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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서녘포구
<사천 서포 초등학교 : 95.03.01-00.02.29>
◎ 다시 찾은 서녘포구
9년 만에 다시 찾은 서포, 참으로 감회 어린 곳이었다. 예전에 처음으로 서포 근무를 할 때에는 어느 교장 선생님의 쐐기로 사실 그리 즐겁지 않은 나날을 보낸 적도 있는 학교였지만, 이후 학습지도 보다는 업무 추진 면에서 참으로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만기 제대를 했던 곳이기에 더욱 감회가 새로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학교는 참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삼층 교실은 없던 것이고, 최신 수세식 화장실도 그랬으며, 본관 뒤편 언덕에 산재했던 교실들이 모두 철거되고 교사(校舍) 집중도를 많이 높인 점이 모두 외양(外樣)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아동 수 1000명이 넘었던 당시의 일들이 흡사 꿈 인양 250명 남짓한 학생들의 모임을 보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또, 당시 친하게들 지냈던 학부모들은 대개 학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고, 학교 밖의 거리들도 참으로 많이들 변해 있었다.
단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학교 일에 필요 이상의 간섭을 하려는 일부 학부모들의 사고방식과 정기 인사 시기가 되어도 오고자 하는 희망자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나도 함께 어울리고 말일이었지만 서포 근무 교사들은 예나 지금이나 정보에 몹시 어둡다는 점이었다.
많은 시간 함께 웃으면서 활력을 충전했던 숙직실은 교사(校舍) 뒤편에 따로 있었는데 이제는 교무실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되어 편리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높은 곳에 있었던 옛 숙직실은 이제 작은 창고로 전락하여 자유롭게 문도 열어보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있어서 서운하기까지 했다.
전에 근무할 때에는 자주 숙직실에서 커피 내기 나이롱뽕을 했었다. 차는 주로 다방에다가 시켰었는데 어느 날은 새로 온 다방 아가씨가 차를 들고 학교장 사택으로 가는 바람에 참으로 난처했던 때도 있어 그 때를 생각하며 혼자 웃기도 했다.
요즈음이사 커피 정도는 생각만 있으면 학교 안에서 타 마실 수가 있지만 그 때는 감히 그런 생각도 못할 만큼 그게 불가능한 때도 있었다.
◎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1996년 3월 1일자로 전국의 국민학교가 일제히 그 이름이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그 배경은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일제시대에 지어진 것이라 했던가? 아무튼 교육개혁의 도도한 물결 속에 이 나라 교육사의 한 페이지를 초등학교라는 이름이 새롭게 차지하게된 것이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면서 일선 학교가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실제로 내용은 교명의 변경과 더불어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외형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달라졌음이 사실이다.
우선, 교문에 붙어 있는 학교 명패가 달라지게 되었다. 서포 국민학교의 동판 명패는 거액을 들여 서포 초등학교라는 동판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분교장에서도 함께 이루어져야 했다.
학교 안에 있는 교기와 우승기가 모두 교체되어야 했다. 덕분에 도회지에 있는 국기사들이 밀려드는 수요에 즐거운 비명을 올렸었다.
또,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따르는 학교 직인, 병설유치원 직인, 고무인, 육성회, 동창회 직인을 모두 다시 새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인장을 새기는 업자들은 살판이 났다. 그 시기는 가뜩이나 나라 경제가 어려운 국면으로 치달아 IMF가 오고 있는 시기였으니 죽어나는 것은 국고가 아니었겠는가?
어디 그뿐이랴? 학교가 보유한 천막들에 새겨진 서포 국민학교는 아까운 천막을 차마 버릴 수는 없었고 하여 보기 흉하게 하얀 페인트를 칠하고 검정 페인트로 다시 쓰는 법석을 떨어야 했다.
학교 강당에 마련된 커텐의 학교이름도 바꾸지 않고는 걸어 놓을 강심장이 없으니 그런 것까지 일일이 바꾸어야 했던 것도 바쁜 교육의 일선에서는 참으로 성가신 일의 하나였다.
학교에서 해마다 신학기에 쓰기 위해 다량 인쇄해 두었던 업무 추진카드, 상장, 졸업장, 임명장 등을 비롯한 모든 인쇄물들, 장부, 각종 서식 등 경상도 방언으로 깔깔한 새것들이 모두 이면지로 쓰이거나 폐기처분 되어야 했다.
또, 미처 입에 익지 않아 자꾸만 국민학교로 나오는 실수들을 두고, 3000번 이상을 써야 익숙하게 고쳐지는 것이라는 둥 그럴듯한 이론적 배경까지 들이대며 학설을 펴는 교육 관계자도 볼 수 있었으니 우습기 그지없는 상황의 연출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에 의해서 전국적으로는 예산이 얼마나 소요되었겠으며, 혼란스런 일은 또 얼마나 연출이 되었겠는가 생각하면 자꾸만 그렇게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아니 되었는지가 반문이 되는 것이다. ‘국민생활에 필요한 초등 보통교육’을 하는 곳이라면 국민학교가 그렇게 심각하게 맞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었다.
-강원도에 있는 속초 초등학교, 서울에 있는 서초 초등학교, 가까운 산청에 있는 생초 초등학교는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초’자의 연속으로 아마 영원히 성가심을 겪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게 교직 말단인 내가 생각하거나 걱정할 일이 아님은 나도 잘 알지만…….-
이제 그 때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인가? 교육 가족들 간의 일상 대화 중에 국민학교라는 얘기는 나오지 않은지 오래다. 그 동안 3000번 이상을 사용했기 때문일까?
◎ 교무 내게 넘겨 주이소
1996년 3월 1일자로 한숙재 선생님이 남해 고현초등학교에서 전입 해 왔다. 선생님은 그 때 결혼 한지 얼마 안 된 시기였고 교육경력이래야 4,5년 남짓한 그런 선생님이었다. 매사 적극적이고 작은 일 하나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바른 길을 모색하려 애쓰는 모습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을 통하여 들은 정보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본인을 통해 들은 이야기 중에 상당히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어서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한 선생님이 초임으로 발령 받은 남해 고현초등학교에서 처음 맡은 학년이 5학년이었다. 교육과정의 정상운영에 남다른 고집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이던 선생님은 체육 시간에 태권도를 지도해야 하는 대목에서 그만 제동이 걸리고 만 것이었다.
인근 도장에 다니는 아동을 앞에 세워 수업을 진행해 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본인이 태권도를 직접 이해한 다음에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게 교사로서의 바른 길일 것 같다는 생각에 아가씨가 과감하게 태권도 체육관에 등록을 하고 정식으로 수련을 쌓기에 이른 것이다.
생각하건대 제약은 많았으리라. 자가용 없이 버스를 이용하는 진주에서의 출퇴근이니 시간도 빠듯했을 것이다. 그리고, 단체 회식이 있는 날 등은 운동을 거르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어려움도 많았을 것은 뻔한 일이다.
