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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기23장1~17절
제목 : 만날 수 없어도
욥은 엘리바스의 말에 반박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공의로운 재판을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욥의 말은 소망에서 탄식으로 다시 확신에서 절망으로 급격한 변화를 보입니다.
1. 주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려는 소망(1~7절)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엘리바스이 비난과 충고에 대하여 욥은 직접적인 변호 대신에 자신의 고통받는 현실을 불평하며(2절), 심판자 앞에서 자신의 변론이 정당하게 인정받게 되기를 소망합니다(3-7)절. 그러나 동시에 욥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탄식하면서(8,9)절 자신의 무죄함을 강조하고 (10-12)절 자기도 모르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행하시기 때문에(13,14절) 그를 두려워한다고 토로한다(15-17절).
1) 욥은 자신의 고통받는 현실을 불평합니다(1~2절)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오늘도. 일반적으로 '지금도' 또는 '항상'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혹자는 이 표현이 욥과 친구들 사이의 대화가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음을 암시한다고 하나, 그보다는 '심지어 지금까지도'(even now)의 뜻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Delitzsch).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사람은 가장 중요 한것이 마음의 평안입니다.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여기서 욥은 하나님께 반항하며 원망을 토로하고 있다기 보다는 친구들에게 반박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하겠습니다(Anderson).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 '받는 재앙'의 히브리어 '야디'는
'나의 손'이라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사실을 고려할 때 본문의 의미는
'나의 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RSV),
혹은 '나의 형벌은 나의 결함보다 훨씬 무겁다'(LB) 등의 두 가지 뜻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뜻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뜻 중에서도, 본장에서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기를 열망하고 잇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후자의 뜻이 더 타당하다 하겠습니다.
2)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3절)
욥은 자신의 극심한 고난에 대해 잠시 언급한 후,
본절에서부터는 곧장 자신의 주된 관심사로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 주된 관심사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받아 보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확신하였고,
더욱이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임을(시 89:14) 믿었기에,
기필코 하나님께 호소하고자 한 것입니다(J.E. Hartley).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만나서 호소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토로합니다.
3) 욥은 하나님 앞에서 변론하고 싶어 합니다(4~5절)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욥은 하나님 앞에서 궁금했던 모든 의문들을 마음껏 털어놓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판결이 나든지 간에 거기에 순복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변하지 않으며,
욥 자신의 결백함 또한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훗날에 여호와께서 직접 욥에게 말씀하실 때,
욥은 두려움 가운데 한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40:2-5).
따라서 본문은 어떤 의미에서 40장 사건을 염두에 둔 극적 암시라 하겠습니다.
4) 욥은 하나님이 자기 말을 들으실 것을 확신합니다(6절)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에 다투시겠느냐 -
다분히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 권세와 능력을 남용하여 멋대로 판결을 내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와 진리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5) 욥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변론만 하면 영원히 벗어나리라 확신합니다(7절)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거기서는 -이를 공간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또는 '보좌 앞'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간적 개념으로 이해하여(35:12;시 14:5;66:6;습 1:14)
'그때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deWilde, Gordis).
즉 '하나님과 변론하는 그 때에'라는 뜻입니다.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 즉 - 욥은 하나님께서 '정직자'(야솨르)의
변론을 들으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신합니다.
물론 여기서 '정직자'란 곧 욥 자신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란 거룩한 존재 앞에 직면했을 때
욥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40:5).
욥은 극도의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서 그 고난의 원인을 밝혀보려고 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변론의 상대자가 아니라,
오직 순종의 대상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 '벗어나리라'(팔라트)는 '해방될 것이다', '피하게 될 것이다'하는 뜻으로 심판자의 형벌(또는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나리라는 의미입니다.
즉, 욥은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시의 무죄함과 순전함이 입증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을 뵐 수 없는 것에 대한 탄식(8~12절)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 욥은 숨어계신 하나님을 의식합니다(8~9절)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여기서 욥은 자신의 부르짖음에 대해 잠잠하시는 소위
'숨어계신 하나님'(the hidden God)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어디로 도망가도 좇아오시는 무소 부재하신 하니님을 증거한 바 있습니다(시 139:7-10).
반면에 욥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 주사 믿음의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갈망하였으나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엄연히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욥의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문제 해결의 과정이나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될 뿐입니다.
2) 욥은 하나님은 자기 가는 길을 알고 계시고 자기는 단련시키심을 알았습니다(10절)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
'나의 가는 길'을 직역하면 '나와 함께 있는 길'입니다.
바로 앞에서 욥은 그 어디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탄식한 바있습니다(8,9절).
그러나 욥 자신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섭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고난 뒤에 정금같이 단련된 영광이 오리라고 소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J.E.Hartley).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나오리라 - 즉, '하나님의 시련이 끝날 때에 용광로에서 연단받은 금처럼 내가 깨끗하고 순결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욥이 자기 무죄성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고,
고난 뒤에 심판대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것임을 전제하고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 욥의 확신과 기대는 절정에 다다릅니다.
