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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25
8월18일 [연중 제2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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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게으름과 나태함을 떨치고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세상과 인류 구원을 위해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백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분히 복합적이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는 사람들은 대견스럽게 바라보셨습니다.
오랜 세월 폭군들의 압제에 시달리던 식민지 백성들의 고통 앞에서는 저절로 연민과 측은지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돌아서지 못하고 과거의 악습에 푹 빠져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가장 중요한 자신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오늘 하루 희희낙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무런 준비도, 변화를 위한 노력도 없이,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영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고, 강력한 경고 말씀이 뒤따랐습니다.
오늘 엄청 강력하고 섬뜩한 경고 말씀은 이런 분위기를 배경삼아 나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복음 12장 49절, 51절)
‘세상에 불’ ‘평화가 아니라 분열’ 등의 강력한 표현은 묵시 문학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이라,
조금 난해하기에, 잘 새겨들어야만 합니다. 묵시 문학에서는 종말이 다가오면 가정에서 부터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붕괴 현상이 초래될 것을 예언합니다.
따라서 가정의 분열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전조라는 것입니다. 한 가족 안에서, 다섯 식구 중 3:2로 갈라져 맞설 것이라는 말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이 맞설 것이라는 말씀, 참으로 듣기에 거북하고 난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종말이 다가오면 하느님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즈카리야서에는 더 끔찍한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온 땅에서 삼분의 이가 잘려 죽고 삼분의 일만 살아남으리라. 나는 그 삼분의 일을 불 속에 집어넣어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고 금을 제련하듯 그들을 제련하리라.”(즈카르야서 13장 8~9절)
우리 역시 더 이상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을 내려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지르신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은 낮처럼 밝아졌고 그분께서 드신 횃불이 온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관심과 타성은 쫒겨나야 하고, 예수님의 불은 세상 방방곡곡으로 번져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경계하시는 백성들의 삶은 열정없는 삶입니다. 살아있어도 이미 죽어버린 삶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뜨뜨미지근한 삶입니다.
열정이 없는 신앙, 불꽃이 없는 설교, 영혼이 없는 얼굴, 뜨거운 사랑 없는 삶! 이제는 떨쳐버려야 할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지상 생활은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이었습니다. 매일 활활 타올랐습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알차게, 역동적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생인데, 금쪽같은 순간들이었는데, 아무런 영양가 없이, 빈둥빈둥 허송세월한 지난 삶이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이 비록 구차스럽고 초라해보일지라도,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 대상, 존재라 할지라도 지극정성으로 대하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게으름, 나태함, 무기력한 삶을 떨치고 일분 일초라도 의미있게 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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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령의 불 옮겨 붙이는 법>
한 사람이 7개월 동안 700명을 입교시킨 분이 계십니다. 1998년 공덕동 본당 신자인 채충석 씨는 이 공로로 서울 대교구장으로부터 선교 대상을 받았습니다.
선교왕이 된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선교하여 1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명 이상을 입교시켰다고 합니다. 이분은 선교를 하다가 거절을 당하더라도 좋지 않은 기분으로 헤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인디언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처럼, 대상자가 입교할 때까지 꾸준히 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말씀대로 선교하면 이런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개신교의 한 할머니의 이야기이지만 가톨릭 식으로 바꾸어보겠습니다.
한 성당의 전교 왕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1년에 백 명도 선교한 적도 있습니다. 어느 지방 도시에 규모가 큰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에서 1년에 100명을 전도한 연세 많으신 할머니의 선교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는 선교를 계획하면 일단 마을을 돌아다니시면서 선교 대상자를 먼저 찾습니다. 찾으면 그를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를 합니다. 때로는 단식기도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가정으로 선교하러 가십니다. 한번은 선교 대상자를 결정하여 놓고 오랜 시간을 기도한 후 그 가정을 찾아갔습니다.
“계십니까? 저는 00 성당에서 왔습니다. 예수님 믿고 천국 갑시다.”
할머니의 선교 내용은 간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주인의 대답도 간단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당에 안가요!”
그때 할머니는 아주 평온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아! 그래요.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돌아왔습니다. 한 주간 뒤에 그 집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계십니까? 예수님 믿고 천국 갑시다.”
그 집주인은 첫 번째보다 약간 언성이 높았습니다.
“성당 안 간다는데 왜 왔어?”
그때도 할머니는 아주 기쁘게 “아! 그래요.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깊은 절을 하면서 물러나왔습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계십니까? 예수님 믿고 천국 갑시다."
그때 안에서 주인이 나오더니 “저 할마시(할머니의 경상도 사투리로 약간 하대해서 하는 말) 성당 안 간다는데 왜 또 왔어.” 하면서 이번에는 할머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때 할머니는 아주 기쁜 얼굴로 “아! 그래요” 하면서 친절히 절을 하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할머니는 너무 기뻤습니다. 예수님도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그 다음 주일 네 번째 그 집을 또 방문하였습니다.
“계십니까? 예수님 믿고 천국 갑시다.”
그때 그 집주인은 침을 뱉어도 찾아오는 그 할머니에게 “지난 번 일이 죄송해서 나 오늘 한 번만 성당에 가 줄 테니 다시는 오지 마시오.”
“아 그러지요.”
할머니는 이미 기도를 많이 해 둔 상태라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날 그 사람은 신부님의 강론에 크게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또 동료들에게 선교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선교 왕들은 왜 그렇게 선교에 매달리는 것일까요? 억지로 하라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 마음 안에 어떤 열정이 타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정은 성령께서 불러일으키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 뜨거움으로 스스로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억지로 분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이 분열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열은 사람들과 일어나기 이전에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납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성령께서 들어오셨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이시려는 불은 싸우지 않으면 평화로워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만약 방 안에 뱀이 들어왔다면 그것을 잡지 않고서는 평화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우리 안을 밝히시어 자아의 실체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아와 싸우지 않으면 절대 평화를 갖지 못하게 만드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죄에 맞서 피 흘리며 죽기까지 싸우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 안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불은 나의 피를 통해 이웃에게 옮아 붙습니다. 위 예에서 할머니는 당신이 침을 뱉어도 기쁠 때까지 선교하였습니다. 침뱉음을 당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죽으면 나오는 피가 선교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가슴에도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의 불을 붙이셨듯이 그 불이 나를 죽여 흐르는 피가 이웃에게 불을 옮겨지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군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양 팔로 지팡이를 머리 위로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이겼고 힘이 들어 아래로 쳐지면 아말렉군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양 옆에서 아론과 후르가 양 팔을 받쳐주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양 팔을 십자가에 높이 들고 계십니다. 거기서 흘러내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 성령의 힘은 싸우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양 팔을 높이 들고 계신데도 싸우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 자신이고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싸우라고 십자가에 달려 계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까? 그러면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내가 죽어도 상관없습니까? 그러면 성령의 불이 타는 중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맙시다. 그러면 내가 침 뱉음을 당하여도 기쁘고 그러면 그 침 뱉은 사람에게도 성령의 불이 옮아 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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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제1독서: 예레 38,4-6.8-10 :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일생을 큰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할”(예레 1,18) 만한 용기를 가졌던 예레미야는 고통과 권세를 갖추신 그리스도의 예언적 ‘모습’이 되고 있다. 그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반대를 받는 표적으로 나타난다. 참된 예언자는 헛된 환상이나 감언이설에 동조하지 않고 그와는 정 반대로 그 상황을 새롭고 대담한 말로써 판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침내 대립과 불화의 상징으로 된다.
