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교안(敎案) 사건
“교안”(敎案)이란 조선말기 개화정책으로 인하여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의 조약체결이후 천주교와 기독교와 정부, 천주교회와 기독교회와 비종교인들과의 분쟁을 외교적 타협과 중재를 통하여 해결한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1876년(고종13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개화시대로 나아 갔습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이후 조선조정은 선교사들에게 여행허가서인 “호조”(護照)를 발행하여 자유로운 선교활동이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나 100여년간 조선왕조의 척사위정(斥邪衛正)과 쇄국양이(鎖國壤夷)정책이 하루 아침에 해소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지방관리청의 관리들과 조선의 양반가문과 천주교회와 기독교회간의 마찰과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조선조정의 의도와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정부의 박해정책 완화로 천주교회와 기독교회의 공격적인 선교활동과 일부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교인과 민간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화는 과정에서 치외법권적 지위를 가진 선교사들의 월권행위에 대한 분쟁이 발생하는 등 과도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문제가 법적공방과 외교문제로 가는 사례가 늘어났습니다. 이렇듯 천주교회와 기독교회의 문제가 당사자들간에 원만하게 합의조정되지 않은채 외교문제로 확대된 사건이 교안이었습니다. 교안은 유교적 전통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에서 신교자유정책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법적 조항으로 해결하려는 외교분쟁은 선교정책에 있어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시 되는 대목이었습니다. 교안의 시기는 1886년, 조불통상조약으로부터 1905년, 을사조약에 이르는 20년간이었습니다.
천주교 신부와 기독교 선교사가 여행허가증을 받은 상태에서 전교활동을 자유롭게 하는 가운데 지방민들과 유교사상이 고착화된 양반가문들로부터 배척당하거나 폭행과 추방이 발생한 사건으로 인한 종교적 분쟁이 대다수였습니다. 1888년, 원산에서의 “드게트”(Deguette)신부에 대한 축출소동과 1890년, 전주에서의 “보드네”(Baudenet)신부에 대한 축출소동과 안변에서의 “마라발”(Maraval)신부에 대한 축출소동, 그리고 1892년, 수원에서의 “빌렘”(Wilhelm)신부에 대한 폭행사건이 주요 분쟁이었습니다. 이들 교안은 천주교 사제와 교인들이 비교인들로부터 부당한 박해와 폭행을 당하고도 불법행위에 대하여 지방관리들이 오히려 비호세력으로 등장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불법적인 문제가 계속되자 천주교 신부는 외교적 특권을 발동하여 자신과 천주교인들을 보호하려는 조치를 취한 것이었습니다. 지방관리들의 불법적 행위와 민간인들의 불법적 폭력과 추방행위에 대하여 주한외국공사를 통한 압박을 가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불법적 행위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근절되어야 할 사안은 분명하지만 선교정책에 있어서 자비와 용서와 관용 대신에 강대국의 지위와 법적 효력을 선택함으로서 자칫 선교정책이 후퇴하는 방향으로 갈수 있어서 우려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천주교회와 민간인과의 분쟁은 다소 완화되었으나 척사위정의 유교적 전통과 관행은 일시에 변화될 수 없는 사안이었습니다. 종교박해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교회와 교인들과 유교전통을 고수하려는 세력간의 충돌은 전국 곳곳에서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와 교인과 민간인들과의 충돌로 인한 폭행과 소송은 끊임없이 전개되었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 신봉자들은 조상제사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한 가족간의 분쟁과 폭력은 극심하였습니다. 교회건축으로 인한 분쟁과 불허문제, 각종 채무관계, 분묘문제, 조상숭배문제, 여성지위 문제 등 각종 사회문제들이 발생하여 법률에 미약한 조선인들의 심적 부담과 저항은 높아져 갔습니다. 문제는 부당한 처사를 받거나 업무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선교사와 공사관의 지위를 이용하여 이익을 편취하려는 사례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방관리들의 불법적 관행은 교안발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보수적 사고가 강하고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지방관리들과 유지들은 천주교와 기독교가 자기들의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매우 위험하고 불경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불법적 훼방과 거부로 선교사들을 위협하거나 교인들을 감시하는 사례가 많았으며 또는 이들을 불법 구금하여 돈을 요구하는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1887년, 경기도 관하 제읍에서 외국인과 관계하는 내국인들을 조사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1892년, 전라도 지방에서 천주교와 기독교의 명부를 작성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와 지방관청이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외교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동학과 일진회 등은 의식적으로 천주교와 기독교를 박해하였습니다. 