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안중근 토마스의 의거 [한국교회의 근현대사]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토마스가 뤼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한지 107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안중근은 신앙인으로서,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교육자와 독립운동가로 살았고, 서른한 살의 짧은 삶이었지만 후세에 남긴 족적이 매우 컸다. 순국한 지 100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이 회자되는 이유이다.
해주에서 연해주까지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 베드로와 조 마리아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므로 이름을 중근(重根)이라 했고, 배와 가슴에 검은 점이 일곱 개가 있어 자(字)를 응칠(應七)이라 하였다.
일곱 살 때인 1885년에 해주에서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주하였으며, 1894년에 김홍섭의 딸인 김아려 아녜스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안중근은 1897년 1월 11일 빌렘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뒤 그는 빌렘 신부를 도와 황해도에서 천주교를 열심히 전파하였고, 빌렘 신부로부터 프랑스어와 서양 학문을 배워 새로운 사상에 눈을 떴다. 그러면서 1901년 2월 이전에는 뮈텔 주교에게 대학 설립을 건의하기도 했다.
러일 전쟁(1904-1905년)이후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자, 안중근은 1905년에 상해로 가서 국권 회복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러다가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하던 르 각 신부를 만나, “교육을 통해 백성을 깨우쳐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충고를 듣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진남포로 이사한 안중근은, 삼흥학교와 돈의학교에 관여하며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정미 7조약’이 체결되자, 안중근은 교육만으로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해외로 나가 무장 독립 투쟁에 투신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그는, 1908년 봄 연해주 의병 부대가 조직되자 참모중장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하얼빈에서 뤼순으로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은 열한 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를 조직하여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런 가운데 1909년 9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대신과 회견하려고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안중근은 동지들과 함께 이토의 처단을 논의한 뒤 10월 21일 우덕순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1909년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10월 26일 오전 7시쯤 하얼빈 역으로 나갔다. 그리고 역 구내의 찻집에서 이토가 탄 열차를 기다렸다. 9시쯤 특별 열차가 도착했고, 군악대의 소리가 들렸다. 9시 30분쯤 안중근은 도열해 있던 러시아 의장대 뒤쪽에 있다가 이토가 러시아군을 사열한 뒤 환영객들과 인사를 나누려 할 때 그를 향해 권총을 쏘아 명중시켰다.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11월 3일 뤼순 형무소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그와 동료들은 1910년 1월 26일까지 열한 번의 검찰 조사를 받았고, 2월 7일 관동 도독부 지방 법원장 마나베의 심리 아래 첫 공판이 열렸다.
안중근은 이토를 포살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대한 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 전쟁 중에 수행한 정당한 행위이고, 동양의 평화를 위한 행동이라고 하였다. 공판은 2월 14일까지 6회에 걸쳐 진행되었고,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쯤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하였다.
안중근의 애국 애족 정신은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드러난다.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날 그는 동포들에게,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해서, 내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목숨을 바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사람, 그가 바로 안중근이다.
행동하는 신앙인
안중근은 세례를 받은 뒤 신앙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빌렘 신부를 도와 전교 활동에 종사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 전쟁 중에도 아침 · 저녁 기도와 묵주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전투에 참여한 동료들을 회개시켜 대세(代洗)를 베풀었으며, 사형 선고를 받은 이후에는 성사를 받고자 신부를 요청하였다. 아울러 자신의 사형 날짜를 성금요일인 3월 25일로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안중근은 죽음을 앞두고 여섯 통의 편지를 썼다. 그중 어머니와 아내에게는 장남을 사제로 양성해 줄 것을 부탁하며, 천국에서 기쁘게 만나자고 했다. 숙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종백부가 아직 입교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며 속히 믿을 것을 권유하였고, 교우들에게는 열심히 전교에 종사하여 우리나라가 ‘성교(聖敎)의 나라’가 되도록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뮈텔 주교에게는 외교인들이 천주교인이 되도록 주교와 신부들이 마음과 힘을 다해 줄 것을 기원하였고, 빌렘 신부에게는 성사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처럼 안중근은 신앙 안에서, 신앙에 의지한 삶을 살았고, 내세에 대한 믿음도 확고하였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는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자 했다.
한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한 것에 대해 신앙적으로도 정당한 행위였음을 이렇게 강조하였다. “비록 성경에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였지만,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 수수방관하는 것은 죄악이므로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다.”
신앙은 안중근에게 민권과 평등사상,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민족의 구원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게 하였다. 따라서 안중근은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악에 도전하고 선을 구현하려는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
안중근은 독실한 신앙과 조국애를 조화시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고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처럼, 정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지난해부터 이어졌던 대통령의 탄핵 정국을 보면서,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세태에서 자신의 삶에 당당했던 안중근의 모습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삶의 거울’이다.
* 방상근 석문 가롤로 -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4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