예레미야는 불신과 저버림을 당하면서 느끼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 15,10)
복음: 루카 12,49-53: 나는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언자들의 삶이 그러했다면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운명이 더 나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예언적 행동을 말해주는 말씀이 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49-50절) 여기서 ‘불’과 ‘세례’의 의미는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고 있다.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정화시키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과 죽음의 물속에 잠기는 행위로써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편 124,4-5 참조)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비록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구원을 성취시켜 마치 성령에 의해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처럼 그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강한 바람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반대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 때문에 가족들 간에도 충돌이 일어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51절) 이제 그분의 말씀을 선과 악, 진리와 허위를 가려내는 척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종류의 가치와 판단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대립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믿음과 믿음을 통해 그분과의 생활한 일치를 통하여 내적인 평화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체로 우리 마음 안에 커다란 ‘전쟁’ 즉 갈등을 일으키게 한다. 이 내적 전쟁을 통하여 모든 것을 극복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 진정한 평화 즉 구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내적 전쟁은 전쟁이며 갈등이지만 범죄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이다.
이 갈등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 갈등을 계속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갈등을 이겨내고 극복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참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이끌어 주실 것이다.
제2독서: 히브 12,1-4: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립시다.
히브리 서간에서도 비록 희생을 통해서이지만 충실성과 사랑으로 찬란히 빛나는 표징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신”(2절) 그리스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4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언제나 부딪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 했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선택한 하느님의 뜻은 평화와 구원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다면 그분의 형제자매인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올바른 선택을 해 나가는 삶을 결심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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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명을 앞두고 당신 마음의 내면을 관찰하도록 해 줍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성경에서 불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내면에서 깨끗하게 씻는 하느님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이 불은 벌써 땅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영을 통해서 신자 공동체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이런 불의 시험을 겪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암시하시는 세례는 번민과 고난과 더할 수 없는 슬픔을 겪으신 뒤에 죽음에 잠기실 당신의 수난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과 전쟁을 일으키러 오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 얻는 그런 세상의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전해 주는 평화를 누리려면, 먼저 불을 통한 정화, 빛과 어둠, 악과 불의, 억압과 무관심, 거짓과 불의한 상황에서 안락한 생활에 맞선 선의 싸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대립 상황은 모든 가정 안에서,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의 믿음과 일관되기를 바라는 모든 신자의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유다교 회당이 나자렛 예수님을 하느님의 메시아로 고백한 모든 유다인에게 파문을 선언하였을 때(기원후 90년 얌니아 회의) 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가족애와 물적 집착보다 하늘 나라의 가치를 첫자리로 놓으면서 하느님 앞에서 전적으로 헌신하고 완전히 자유로운 자세를 취하도록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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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49-50)
이 말씀에서 ‘불’은, 하느님의 사랑, 구원의 복음 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는 말씀은, “나는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려고 왔다.”, 또는 “나는 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왔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마치 세상을 심판하려고 오신 것처럼 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7-20)
이 말씀의 실제 예로 헤로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를 꾸짖은 일은(마르 6,18), 그를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빛의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회개하기는커녕 세례자 요한을 죽여 버렸습니다.(마르 6,27) 그것은 빛을 거부하고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 일입니다. 헤로데 자신이 구원을 거부하고 심판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당신의 복음을, 또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움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3,34-35)
이 말씀은 단순한 ‘멸망 예고 말씀’이 아니라,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불’을 거부하면 ‘심판의 불’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 수난의 고통을 예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고통에는 십자가에 대한 인간적인 고통도 포함되어 있지만, 사실 예수님의 가장 큰 고통은, 인간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을 보는 고통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통곡하는 여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 23,28)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루카 12,51-52)
이 말씀은 ‘반어법’을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7-18)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5-6)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실천하면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의 평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복음 없이는 참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참 평화를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거부하고, 그래서 둘 사이에 분열이 생겼고,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분열은 갈등과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예수님 탓도 아니고, 예수님의 복음과 평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 탓도 아니고, 복음과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 쪽의 책임입니다. 이 상황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내면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내면에서 갈등과 분열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9)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열도,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분열도 모두 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굳은 믿음, 인내, 희망, 사랑, 회개, 그리고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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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님]
<분열을 넘어선 평화>
몇 해 전에 아버지, 동생 둘과 전남 순천에서 서울 집까지 함께 내 차로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약 5시간의 이 여정에서 가장 힘들어했던 사람은 아버지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아버지로 인해서 받았던 상처들을 동생들이 하나씩 꺼내놓으며 어렸을 적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다가 결국에는 아버지가 ‘미안하다’라고 하시며 어렵게 인정하면서 일단락되었습니다. 운전을 하고 있던 저는 ‘우리 가족에게 자신들의 속마음을 내놓는 좋은 시간도 생기는구나!’라고 하며 내심 기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분열되어 있는 듯 보이는 이 시간 동안 동생들은 과거의 상처들을 열어놓고 치료하는 시간이었고, 아버지는 자신이 몰랐던 자녀들의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런 시간이 필요했나 봅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재로는 진심 어린 사랑의 관계가 부족하고 이기적인 자아로 가득 찬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보내어 화끈한 성령의 불을 놓아야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과 계명보다는 적당히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당신 뜻대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성령의 불을 놓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고난의 과정이 있어야 관계 회복이 가능합니다. 사람들의 회개를 이끌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흠 없는 희생제물이 필요했고 예수님은 그것을 행하러 이 땅에 온 것입니다.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세례를 베풀려고 예수님은 자신이 그것을 먼저 받았으며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그것을 완성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께서 할 일은 다 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자신이 살던 대로 살 것이냐? 예수님을 따를 사람들과 기존의 삶을 쫓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은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과정입니다.