동학은 교조의 포덕문에 반포된 것과 같이 천주교와 기독교를 서구열강들의 침략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박해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동학농민들은 외국선교사와 전교신부들을 폭력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불법적인 언행을 사사로이 자행하였습니다. 1899년, 안변동심계원(安邊同心契員)과 1901년, 상주향약동심계(尙州鄕約同心契)는 유교적 향촌의 향약에 의해 천주교와 기독교인들을 마을에서 추방하거나 징벌을 가하는 집단적 행위로 확산되어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교안은 조선최대의 교안으로 교인들과 민간인들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350명의 천주교 신자가 희생되는 등 700여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899년 교민조약이 체결되었고, 1904년에는 선교약조가 체결되는 등 자성적인 중재안이 계속되어 교안사태는 진전국면에 이르렀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더 이상의 교안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➀ 해서교안(海西敎案)
“해서교안”(海西敎案)은 1900년 황해도 해서지방에서 일어난 천주교 신자들과 민간인과 지방관청 관계속에서 일어난 충돌사건으로 외교문제로 까지 비화되었습니다. 황해도에 천주교가 전파되고 “베르뇌”(Berneux, S. F.) 주교를 중심으로 우세영, 이득보의 전교활동으로 교세가 급성장 하였습니다. 이들 입교자 가운데에는 신앙심보다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부패한 지방관리들은 착취와 금품수수를 요구하고 천주교회에 대한 모욕과 박해를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천주교 사제들과 마찰이 불가피하였고 이 과정에서 주한 외국공사의 권력을 빌리면서 외교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천주교는 지방관청과 민간인 뿐만 아니라 새롭게 성장한 기독교의 성장에 따르는 교세확장에 관한 미세한 마찰까지 일어나면서 분규는 해주, 신천, 재령, 안악, 장연, 봉산, 황주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천주교인들과 민간인들과 시작된 마찰은 관청으로 확대되고, 천주교 사제가 주한공사를 동원하면서 외교문제로 까지 비약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1903년 1월24일, 조선조정은 사핵사 “이응익”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였으나 이응익은 일방적인 처리와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폭력적 행위를 자행함으로서 천주교를 더욱 자극하였습니다. 1904년, 결국 주한 프랑스공사가 외부대신과 접촉하고 선교조약이 체결됨으로서 이 문제는 봉인되었습니다.
➁ 제주교안(濟州敎案)
“제주교안”(濟州敎案)은 “신축교난”(辛丑敎難), “이재수(李在守)의 난”, “제주민란” 등으로 불리워 졌습니다. “교안”(敎案)은 천주교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국가 정책이 “전면박해”에서 “전면개방”화 하는 과정에서 종교문제, 또는 종교문제와 관련한 분쟁이 정치적, 행정적 문제로 발전하였던 사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1901년에 발생한 제주교안은 역사상 최대규모의 교안으로 700명이 살해되는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참극이었습니다.
전제군주제를 지향하였던 대한제국은 황실제정을 안정화하기 위해 내장원(內藏院) 봉세관 “강봉헌”을 제주도로 파견하였습니다. 강봉헌은 제주 공유지에 대한 무리한 세금부과와 어장과 그물망, 소나무, 목초지에 대한 세금까지 부과하는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1899년 5월, 제주에는 프랑스 외방선교회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와 조선교구 소속 김원영 신부가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교안직후에는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파견되었습니다. 초기 천주교의 제주선교는 제주민들의 배타적인 미신과 토속신앙으로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서민층과 향리층과 유배인들이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천주교회는 제주도내에 새로운 사회권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을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성황당나무)을 벌목하는 무리한 행위로 인하여 주민들과 잦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1901년 2월, 정의군 하효리 “오신락” 노인이 천주교당에 잡혀 갔다가 귀가후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교회에 대한 반감은 매우 높았습니다. 더욱이 천주교 신자가 강봉헌의 징세 브로커 역할을 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후 중앙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회가 열리고 민란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강봉헌은 자취를 감추고 천주교 신자들이 민란의 사무실을 습격한 사건이 발생하여 민란군과 천주교회의 대결구도로 치달았습니다. 민란군은 도민을 규합하여 제주읍성 황사평에 주둔하며 천주교 신자들과의 살상전이 전개되었습니다. 5월28일, 성내 주민들이 성문을 개방하고 민란군이 제주성을 장악한 후 천주교 신자들을 관덕정 앞에 집결시킨 뒤 300~350명을 살해하는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김창수” 제주군수는 피난길에 올랐고, “채구석” 대정 군수는 천주교 신자들로부터 불신을 받아 중재 자체가 불가능하였습니다. 교회측에서도 신부가 중재하려 하였지만 최형순 등 강경파들에 의해 무산되는 등 제주 내 존경받는 리더자가 부재하였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프랑스 공사관과 대한제국 외무부가 나서서 주모자인 이재수 등 민란의 동참자들이 처형당하고 천주교인들의 묘지가 확정됨으로서 제주교안은 타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