어쨌거나 열심히 수련을 하여 2단을 획득하고 더 하지 않아도 아동지도에 어려움이 없겠다는 판단으로 그만두었다는 선생님의 이야기는 충분히 감동을 주는 이야기이다. 남교사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경우 시범 보일 아동만 선정하여 수업에 임하고 말 가능성이 높은 일인데 한 선생님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볼 수 있는 일면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 후 고학년을 맡아서 체육시간에 소위 도장에 다니고 있다고 자신 있게 나서는 좀은 시건방진 아이들의 잘못된 태권도 품세를 바로잡아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한 선생님이 태권도에 몰두한 시간들은 장기간을 내다보고 투자한 가장 확실한 교재연구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 선생님이 처음 서포에 부임을 해 와서 과학 업무를 맡았는데 그 업무는 바로 전 해에 내가 맡았던 사무라서 디스켓에 담긴 내용들 일체와 업무 홀타를 통째로 넘겨주고 시기에 맞춰 가며 업무를 안내 해 주기도 했다. 전년도 것을 참고하다 보니 일이 좀은 수월했던가? 다음해에는 내가 교무부장 업무를 맡게 되었을 때 내가 맡았던 체육을 자기가 맡겠다고 한다. 결국은 소원대로 체육 업무를 맡아서 1년을 보내고 나더니 연말이 거진 다 지나 가는 어느 날 내년에는 교무도 자기에게 넘겨달라는 이야기를 해서 한참을 웃었었다.
그 한 선생님이 체육을 맡았던 1997년, 여교사인 그의 기획에 의해서 전통으로 여겨져 어느 누구도 손 댈 생각 안하던 ‘가을 대 운동회’라는 운동회의 이름을 ‘서포 한마당’으로 바꾸게 되었고 이후 서포 근무를 함께 하는 동안에는 바뀐 ‘서포 한마당’을 계속했었다.
아동 지도를 위해 태권도를 배우는 아가씨 교사의 열정이나, 내 사무 물려받아서 안내 좀 받고나서는 교무업무까지 넘겨 달라는 재치와 유모어, 백년 가까운 전통으로 이어져 오던 ‘가을 대 운동회’를 ‘서포 한마당’으로 과감히 바꾸어 놓은 개혁 내지는 개척정신이 아무래도 연약한 여성으로만 보이지 않는 아주 맹랑한 여 선생님으로 내게 비쳐진 것이다.
그리고, 어느 기회에 내가 강사가 된 동시조 창작 지도를 위한 연수를 받고 꼭 다음에 실천에 옮기겠다는 다부진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한 선생님은 그 후 동시조 지도와 스스로의 시조 쓰기 공부에 빠져서 교원예능경진대회 시조 백일장 부문에서 2등급을 수상했다. 그리고, 연전에는 자기가 지도하여 발간한 봉래초등학교 재직 시의 자기 학급 문집을 내게 보내온 적도 있다.
지금은 진주시조시인협회 회원으로 시조 사랑에 열을 쏟고 있다.
◎ 카풀 팀 이야기
<그 하나>
진주와 서포는 32㎞로 꽤 먼 거리에 속한다. 차량 통행이 많은 고속도로를 이용하면서 느꼈던 일인데 한사람이 한 대씩 몰고 다니는 비경제적인 사안을 과감히 바꿀 요량으로 카풀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첫 카풀 팀은 내 차로, 차를 갖지 않은 주로 여선생님들과 팀을 이루었다. 강혜정, 유순자, 박명월, 장미숙 네 사람과 함께 하던 중 강혜정 선생님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중도 탈락을 했고, 이어 해가 바뀌면서 박명월 선생님이 곤양 전출로, 장미숙 선생은 차를 구입 독립을 함으로써 빠지고 하여 안보선, 이경진 등 새 멤버가 보강되어 오가는 동안에 늘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서로 지루함을 떨칠 수 있었다.
<그 두울>
1999년에는 많은 직원들이 이동을 함으로써 각기 차량을 갖고 있는 직원들과 카풀 팀을 구성해야 했다. 1학기 동안은 이정희, 전제헌 선생님, 그리고, 강성희 영양사를 포함한 넷이서 팀을 구성했다. 구성원들이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어서 차량이 출발하여 모두 내릴 때까지는 웃음이 그치지 않는 참으로 좋은 팀을 이루었었다.
오죽하면 스스로들 붙인 카풀 팀의 이름 앞에다가 ‘환상의’ 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이정희 선생님은 나와 사천중학교 동기 겸 교대 한 해 선배였다. 가끔 아침에 창원까지 출근하시는 남편을 위해 마련하는 맛 좋고 영양가 높은 쥬스성 음료들을 일부러 넉넉하게 만들어서는 갖고 와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나눠 마시면서 담소하곤 했던 일이며, 이 선생님 스스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극진했다.
전제헌 선생님은 교육대학교 후배이고, 타고난 미남에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면서도 단체를 생각하는 여유롭고 넉넉한 품성의 소유자로 언제나 웃는 얼굴로 함께 했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함께 하는 다른 모든 이들을 편안하게 하려고 넉넉하고 실천하는 참으로 만인이 본받을 그런 사람이었다.
강성희 영양사는 가장 젊은 여성으로 신세대적 유모어가 있고, 밝은 미소와 행동거지로 다른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일종의 마력을 지닌 그런 멤버였다. 이제 어린 자녀를 키우면서도 그런 일에 쫓김을 전혀 내색하지 않을 만큼 일종의 발랄함을 마음껏 발산하는 태도에서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 주는 인물이었다.
여기에 나를 포함한 일행 4명은 가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는 여유는 물론, 진주 반성 식물원으로, 진성의 백숙 집으로, 그리고, 진주 장재동의 백송 가든으로 회식을 다니곤 했었다. 그야말로 환상의 카풀 팀임을 자랑도 하고, 입증도 하는 자신 있는 ‘우리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랑스럽던 환상의 카풀 팀이 한 학기를 끝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전혀 자의가 아닌 타의로 깨어졌지만 우리는 참으로 아쉬웠다. 얼마나 아쉬웠으면 이별식을 하기까지 했을까?
강성희 영양사는 갑작스레 합천 야영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이정희 선생님은 명예퇴직을 하게 됨으로써 정녕 아쉽게도 그만 환상의 카풀 팀이 붕괴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 셋>
1999학년도 2학기가 되어 김명선, 안판숙 두 여 선생님들이 전근되어 왔다. 깨어졌던 환상의 카풀 팀 재건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둘 다 찬성을 하고 여건을 조정하여 합류를 하는 데는 조금의 기간이 필요했었다.
어쨌든 재건된 『뉴 환상의 카풀 팀』은 새로운 탄생답게 매우 활발하게 움직였다. 전의 팀과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을 그런 멤버였다.
