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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동여객선을 타고 다녀온
일본 땅[대마도]
- 2003년에 배를 타고 실시한 첫 일본여행에 이어서 11년 만에 2번째도 배를 타고 다녀온 여행기 -
☞ 2014.1.7(화) ~ 9(목) 부산 1박, 대마도 1박(2박3일)
2019년 현재 일본이 시작한 경제 전쟁으로 인하여 일본과의 관계가 많이 좋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여행을 선뜻 실행하기에는 많은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마도'를 다녀 온 2014년에도 사정은 똑 같았다.
전 세계 여론의 비난이 비등한데도 총리의 신사 참배는 여전하다.
또한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등 아베 정권의 침략이 도를 넘고 있다.
우리도 강경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라 관광 수입을 보태주는 일본 여행이 좀 망설여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섬인 관계로 그에 대한 역사와 자연이 궁금하여 대마도를 다녀오기로 했다.
'대마도'는 일본에 예속된 섬이지만 한반도와 아주 가깝고 일본과도 가까워 양국 간의 중재 역할을 했다.
실제 임진왜란 당시에도 대마도교주가
“일본에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으니 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대마도는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와 경제적 교류의 중간 매개체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문화가 일본 본토로 들어 가기위해서 대마도를 거쳐 들어갔고 경제적으로도 일본과 중개무역을 하는 위치였다.
조선시대 통신사도 일본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대마도 교주가 영접을 했다고 한다.
이곳을 거쳐서 일본 본토로 들어가는 교통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심회]에서 지난여름에 '전주한옥마을투어'를 했었는데 연이어 또 이 여행을 계획하다.
그것은 정선배 사모님과 우리 집사람이 비행기를 못 타니 이번에는 아내들을 위해서 배를 타고 외국여행을 한번 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져서 기획이 되었다.
그러나 추진과정에서 한 회원의 사모님이 일을 하는 관계로 도저히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부 행사는 못하더라도 기왕 마음먹은 것이니 남자들만이라도 강행하자는 의견에 따라 결국은 남자들만의 여행이 되어서 집사람에겐 미안한 여행이 되었다.
여행사 납부경비가 '19만 8천원'인 초특가 찬스이다.
평시엔 '39만 8천원'하는 상품인데 이번에 홍보를 겸해서 초특가로 진행한단다.
경제 전쟁이 한창인 시절이라 일본 여행이 죽을 쑤는 바람에 가격이 많이 내려왔지만 일본행을 택하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여행마을]이란 곳에서 진행한 상품인데 우리 일행 11명에게 전속으로 안내를 해준 유능한 가이드에게도 감사한 여행이었다.
▶ 1일차 : 7일(수)
당초에는 출발 당일 새벽차로 [부산국제여객선터미널]에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모두가 백수인 점과 일정이 여유로운 것이 좋다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서 출발 전날 저녁 6시차로 부산으로 향하다.
결국은 부산에서 1박을 더한 여행이 되었다.
1월 8일 아침 7시 15분 [부산 국제여객선터미널]이 미팅 시간이다.
포항에서 한 시간 반을 달려 부산 노포동에 있는 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노포 역에서 1호선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여 만에 부산역에 도착하여 늦은 저녁을 먹고 바로 ‘귀빈장’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두 명과 네 명으로 나눠 방 두 개를 9만원에 예약하였다.
일부는 일찍 취침에 들어가고 나머지 팀은 부산역 근처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밤샘을 하였다.
소주 팀들은 마누라 감시에서 벗어나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함께 나가서 기분을 내자고 한다.
술 마신 후 듣는 잔소리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 것인데 결국 건강을 걱정하는 잔소리임에도...
그러나 지난번 스키를 타다가 다친 다리의 후유증으로 나는 열외를 하였다.
술팀에서 빠진 덕분에 이튿날이 편안해서 엄청 좋았다.
▶ 2일차 : 8일(목)
출발을 하려고 기상을 하니 아침부터 겨울비가 내린다.
소주 팀은 눈 붙일 시간이 거의 없었다.
총무의 기상 명령이 떨어지자 단잠에 빠진 일행을 강제로 깨워 세수를 하고 부산 국제여객선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 내 분식집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했다.
어제 저녁 마신 술이 채 깨지 않은 상태에서 해장을 해야 한다며 또 소주가 들어갔다.
우리 팀의 전용 가이드 ‘강지영 짱’과 미팅을 한 후 쾌속선을 타고 호수 같은 바다로 항해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이용한 배는 [코비호]였는데 속력이 붙으면 물 위로 부양이 되어 달리기 때문에 배의 흔들림이 무척 적었다.
배 밑창이 수면 위로 떠올라 스키 같은 칼날이 파도를 가르면서 달리는 구조의 배라서 배멀미를 전혀 안하는 선박이다.(위 '코비호' 사진 참조)
대마도 북쪽 [히타카즈]항에 도착을 했다.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되었다.
겨울비는 대마도에 도착해서도 내리고 있다.