한국 사회는 학연·혈연·지연 등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끈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끈에 연결되면 문제의식 없이 그 그룹에 매여서 자신의 소리를 못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복음적인 사회적 경향에 대해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소외됨과 분열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참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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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인식 마티아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오늘 제1독서는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포위된 몇 달 동안 일어난 극적인 사건을 전해줍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빌론 군대가 이집트 군대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일시적으로 포위를 풀고 철수했는데 이것을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해주신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고, 예레미야는 거침없이 그들 의 마음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바빌론 군대가 다시 돌아와 이 도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불태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대다수의 백성에게 예레미야는 민심을 흉흉하게 하고 백성의 사기를 꺾는 유언비어 유포자, 적을 이롭게 하고 민족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민족의 반역자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의 지도자들은 격한 반감과 증오심으로 그를 왕에게 고발합니다.
예레미야는 급기야 자기 백성들로부터 대립과 불화의 원흉으로 지탄받고 생명까지 빼앗길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의 모습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다가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십자가의 고통과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루카가 전하는 오늘 복음은 당신 죽음과 영광을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 여행을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당신이 지상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의 깊은 의미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여기서 예수님께서 연결시켜 사용하고 계시는 ‘불’과 ‘세례’라는 상징적 표현은 분명히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정화 시키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 과 죽음의 깊은 물속에 잠기는 침례적 행위로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이 드러내는 위대한 사랑과 철저한 가르침 앞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예수님께서는 참 평화를 주시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그래서 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거짓 평화가 깨져야 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과 어두움, 사랑과 이기심을 싸움 붙이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한 가정 안에서도 식구끼리 서로 반대하여 갈라지는 일도 벌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레미야나 예수님처럼 불같이 타오르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확신과 열정으로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거짓된 평화와 타협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사랑과 진리 안에 머물러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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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승환 베드로 신부님]
<불을 지르러 왔다>
연일 이어지는 불볕더위에 몸도 마음도 지쳤습니다. 처서 절기를 며칠 앞두고 다가올 가을의 풍요로움을 생각해 봅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힘을 내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신 것처럼, 우리 또한 새로운 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이해하기 힘들고 많이 당황스러운 내용입니다.
소방수가 아니라 방화자로, 평화의 화신께서 가족 간의 분열을 조장하시고 서로 갈라서게 하시다니요?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설적 의미를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은 바로 세상을 정화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소명설화(이사 6장)에서 이사야는 불에 달군 숯으로 입술이 정화되고 죄 사함을 받아 예언자로서의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처럼 불은 인간들의 오만을 태우고 하느님의 거룩함과 그분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드러내며 심판 날에 밀과 가라지를 가려냄으로써 완성될 것입니다.
또한 불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활활 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온갖 속된 세상의 것들을 모두 태우고 정화된 삶은 바로 성령의 비추심에 따라 살아가는 참된 삶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평화의 화신이십니다. 그분이 탄생하셨을 때 평화가 넘쳤고, 당신께 치유 받은 여인에게 평화를 베푸셨고, 전교 여행을 하면서 평화의 인사를 하도록 사도들에게 지시하셨고, 부활하신 주님의 첫 인사 또한 평화의 축복이셨습니다. 이런 온유하고 평화 자체이신 분이 우리가 믿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분열을 극복하고서만 얻을 수 있는 귀한 선물입니다. 그분의 평화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어정쩡한 평화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 평화는 불을 통해 정화된 참 평화이며, 당신이 받아야 할 세례, 즉 그분의 전 생애인 삶과 죽음을 온전히 아버지께 봉헌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진정한 평화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불을 지르러 오셨고,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처럼 성령과 불의 세례를 기억하며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라,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박해 속에서도 말씀을 전하고 증거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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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내가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주제들입니다. 복음서들은 오늘 우리가 사는 문화권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부터 2000년 전 팔레스티나의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불을 지르러 왔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옮기면, 예수가 방화범(放火犯)이 되려 왔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불에다 비유합니다. [예레미아 예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님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 두자고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20, 9) 이 말씀을 배경으로 오늘 복음을 이해하면,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불길같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 왔다는 뜻입니다.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서](10, 38)는 예수님의 죽음을 세례라고 표현합니다. 세례는 사람을 물속에 잠그면서 행하는 의례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과거의 삶에 죽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의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데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든, 자기의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주저와 고뇌를 겪으면서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신 다음,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도 말씀하십니다.예수님이 불화(不和)를 좋아하신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 시대 유대교의 묵시문학은 세상 종말에 하느님이 가까이 오시면,가정이 분열되고 사회적 갈등이 고조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심판하실 종말이 가까워지면, 이 세상의 기존 질서들이 모두 무너진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알리는 것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은 당신의 말씀이 불길 같이 타올라 온 세상에 전해지기를 열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전해야 하는 말씀을 위해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당국과 갈등을 겪었고, 결국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이 고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의 생존도 결코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은 많은 곳에서 분열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정공동체가 찢어지며 가족끼리 반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시대 유대인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돌아가셨듯이, 그리스도 신앙인들도 가정이 분열되고, 서로 반목하는 아픔을 겪고, 많은 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 신앙 초기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초기 신앙인들에게는 분열과 반목의 아픔이 많았습니다. 신앙인이 되어서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사람이 20,000명에 이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혈연보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 소중하다고 믿습니다. [마르코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3, 35) 가장 중요한 인연은 형제, 자매, 혹은 아버지, 어머니라는 혈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 되어 살겠다는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과 인연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분열과 반목을 겪으면서 싸워 이기고 군림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다가 그 충실함 때문에 발생한 분열과 반목을 참고 견딥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분열과 반목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그리스도적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분열과 반목을 자초하거나 조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그것을 참고 견딜 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선교한다는 사람들의 독선적 자세를 만납니다. 그들은 그들만이 진리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웃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승리하고 명령하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랑하고 섬기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가 테살리니카인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살펴보고 좋은 것을 지키시오.”(1데살 5, 21)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모든 것을 살펴보는’ 현명함을 잃고,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살겠다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 어리석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불길 같이 타오르게 하지 못합니다. 우월감을 가지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려 하지 말고,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섬김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아들 됨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 34)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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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사제가 되어 본당 사목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종교를 개인의 취미처럼 생각하는 이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공동체, 타인에 대한 상처와 원망으로 올바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들, 미사를 소홀히 하는 이들에게 사실 적당한 충고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순간 개인적으로 항상 갈등이 되는 것은 바로 “사랑의 가치, 평화의 가치”입니다. 싫은 소리, 혹은 직접적인 충고로 인해 평화가 깨질까, 그렇다면 이것이 맞는 것인가 사제로서 걱정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평화를 거부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듯한 말씀을 아주 단호하게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 말씀은 자칫 우리에게 거북한 가르침으로 다가옵니다. 분명 사랑과 일치를 강조하셨던 주님이신데, 불을 지르러 오셨고 분열시키러 오셨다고 선포하시니 오늘만큼은 예수님께서 평소의 가르침과 모순된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욱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여기서 우리는 이 “불”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의 특징은 첫째로, 매우 뜨겁습니다. 우리는 흔히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 “저 사람은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즉,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으며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말씀은, 신앙인들이 하느님께 열정을 가지고 다가가야 하며 그 믿음은 뜨겁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열정은 후에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우리들의 모범으로 제시될 것입니다.