김명선 선생님은 진주 동진 초등학교에서 전입해 왔는데 나의 교대 후배로 성격도 밝고,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그런 인물로서 함께 하는 이들 모두를 늘 마음 편하게 해 주는 마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안판숙 선생님은 관내 근무가 오래된 관계로 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던 터라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다. 언제나 명랑한 태도를 유지했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마음까지 지닌 그런 선생님이었다.
교대의 한참 후배이고 나와는 띠 동갑(소띠)으로 12년 차의 세대 차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런 인물로 역시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함께 지내다가 내가 사천초등으로 발령을 받은 후 안판숙 선생님도 진주로 발령이 나서 네 사람이 함께 모여 송별연을 거창하게 한 것도 기억에 새롭다.
◎ 여기서도 핀 시조의 꽃
서포에 와서도 시조 쓰기 지도는 멈추지 않았다. 1995년에는 내가 맡은 5학년 1반은 물론, 클럽활동 부서의 문예부에서도 시조 쓰기 지도를 했다. 지도 경험은 이제 어느 정도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해마다 조금씩 수정하고 보완한 지도 프로그램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가을이 되어 진주교대 주최 경남 아동 백일장에 출전을 했다.
정영민 어린이가 차상을 차지하였다. 욕심 많기로 소문난 영민이는 어머니가 함께 근무하는 선생님이었고 내 반에서 공부면 공부, 서예면 서예, 그리기면 그리기, 글짓기면 글짓기, 웅변 등에 이르기까지 명실 공히 대표선수였으며 실력도 분야마다 탄탄한 아이였다.
다음해에는 특수학급 담임을 하는 관계로 학급 전체 아동은 포기하고 문예부 시조지도를 하게 되었다. 열심히 과정을 공부하고 연습하여 그 해 가을 작년처럼 진주교대 주최 백일장에 참가를 하였다.
그 결과 4학년 이정언 어린이가 장원을 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차상, 참방에 몇 어린이가 더 입상을 했고, 시조부를 제외한 산문부와 동시부에서도 입상자를 냄으로써 나는 진주교육대학교 총장님이 수여하는 지도교사 표창을 받을 수 있었다.
장원을 차지한 이정언 어린이의 아버지는 젊은 사람으로서 열린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다. 학교로 찾아와서는,
“선생님,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와 함께 학교 급식소에다 난로 한 대를 설치해 주었다.
정영민군은 이후 육군 사관학교에 진학하여 그가 1학년 생도이던 2004년에 스승 초청 행사에서 ‘생애 잊지 못할 스승 두 사람’ 중 하나로 나를 선택하여 육사 방문의 기회가 되었었다.
이정언 어린이는 뒤에 그가 진주여중 재학 당시 개천예술제 백일장에서 중등부 시조 백일장 참가자와 심사위원으로 다시 만났던 적이 있었다. 당시 상당히 좋은 시조를 써서 좋은 등급에 입상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 무자격 특수교사의 보람 찾기
두 번째 서포 근무 2년차에 특수학급 담임을 맡았다. 이름 하여 무자격 특수교사인 셈이다. 교무, 연구 업무와 함께 하는 특수학급 담임은 세인들이 흔히 가르치지 않고 그냥 두는 무책임한 교사도 가능은 했지만 나는 결코 그러지는 않겠다는 결심으로 좀 심한 학습부진아 집단인 그들을 위해 학습지도활동에 나름대로 열성을 쏟았다.
그들과의 일과는 참으로 즐거운 가운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그들과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학습은 언제나 일상 속에서>
주로 국어와 수학이 심하게 부진하여 특수학급 소속이 된 그들을 위해 국어, 수학을 공부인지도 모르게 공부하게 했다. 교실에 지천으로 있는 카드 등 자료들은 주로 놀이시간에 그들 스스로 가지고 놀게 함으로써 활용하게 하였다.
학습활동의 실례를 한 가지만 들어보면 고리 던지기 놀이를 첫 시간부터 시작하면 작은 칠판에다 다섯 명의 이름과 서너 번 던진 결과를 기록할 수 있는 표를 그린다. 그리고, 차례로 던지고 결과를 기록한다.
세 번이면 세 번, 네 번이면 네 번 던진 결과를 개인별로 합산하게 한다. 검토의 과정을 거쳐 남의 것도 맞게 덧셈을 했는지를 확인하게 한다.
합계를 토대로 막대그래프를 그리게 한다. 그게 끝나면 오늘은 누가 1등을 했고, 누가 꼴찌를 했으며, 동점자는 저학년 우선으로 등위를 매기게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자기네들 스스로 하도록 훈련이 되고난 후에는 나도 참으로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득의의 미소를 짓곤 했었다.
대개 한 번으로 부족하여 두 번이나 세 번 쯤을 더 하고나면 아마도 수학의 많은 부분이 향상되어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것은 원적 반 선생님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들로 충분히 확인이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없어진 상장 이야기 - 특수아동에게서 경영의 전략을 배운 사연>
나는 특수학급 담임과 함께 교무부장 보직을 받았었다. 교무부장은 예나 지금이나 전체적인 학교의 일들을 챙기기도 해야 하고, 조언도 해야 하는 등 일이 많은 법이다.
97년이었던가? 교내 과학경진대회를 마치고 시상을 하기 위해 90장이 넘는 상장을 차례로 컴퓨터 워드로 작성하고 프린터 출력을 시켜놓고 점심시간을 맞았다. 딴에는 점심시간 동안에 인쇄가 다 되어 있을 테니 시간을 활용하자는 계산이었다.
과연 점심을 먹고 오니 당시의 잉크젯 프린트기가 속도가 워낙 느려서 다 끝을 내지 못하고 마지각 장을 반 쯤 인쇄하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상장을 모두 서무실로 가져가서 직인을 날인하고 시상 준비를 했다. 시상식은 다음날이었는데 시상을 하고 보니 상장 한 장이 없어졌다. 당연히 인쇄 과정에서 프린터가 일으킨 착오쯤으로만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없어졌던 상장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김상길이라는 특수학급 아동의 가방 안에 있는 상장을 원적반 선생님이 발견하시고 내게 알려온 것이었다. 상길이를 불러 어찌된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상길이는 꼭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도통 말이 없다가
“상이 받고 싶어서요.”
순간 나는 참으로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상장과는 담을 쌓은 채 살아야 하는 아이들, 조회시간에 시상이라도 하면 자기들과는 전혀 무관한 일들로 여겨야 하는 아이들이 상을 얼마나 받고 싶어 하는지를 알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명색이 그들을 맡아 가르치는 담임으로서 부끄러운 일에 속한다고 생각을 했다.
