소리를 내고 / 급기야 안양루 대종소리를 내고 만다’고 했으니 말이다. 물론 견해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김승해시인의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와 엇비슷한 시를 쓴다면 다음과 같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하길 바란다. 제목은 <비슬산 산천에는 진달래도 많다>로 해 보았다.
비슬산 산천엔
진달래꽃 한 떨기마다 초가집 한 채 들었다
붉은 진달래꽃물 드는 일은
초가집 한 채 세우는 일이라
진달래꽃 한 떨기
막 피워 올린 산, 금세 품이 넉넉하다
한 떨기 진달래꽃마다
초가집 하나 들어있는 것인데
초가집마다 가슴 두들기는 다듬이 소리 하나 퍼내려는 것인데
산천의 진달래꽃 하나 피어나는 순간
초가집 다듬이 소리는
이태백 달 밝은 밤 지어내어서 급기야
대낮이면 다듬이 소리를 내고 만다
어쩌자고 산천엔 진달래꽃이 저리 많아
온 산천 울리게 하는가
ㅡ 가상의 시 ‘비슬산 산천에는 진달래도 많다’ 전문.
이렇게 한번 시도해 보았던 것이다. 과거 나의 문하에서 시를 배운 바도 있는 고은아라는 본명을 가진 시인인데, 정중한 소통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시(詩)는 인간(人間)이 쓰는 것이기에 시인(詩人)이듯이 같은 땅에서 살고 있으면서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문정희선배시인의 말을 빌면 필자를 전혀 모른다 했다 하니 마음이 더욱 아플 뿐이다.
여기에 또, 참고로 역시 나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함께 수학한 바 있는 이채운시인의 시 <사과알 속의 수행자>를 소개한다.
밤낮 한 그루 사과나무를 쳐다보고 있는 수행자가 있다 가는 실끝 잡아당기듯 번쩍거리는 눈과 코,여문 턱이 허공을 민다 붉은 껍질 벗기고 속살을 훔쳐보기라도 하는지 미동조차 하지않고 응시하면 사과나무는 수줍은 듯 몸을 떤다
차츰, 사과나무는 비바람에 시달리던 지난 이력과 몸 속 켜켜이 쌓인 독기를 풀어놓았다 쉴 새 없이 피워낸 수많은 말들이 수행자의 가슴을 강물처럼 돌아 흐른다 살속을 후벼파는 벌레와 집적거리는 뭇새들 훠어이, 훠어이- 쫓아버리고 희고 둥근 방 속으로 맨발의 그가 걸어 들어간다
사과알 속은 환하고 따스하다 거칠던 바람이 사과나무 주변으로 오던 고약한 성미 기어들고 태양도 그들을 달래어 걸러진 빗살 내쏜다 수행자가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내다본다 시끄러운 세상사가 두어 번 뒤척이더니 그의 호흡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번씩 숨을 들이킬 때마다 사과알이 점점 크고 불룩해진다
ㅡ이채운 시 ‘사과알 속의 수행자’ 전문.
이 작품이 바로 사과나무의 사과를 보고 쓴 번뜩이는 상상력을 잘 반죽한 예라 하겠다. 풍부한 상상력이 잘 뒷받침 된 수작으로 보여지는데 어느 해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심 3편 가운데 한 편으로 거론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심사위원인 황동규시인의 심사평에서도 ‘최종심에 오른 세 사람의 세 작품 가운데 어느 작품이 당선되어도 무관하다’고 언급했고 보면 말이다. 이 작품에서도 보면, 길 가다가 그냥 사과나무의 사과열매를 쳐다볼 뿐인데 사과열매가 익는 과정을 관찰자인 수행자와 대비시켜 나가며 드디어는 일체감을 보여주고 있는 수법을 쓰고 있다는데 놀라운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 '희고 둥근 방 속으로 맨발의 그가 걸어 들어간다'는 대목이 그것이며, '수행자가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내다본다'에서 일체감을 보여주고 있는데, '세상사가 두어 번 뒤척이더니'라는 이런 놀라운 표현도 대단하지만 '한번씩 숨을 들이킬 때마다 사과알이 점점 크고 불룩해진다'고 끝맺는, 그러니까 하나의 사과알이 완성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나 자연의 산물인 열매도 수행의 과정을 통해 온전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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