두 번째 불의 특징은, 모든 것을 태워서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 자리에 있던 것은 사라지고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빈 공간이 생깁니다.
즉 예수님의 비유 안에서 이 불이란, 미움과 차별, 죽음과 같은 악한 것들을 사라지게하고 그 자리에 사랑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장소를 제공하는 유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정으로 우리의 죄는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과 사랑이 싹틀 것임을 오늘의 말씀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언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그냥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갈등과 분쟁 없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사랑이 주어지면 좋겠지만 사실 그럴 수 없습니다.
불은 열기를 내뿜고 모든 것을 태우기 때문에, 다른 사물들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즉 이것은 불의 세 번째 특성과 연관되는데, 이는 곧 불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동안 거기에 닿는 것은 잿가루가 되어버리거나 녹아버립니다. 이것은 새로운 생명을 위한 갈등과 희생을 상징합니다. 불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종이나 나무, 숯과 같은 태워질 사물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불, 즉 영원한 생명에는 마땅한 희생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은 인간에게 분열을 가져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대의 표적이 되셨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과 반대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가르침이 논란의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정치권에서, 유다인들의 문화권에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혁신이었지만 이는 기존 사회의 분열을 야기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모험이며 결단이었고 전통사회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결국 부모와 형제, 자녀들 간의 마찰과 갈등을 전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쟁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만들어내신 세상의 분열은 인간의 부족함을 당신의 사랑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불이 이 세상에 떨어졌고 이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후 그 자리에는 평화가 생겨날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불에 탄 뒤 남아있는 적막과 같이, 세상에는 평화가 넘치고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불은 태워질 무언가를 전제합니다. 만일 일상 생활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 겪는 어려움과 희생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 안주하며 이 불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응답은 신앙인의 가치에 반대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재물, 욕망, 교만, 신앙에 대한 나태함 등등 우리에게 분열을 일으키는 것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성당에 가지 않는 자녀들 혹은 가족들에게 침묵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더 나아보이고 그리스도의 가치를 실천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사람들은 미련해 보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질러주신 불이 꺼지지 않도록 그것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이 불은 여러 곳으로 퍼져서 새로운 일치를 만들고 그 자리에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공간이 생겨날 것입니다. 여러 곳으로 퍼져나간다는 것. 이것이 불의 마지막 특성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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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눈빛, 칼, 불 : 그리스도인의 사명>
루카 12,49-53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눈빛, 칼, 불 : 그리스도인의 사명>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꿰뚫는 눈빛입니다
제 삶 속 은밀한 거짓과 불의를 통찰하며
더욱 맑고 투명한 빛을 거침없이 내품어
혼탁한 세상의 선과 악을 가려내는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꿰뚫는 눈빛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예리한 칼입니다
제 몸과 마음의 썩은 곳을 고통스레 잘라내며
더욱 곱고 날카롭게 시퍼런 날을 세워
세상 곪은 곳 도려내는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예리한 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꺼지지 않는 불입니다
제 자신에게 기생하는 죽음과 악의 세력을 없애려
쉼 없이 두려움 없이 스스로를 불살라
이 땅 가득한 어둠을 태워 없애는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꺼지지 않는 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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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하느님은 내 편…>
농사를 짓는 한 형제가 어느 날 자기 논에 물이 자꾸 줄어드는 것을 발견합니다. 알고 보니, 옆에 있는 논 임자가 자기 논에서 물길을 돌려 물을 자꾸 빼가는 것입니다. 그 논 임자는 최근에 성당에 나오기 시작한 예비신자였습니다. 형제는 시비를 걸고 싶지 않아서 원상대로 회복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에 가보니 다시 물길이 돌려져 있는 것입니다. 형제는 화가 났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그러나 믿음으로 산다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옹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는 성전으로 가서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저 사람이 틀리고 제가 올바르게 일을 하는데, 왜, 내 마음속엔 평화가 없습니까?” 형제는 “내 마음 안에 평화가 없습니다. 평화를 주시기를….”하고 은총을 청하면서 계속해서 기도하였습니다. 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들어오더랍니다.
“너는 올바른 일을 위해서만 사느냐? 그 이상으로 살 수는 없겠느냐?”
형제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올바른 일 그 이상으로 살라.”는 말뜻이 과연 무슨 뜻일까? 그리고 느낌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다음 날 일찍 일어나 자기 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예 처음부터 물길을 예비신자인 옆 논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기도하면서 들었던 그 느낌이 “올바른 일 이상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형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고, 마음에 평화가 오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남을 위한 배려의 삶”
얼마 후에 옆 논의 임자인 예비신자가 형제를 찾아와서 말하더랍니다.
“당신은 정말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형제님처럼 예수님을 믿고 사는 신자 되고 싶다고요. 그래서 세례 대부를 부탁하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올바른 삶을 사는 것만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을 희생하고 배려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안에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내 마음 안에서 마귀가 왕 노릇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씀의 불을 내 마음 안에 질러서 싸움이 일어나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마귀와 싸울 힘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말씀의 불을 주신 것입니다.
예) 초대 교회 때에 신자들은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 37-38절에 보면….
“사람들은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꿰 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우리 혈액 속에는 백혈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루에 수백만 마리의 병균을 먹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에 있는 혈액 속에 백혈구가 있어서 이 병균들을 전부 잡아먹고 있으므로 건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항상 이런저런 마귀의 유혹들이(잠 마귀, 욕 마귀, 험담 마귀) 주는 병균들이 있음을 아시고 하느님께서 그 병균을 이기게 하시는 성령의 불을 던져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성령의 불은 우리를 유혹하는 갖가지 마귀를 집어삼켜 이기게 하는 말씀의 백혈구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기쁨이 있다면 말씀의 백혈구가 살아있음이요, 내 안에 기도가 있다면 말씀의 백혈구가 건강함이요, 내 안에 감사가 있다면 말씀이 백혈구가 타오르고 있음입니다. 오늘 성령의 불로 고운님들 안에 말씀의 백혈구가 충만한 은총 가득한 복된 주일날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우리 혈액 안에는 백혈구도 있지만, 적혈구도 있습니다. 정혜신이라는 분이 쓴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서 적혈구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산소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맑은 공기를 통해서 패기로 들어온 산소는 혈액 속 적혈구에 실려서 온몸으로 운반됩니다. 적혈구는 폐로 들어온 산소를 이고 지고 택배 배달원처럼 멀리 있는 길을 떠납니다. 몸의 끝부분까지 일일이 찾아가 산소를 배달합니다. 적혈구는 쉬지 않고 일하는 고맙고 성실한 산소 배달원입니다. 적혈구가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 몸의 생명도 끝납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옳다.’라는 확인입니다.”
