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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11:28~44절
제목 :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예수님은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임을 일깨워 주시고,
예수님은 마리아를 불러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애곡하는 무리를 보시고 또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십니다.
기도하신 후, 큰 소리로 외치자 죽은 나사로가 살아 무덤에서 나옵니다.
1.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십니다.(28~31절)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11:28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
그리스도께서 동네 밖에 계시며 동네 안, 사람이 많이 모인 곳으로 오시지 않은 것은 마르다의 간청에 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르다는 두려웠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최근 얼마 전에도 주님께서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르다는 자기 자매인 마리아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오신 사실이 소문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
'선생님이'란 단어는 마르다가 예수님을 경배하는 의미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지금까지 마르다와 마리아는 마땅히 받을 수 있는 분복 이하의 복을 누렸지만 하여간 주님에 대한 신뢰감은 상당했고 충실한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로 간 것을 보면 그녀가 주님을 경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
마르다를 집으로 돌려보내어 마리아를 불러오게 한 주님은 또 하나의 목적을 가지시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함께 있던 유대인들이 그가 행할 기적의 목격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 있던 유대인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의도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수가 흔합니다.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집안에서 나가는 것을 보고 저가 무덤으로 가는 줄 알았습니다.
당시 이 관례가 그러했듯이 문상하러 온 사람들에게 슬픔을 자극시키기 위해서 무덤으로 가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당시의 관례에 따르면 아내를 잃은 남편이나, 자식을 잃은 부모나, 남편을 잃은 아내나, 부모를 잃은 자식은 또는 친척이나 친구들 잃었을 적에 그들은 으례히 슬픔을 자극시킬 만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등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목적으로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 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감정은 이미 슬픔으로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에 대한 새로운 어떤 자극으로 더 흥분하게 될 것입니다. 문상객들은 마리아가 무덤을 향해 달려가면 제어할 수 없는 슬픔에 더욱 몸부림치리라 생각하여 마리아를 만류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강요하여 만류하지는 않고 뒤따라 감으로 슬픔에 동참하고자 하였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드럽게 위로하는 이런 방법은 때때로 큰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비통의 눈물을 흘리십니다(32~37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
마리아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렸다는 사실은 예수님께 대한 특별한 경배심을 나타냅니다.
왕이나 지도자들 앞에서 땅에 엎드리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는 당시 그의 육신적인 면을 생각하면 전혀 왕족이나 찬양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엎드려 경배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엎드려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
여기에서도 마리아는 경배하듯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마리아는 자기 말로 주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하늘과 땅에 가득한데 이를 육체를 가진 예수의 몸에 국한시킨 것입니다.
11:33
예수께서...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불행에 대해서 긍휼을 갖지 않으셨더라면,
냉정한 태도를 보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동정심을 보이셨고 민망히 여기셔서 눈물까지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외에도 인간의 공통적인 운명인 가련한 인간의 삶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주님은 그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목적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곧 인생들의 병고의 슬픔에서 해방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셨고, 열심과 긍휼로 행하시는 것을 보이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먼저 심령으로 민망히 여기시고 슬픔을 나타내시며 눈물까지 흘리시므로 우리 인간들의 질병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시기를 자신이 고통당하시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그러나 심령으로 통분히 여기시고 마음에 민망한 것이 어떻게 하나님 아들의 속성이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인간처럼 감정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비밀의 경륜을 따라 자신에게 그러한 감정을 끌어 들임으로써 슬픔이나 기쁨을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께서는 스스로 민망해 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혀 마음을 제어할 수 없어 감정의 노예가 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 의한다면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감정을 초월해 계시지만 자의로 이러한 슬픔과 민망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서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실 때, 죄인이 아닌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지상에 오신 것은 그리스도의 선택에 의한 것으로 보며, 이는 오로지 우리를 위해 선택하신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조금도 손상을 입히는 요소가 아닙니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유순하였고 순종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감정이 없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이점에서 주님은 우리의 형제임을 입증하여 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대번인이 되고, 인간이 경험하는 동일한 내용을 경험하여 우리를 변호하시며 우리의 약점을 옹호하는 일을 기꺼이 담당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만일, 누가 사람의 감정은 죄에 물들어 있으므로 이러한 감정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질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그에게 우리들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지적해 주고 싶다. 우리는 절제하지 못하며 중용을 지키지 못하여 우리의 감정은 죄에 물들어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이러한 감정들이 정돈되고 통제되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되므로 죄에서 떠나 있습니다.
사람의 감정은 실로 두가지 측면에서 악하다고 봅니다.
첫째는 혼란한 상태에 감정이 정돈되지 못하고 또한 중용의 덕에 의해 지배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합법적인 동기, 아니면 최소한 합법적인 목적을 지향하지 않은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도를 넘어 기뻐하거나 슬퍼합니다.
