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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善惡果)에 대한 하나의 묵상 1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 2, 9, 15~17)
● 선악과는 실제로 어떤 과일이었을까?
선악과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일이었을까? 사실 이 질문은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의 의미와는 무관하지만, 그럼에도 명상을 시작하는 출발점에서 의미 있는 하나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린이 동화집에서 ‘선악과’가 ‘복숭아’로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동화작가는 왜 그 수많은 과일들 중 복숭아로 묘사했을까? 아마도 동양인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동양에서 과일 중 신선들이 먹는 ‘신령한 과일’은 ‘복숭아’이며, 그래서 ‘천도복숭아’라는 이름의 과일이 있는 것이다. 즉 신이 금지시킬 만큼 ‘신령한 어떤 과일’이란 동양인의 관점에서는 복숭아뿐인 것이다. 반면 나이가 들면서 고교시절 성당에서 교리를 가르쳐 주셨던 수녀님은 선악과를 ‘사과’로 묘사하였다. 일반적으로 라틴어 계통의 서적들에는 선악과를 사과로 묘사한다고 하였다. 나중에 그 이유를 찾아보니 라틴어에서 ‘악(Malum)’이라는 발음이 ‘사과’와 동일하다고 했다. 반면 동양의 어떤 책에서는 한자로 뱀이 ‘사(蛇)’이며, 뱀이 유혹한 과일이라고 해서 ‘사과’라고 한다거나, 먹게 되면 반드시 죽게 되는 과일이라서 ‘죽음의 과일 즉 사과(死果)’라고 한다고 했다. 반면 미켈란젤로의 천정화 속에는 선악과가 ‘무화과’로 그려져 있는데,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자신들의 벌거벗음이 부끄러워 나뭇잎을 따 몸을 가렸다는 내용이 있는데, 당시 유대인들의 바로 곁에 있었던 흔한 나무는 무화과나무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선악과가 ‘바나나’로 묘사된 곳도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는 것은 바나나 나무뿐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어떤 책에서는 선악과를 ‘포도’로 해석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술인데, 당시 술을 만들었던 유일한 과일이 ‘포도’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선악과가 무슨 과일이었을까’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며 각자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즉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건들은 대게 비유 혹은 알레고리이며, 이러한 비유가 해석될 때는 시대의 역사적 상황이나 인간이 처한 환경적 요인 등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며, 그 해석의 가능성이 다양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 중 어떤 해석이 가장 좋은 것일까? 아마도 ‘가장 좋은 해석’이란 것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어떤 지혜나 의미를 주기 위한 것이 ‘상징’ 혹은 ‘알레고리’여서 보다 더 나은 의미나 가치를 가져다주는 것이 가장 선호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애초에 신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가지고...
선악과에 대한 이야기를 할라 치면 일반인들이 가장 먼저 질문하게 되는 의문은 “신은 왜 애초에 낙원에서 추방되는 비극의 씨앗인 선악과를 만들었을까?”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설령 나중에 다시 구원을 해 준다고 해도, 이것은 병주고 약주는 것이 아닌가”라며 선악과를 만든 신의 행위를 고발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자주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의문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구원의 역사가 아무리 장대하다고 해도 병도, 아픔도, 죽음도 없는 낙원에서의 삶이 이 지상의 인류의 삶보다는 백배 나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이나 의문은 문학에서의 창작의 비유를 들면 쉽게 해결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치의 문제이다. 그 결과와 무관하게 어떤 소설가나 화가에게서 가장 첫 번째 가치는 무엇인가를 창작한다는 사실이다. 철학에서도 “철학적으로 죄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창작을 그 본질로 하는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이자 모든 가치의 기초는 ‘무엇인 가를 창작하는 일’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창작하고자 않는 다는 것, 그것은 예술가들에게 있어서는 이미 ‘예술가로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만일 ‘인간을 만든 신’이 ‘인류의 역사’라는 것을 원하였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낙원의 삶에서의 이탈’을 꿈꾸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낙원에서의 삶이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전혀 다를 바 없는 항상 만족하는 이상적인 삶이요, 고통이나 환희, 고뇌나 기쁨, 절망과 희망이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단조로운 삶일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역사’ 즉 ‘히스토리’가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단조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선악과의 이야기는 ‘인류의 역사’가 있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하나의 조건이었다.