고운님들 안에는 이미 성령의 불로 말씀의 백혈구가 있습니다. 이제 고운님들은 그 말씀의 백혈구를 가지고, 지금도 어디선가 몸과 마음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도움을 청하는 누군가에게 산소를 공급해주는 말씀의 적혈구가 되어야 합니다. 즉 말씀의 택배 배달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이 항상 옳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당신 편입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당신이 옳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시켜도 짜증이 없고 불평도 없이, 먼저 고운님들 안에 성령의 불로 말씀의 백혈구를 담고, 그리고 말씀의 적혈구가 되어 발걸음마다 회복되는 은총 가득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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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27)
♧♧ 시편 44편 5절….
"하느님, 당신께서 바로 저의 임금님이십니다.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이는 온 누리의 창조주요 최고 통치자이신 하느님이 다윗 자신의 삶을 인도하실 수 있는 임금이 되심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한편 이러한 고백은 일반적으로 고대 근동 국가들 간에 행하여졌던 종주권 언약의 한 형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종주권 언약에서 주권국이 종속국에게 베풀 은혜, 곧 원수들로부터 구원해줄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종속국은 주권국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이 구절과 같은 내용으로 고백합니다. 이같이 당시의 풍습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야훼 하느님에 대한 다윗의 철저한 충성의 맹세로 볼 수 있습니다.
♧♧ 시편 44편 6절….
"저희는 당신 힘으로 적들을 물리치고 저희에게 항거하는 자들을 당신 이름으로 짓밟습니다."
신명기 33장 17절에 보면...“그는 맏이로 난 소, 그에게 영예가 있어라. 그의 뿔은 들소의 뿔. 그 뿔로 민족들을 땅 끝까지 모두 들이받으리라.”라는 말씀처럼, 마치 당신(주님)의 힘은 들소의 강한 힘을 연상하게 해줍니다. ‘당신 이름으로...’ 이름은 곧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사람의 전 존재나 인격, 성품을 나타내 줍니다. 여기서 ‘당신(주님)의 이름...’이란 하느님 자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당신(주님) 이름으로...’이란 말은 ‘하느님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의지하여...’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특별하신 은총으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또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시어 이스라엘 역사를 시작하게 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이 또한 이스라엘 모든 적들을 물리치시라는 승리의 확신을 노래한 것입니다.
(내일은 시편 44편 7-9절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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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아이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급하게 이송되었습니다. 골절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사고로 인해 심장과 뇌에 심한 손상이 온 것입니다.
병원의 의료진들은 가망이 없을 것 같다면서 이 아이의 어머니에게 준비하라는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면서 가망이 없다는 수술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수술 후, 어머니께서는 의료진을 비롯해서 사람들에게 아들의 완쾌를 의심하는 표현을 아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전혀 들을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상관없이 아들의 귀에다 완쾌할 것이라는 확신의 말을 계속해서 들려주었습니다. 며칠 뒤, 아들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깨어났습니다. 깨어나도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아들은 몇 달 뒤에는 정상인처럼 걸을 수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불가능을 이겨내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무의식중이지만 어머니의 긍정적인 말이 작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의 힘은 대단합니다. 말은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기도 하고,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서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어떤 생각과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행동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정적인 말, 한계를 짓는 말, 힘이 빠지는 말을 너무나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희망을 보여주는 말과 생각이 아니라, 의욕을 꺾어버리는 말과 생각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불은 사랑의 불이고, 정의의 불이었습니다. 촛불은 자신을 태우면서 빛을 내지요.
또한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서 장작은 자신을 태워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그런 불이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완전히 태우는, 하나도 남김없이 태우는 불의 삶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태우는 불이 되기 위해서는 큰 아픔이 동반될 수도 있습니다. 남들에게 오해를 사서 외면을 당할 수도 있고, 남들과 다른 모습에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피우기 위해 위선적인 삶을 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남들처럼 부정적인 생각과 말로 희망의 주님 곁에서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상의 눈에 보이는 평화가 아니라, 세상의 눈에서는 분열로 보이지만 참 진리의 길을 향하는 우리가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간직하면서 긍정적인 생각과 말, 남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생각과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을 지금 우리가 당장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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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과 의지를 앗아가는 4가지 말}
어떤 책에서, 이 세상에는 가능성과 의지를 앗아가는 4가지 말이 있다고 작가는 표현합니다. 그 단어는 ‘못해.’, ‘필요하다.’, ‘나쁜’, ‘해보다’라고 합니다.
사실 ‘못해’와 ‘나쁜’은 그럴 것 같다라고 생각되었지만, ‘필요하다’와 ‘해보다’가 왜 가능성과 의지를 앗아가는 말인가 싶더군요. 그런데 그 설명을 들어보니 그럴 것 같다 싶습니다.
첫째, ‘못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이룰 가능성이 없다고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둘째, ‘필요하다.’라는 이 말을 하는 순간 다른 중요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새 옷이 필요해’라고 생각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옷만 보이게 되지요.
셋째는 ‘나쁜’이라는 말은 사고를 제한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강점, 좋은 점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해보다’는 말은 실패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공부해 볼게”라는 말은 공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공부할게”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을 할 수 있는 의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심코 쓰고 있는 말들로 그 가능성과 의지를 앗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말도 잘 써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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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주에는 중앙동 성당 설립 50주년 행사가 있었습니다. 교구장님께서 축하 미사를 집전해 주셨습니다. 역대 본당 신부님, 보좌 신부님, 본당 출신 신부님, 본당 출신 수도자가 함께하였습니다. 저는 중앙동 성당 출신이고, 마침 안식년을 중앙동 성당에서 지내고 있기에 축하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은총과 감사의 50년을 축하드리고, 사랑과 나눔의 50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족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이 14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14대이고 바빌론 유배부터 예수까지가 14대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50주년을 축하한 중앙동 성당도 초대 주임신부님부터 지금 주임신부임까지가 14대입니다. 중앙동 성당의 50년은 성서에 따른 의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는 겉모습으로 그 크기와 역사를 알 수 있지만, 나무는 나이테로 매년 나무의 삶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0년을 축하하는 외적인 행사도 의미가 있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성금을 나눠준 것이 더 좋았습니다.
악을 뜻하는 Devil과 거룩함을 뜻하는 Divine은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에 설 것인가, 악의 깃발에 설 것인가를 늘 식별해야 하고,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악한 것들이 화려해 보이고, 편안해 보이고,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르면서도 악의 깃발 아래 서 있곤 합니다. 악의 깃발에는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참된 구원을 주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희생, 양보, 헌신이라는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의 깃발에 서지 못하곤 합니다.