'비'는 국경이 없나 보다.
입국 수속을 하고 열 한명으로 구성된 우리 팀은 24인승 버스에 올랐다.
똑 부러지게 안내하는 가이드 '강 짱'과 함께 대마도의 첫 관광지로 향했다.
섬의 남쪽을 향해서 이동을 하며 구경을 하였다.
아침부터 내리는 겨울비 덕분에 우산을 쓰고 다녀야 했다.
일본추천관광지 100선에 손꼽힌다는 아름다운 ‘미우다 해수욕장'에 도착하여 고운 모래사장을 거닐며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바다를 둘러 보았다.
우리가 탄 버스는 꼬불꼬불 산길을 돌고 돌아 부산을 감상할 수 있다는 한국전망대 ‘와니우라’로 향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바람에 시야가 좋지 않아 전망대에 걸어 놓은 사진만 감상하니 많이 아쉬웠다.
이어서 인근에 위치한 '조선역관사 조난 위령비'를 둘러 보았다.
다음 코스는 ‘와타즈미 신사'다.
이곳은 일본 건국신화의 발생지이자 일본 최고의 용궁 신사로 바다에서부터 토리가 본당까지 이어졌다.
중식은 현지 식으로 ‘나베’ 우동 정식을 먹었다.
우동과 함께 초밥이 나오는 깔끔한 중식이었다.
이어서 [아소만]을 360도 조망할 수 있는 대마도의 하롱베이 ‘애보다시케’ 전망대로 올라갔다.
겨울비가 계속 내려서 시야가 좋지 않아 작은 무인도만 올망졸망 시야에 들어 왔다.
다음 코스는 두 개의 섬으로 나뉜 대마도를 하나로 이어주는 ‘만제키바시 다리'이다.
우리와는 악연으로 만난 다리를 걸어서 건너갔다.
이 다리밑 깊숙한 곳에 일본군들은 군함을 숨겨두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가는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운명의 다리다.
이 전쟁을 승리로 마감하여 기가 오른 일본이 결국은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였다.
러일전쟁 승리의 원인이 되기도 한 다리 밑을 살펴보니 역사의 뒤안길을 보는 것 같았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지만 이 다리가 없었다면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
우리 돈 만원으로 선택한 옵션은 해수온천인 [유타리] 온천이다.
어제 저녁 밤을 새며 마신 술로 인하여 피곤한 몸을 추스르고 나오니 일행들은 생기가 돌았다.
오늘 마지막 일정으로 하루 밤을 묵을 최고의 시설인 '팬션형 통나무호텔'로 가서 짐을 풀었다.
저녁은 시내에 나와서 먹었다.
싱싱하고 푸짐한 해산물과 육고기가 합쳐진 해산물 바비큐 정식이었다.
양이 푸짐하고 맛이 일품이다.
소주 1병 8천원과 맥주 6천원을 곁들여 저녁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와 대마도에서의 첫 일정을 접었다.
편백나무로 지은 숙소는 가운데는 일행이 모여 쉬면서 차를 마시는 응접실이 있고 양쪽으로 2인 1실의 침대 방이 배치되어 참 편리하고 깔끔했다.
편백나무 냄새가 향기로운 것이 인상적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 3일차 : 9일(금)
아침 기상은 여유가 있어서 잠을 충분히 자고 8시에 통나무 펜션호텔 안에 있는 일본 정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청국장을 끓이지 않고 발효된 콩을 접시에 담아 먹도록 식탁에 둔 것이 이색적이었다.
하얀 진이 생기고 먹기에도 거북했다.
그러나 일본인은 소화에 큰 도움을 주는 이 음식을 즐겨 먹는다고 한다.
우리 팀원 중 한 명은 냄새 때문에 못 먹겠다며 먹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모습도 보였다.
어제 밤까지 지루하게 내리던 비는 그쳤으나 날씨가 매섭게 추워지고 바람도 불어 체감 온도가 영하 5도정도 되는 느낌이었다.
하기사 1월 달인데…….
오늘은 [이즈하라 시내 관광]을 하기 위해 첫 방문지로 갔다.
단식 투쟁을 하시다가 순국하신 최익현 선생님의 순국비가 있는 ‘수선사’를 찾았다.
일본인들의 납골당에 섞여 조화가 앞에 놓인 초라한 비석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비가 바로 순국비라고 한다.
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비석에 새겨진 비문을 읽으며 당시의 나라 잃은 억울한 선생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다음은 ‘이즈하라’ 시청을 지나서 고종 황제의 외동 딸 '덕혜옹주의 결혼기념비가 있는 공원'으로 가서 [덕혜옹주]의 한 많은 삶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덕혜옹주는 열두 살에 일본으로 끌려 와 귀족학교에 다녔지만 왕따를 당하면서 외로운 삶을 살다가 대마도주의 아들과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두었다고 한다.