전쟁과 기아, 전염병과 재해들 무수한 범죄행위와 수많은 고뇌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극적인 것이 전혀 없다면, 무수한 인간적인 가치들이 또한 없었을 것이다. 불을 발견하고, 하늘의 별들을 관찰하고, 인체의 신비를 밝혀내고, 음악과 미술 무수한 조각상들과 건축물들을 낳은 예술이란 것도 없었을 것이며, 도교니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종교들도 없었을 것이며, 톨스토이나 소크라테스도 없었을 것이다. 마더 데레사나 퀴리부인들의 감동적인 희생들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영어나 한자 라틴어나 한글 산스크리트어 등의 언어도 발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인류 문화라고 하는 찬란한 문화유산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선악과가 없었다면 ‘신이 인간이 된 최상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도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를 “복된 죄여!”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 선악과가 없었더라면... 하는 가정은 사람에 따라서는 불필요하거나 어리석은 가정에 불과한 것이다.
● 왜 하필 선악과(善惡果)였을가? ‘선과(善果)’와 ‘악과(惡果)’가 따로 있었다면...
선악과나 원죄의 이야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선악과’ 즉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일’이라는 가정이다. 만일 선과 악을 동시에 알게 하는 것이 아닌, 선만을 알게 하거나 악만을 알게 하는 과일이 따로 있었다며, 그리하여 아담이 ‘악과’는 내버려 두고 ‘선과’만을 따먹었다면 이 세상이 훨씬 더 낳았을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선과 악에 있어서는 '안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이 동일한 사건이라고 하였다. 이는 사실이다. 단지 선과 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어떤 실천적인 앎에 있어서는 안다는 것과 그것을 행한다는 사실은 동일한 것이거나 동시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수영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은 ‘수영을 하고 있음’과 동일한 사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앎이다. 도둑질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은 최소한 도둑질을 해 보았음을 혹은 그 행위의 결과로 그 방법을 알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과 악에 있어서 ‘안다’는 사실은 그것을 ‘행하였다’ 혹은 ‘그 상태에 있다’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사실 즉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악의 상태’와 ‘선의 상태’에 있게 되었다거나 혹은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를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선과’만 먹게 되었다면, 선한 행위를 할 수 있거나 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며, 여전히 악한 행위는 할 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신은 ‘선과’와 ‘악과’를 따로 만들지 않고 ‘선악과’를 만든 것일까?
그 이유는 선과 악에 대한 기독교의 독특한 관점때문이다. 즉 기독교에서 선과 악은 사실상 하나의 사태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 같이 동시적이라는 말이다. 즉 선을 가정하지 않은 악이란 있을 수 없고, 악을 가정하지 않는 선의 개념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건강이라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병’이라는 개념을 가질 수가 없고, 병이라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건강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중세의 철학자들은 ‘악이란 선의 부족’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선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곧 악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역으로 인간이 악을 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곧 선도 행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새나 소와 같은 짐승들은 선도 악도 알지를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선을 행할 줄도 악을 행할 줄도 모르는 것이다. 아니면 자연법칙이 곧 선이라는 차원에서 유비적으로 말해 동물들의 존재함 그 자체가 선이요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이 선일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갓난 애기는 선도 악도 행할 줄 모른다. 선과 악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게 되면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앎이 곧 의지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만을 알게 하는 선과’와 ‘악만을 알게 하는 악과’를 가정할 수가 없으며, 선을 안다는 것은 곧 악도 안다는 것이요, 악을 안다는 것은 또한 선을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악을 낳게된 '선악과'를 증오한다면, 이는 또한 모든 인간의 선행도 증오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요컨대 ‘선악과’의 이야기는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게 하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우화적’으로 말해주는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선도 악도 발생하지 않는 동물의 상태를 선호할 것인가? 아니면 선도 악도 행할 수 있는 인간적인 상태를 선호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 당연히 ‘인간적인 상태’를 선호하는 사람이 대다수 일 것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 천년을 수행한 여우의 이야기 같은 전례동화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의 ‘선악과’를 통한 ‘원죄’의 이야기는 ‘선과 악에 대한 선택’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가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현대로 올수록 이러한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거나 생각하기를 꺼린다는 것에 있다. 선과 악에 대한 이러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 더 이상 이를 생각하지 않거나 부정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악마가 궁극적으로 목적한 것인지도 모른다.
● 선악과를 선택한 뒤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일까?