이후 특수학급의 아동 여섯 명 모두가 여러 차례의 상을 받았다.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하자면 담임 상을 제정하여 시상을 한 것이다.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고, 그렇게 행복해할 수 없었음은 물론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의 교육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실은 그게 특수학급 소속 김상길이라는 어린이를 통해서 담임이 배운 아이디어임은 아이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어른들도 아이들을 통하여 배울 것이 있는 것이라던 어른들 말씀을 흘려들었던 나는 이 일로 옛 말 그른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이제 상길이가 20대 중반의 청년이 된 지금 그의 근황을 훤히 꿰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남을 괴롭히거나 해할 마음은 절대로 가지지 않을 착한 심성의 소유자였던 점은 믿고 있다. 따라서 그가 어디서 무얼 하고 살고 있던 간에 뛰어난 능력 발휘는 어렵다 할지라도 남에게 결코 피해를 안기는 삶은 살지 않을 거란 확신은 가질 수 있다.
◎ 정년단축 회오리와 교육 공황
몇 년 전부터 치열한 공방으로 오리무중의 사건처럼 세인들의 화제가 되고, 당사자인 우리들 교육가족들의 지대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어쩌면 우리들의 사활이 걸린 일이기도 했던 교원 정년단축문제가 1998년 말 경에 그 윤곽이 잡혀가는 듯 했다. 아니, 미리 짜여진 각본은 전편을 서서히 연출하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가며 약간의 수정공연이 실행되었을 뿐이다.
여기서의 전편이란 촌지 문제니 교사 체벌 문제 따위를 들먹이고, 지극히 일부인 일을 마치 온 교육계가 촌지의 힘으로 살고 있고, 촌지 안 받는 교사는 없는 것으로 매도하던 일을 말함인데 이는 분위기 조성 작업치고는, 국가 「백년 지 대계」를 흔들어 보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에 속했다.
정년 단축의 갑작스런 시행은 정책의 잘 잘못을 떠나서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을 몰고 왔다. 대학교원과의 차이를 둠으로써 반발을 막았겠지만 그로 인한 초․중등교원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져야 했다.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사들이 사기가 떨어지면 효과적인 교육의 수행은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는가. 교육이 국가 「백년 지 대계」임을 내세우는 데는 이미 설득력을 잃고 만 것이다.
교육을 천직으로 알고, 묵묵히 교직에 종사해온 내 선배님들, 특히 그들은 전날 대규모 교직 이탈로 인한 교사 부족으로 교육계가 크게 위기에 처해졌을 때 국가는 그들을 향해 교직은 천직이요, 성직임을 강조하면서 훗날을 기대하자고 했었다.
우선 교직을 대량으로 떠나는 사태를 막아보자는 뜻이었겠지만 이제 그때 참고 타 직종으로 진출하지 못해 어렵게 살아오며 노후 대책도 세우지 못한 그들을 향해 나가라고 호통 치는 결과가 의도적으로 초래된 그런 상황이었다.
인생에 있어서의 일생이란 인간 최대의 과업이 아니겠는가? 인생에 있어서 일생을 함께 해온 직업에 대하여 마무리할 게획을 세워두고 있는 그들에게 마무리하지도 말고 나가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안의 앞에 무력한 교육자들은 정녕 수모와 어려움을 항변 한마디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더러 정치하는 사람들의 출마 공약으로 정년 환원을 거론하곤 하더니 이제는 그런 일조차 우리 스스로가 잊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노인 인구의 급증으로 정책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늘어가고 있고, 실제로 노인의 일자리 창출도 절박한 시기에 정년 단축은 정녕 잘못된 사안이었다고 보기에 환원은 당연한 일이지만 만에 하나 그로 인하여 또 피해 입는 사람이 생길까봐 조심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 학교 통․폐합 추진의 문제
대량으로 쫓아내다 보니, 교원의 부족사태는 참으로 심각했다. 이의 해결 방안이라고 추진한 일들이 또 한 번 교육을 공황으로 몰고 가게 되었다. 시골 학교의 아동 수가 적은 것은 어쩌면 교육 선진국으로 접근하는 일이라고도 보았는데 경제논리에 입각하여 과감하다 못해 무섭게 강행한 통․폐합은 참으로 맹랑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없는 듯한 가운데의 아주 조금씩의 변화가 교직을 안정되게 하는 법인데 마구잡이 식 학교 통․폐합으로 급기야 애초 목적이던 경제논리를 비웃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시골을 좀은 풍요롭게 지켜주던 문화의 센터들이 폐허가 되고 말았고, 흉물로, 청소년의 탈선장(脫線場)으로 변해버렸다. 거액의 국고가 낭비된 곳을 보고 경제논리에 입각한 잘된 행위였다고 누가 평가할까? 시골학교가 무더기로 통․폐합 되면서 수많은 학교 앞 구멍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어쩌면 그들의 호구지책을 막아버린 결과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시골에도 스쿨버스란 것이 생겨나고, 한적한 시골길에도 노란 스쿨버스가 다니게 되었다. 가뜩이나 신세대 부모들의 과잉보호로 나약해진 어린이들이 이제는 1Km도 걷지 않으려 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옛날에는 10-20Km를 예사로 걷던 학생들이 부모님들에게 든든함을 안겨드렸다면 요즘 아이들은 참으로 노심초사하는 심정만을 안겨주고 있지 않을는지?
자주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말을 내세워 국민을 향해 내핍생활(耐乏生活)을 주문했었는데 이제 없어도 괜찮았을 전국의 스쿨버스 기름은 경제논리와 어떻게 관련 지울 수 있을까? 인건비 지출은 우리나라 안의 문제고, 고용창출이지만 기름은 아니지 않는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임을 안다면…….
없어진 학교마다 동창회란 것이 조직되어 나름대로 학교를 돕고 후배들을 돕다 보니 싹이 터서 자라던 애향심이 뿌리째 뽑혀버렸다. 혹 통합된 학교에다 그 정열과 사랑을 변함없이 쏟는 곳이 있다고 쳐도 그건 극히 일부일 것이고, 전국적인 시골 황폐화의 원인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으니 행여 더 추진시킬 생각이나 접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2009년인 지금에도 폐교된 학교마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을 대충 정리하고 총 동창회를 마련하여 하루를 뜻있게 보내는 시골 폐교들이 많다. 이건 향토, 특히 모교를 사랑하는 정신이 잡초의 생명력마냥 끈질김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일이다.
◎ 존경스런 교장선생님
1998년 9월, 모시고 있던 이자현 교장선생님이 정년퇴임을 하시고 새로 남상배 교장선생님이 초빙교장으로 부임을 하셨다.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학교장 초빙제를 실시하는 학교가 된 셈이었다. 초빙의 절차는 상당히 복잡했다.
교무부장을 맡고 있었던 나는 그 일을 다른 선생님들의 협조를 받아가며 추진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전혀 알 수 없는 새로운 교장선생님을 모시게 된 것이었다.
학교장 초빙제에 관해서는 그 당시 말도 많고, 문제도 많은 제도였다. 교장 임기제를 다 채우지 못하는 교장들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시행되는 제도라는 낙인이 찍힌 그런 사안이 되고 말았다.
