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창(姜遇昌)
고종 신묘18년(1231), 송 소정4년. 금 정대8년. 몽고 태종3년
○ 12월에 몽고 군사가 경성의 4문밖에 나누어 진치고, 흥왕사(興王寺)를 공격하므로 다시 민희를 보내어 그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화친을 맺었다.
○ 몽고 군사가 다시 큰 포차를 가지고 귀주(龜州)를 공격하므로, 박서(朴犀)가 또한 포차를 쏘아, 돌을 날려 수없이 쳐 죽이니, 몽고 군사가 물러나 진을 치고, 책(柵)을 세워 지키었다.
살례탑이 우리나라 통사(通事) 지의심(池義深)과 학록(學錄) 강우창(姜遇昌)을 보내어 희안공 정(侹)의 편지를 주어 귀주에 항복하라고 타일렀으나, 박서가 듣지 않았다.
살례탑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그를 타일렀으나, 박서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몽고 군사가 운제(雲梯)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려 하므로 박서가 대우포(大于浦)로써 맞서 치니 부서지지않는 것이 없어서 사다리를 가까이 댈 수가 없었다. 대우포란 것은 큰 날이 달린 무기였다.
나이가 거의 70되는 몽고 장수 한 사람이 성아래에 이르러서 성루와 기계를 둘러보고 탄식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종군하여 천하를 두루 다니면서, 성곽과 해자에서 공격하고 싸우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으나 일찍이 공격을 이처럼 되게 당하고도, 끝끝내 항복하지않는 자는 처음 보았다. 성중의 제장(諸將)이 반드시 다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