그 후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다가 이혼을 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대마도에 온 한국인 관광객들이 등산코스로 많이 이용하는 ‘금석 산성’이 눈에 들어오고 공원의 양쪽 길옆에는 분홍색의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다음은 이혼한 대마도주의 처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어 놓은 신사가 있는 ‘팔 만궁’ 신사를 구경하고는 현지 식으로 된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깔끔하고 먹을 만 했다.
다음에는 인근에 위치한 면세점에 들러 선물을 구입하다.
당시만 해도 1박2일 대마도 여행가격이 제법 비싼 편이었지만, 우리가 이용한 이 상품은 마지막에 들린 면세점이 유일한 쇼핑으로 일체의 강요된 쇼핑이 없어서 참으로 편안하게 다녀온 여행이었다.
출발 배를 타기 전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어서 시내 구경을 했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긴 수로 도랑으로 고기들이 한가하게 떼를 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모치나 황어새끼' 같은 고기도 보이고 '학꽁치'도 눈에 띄었다.
정말 물이 오염되지 않아 이런 광경도 볼 수가 있으니 이것도 훌륭한 관광 자원이 아닌가 싶다.
출국 수속을 하고 3시 30분에 대마도의 서남쪽 항구인 ‘이즈하라’ 여객터미널을 출발했다.
날씨가 매우 춥고 바람이 불어 파도가 거셀 것 같았다.
우리가 탄 쾌속선 ‘코비’는 대마도와 일본 본토 사이로 항해하여 북쪽으로 돌아 부산항에 두 시간 정도 걸려 도착할 예정이다.
예상대로 섬의 북쪽을 돈 지점부터는 파도가 매우 세게 쳐서 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선실내 방송에서는 배가 많이 움직인다고 안전띠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자리를 지키라고 몇 번이고 방송을 했다.
운항 시간은 2시간 정도로 들어올 때와 비교하여 버스를 타고 내려온 섬의 길이만큼 더 운항을 한 셈이다
5시 반에 부산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저녁 늦게 포항에 도착 한 후 터미널 부근에서 아구찜을 곁들여 식사를 한 후 귀가하다.
짧은 일정이지만 경비에 비해 잠자리와 먹는 식사까지 알찬 관광이었다고 팀원들이 모두가 만족한 여행이었다고 흡족해 한다.
☞ [대마도] 여행 후기
'최익현선생 유적지'를 비롯한 '조선통신사의 흔적', '전망대' 등을 둘러보았는데, 일본 땅에 한번 들렀다는데 의미가 있지 특별하게 기억에 남을 빼어난 경치는 아니었다.
관광이 목적이라면 볼거리는 별로다.
그렇지만 대마도의 역사적인 의미는 평가가 달라진다.
역사적으로 신라때까지는 우리나라가 [대마도]를 점유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비탈이 아주 심한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진데다 농토 면적이 엄청 작은 경제적으로 별다른 매력이 없는 섬에 불과하였다.
이곳은 일본 본토에서 가까운 곳이다.
본토에서 죄를 지은 죄인들이 도망을 와 숨어살면서 가까운 우리나라의 해안 마을을 약탈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들로서는 일본 본토로부터의 체포 걱정이 없는 적당한 곳이었다.
그러나 섬에서 나는 곡식으로는 자급자족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의 해안 마을을 약탈하면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바로 [왜구]라고 부르는 왜놈들 해적이다.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여말선초 약 70년간 우리나라 연안 각지에 침입하였다.
대마도는 본래 신라에 소속되었으나 차차 왜인들이 들어와 거주하게 되면서 일본 땅이 되어갔다.
인구가 적고 땅이 매우 척박하므로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기근을 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신라에서는 관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는 일본 국내 사정으로 본토와는 정상적인 교역을 통한 식량의 구입이 어려운 상태였다.
몰락한 무사와 죄수들이 증가하니 비상수단에 의한 물자 공급이 요청되었는데 그 비상수단이 노략질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종대왕은 이종무가 이끄는 원정군으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했다.
조선군은 대마도에서 2주 정도 전투를 벌인 뒤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귀환한다.
이때부터라도 우리가 통치를 했더라면......
당시에 아마도 먼 훗날을 바라보는 혜안을 가진 정치지도자들이 있었다면 [대마도]는 오늘날 우리의 소유가 되었을 텐데.......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나니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유능한 가이드 덕분에 대마도에 관한 유익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 커다란 소득이었다.
Ps : [대마도]는 아주 가까운 곳이다.
제주도에 가는 기분으로 여행을 하였다.
그래서 스마트폰도 해외로밍에 신경을 쓰지 않고 여행을 하였다.
여행 중에 재직 중인 학교에서 업무상 필요에 의해서 전화가 왔다.
“와! 가까운 곳이라서 좋기는 좋다. 별다른 로밍을 하지 않았는데도 학교에서 업무차 오는 연락이 잘된다.”
하면서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 후로도 전화연락을 했었다.
우와?
그런데 귀국 후 다음 달 전화요금 고지서를 받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대마도]가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도 해외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해외요금이 적용되니 요금 폭탄을 맞았다.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