욥이 자신의 시련을 금 제련에 비유한 것은
그의 염원이 재물의 회복이 아니라 바로 인격과 영예의 회복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더러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을 금과 은처럼 여기라고 충고하였으나(22:24, 25),
욥은 자신이야말로 신앙 인격과 신앙 안에서의 명예를 그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욥은 자기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정에서 승소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합니다(11~12절)
(1) 욥은 그의 걸음을 따랐습니다(11절).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었습니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의 교훈과 법도를 무시하는 자라고 공박한 적이 있습니다(15:4;22:22).
그러나 욥은 일거수일투족을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했음을 담대히 고백합니다. 이는 시편 119편 기자의 고백을 상기시킵니다(시 119:105, 131, 147).
*시119:105,131,147 “[105]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31]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147]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 이것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렘 9:20), 곧 그의 명령과 교훈에 순종하였다는 뜻입니다(J.E. Hartley).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십니다(시 1:6).
(2) 그의 입술의 명령을 귀히 여겼습니다(12절)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 '일정한 음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후키'는 보통 다음과 같이 해석됩니다.
(1)'일정한 음식'(LB,NIV) 또는 '필요한 양식'(KJV, 창 47:22;잠 30:8).
(2)'나의 가슴속에'(70인역, 벌게이트역, RSV).
이 경우는 '메후키'를 '베헤키'로 읽기 때문이다.
(3)맛소라 사본(MT)에는 '나의 규칙, 법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을 단정적으로 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견해를 취하든지 전달하고자 하는 기본 의미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즉, (1)의 견해는 말씀을 사모하는 열성이 특출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2)는 말 그대로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명심한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3)의 견해는 특별히 욥이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규칙, 법칙'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있는 본성의 법,
곧 '지체의 법'(룸 7:23)을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욥은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거부하고 주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 없음에 대한 탄식(13~17절)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15]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1) 하나님의 뜻은 일정하십니다(13절)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여기서 욥이 하나님의 불변하신 뜻, 변개되지 않는 하나님의 선택과 계획을 고백하고 있다고 봅니다.
즉, 이유야 어쨌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과 그 목적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욥은 어느 누구도 그 뜻을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작정하신 것을 이루십니다(14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 여기서 '이런 일'이란, 욥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이유 없는 고통을 내리신다는 것인지, 아니면 욥 자신에게 내려지는 재앙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욥 자신 뿐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그의 절대적인 섭리하에 행하여집니다.
3) 욥은 절규의 말입니다(15~17절)
(1) 그 앞에서 떨며 그를 두려워 합니다(15절)
“[15]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욥은 자신의 변론을 전형적인 비탄조의 탄식으로 끝맺고 있습니다(15-17절). 그러나 이러한 탄식이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소망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31:35-37).
또한 이러한 탄식이 10-14절에 나타난 고귀한 신앙의 상실을 의미한다고도 보기 힘듭니다.
다만 욥은 견디기 힘든 현실로 인해 저절로 고통스런 절규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Anderson, Habel).
(2)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두렵게 하셨습니다(16절)
“[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 직역하면 '나의 마음을 연약하게 (또는 앓게) 만드셨다', 즉 용기를 빼앗아 가시고 두려움에 떨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뜻입니다.
욥은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의 압박뿐만 아니라 미래에 당할지도 모르는 모든 위협을 생각하고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15절 주석 참조).
(3) 욥의 고통을 말합니다(17절)
“[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멸망당하지 않음으로써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맛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메튜 헨리(Matthew Henry)도 욥이 환난이 이르기 전에 죽지 못하고서 여러 가지 고통에 직면해야 하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중 어떤 견해를 따르더라도, 욥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타나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자신의 뜻을 변함없이 이루시는 분입니다( 10~14절).
우리는 이 땅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나 자신과 주님 나라에 꼭 필요한 고난일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견디기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신 뜻을 붙들고 인내합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한 과정을 허락하십니다.
욥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말씀을 다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하는 일의 목적은 하나님이 감추고 계시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따를 방법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럴지라도 욥은 하나님이 고통 중에 있는 자신의 길을 알고 계시며, 모든 시련이 끝나면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이 모두 이루어질 것을 확신합니다.
내게도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욥은 견디기 힘든 현실로 인해 앓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2,15~17절).
주님의 섭리를 인정한다고 해도 고난은 힘듭니다.
욥은 자신이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맛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육신으로 계실 때에 이런 경험을 하셨습니다(히브리서 5장 7,8절).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으로 인해 통곡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신의 결정권을 아버지께 넘기셨습니다. 이처럼 순종이란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그 문제의 결정권을 넘기는 것입니다. 2) 성경과 교회 역사에서 경건한 신앙을 가진 인물들도 모두 하나님을 볼 수 없는, 혹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영혼의 어두운 밤을 거쳤습니다(8,9절).
하지만 우리는 욥의 기도를 주께서 듣고 계시며, 끝내 그의 모든 간구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도
공동체-수시로 확신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제 마음을 붙들어 주시고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열방-세계은행에 따르면, 세계 빈곤층 90% 이상이 휴대전화 사용이 가능한 지역에 거주하며, 개발도상국의 휴대전화 보급률은 90%에 육박한다. 휴대전화를 이용한 다양한 사역이 개발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