학교가 주체가 되어 필요한 유능한 교장을 모셔 와야 진정한 의미의, 그리고 참된 취지의 학교장 초빙제가 되는데 미리 정해진 교장을 두고 요식을 갖추는 그런 운용은 좋은 의미는 완전히 퇴색되었고, 오직 지탄받을 요소만으로 운영이 된 것이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초빙에 의해 모신 남상배 교장선생님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다. 뚜렷한 교육철학을 가진 분으로서 간섭과 지시 위주의 경영이 아닌 직원들의 개성과 능력을 최대한 존중해 주는 가운데 아동교육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그런 분이었다.
초빙제가 아니면 서포에 오실 가능성이 0%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분으로 존경받을 요소들이 수 없이 많으나 간략하게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째, 직원들을 위해 사비를 너무 많이 쓰는 분이었다. 혼자 객지에 나와 계시는 교장선생님이 조금이라도 즐겁게 지내시라고 동료들과 함께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 인근의 관광지로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려고 하거나, 학교 행사 끝에 회식 모임을 마련하면 어느 누구도 돈을 지불하지 못하도록 막으셨고 오직 자신만이 지불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셨다. 그 방법이 너무나 철저하여 몰래 지불했더라도 성공할 수 없는 사안이 되고 말았다.
둘째, 직원들의 신상을 너무도 철저하게 챙겨 주시는 분이셨다.
직원들의 이동을 뜻대로 성사시키기 위해 발로 뛰는 활동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윗분들과의 의논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철저하게 챙겨서 절대로 차질이 없도록 주선을 해 주셨다.
나를 위한 일들을 예로 들어보면, 1998년 말 경, 교육청의 어느 장학사가 자기 측근의 한 인물을 위해 서포에 교무 자리와 근평을 받을 수 있도록 한 부탁을 한 일이 있었다. 상식 이하의 부탁임은 틀림없는데 솔직히 여느 교장 같았으면 타협을 하거나, 얼버무렸을 것이라고 보는데 오직 나를 위하여 고성이 오가는 사태까지 몰고 가면서도 끝내 명확하게 거절을 했다.
또, 나의 표창을 상신하고 주선하여 과분하게도 국무총리표창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밖에도 업무 추진이나 사람 대하는 것 등 모든 것이 배울 점인 분이셨다.
정부의 갑작스런 정년 단축 강행으로 교육이 일종의 공황 사태를 몰고 오는 바람에 억울하게도 교직수행의 철학과 소신을 뜻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교단을 떠나신 점이 늘 안타까웠고, 거기에 입은 은혜가 태산 같으면서도 전혀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한 점이 아쉬울 뿐이다.
남상배 교장선생님은 내가 지금 교장 근무를 하면서 학교경영의 실제를 배워 두었다가 활용하게 되는 몇 분 안 되는 교장선생님이시기도 하다. ‘언제나 내가 조금은 손해를 본다는 생각으로 매사를 처리하다 보면 일은 일대로 원만하게 처리되고 실익은 실익대로 나를 찾아온다.’는 이치가 바로 그 분께 배운 철학인 것이다.
진주 진성 작은 마을에서 살고계시는 남교장 선생님의 건투를 빈다.
◎ 교감연수 대상자 대열에 내가 끼다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지 28년이 된 시점에 처음으로 자신의 근무평정(勤務評定)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이전에는 그런 것이 내게 필요도 없는 가운데 불만도 많이 가졌었다. 이름만 근무평정이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열심히 좋은 일, 궂은 일 다 하고도 실속은 전혀 차릴 수 없었고, 실제로는 나이 많고, 승진에 가까운 사람에게 거의 무조건에 가깝게 좋은 성적이 돌아감을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나름대로는 합당한 사고라고 여긴 것이었다.
세태에 의하여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불만은 늘 가지고 있었다. 좋은 근무평정이 필요한 사람은 열심히 학교의 중책을 맡아서 일을 하고,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한 후에 받는다면 누가 감히 불만을 갖겠는가?
왕왕 젊은 교사들에게 산더미 같은 일을 맡겨 전전긍긍하게 해 놓고, 선풍기 앞이나, 난로 가에서 매우 한가롭게 신문이나 보는 그런 고참들 때문에 갖는 생각들인 것이다. 그런 선배님들이 자주 내세우는 주장은 대개,
“나도 젊었을 때는 많이 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런 선배님들일수록 알아보면 능력이 모자라 일 제대로 못하고 허송세월 했던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학급경영과 업무 추진을 시범적으로 열심히 하고 그 대가(代價)로 당당하게 근무평정을 잘 받는 고참들도 많이 보았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존경스러웠고, 다음에 나도 기회가 되면 저런 선배님들을 본받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드디어 내게도 그런 시기가 도래(到來)한 것이다.
1998년에는 교무, 연구, 체육, 특수교육의 업무를 맡아 교내 어느 누구보다도 과중한 짐을 졌다고 자부했다. 특히 그 해에는 특별활동 도 우수학교 업무까지 겹침으로써 정말로 바쁘고 고달픈 한 해를 보내고 근무성적 ‘수’를 당당하게 받았다.
1999년에는 교사 초빙의 덕으로 교무, 특수교육, 교육개혁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짐으로 한 해를 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혜분교, 비토분교가 본교로 통합됨으로써 결코 수월하지 않은데다가, 9월에는 인근의 금진 초등학교마저 통합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태산으로 믿고 모시던 남상배 교장 선생님은 정년퇴임을 하셨고, 많은 조언과 지도를 주셨던 강의조 교감 선생님마저 교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전출을 하시는 바람에 엄청난 정신적 부담을 이겨내야 했다.
새로 오신 신홍철 교장선생님의 지극한 배려로 연말에는 당당히 근무성적‘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좀 넉넉한 점수로 속 안 끓이고 교감 연수 대상자의 대열에 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참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도움이 있었음을 밝혀 둔다. 결코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해 낸 일은 아니었다.
그 것을 구체적으로 나열할 수는 없는 가운데 나도 앞으로는 다른 이들의 승진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태주어야 한다는 업보를 졌음을 자인하고, 꼭 갚는다는 실천적 의지로 살아갈 것이다.
요즈음도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교감 자격연수 대상자나 거기 가까운 후보자가 있는 경우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곤 한다.
나는 너무 손쉽게 성취하고 만 일인 것 같아 남의 심정들은 짐작으로만 알 뿐이지만 그 일로 스트레스의 한 조각이라도 받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은 늘 갖고 산다.