우리의 목에는 두 개의 기관이 함께 있습니다. 음식물을 섭취하는 식도와 공기를 마시는 기도입니다. 음식을 섭취할 때는 자연스럽게 기도가 닫히게 됩니다. 만일 기도가 열리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음식물이 기도를 막게 되면 질식할 수 있고, 음식물이 폐로 가게 되면 염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음식물이 기도로 가게 되더라도 우리는 재채기를 통해서 음식물을 밖으로 내보내게 됩니다.
식도와 기도가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선과 악도 어쩌면 우리의 마음에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악한 것들이 들어오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을 닫아야 합니다. 악한 것이 들어왔다면 그것을 내 마음에서 내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고, 하느님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선한 것들이 들어오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선한 것들이 들어왔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꽃을 피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깨버린 불법일지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고,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참된 행복을 느꼈고, 신분과 계급의 벽에 막혀서 답답하던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한 형제요 자매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라면 몸이 아픈 병자들도, 장애인으로 태어나 멸시를 받았던 사람들도, 죄인이라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들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된 것도, 멸시를 받던 것도,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것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기 위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삶이 파격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것 자체가 파격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주라는 말, 친구가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도 가주라는 말,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는 말,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은 바로 파격입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을 생각합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 생각합니다. 지금 아프고,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교회와 신앙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친구로,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신앙인들이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지금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병든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늬만 교회요, 겉모습만 신자일 뿐입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것은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부처가 방해되면 부처마저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나의 내면에 있는 악한 것들을 모두 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근심, 걱정, 분노, 원망, 미움, 욕심이라는 쓰레기들을 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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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무엇인가?>
-여정, 열정, 인내, 평화-
삶은 신비의 여정입니다. 수도원에서 30년 이상 정주하면서 참 무수한 분들을 만납니다. 한 분 한 분의 삶의 여정이 기적같습니다. 어제 수십년간 수도원과 관계를 맺어온, 오랜만에 만난 분들과의 면담과 고백성사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산전수전 다 겪어온 삶이 고맙고 반가워 안아 드리며 치하했습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믿음의 여장군입니다. 믿음의 별을 달기로 하면 별 몇 개씩을 달아 드려도 되겠습니다.”
덕담을 드렸습니다. 사실 제 주변에는 믿음의 여장군들이라 칭할 수 있는 분들이 무수합니다. 새삼 삶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힘든 세월을 어떻게 지냈을까 싶습니다. 한 분은 얼굴이 까맣기에 물었습니다.
“남편과 공터마다 농사를 짓기 때문입니다. 남편도 경비직을 떠난 후 하루 종일 얼마나 농사짓기에 바쁜지 모릅니다. 함께 일하다 보니 얼굴이 까맣게 됐습니다.”
참으로 늘 부지런히 성공적 인생을 살고 있는 부부였습니다. 한 분은 예전에 꼬마 넷을 어떻게 키울까 걱정했었는데 둘은 결혼 시켰고 하나는 12월에 결혼하고 하나는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며 자식 자랑을 했습니다. 참으로 곤경 중에도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수십 년간 믿음의 도반으로 살아 온 분들이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삶은 무엇인가? 다시 묻게 됩니다.
첫째, 삶은 여정입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향한 여정입니다.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함께의 여정입니다. 히브리서가 삶의 여정을 역동적으로 묘사합니다. 걷는 것이 아니라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흡사 마라톤 경기를 연상케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12장 서두 말씀은 11장 ‘믿음의 전사들’에 이은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근심과 그토록 쉽게 달라 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흡사 옛날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때 달리기 장면이 연상됩니다.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힘껏 뛸 때의 모습입니다. 삶은 마라톤 경기와 같습니다. 매일매일 계속되는 삶의 마라톤입니다. 집착과 죄의 짐을 비우고 버려 가능한 가벼운 몸차림으로 달리는 것입니다. 달리지 못하면 부지런히 걷는 것입니다.
역시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입니다. 기록은 문제가 아니고 각자 제 페이스대로 완주하면 모두가 1등입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완주하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 또한 무한 격려가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둘째, 삶은 열정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열정입니다. 열정있을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안으로는 타오르는 불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열정의 불이 꺼지면 살았다 하나 실은 죽은 것입니다. 사랑의 불, 말씀의 불, 성령의 불입니다. 또 불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합니다. 열과 빛을 내는 불입니다.
과연 내적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입니까? 꺼진 불입니까? 성령의 불, 기도의 불, 말씀의 불 꺼지면 인생은 무겁고 어둡고 차겁고 거칠고 힘듭니다. 예수님은 평생 불로써 사셨고 지금도 현존하셔서 끊임없이 우리들 영혼에 사랑의 불을 붙여 주시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소원을 알아채야 합니다. 당신을 닮아 타는 불로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 사랑의 불이, 말씀의 불, 기도의 불이 되어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죽음은 물론 세례로 상징되는 온갖 고통과 시련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통과합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분명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십자가의 양상과 무게는 다 다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각자의 고뇌도 참 다양합니다. 이 모든 시련을 감당하여 통과할 수 있음도 하느님을 향한 타오르는 열정의 불이 있어 가능합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제1독서의 예언자입니다. 하느님은 정의와 열정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살려 내십니다. 사면초가의 죽음의 궁지에 몰린 예레미야를 에벳 멜렉을 통해 살려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된 치드키야 임금은 에벳 멜렉에게 명령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기 전에 그를 저수 동굴에서 꺼내어라.”
시편은 이에 화답하여 주님께서 구원하심을 노래합니다. 참으로 한결같은 열정의 사람과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며 흡사 예레미야의 고백처럼 들리는 화답송 시편입니다.
“외치는 내 소리 들어 주셨네. 나를 멸망의 구렁에서, 더러운 수렁에서 꺼내 주셨네. 반석 위에 내 발을 세워 주시고. 발걸음도 든든하게 잡아 주셨네.”
셋째, 삶은 인내입니다.
인내와 시련입니다. 시련과 유혹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시련을 통해 복종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삶에서 오는 온갖 시련들을 인내하며 비움의 계기, 겸손의 계기로 삼을 때 내적 성장에 성숙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견뎌 내는 자가 구원의 승리자가 됩니다. 바로 우리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이자 빛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 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기쁨을 내다 보면서, 기쁘게 자발적으로 각자 십자가의 시련을 지극한 인내로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아 계신 주님은 힘을 주십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시련을 겪을 때 마다 죄인들의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어제 믿음의 여장군같은 자매에게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전 60대 중반의 나이에 야학으로 고등학교 검정시험에 합격한 백절불굴 ‘믿음의 여전사’입니다. 바로 막내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입니다. 온갖 십자가의 시련을 믿음으로 견뎌낸 결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준호를 통해 영광 받으소서. 준호 사도요한이 9급 행정직 시험에 최종 합격입니다. 감사미사 부탁합니다. 신부님, 다음 주일 준호와 함께 뵈러 갈께요.”
