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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묘려(寬洞墓廬) 및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 묘 우리나라에서 가문을 일으킨 할머님이 크게 3분이 계신다. 울산김씨를 일으킨 장성 민씨할머니, 광산김씨를 일으킨 논산의 허씨할머니, 은진송씨를 일으킨 대전의 고흥류씨할머니가 그 분들이다. 그중 고흥류씨 할머니 묘소를 찾아뵙지 못했는데 이번에 일부러 찾아봤다. 대청댐으로 인해 이곳 묘소를 가려면 일부러 찾아가야하고 다시 되돌아 나와야하기 때문에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풍수답사 때 인근까지 가서도 찾아뵙지 못했는데 맘먹고 이번에는 찾았다. 혼자 답사할 때는 한가해서 좋은 면도 있지만 용맥을 밟고 산 위로 올라가기에는 역부족이라 아쉬운게 많다. 그러다보니 혼자 답사할 때는 묘역 위주, 사격 위주로 보고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번 다녀온 곳을 다음에 다시 찾아야 비로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찾아가봐야 될 곳을 안가면 가슴 한곳이 답답하게 되는데 뒤늦게라도 찾게되면 체증이 내려가듯 편안해 지는 것을 보면 이것도 다 팔자려니 하고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다. |
관동묘려(寬洞墓廬) 및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 묘 관동묘려(寬洞墓廬)는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에 있는 재실이다. 1994년 6월 7일 대전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열녀로 열녀문을 하사받은, 쌍청당(雙淸堂) 송유(1389~1446)의 어머니 유씨 부인이, 문종 2년(1452) 82세로 돌아가시자 이곳에서 장례를 지내고 그 옆에다 만든 재실이다. ㄱ자형 재실 건물에 양 옆으로 2칸씩 방이 달려 있는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재실 중앙에는 큰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었고, 안방 옆으로는 2칸 크기의 부엌을 만들었다. 중앙 큰 마루에는 ‘관동묘려(寬洞墓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옆면에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라는 현판이 있어 고종 31년(1894년)에 고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유씨 부인은 쌍청당 송유의 어머니이다. 그는 고려말인 1371년(공민왕 20) 상서를 지낸 호안공(胡安公) 유준(柳濬)의 딸로 태어나 일찍이 진사 송극기(宋克己)와 혼인하였으나 약관의 나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22세에 홀몸이 되었다. 청상의 몸으로 유복자 송유와 함께 개성의 친정에 살고 있었으나 가엽게 여긴 친정에서 재혼을 종용하였다. 당시 사회풍습으로 재가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얼마 후 풍습대로 친정에서 재혼을 서두르자 한밤중에 아들을 데리고 500리가 넘는 시가인 이곳 회덕으로 내려왔다. 재혼에 뜻이 없었음이 분명했다. 그 후 유씨 부인은 시댁에서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아들을 훌륭한 선비로 성장시켰다. 생전에 그는 효행이 뛰어나 그 소문이 자자했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 세상을 뜨고 나서 약 200년 후인 1653년(효종4)에 그의 정절을 기려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대전문화원, 위키백과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대전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37호 |
문화재명칭 | 관동묘려(寬洞墓廬) |
소재지 | 대전 동구 냉천로152번길 291 |
관리자(연락처) | 은진송씨 |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 묘 전경
▼관동묘려(寬洞墓廬) 입구에 최근에 세워진 재실 추원사
▼고흥유씨(高興柳氏) 행록(行錄)
▼추원사(追遠祠)
▼추원사(追遠祠) 전경
▼관동묘려(寬洞墓廬) 안내문
▼은진송씨 회덕 입향조이신 송명의선생 유허비 안내문
▼송명의선생 유허비각 측경
▼송명의선생 유허비각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 묘 입구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 묘 전경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 묘... 상석 앞쪽에 돌로 울타리를 치듯 테두리를 한게 특이하다.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 묘비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 묘 청룡쪽 석물... 망주석이 바깥쪽으로 나온 것도 좀 특이하다.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 묘 백호쪽 석물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 묘비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의 남편인 송극기 단비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 묘 입수도두
▼안인(安人)고흥유씨(高興柳氏) 묘 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