<함께 했던 직원들>
1995.03.01/이자현(교장선생님), 김남민(교감선생님), 안문웅, 구용기, 최한업, 김진태, 박명월, 이금옥, 임경희, 강혜정, 이영균, 노운행(보건교사), 이은주(유치원), 박종식(서무), 송은경(영양사), 유순자(조리사), 이윤규(기능), 강점성(기능), 강충실(기능), 김지은(산대강사) 자혜분교 한일선(분교장 주임), 이승현, 박용숙, 최포석(기능)
1995.07.01/정미윤(서무) 1996.03.01/최세권, 박옥자, 한숙재, 안보선(유치원), 장미숙(양호교사) 비토분교 황인수(분교장 주임), 하문헌, 박주갑, 강신분(유치원), 강종선(기능) 1996.09.01/최포석(기능), 양은주(산대강사) 1997.03.01/강의조(교감선생님), 박남수 1997.04.01/이경진(서무) 1997.09.01/남상배(초빙교장선생님), 정영이(영양사)
1998.03.01/강대백, 정임근, 자혜분교 정경화(분교장 주임), 박남수, 전제헌, 강점성(기능) 1998.09.01/박종화, 진미령, 송은영, 이인구(기능) 1999.01.01/이진화(서무), 김정숙(조리사), 강점성(기능), 강성희(영양사) 1999.03.01/전제헌, 박남수, 박신규, 이정희, 강신분(유치원), 강점성(기능), 강종선(기능) 1999.07.01/마금란(서무), 양갑수(양수정으로 개명) 1999.09.01/신홍철(교장선생님), 이철근(교감선생님), 김광수, 김명선, 배순애, 안판숙, 이은주(유치원), 김성춘(기능), 이윤규(기능)
산성 공원 아랫동네 - 아쉬운 반년
<사천 초등학교 : 00.03.01-00.08.31>
◎ 제일 큰 학교로
교감 자격연수 대상자로 지명이 된 상태에서 학교를 옮겨야 할 처지가 되었다. 서포 초등학교에서 5년 만기가 된 것이다. 나와 같은 처지에서 다른 학교로 가게 되면 어느 누가 반겨줄 것인가가 걱정이 되었다. 한달 여에 걸친 연수기간 중에 교실을 비우게 되고 업무도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 맡아야 함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해서 선택한 학교가 위에 열거한 어려움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곳이라는 판단으로 우리교육청(사천) 관내에서 가장 큰 학교로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사전에 조사할 것, 밟아야 할 일련의 절차는 그래도 밟았다.
그 절차 중의 하나인 교감선생님의 허락 받는 일은 김대홍 교감 선생님의 배려로 너무 쉽게 끝이 났다. 전에 동성에서 함께 근무하기도 했던 김대홍 교감선생님은 그 특유의 너털웃음과 함께,
“네가 사천 말고 갈 데가 있는 줄 아나?”
라는 말씀으로 허락을 대신했다.
실은 전에 지금보다 훨씬 젊은 시절에 중심학교인 사천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싶었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내게는 감히 접근도 못할 높은 위치의 학교였던 곳이 바로 사천 초등학교였다.
서포에서의 후반 4년 동안 나는 승진을 위해 애쓰다 보니 저절로 참으로 많은 이동에 필요한 점수를 확보했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사천초등학교로의 전입에 성공할 수 있었고, 그만큼 떳떳한 사천에의 입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려서 외딴 집에서 자란 탓일까? 내성적인 성격으로 언제나 경쟁에 나서기를 꺼렸었고, 매사 남의 힘을 빌리거나 소위‘혀 굳은 소리’가 질색이었던 나는 이날 이때껏 어렵거나 안 되는 일을 억지로 매달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능력도 모자란 주제대로 늘 남들의 뒤를 배회하는 삶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걸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생은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아닌가?
◎ 최후의 한 방울까지 - 우유 먹이기 작전
학교에 우유 급식이 부분적으로나마 실시된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지금은 학교급식과 함께 이루어지는 우유의 급식이 늘상 작으나마 문제를 안고 있었다. 어떤 점이 문제냐 하면 우유가 비위에 맞지 않음인지 아니면 무슨 거부의 원인이 있었음인지 지도가 없으면 아마도 삼분의 일 가까운 아동들이 마시지 않는 실정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해서 교실마다 남아나오는 우유가 있어 교장, 교감선생님들의 소위 잔소리 거리를 만들게 되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화단 구석이나 교실 앞 베란다 부위 등에 통째로 버려짐으로써 아까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가끔 남겨진 우유를 담임이 공공연히 봉지에 담아가지고 가져가는 경우도 썩 권장할 만큼 보기 좋은 경우도 아니다. 함께 다 마시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를 혼자 궁리하다가 생각해 낸 방법이 내게는 있었다.
우유는 신선할 때 마시게 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래서 나는 대개 첫 시간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다 같이 우유를 마시도록 운영한다. 그 때가 우유의 신선도도 그렇고, 다 함께 마시기에도 적당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좀 웃기는 일이지만 담임의 구령에 따르도록 하였다.
“우유를 든다, 살펴본다, 열기 시작, 마신다, 최후의 한 방울 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최후의 한 방울 까지를 다 마신 다음에는 팩을 거꾸로 하여 자기 머리 위에서 흔들며 웃는 녀석도 있었다. 계속 하는 동안 어느새 팩을 거꾸로 하여 자기 머리 위에서 흔들며 웃는 것은 우리 학급 우유 마시기의 기본처럼 되었고 가끔은 짝끼리 러브샷을 하는 축들도 있어 웃음을 자아낸다.
최후의 한 방울 까지는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실은 자원 절약과 환경보전의 참으로 중차대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 아이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두 켐페인성 사안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우유를 100% 다 마시고 시작하는 첫째 시간의 수업은 설사 가끔씩은 5분정도 시간적인 손실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해도 분위기 조정에 의한 수업 효과 극대화로 충분히 목표를 초과 달성 할 수 있기에 그런 우유 급식은 내 전유물로 계속했다.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그런 걸 전파하려고 해도 쉽사리 동조하는 선생님들이 없어서 효과를 보지 못했고, 관리자가 된 다음에는 자칫 잔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야기를 삼간다.
요즈음도 간혹 남겨진 우유를 화단에서나 교실 앞 베란다에서 보게 되는데 참으로 난감지사로만 여기고 만다.
◎ 제자의 딸
사천 초등학교로 사전 부임을 하는 날 관내에 함께 근무하는 한 초임지 제자를 만났다. 이순엽 선생은 지금은 정동 초등학교에 근무하는데 내 초임지 남해 도마초등학교에서 당시 6학년이었다. 나는 5학년 담임이고, 그의 남동생이 내 반에 있었다.
이순엽이란 6학년 여학생은 내가 맡은 문예부에 속함으로써 1주일에 한 번 내 교실에 와서 공부를 했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관내의 인근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가 되어 있는 자랑스런 제자이다. 그런 이 선생이 결혼을 할 무렵 연락이 되어 나는 그의 결혼식장에도 참석했었다.
그런, 말하자면 간접제자인 그가 내게 한 말이 참으로 고마왔다.