고등학교 졸업 후 얼마 동안 집중 노력하여 기적처럼 합격한 것입니다. 자매가 이 아들을 낳았을 때 저에게 부탁하여 이름도 세례명도 제가 지어 주었으니 하느님 친히 사제를 통해 하신 일입니다. 즉시 새벽에 답신을 보냈습니다.
“경사가 겹쳤네요!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준호가 집안의 희망이, 빛이 되었네요. 기적입니다. 오늘 아침 감사미사 봉헌합니다.”
넷째, 삶은 평화입니다.
가짜 거짓 평화가 아니라 진짜 참 평화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은 평화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경계한 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 자체가 참 평화입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곧 길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노신과 신영복 선생님의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예수님은 판별의 잣대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요 빛이요 평화요 생명입니다. 예수님 앞에 진리와 거짓, 빛과 어둠, 참평화와 거짓평화, 생명과 죽음이 저절로 드러나기에 분열은 자명합니다.
이런 분열은 과정상의 분열이요 참 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분열입니다. 결코 값싼 평화는 없습니다.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백배 낫습니다. 작금의 한반도의 평화가 바로 그러합니다. 얼마나 지난한 인내의 과정입니까? 그러나 마침내 한반도에 참 평화가 도래할 것을 믿습니다. 참 평화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한반도 한 복판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열이 답이 아니라 평화가 답입니다. 한반도내의 분열이 참으로 심각한 상황이지만 답은 지극한 인내와 지혜로 궁극의 참평화가 도래하기 까지 노력하며 분열의 시련을, 십자가를 견뎌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의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기쁨이요 평화요 감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열정의 사람, 인내의 사람, 평화의 사람, 기쁨의 사람, 감사의 사람이 되어 각자 주어진 삶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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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설마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을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크고 넓고 깊은 사랑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살 수 있는 은혜를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20)라고 주님의 참 평화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정말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신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신학교에 가겠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님께서 반대하셨습니다. ‘학비도 안 대 줄 것이고 너와 나는 이제 끝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저와 어머니와의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친구 어머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신부가 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에게 효도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저와 어머님의 갈등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구나 하는 생각에 저의 결심을 굳히고 더 확고하게 ‘신학교에 간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 허락하시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부모님과 소원하게 지내야 했습니다.
이때의 갈등과 분열은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한 진통이었습니다. ‘성장통’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머님께서는 제가 미국 교포사목을 하는 동안 한 통의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신학교에 가는 것을 반대했던 미안함을 표현하셨습니다. 지금은 매일 저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멀리 있는 사람과의 관계는 원만합니다. 등을 지거나 원수 되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각자의 탈랜트에 따른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것을 더 강하게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왜 너는 나의 말을 따르지 않느냐? 왜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느냐? 나의 뜻을 존중해 주지 않느냐?”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다" 하고 말하며 자기의 기대를 채워주지 않는 것에 실망을 갖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나름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하며 실망과 상처를 지니고 결국에는 “네 마음대로 해봐라. 어디 잘 되나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을 품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은 사자와 황소의 결혼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사자와 황소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데 하루는 황소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자는 큰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먹으려 하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황소가 여물로, 풀로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화가 났습니다. 잔뜩 기대를 하였는데 그 기대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황소도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준비한 것인데,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왜 안 먹느냐? 정성을 기울이고 사랑을 쏟은 만큼 화가 났습니다.
다음날은 사자가 준비하였습니다. 고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것도 쇠고기로 준비하였습니다.
결국 황소와 사자는 서로를 위하여 정성과 사랑을 다하였으면서도 남은 것은 기쁨과 보람이 아니라 ‘화’밖에 없었습니다.
그야 말로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에 최선을 다하되 깨어서 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않으면 결국은 분열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서로 맞서게 되는 이유는 잘못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주면 더 행복합니다.
사랑하면 풍요로워집니다. 부유해 집니다. 그런데 눈높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사랑이라는 빌미로 상대방을 옥죕니다. 사실 세상은 더 많은 소유와 지배,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에 우리를 유혹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에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선을 선택해야 하는 당연함 속에서도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선언 하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와 상황, 여건 안에서도 흔들림 없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집회서 15장 15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우리는 분명 생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눈앞에 보이는 축복이 다인 것 같지만 주님의 눈으로 보면 그 축복이 저주요, 오히려 지금의 저주가 축복이요, 영원한 선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을 선택하기를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아기를 낳게 되면 탯줄을 잘라야 합니다. 그래야 아기가 삽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품에 있고 싶다고 해서 탯줄을 그냥 둘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면 혈육으로 된 핏줄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육적인 관계보다 영적인 새 생명의 관계를 단호히 선택해야만 합니다.
혹 인륜의 도리에 소홀한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주님을 먼저 택하면 그 다음은 주님의 풍요로 채워지게 됩니다. 부모 형제,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혈육을 먼저 택하게 되면 하느님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갈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7,13-1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천상과 연결된 결정을 내려야 하고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요구와 대결을 하며 분열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택하면 나머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넉넉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5장 13절에서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옛말에 “너,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의 싸움, 불의와의 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오는 분열은 참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이분열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분명한 것은 하느님을 선택하면 모든 것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의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그때에 환전상들의 가판대를 둘러엎으시고 누가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느냐며 화를 내셨습니다. 사랑을 강조하신 분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행동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진 거짓 평화와 맞섬으로써 분열을 가져 왔지만 그 분열은 멸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참 평화를 전제로 한 분열이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특별히 자녀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면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해야 합니다.
역작용이 날까 두려워하며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급급해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위한 값진 보물을 발견 하였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혼자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더 큰 것을 주기위한 갈등, 분열은 감수해야 합니다.
오래 전입니다. 한 형제님의 팔순을 맞이하여 본인의 뜻에 따라 가장 귀한 선물을 주문하였는데 가족 모두가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8명의 가족이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중에는 쉬고 있는 자녀도 있었습니다.