때로는 억제의 굴레를 송두리째 벗어버리기로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너무나 집착해 있으므로, 사소한 것에도 슬퍼하고,
때로는 전혀 아무 것도 아닌 것까지 문제시합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전혀 이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감정표현은 한계를 초월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감정은 올바른 이성과 판단에 근거를 두고 올바르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좀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창조될 당시의 인성(人性)과 후에 죄를 물들고 타락된 인간성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는 사람에게 감정(emorions)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감정은 이성에 합당한 순수한 감정이었습니다.
이러한 감정이 후에 무질서 해지고 타락한 것은 우연한 사고에서 빚어지는 오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속성인 감정을 가지셨지만 이러한
*(아타크시아)가 없는 감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감정(passions)에 노예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심히 민망하셨고 통분히 여기셨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감정과 우리 사람의 감정을 비유하여 설명한다면, 그들은 마치 유유히 흐르는 강에 깨끗하고 청결한 물과 흙탕에 거품나는 물과의 차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예 하나만으로 스토익파(stoics) 금욕주의자들의 굽힐 줄 모르는 강인함을 물리치기에 족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최상의 완전에 대한 기준을 그리스도를 떠나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담의 죄로 인하여 우리의 감정 가운데 내재해 있는 완고함을 시정하고 길들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도자로 따를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바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우리에게 돌처럼 굳어질 것을 요구하지 않고 적당하게 슬퍼하되 소망 없는 불신자들처럼 우리 자신을 슬픔에 내던지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살전4:13).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감정을 절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능력으로 우리 감정속에 있는 죄를 제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11;36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
요한은 여기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판단을 우리에게 기술해 보이고 있습니다.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라고 말한
첫째 사람들은 인간적인 면만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별로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구하지 않았다고 악의에 차서 그리스도를 비난했던 다른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칭찬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주님을 비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이 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은 훨씬 더 저속한 것이어서,
이 한번의 경우에 계시지 않았다 하여 불평을 터뜨린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이와 같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며,
오늘날도 계속 배은망덕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지 않으면 우리는 즉시 불평을 토로합니다.
"주님은 지금까지 나를 잘 도와 주셨는데 이제와서 왜 나를 버리시고 나를 실망케 하실까?" 여기에 이중의 병이 있습니다.
우리는 별 생각이 없이 우리에게 덕이 되지 않는 것을 요구하고 하나님께 우리 육신의 비뚤어진 욕망을 채워주도록 강요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답을 강요하며 우리의 참지 못하는 조바심이 지나치게 우리를 서두르게 만듭니다.
3.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십니다(38~44)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
그리스도께서는 한가한 방관자로서 무덤에 나아 오지 않고 싸움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씨름선수와 같이 무덤에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속으로 다시 통분히 여기신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가 정복해야만 하는 사망의 사나운 횡포가 그의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 통분히 여기심이 우리가 이미 언급한 불신(不信) 즉 믿지 아니함에 대한 의분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이유가 나에게는 더 적절하게 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위 사람들보다 사건 그 자체를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 풍성하게 나타내는 여러가지 내용이 뒤따릅니다.
그것은 무덤을 돌로 막아 놓은지가 나흘이 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11;39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이것은 불신이 표시였습니다.
마르다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하여 자신이 기대할 수 있는 능력 이하로 주님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의 뿌리는 그녀가 하나님의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을 자신이 육적인 감각에 의하여 헤아렸다는 점에 있습니다.
죽은 오빠가 이미 부패하여 악취가 나기 때문에 더 이상 마르다는 고칠 대책이 없다고 유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잘못된 생각에 의하여 지배될 때,
우리는 주님을 우리 마음에서 추방하여 주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실 일을 이루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녀의 오라비가 영원히 무덤속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은 마르다 덕분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마르다는 사실 그의 오라비가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을 끊어 버리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그를 살리는 일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르다의 마음은 정반대였지만 믿음의 연약함이 이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이쪽 저쪽으로 끌려 다니며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쪽 손을 뻗쳐 하나님으로 부터 도움을 청하는 반면에 다른 손으로는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는 도움을 밀어내기가 일쑤입니다.
물론 마르다가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할 때 마르다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혼돈되고 불투명한 믿음은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에 이르렀을 때 이를 활용하지 않는다면 별로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마르다에게서 최상의 사람들의 믿음에도 많은 결함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에게 달려나와 그를 맞은 첫번째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보통 이상의 믿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주님의 길에 어려움을 제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까지 미칠 수 있도록 우리의 감각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능력을 하나님께 돌릴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한 가지 약속이 우리에게 까지 미칠 수 있도록 우리의 감각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능력을 하나님께 돌릴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한 가지 약속이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면, 어쨋든 하나님께서 두번 세번 확증해 주실 때는 마르다처럼 묵묵히 따르도록 합시다.