죽음이란 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종말을 의미한다. 내가 죽으면 어떤 의미에서 이 지상에서 나와 관계하였던 모든 것이 소멸하는 것이다. 나의 죽음은 최소한 물질적인 우주 그 자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죽음은 유비적으로 말해 인류역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낙원의 삶이 지속되고 있다면 죽음이라는 것도 없었을 것인가? 그럴 것이다. 최소한 우리가 성경의 말을 믿는다면 낙원의 모든 이들은 영생을 누릴 것이다. 물론 그 낙원에서의 삶이 어떤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서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 것이지는 아무도 상상할 수가 없을 것이다. 타락한 존재가 타락하지 않은 존재의 삶을 어떻게 상상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죽음이 단순히 한 개인의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선악과를 선택한 이후에 인류란 이제 선과 악을 매 순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힘겨운 고난의 삶을 가지게 되었고, 이 선택의 삶이 영원하지 않으며, 언젠가는 최종적인 결산을 할 종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선택한 인류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마지막 종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한다. 하지만 인류의 이야기(히스토리)가 잘 진행되기 위해서는 점진적으로 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 최종적이 목적은 ‘최고 선’이기 때문이다. 최고선이 있는 곳 그곳이 이 인류의 역사가 도달해야할 ‘종점’이기 때문이다. 만일 선악에 대해 무지하고,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명상하지 않고, 오직 본능에만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결국 세계는 악이 가득하게 될 것이고, 이는 드라마의 중도하차가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선도 악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 자체로서는 선보다는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전혀 유혹이 없다면 선과 악의 선택이란 반반의 확률이 되겠지만, 여기엔 ‘악으로 인도하는 악마의 유혹’이 늘 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악마의 유혹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다만 영적인 눈이 먼 사람들에게만 세상에 악마의 유혹이 보이지 않을 뿐, 이 세계는 끊임없는 악마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으며, 너무나 많은 영혼들이 이 악의 유혹에 빠지고 파멸에 이르고 있다. 애초에 아담과 하와가 겪었던 그 선택의 시련이 인류의 역사가 지속하는 한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첫 인간들에게 허락되었던 그 악마의 유혹은 이후 모든 인간에게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것이 원죄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따라서 만일 선과 악에 대한 숙고와 명상 그리고 이에 대한 진지하고도 이성적인 선택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필시 인류는 너무나 쉽게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국 인류는 종말이라고 하는 ‘조숙한 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드라마이든 주인공이 죽으면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인류의 역사에서 드라마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신이 세계와 인간을 만들었고, 신이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기획가나 연출가라고 하더라도, 주인공인 인간에겐 선택의 자유가 있다. ‘이 자유의지의 선택 앞에서는 신도 멈추어 선다.’ 따라서 이야기의 중심, 그 속의 행위자는 인간이며, 인간이 이 이야기를 주도하는 주인공이다. 주인공이 죽으면 드라마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지구의 종말을 예견하기도 하는데 그 시간이 예상보다 빠를 것이라고 진단한다. 시대의 징표를 보면 이러한 과학자들의 예상이 과장된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조속한 종말은 오직 선과 악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하지 않는다는 한에서 가능하다. 인간이 선과 악에 대한 명상을 충실히 한다면 그리하여 충분히 악의 유혹에 저항 할 수 있다면, 즉 선에 대한 의지가 충분하다면 인류의 종말은 그렇게 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는 악의 유혹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지만 또한 선에 대한 희망이나 갈망도 그에 못지않게 크고 강하다. 그래서 악마는 끝임 없이 인간에게 선한 것은 나올 수 없다고, 이 세계에 선한 것은 볼 수 없다고 종용하는 것이다. 사랑이나 희생은 고차적인 이기주의라고 교설을 늘어놓는 것이다. 인생은 액자 소설과도 같은 것이다.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드라마를 가지고 있으며, 이 드라마는 인류역사라는 거대한 드라마 속의 작은 드라마와 같다. 모두는 자기 인생의 드라마 속에서 자신이 주인공이며,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가 주인공이었듯이 자신의 인생 드라마에서 절대적 선택권을 가진 존재이자 또한 절대적인 책임을 가진 존재이다. ‘선악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그 마지막 종결은 결국 ‘선과 악’의 선택에 의해 결산을 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사랑의 실천’으로 심판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사실 이 말은 ‘선악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의 선을 갈망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