미사봉헌을 마친 후 한 자녀가 말했습니다. “신부님, 오늘 강론은 제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기를 소망한 형제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도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십시오. 하늘을 차지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비온 뒤에 땅바닥이 단단해 지는 것처럼 어떤 풍파가 있은 후에 일이 더 단단하게 여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사안일, 허위나 부정,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선택하는데 주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참 평화를 위한 분열을 감당하는 가운데 행복한 한 주간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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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연중 제20주일 말씀에서는 다소 강한 어조의 예수님 목소리와 이를 뒷받침하는 두 개의 독서가 봉독됩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불은 참으로 다양한 표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불은 덥혀주고 따뜻함을 유지해 줍니다. 불은 소독하고 정화하며 불순물을 걸러줍니다. 불은 태워 없애고 파괴하고 잿더미를 만듭니다. 또 불은 하느님의 진노를 드러내고(창세 19,24; 묵시 16,8), 하느님 현존과 영광을 드러냅니다.(창세 15,17; 탈출 3,2) 또 불은 사랑인 동시에, 사랑이신 하느님이십니다.(아가 8,6-7)
"그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이스라엘은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불을 충분히 경험해 왔기에 사실 그들에게 불은 생소한 표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은 여전히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며, 하느님의 불에 자신을 내어맡기기보다 세상 원리와 손잡기를 즐겨합니다. 그래서 충분히 타오르고도 남았을 터인데도 아직 타오르지 않은 불을 아쉬워하십니다. 그 불이 타올랐다면 아마 이스라엘은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니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불이십니다. 그분은 사랑의 불이시고,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살라 바치는 불이십니다. 미움과 절망으로 얼어붙어 굳어버린 마음들을 녹이는 불이시고, 질병과 고통과 눈물을 치유하는 불이시며, 남녀노소, 자국민과 이방인, 주인과 노예, 종교들을 가르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불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미 불이시니, 곁에 있는 이는 옮겨붙거나 멀리 피하거나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열정에 압도되어 그 불덩이가 옮겨붙도록 허용한 이는 먼저 그 불로 자신 안의 불순물들이 타고 정화되는 고통의 시간을 겪어내어야 합니다. 어느 성인의 비유에서 보듯, 습기 찬 나무둥치에 불이 붙으면 처음에 악취와 연기를 내뿜습니다. 그렇게 자신도 아프고 주변도 괴로운 정화의 시간을 거쳐야 하지요. 그 기간을 견뎌내며 잘 건조된 나무둥치가 활활 타오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키ㅣ 12,51)
예수님의 불은 분열을 일으킵니다. 맞서고 갈라지게 합니다. 불로 정화된 영혼과, 멀찌감치 떨어져 불구경만 한 사람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무늬로만 제자의 타이틀을 지닌 이와, 사랑의 불이 자신을 태워 사랑이 되어버린 제자 사이에는 갈등이 불가피합니다. 사랑의 불이 되어버린 이는 더 이상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두루뭉실하고 안일한 편안함에 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여기서는 맞서고 갈라지는 대상들을 가족 구성원의 예로 말씀하셨지만, 그 대상은 우리 내면에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스스로가 불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안정제일주의와 보호본능, 적정선을 지키는 데 무절제한 충동과 자극, 결과에 대한 우울과 불안, 편협하고 무질서한 자기애 등 한 인격 안에 자리하는 여러 모습들이 맞서고 갈라질 것입니다. 이 역시 혼란스럽고 아프지만 질서와 조화를 찾아가는 여정이고 궁극의 평화를 향해 있습니다.
내면에서든 외부 관계에서든, 아프지만 맞서고 갈라지고 성찰하고 화해하면서 서로에게 불을 지펴주고 꺼지지 않게 돌봐주는 사이, 매캐한 악취와 연기를 지나 평화는 옵니다. 순탄하다 못해 나른하기까지 한 상태는 편안 정도이지 평화는 아닙니다.
불이신 예수님 곁에서 불이 옮겨붙은 이는 이내 예수님과 한 덩어리의 불이 됩니다. 불을 둘로 가를 수 없듯 이미 두 존재는 하나의 불길입니다. 그렇게 커진 불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현존을 더 크고 더 밝게 더 뜨겁고 더 맹렬하게 드러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레미야의 곤경을 다룹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점령당하리라고 진실을 전한 탓에 물 없고 진흙만 있는 저수 동굴에 내려져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불길에 휩싸여 하느님의 뜻을 진실되게 전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예언자의 전형입니다. 이 모습은 곧 예수님께도 겪으셔야 할 고난의 모습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주님을 따른다고 나서긴 했지만 내외적 관계 안에서 맞서고 갈라지고 짓눌리고 분열되다 보면 갈등이 생깁니다. 선하신 주님을 따른다면서 서로 맞서고 갈라지는 걸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슬금슬금 뒤를 돌아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두루두루 좋고 편안하게 사는 게 하느님 뜻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 비슷한 일침을 가합니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히브 12,3-4)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주님의 불이 되어 타오른다는 것은 고난이든 영광이든 주님과 한 몸이 되어 헤쳐나가겠다는 의지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권고대로, 십자가를 견디어내신 분이 우리 앞에 계시니 우리는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 12,1) 우리는 이미 주님과 한 불이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그 사랑의 불에 휩싸인 벗님의 열정적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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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예, 있는 그대로의 저는 가겠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에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하느님께 받아들여졌다고 느꼈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였다.
“예, 있는 그대로의 저는 가겠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존엄성과 위대함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나 성과물, 쏟아지는 박수갈채나 성공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달려있다.
♣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똑같다. 교육을 많이 받은 자, 현명한 자, 이 세상의 지혜로운 자도 가장 불운하고 무지하며 가난한 자와 동등하게 여겨진다. 그 사람이 받은 은사, 소유한 능력에 따라 하느님께서 사랑에 차별을 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인 논리다. 곧 인간적인 논리는 그의 몸값이나 측정할 수 있는 가치지만 중요하다고 본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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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도전장>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이 도전장을 ???
맞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공학박사되기를 원하고
자식은 미용사가 되기를 원할 때 ᆢ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자식이 어릴적부터 내 소유라고
귀하게 잘 키워본다고 하다가 어느새
자식의 인생을 지휘하고 부모가 원하는
방식으로 연주를 마치고 싶어합니다.
그러지 마세요.
자신, 서로, 갈등하고 싸워야 합니다.
소리를 내야 하고 그 소리가 가족 간의 분열을
일으키게 되더라도 다퉈야 할 때가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 다툼을 피하다
병드는 사람들 많습니다.
소리를 내야할 때는 내야 합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도 알려야하고
갈등을 허용할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게 됩니다.
'겁내지 말고 표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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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 49)
뜨거운 불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타오르시는 불이신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가장 빛나는
불이십니다.
우리또한
타오르는
불이 되길
바라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사랑이
이제는 뜨겁게
뜨겁게 타오르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의 모순을
우리의 거짓을
불태워 우리
어둠을 이제는
밝히길 원하십니다.
타오르는 불이
길을 안내합니다.
타오르는 불이
신앙공동체를
환히 밝힙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삶을 가득
기쁜소식으로
불타오르게 하십니다.
시작도 마침도
불이십니다.
뜨거운 불이
타오르는 불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복음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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