11;40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주님은 마르다가 들었던 약속에서 충분한 희망을 걸지 못한 점을 들어 그녀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요한이 말로 표현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예시한 대로, 주님께서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이를 의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지 않았음을 인하여 마르다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네가 믿으면 - 이 말씀은, 믿음이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일 가운데 비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나도록 그 길을 평탄케 해 주기 때문에, 언급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시편 81편 10절에 "네 입을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불신은 하나님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손을 묶어 놓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다른 곳에서 예수께서는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13:58)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뜻에 의하여 구속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악의(惡意)가 하나님의 능력을 저항하고 반대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손을 멈추시고 믿지 않는 자에게 도움을 보류하실 때는,
그들이 불신의 장벽에 갇혀 있어서 주님의 손길이 뻗칠 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
주의하여 볼 것 같으면 기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하여 그의 손의 능력을 나타내시며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그리스도의 두번째 선언에 만족하여 돌이 옮겨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녀는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명령을 내리시는 것을 보았을 때 마르다는 기꺼이 주님의 명령에 의존합니다.
11:41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
참으로 기도를 위해 준비된 마음의 표현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바로 부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연합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상에서 들려 하늘에 오르기 전에는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항상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육신의 더러움에 빠져 있는 위선자들은 그들의 심각한 표정에 의하여 하늘을 끌어내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심각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이 하는 척하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은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눈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는 자는 정신적으로 하나님을 하늘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편만하여 계신 분으로서 천지에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세상을 떠나 천상으로 들리기 전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지나치고 세상적인 생각과 상상을 계속하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부르고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우러러 보는 것에 관한 한,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기도가 합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 영속적인 예식이 아닙니다.
세리는 그의 얼굴을 들지 못하고 땅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지만 그의 기도는 믿음으로 하늘에 상달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유익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의 열성은 때때로 우리의 몸에 영향을 미쳐 몸은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마음을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셨을 때 그는 특별한 열의를 가지고 기도했기 때문에 마음이 하늘로 따라갔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완전히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함께 하나님께로 데려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
비록 주님은 아무 것도 구하시지 않았지만 감사함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서 저자가 주님께서 형식적인 말씀으로 기도했다고 기록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전에 기도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도가 응답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주님은 복음서 저자가 언급한 대로 통분히 여기는 심령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보처럼 스스로 흥분했으리라는 것은 전혀 그 이야기에 일치되지 않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생명을 얻은 주님은 이제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능력을 아버지께로서 받았다고 말하고 스스로 능력을 주장하지 아니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대행자임을 인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인간의 능력에 적응시킴으로써 때로는 신성을 주장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스스로 주장하지만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성격을 입는 것으로 만족해 하시고 신성의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기도 하십니다. 복음서 저자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셨다고 한 한마디 말씀 안에 이 두 가지 면을 놀랍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 저자는 주님께서 사람들로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낸 것을 알고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하기 위하여 감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높은 위엄을 사람들이 그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비천하고 둔갑한 인간의 지각을 점진적으로 그러한 경지에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주님은 전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여러 모양으로 우리와 같이 낮추신다 해서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비어 비천한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셨다고 말씀하셔도 그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
이 말씀은 주님께서 원하는 만큼 많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미리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그에게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만을 행하시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로 이일이 참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일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만일 누가 "그러면 주님께서 왜 죽은 자들을 모두 살리시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면 그 대답은 용이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기적은 복음을 확증하는데 충분하다고 주님께서 판단하시는 한도 내에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주님의 거룩한 능력은 주님께서 나사로를 손으로 만지시지 아니하고 그의 음성으로만 외치셨다는 사실에 의하여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어떻게 죽은 자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는가?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가운데 우리가 매일 같이 믿음의 지각을 통하여 경험하는 주님의 신령한 은혜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음성에 죽은 생명을 살리는 힘이 내재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
복음서 저자는 나사로가 무덤 속에 안장되었던 그대로 나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수족을 동였던 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매장은 아직도 유대인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베로 몸을 동이고 머리는 머리수건으로 별도로 동입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
기적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할일은 그들이 친히 자기들 눈으로 본 일을 손으로 만져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동이고 있는 수의를 흔들어 놓았거나 저절로 수의가 벗겨지도록 해놓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증인으로 옆에서 보고 있던 방관자들의 손을 이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교도들은 여기서 엉뚱하게도 비밀 고해(告解)를 유추해 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를 생명으로 회복시켰을 때 제자들이 나사로를 풀어 놓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우리의 죄를 사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도들은 나사로를 풀어 놓아다니게 하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제자들이었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그 명령이 유대인들의 의심을 송두리째 제거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분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