“선생님이 사천으로 오시는 줄 알았다면, 저도 더욱 힘을 써서 이 학교로 올 것을…….”
물론 웃고 말 이야기지만 그러면서 사천 초등학교에 자녀가 다닌다는 이야기를 했다. 신학기의 바쁜 업무가 대충 마무리된 다음에 나는 그 아이를 찾았다. 6학년 1반의 차화진이란 어린이였다.
막상 불러다 놓고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를 몰라서 좀 머슥한 기분을 느끼며, 그 옛날 네 엄마가 6학년일 때에 그 학교에서 근무했고, 클럽활동 시간에 내 부서였음을 이야기 하니, 화진이는 무척 밝은 웃음을 웃었다.
그 후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잘 하는 아이였고, 각종 대회에서 다양한 상을 타는 꽤 뛰어난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뿐 만 아니라 학급에서 공부도 최 상위권에 속한다는 담임 황인수 선배의 말씀을 듣고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2000년 스승의 날, 화진이는 내게 조그마한 선물 상자를 가지고 내 교실을 방문했다.
“엄마가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넥타이였다. 선물이 고가 이어서거나, 어깨 으쓱할 일이어서가 아니라 30년 가까운 세월이 갑자기 동강났다가 다시 이어진 느낌으로 정녕 흐뭇한 마음일 수 있어서 더욱 진한 감동을 느꼈다. 상당 기간 동안 나는 그런 감동으로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찾은 상태로 살아갈 수 있었다.
화진이가 수학여행을 가는 날 일부러 그들의 출발 시각인 아침 7시 이전에 출근을 하여 조금의, 아주 조금의 용돈을 쥐어 주며 잘 다녀오라는 말을 전했다. 그 때의 내 기분은 조금 지나친 생각일지는 몰라도 할아버지가 손녀의 여행길에 전송을 하는 그런 기분이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그 화진이가 훗날 진주 제일여고에 다닐 적에 장학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최후의 골든 벨 문제 바로 문턱에서 실패함으로써 아쉬움을 안겨 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문제가 한국 현대사의 인물 문제였으니 고등학생 대상의 프로그램이지만 풍부한 상식을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이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 상담실에의 기꺼운 모임
사천초등학교는 규모가 커서 여러 가지로 작은 학교와는 다른 점들이 많았다. 우선 전체 선생님들의 모임이 주2회 밖에 없었다. 학급 수가 많은 관계로 다른 선생님들과 얼굴을 마주할 기회조차 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동 학년이나, 인접 학년끼리의 모임이 저절로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본관 건물 2층 중앙쯤의 지점에 ‘상담실’이란 팻말이 붙은 작은 공간이 하나 있었다. 거기가 바로 3,4학년의 휴식과 회합의 공간이었다.
주로 아침에 모임을 갖고 여러 가지 의논을 하고, 1교시 후의 휴식시간 20분 동안에는 함께 모여 여러 가지 정보도 교환하고 업무의 조정 및 협의도 이루어지는 그런 장소요 시간이었다. 그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차 한 잔씩을 나누어 마시는 몹시 여유로운 일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퇴근까지의 여유로운 시간에도 상담실은 참으로 좋은 휴식공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교실의 너른 공간보다는 상담실을 찾으면 가끔 다른 동료들과 많은 얘기도 나눌 수가 있는데 그러다 보면 실의 이름처럼 상담활동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실제로는 아동 개별 상담지도를 위한 한 공간이었지만 그런 목적보다는 선생님들의 이용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이는 상담실 비슷한 장소로 3층에는 ‘쉼터’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 곳은 5학년과 6학년이 모이는 장소였다. 이처럼 인접학년끼리 분산 모임을 갖는 것도 다 학교의 규모가 큰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간혹 이런 모임끼리 팀이 되어 배구시합도 즐기고, 회식도 함께 하며 교직수행의 고달픔을 보다 풍요롭게 일구어 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런 즐겁고 기꺼운 모임은 참으로 강한 희생정신으로 조금치의 불평이나 불만의 표시 없이 매일 다과를 마련하고, 설거지를 하는 여 선생님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살짝 밝혀 둔다.
◎ 사량도 옥녀봉 등정
사천초등학교는 6월 1일이 개교기념일이었다. 2000년의 개교기념일에는 특별히 재미있는 역사를 만들어 볼 요량으로 상담실 팀의 등산을 제의했다. 목적지는 사량도 옥녀봉, 대부분이 찬성을 했고, 그런 관계로 쉽사리 계획이 수립되고, 추진이 되었다. 학습지도 연구대회 본선 행사가 임박하여(6월 9일) 조금은 문제가 생겼으나 애당초의 계획은 추진이 되었다.
처음에는 3,4학년만 가려고 했으나, 1학년에서도 희망을 하고, 거기에 교감, 교무선생님까지 합류하니 그 인원이 갑자기 많을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그러나 각자 개인적, 가정적인 문제들이 생기는 등 불참자가 속출하여 최종 인원은 12명으로 예상이 되었는데 이는 출발을 하여 선창에 도착한 후에야 확정되었다.
김대홍 교감선생님, 최한업, 김순자, 조성자, 최영순, 김윤희, 문향자, 김정순, 허윤정, 심경희, 백정림 선생님에 나를 포함하여 열 두 명이 멤버의 전부였고 하나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다리호에 승선을 했다. 사실은 사량도로 목적지를 정한 것은 순전히 내 뜻에 의한 것이었다. 1989년부터 5년간 2개 학교에 근무하면서 보아 두었던 사량도 옥녀봉의 모습을 실제로 등정함으로써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느낄 수 있도록 하고, 보다 단합된 마음으로 즐거운 근무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내심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약간 안개가 끼기는 했어도, 어렴풋이 보이는 섬의 윤곽은 제법 웅장한 산의 모습을 감탄으로 보게 했고, 선상에서 주고받는 대화도 모두들 정에 겨웠다. 금평리가 가까워 올수록 나는 전에 근무할 당시의 내 삶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설레었다.
배를 내리니 세월이 좀은 흘렀어도 아는 이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고, 그럴수록 내 옛 삶이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등정은 금평에서 옥동 성자암까지 가는 코스를 택했다. 시작부터 몹시 가파른 오르막길이라 좀은 힘이 들었지만 모두들 즐거운 기분으로 등정을 했다. 맨줄, 줄사다리, 철사다리, 가벼운 암벽, 오솔길을 지나는 동안 애기봉과 옥녀봉, 그리고, 가마봉을 차례로 지났다.
산 위의 적당한 그늘을 찾아서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하산은 옥동 뒷산 길을 택했다.
