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산·대천의 식생 |
싸리나무
싸리나무는 다 자라도 사람 키 남짓한 작은 나무다. 하늘 높이 쭉쭉 뻗어 아름드리로 자라는 큰 나무들이 볼 때는 정말 하찮은 존재로 여겨 우습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녀린 몸체가 가진 것의 전부인 것 같지만 싸리나무만큼 쓸모 있고 널리 쓰이는 나무도 드물다.
옛사람들의 생활용품으로 싸리나무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두루 쓰였다. 일반 백성들의 집에 들어가려면 먼저 사립문을 밀고 들어가야 한다. 또 마당에 놓인 싸리비, 삼태기, 지게 위에 얹는 바소쿠리와 부엌에 두는 광주리, 키 등 거의 대부분이 싸리 제품이었다. 집을 지을 때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먼저 싸리로 엮고 그 위에 흙을 발랐다. 명절날의 윷놀이에 쓰는 윷짝 역시 싸리나무였다. 이처럼 일일이 그 쓰임을 다 찾아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군수물자로도 싸리나무는 빠지지 않았다. 화살대는 남부지방의 경우 주로 이대를 사용하였으나, 대나무가 자라지 않은 북부지방에서는 싸리나무나 광대싸리로 만들었다. 또 장군이나 임금의 화살대 등 소량으로 특별 제작할 때는 대나무보다 싸리나무를 선호한 것 같다. 《용비어천가》에 보면 “태조는 초명적(哨鳴鏑)이라는 큰 화살을 잘 이용했다. 이는 싸리나무로 화살대를 만들고 학의 날개로 넓고 길게 깃을 달았으며, 사슴뿔로 화살촉을 만들었다. 촉이 무겁고 대가 긴 것이 보통 화살과 같지 않다”라고 했다. 또 싸리는 비중이 0.88이나 되어 단단하기로 보면 박달나무에 가깝고, 수분도 다른 나무에 비해 적게 포함되어 있다. 불이 잘 붙고 화력이 강해 군인들이 야외로 훈련을 나가서 취사를 할 때 싸리 없이는 자칫 생쌀을 먹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또 다른 귀중한 쓰임새는 횃불이다. 단종 2년(1454)에 신주(神主)가 종묘에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한 내용 중에 “앞에는 고적대가 있고, 이어서 싸리횃불 1백 개가 좌우로 나뉘어서 행진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그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야간행사에 싸리횃불을 이용한 기록들이 여기저기 나온다. 흔히 TV 역사극에서 기름을 묻힌 솜뭉치 횃불이 등장하는데, 그렇게 함부로 쓸 만큼 기름이 풍족하지는 않았다. 실제는 대부분 싸리횃불이었을 터이다.
출처 : 우리 나무의 세계 1 저자 / 박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