하산하여 금평에 닿아서는 은경이네 집에 가서 은경이 어머니가 베푸는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서 조금의 여독을 풀었다. 배 시간이 잘못 안내되어 우리는 자칫 늦게까지 사량도에서 시간을 보낼 뻔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전에 알고 지냈던 ‘먼산이’라는 분의 친절한 안내로 몹시 덜컹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내지까지 가서 다리호를 타고 입암까지 갈 수 있었다. 버스로 이동을 하는 동안 시골 길이 어찌나 험했던지 대책 없이 흔들리는 차 속에서 흔들림 그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추억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맥전포의 어느 횟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삼천포 어느 노래방에서 뒷 풀이까지 신나게 하고는 늦은 시각에 헤어졌다.
2000년으로 사량도를 떠난 지 꼭 8년, 나는 그 동안 서포 초등학교 재직 시 두 번에 걸쳐,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의 사량도 옥녀봉 등산을 안내했었다. 그리고, 거의 해마다 혼자서라도 사량도 방문은 했었다.
사실 그랬기에 아직도 사량도에 아는 이들이, 나를 반겨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밝혀둔다.
◎ 추억 어린 송별연
사천초등 6개월, 이게 내게는 교사생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나름대로 동료들과도, 학생들과도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스스로 미안 감을 가득 안고 왔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정녕 최근 승진을 준비하는 막바지 몇 년 정신없이 바쁘게 보낸 세월들 탓으로 내 본연의 의무를 소홀했다는 죄책감을 덜고 싶어서 더욱 그랬다.
아이들과는 그럴 수 없이 친할 수 있었다. 학부모들도 그랬었다. 처음 전입한 담임이지만 학부모를 상대로 한 수업 공개 시에는 동 학년에서 우리 교실이 항상 붐비는 교실이었다.
다른 선생님들도 그랬다. 주로 3,4학년이 함께 하는 커피타임이나 함께 팀을 이룬 배구경기에서 화합을 마음껏 과시했다. 오죽하면 내가 자격연수를 떠나기도 전에 계까지 조직했을까? 1년에 한, 두 번씩은 꼭 만나자는 의견이 누구의 제안이랄 수도 없게 채택이 되었고, 매우 희망적인 마음들로 기꺼울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양산 천성초등학교로 발령을 받고 나서 송별연이 줄을 이었는데 친화회가 주관하는 송별연에서는 코끝이 시큰함을 느꼈었고, 3,4학년이 함께 한 민속 찻집에서의 송별연은 눈물이 났었다. 눈물이 나기 직전 화장실로 피신하여 다른 사람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는 못했을 테지만 나만 아는 이 사건은 우리들(3,4학년)의 모임이 얼마나 기꺼운 모임인지를 단적으로 말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천 공설운동장 부근의 민속 찻집, 요즈음도 볼 일이 있어 거기를 지나노라면 그 집에서의 그 추억이 그리워진다. 실제로 몇 번은 일부러 그 찻집에 들러 민속 차 한 잔으로 추억을 다시 담아보기도 했다.
◎ 무더위 속 교감 자격연수와 발령
애초 교감 자격연수는 2000년 5월 중순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2000년 5월 당시의 우리 경남 초등교육현장은 참으로 애로가 많은 상황이었다. 102명의 연수대상자들의 자리를 임시로나마 메울 소위 기간제 교사로의 활용요원이 전무한 상태였다. 따라서 5월 연수를 강행한다면 그야말로 일선은 난리가 날 것이 뻔했고, 그 난리는 아마 6․25 사변에 버금가는 난리가 될 것이 불을 보듯 환한 일이었다.
그런 사정으로 연수는 연기가 되었고, 그게 내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나처럼 전임지 학교에서 연수대상자로 지명을 받고 학교를 옮긴 사람은 아마 모두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학기 중에 한 달 이상을 교실을 비운다는 것은 교장, 교감, 동학년, 업무 대리자 등 정말로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안겨주는 결과임이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이 덜 미안하게 되었고, 다행스러웠다는 이야기이다.
연수는 2000년 7월 18일부터 8월 22일까지였다. 방학을 거의 송두리째 연수에 투입해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우리들 연수생 모두는 불평 한 마디 안하고 연수에 임했다. 강의실은 모두 에어컨을 작동함으로써 더위는 느끼지 않았지만 냉방에 의한 두통이 약간씩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연수기간 내내 나는 전에 사량도 돈지분교 근무 때 함께 했던 김행식 선생의 집에서 지냈다. 김선생은 아직 미혼이었고, 연수원 부근에서 방 두 개를 전세로 얻어 살고 있었으니 참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이건 내게 참으로 크나큰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연수기간중의 어느 날 도교육청 어느 장학관의 강의 시간에 지금 연수를 받고 있는 102명중에 50명 정도가 9월에 발령이 난다고 했다. 그게 처음 듣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지만, 다만 좀 정확한 정보인 것은 틀림이 없었고, 그때까지 흐릿하던 전망이 환해진 것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차출 당시의 서열이 62번이었다. 따라서 현 서열로는 9월 발령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급 정교사자격연수 성적이 ××점이었던 나는 적어도 이번 교감자격연수 성적을 00점 이상은 받아야 9월 발령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무딘 머리로도 짐작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함께 연수를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생각으로 열심히들 공부를 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고, 실제로 어중이떠중이의 집단이 아닌 도내의 이인자라면 서러워할 이들의 집단이라 더욱 성적을 올릴 자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열심히는 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열심히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했다.
그 결과 좋은 연수성적을 얻을 수 있었고, 초조했던 몇 날이 지나고는 양산으로의 발령을 받았다. 이제 교사시절의 종말을 고하는 내게는 역사적인 사건임을 인식하면서 다음 일들에 대비해야 했다.
발령 받은 학교는 양산시 웅상읍에 소재한 천성초등학교였다. 26학급 규모의 낯선 지역 학교, 두려움도 앞섰고, 내 능력도 의심이 갔지만 모든 것은 직접 대하면서 하나하나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임하기로 작정을 했다.
<함께 했던 직원들>
2000.03.01
황성규(교장선생님), 김대홍(교감선생님), 김윤희, 하미숙, 강혜정, 오정아, 손홍근, 김선애, 김순자, 여경자 ,박복영, 송만선, 오정운, 이은희, 황영미, 최또용, 문향자, 김정순, 허윤정, 심경희, 김동욱, 김정구, 최영순, 이정숙, 정임근, 백정림, 이국웅, 남정숙, 강필선, 남미옥, 강은진, 박수천, 황인수, 권순현, 정현수, 이회미, 김순렬, 조성자, 최한업, 정예정(양호교사), 성병준(서무), 김춘자(영양사), 정수애(기능), 장정문(기능), 조용철(기능), 황철진(기능), 고장선(기능), 정덕애(기능), 이승희(과학보조), 유막선(급식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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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육의 역사까지도...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바뀐지가 벌써 20여년이 다 되어가네요...
교직자는 아무나 될수 없다는것을 새삼느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요새 딱 정해 놓은 할 일이 별로 없으니 한가한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이 나를 백수라 하겠지만 백수는 일이 맨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맨날 일이 없는 것도 아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