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시회(詩會)를 열었던 날들
-방산(芳山) 박제천 선생님을 추억하며
정복선(시인)
“저는 시인이 되려고 시를 쓰지 말라고 해요. 전인적인 정신의 결집체가 바로 시이기 때문에 시인이란 예술가가 되어야지 단순한 장인(匠人)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에요. 다만 시 쓰기가 어려운 것은 항상 전에 쓴 시보다 더 좋아야 하고 새로워야 한다는 사실 그것 때문이죠.”
- 이정현 대담/ 방산 박제천 선생님을 만나다, 문학사학철학 2021년 가을호에서
박제천 선생의 아호 방산(芳山)은 김구용 선생께서 지어주셨고, 芳山齋(방산재)라는 당호를 우아한 서체(금문(金文))로 휘호해주셨다(1971년). 방산 선생의 시 세계는 너무 방대하기에, 이 글에선 아무래도 부분적인 조명만을 할 수밖에 없겠다. 그의 시 중에서 널리 애송되는 시는 「비천」을 꼽을 수 있다.
나는 종이었다. 하늘이 내게 물을 때 바람이 내게 물을 때 나는 하늘이 되어 바람이 되어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괴로움을 물을 때 그의 괴로움이 되었고 그의 슬픔을 물을 때 그의 슬픔이 되었으며 그의 기쁨을 물을 때 그의 기쁨이 되었다.
처음에 나는 바다였다 …… (생략)
처음에 나는 하늘이었다 …… (생략)
처음에 그 처음에 나는 어둠이었다 …… (생략)
참으로 오랜 동안 나는 떠돌아다녔다 내 몸 속의 피와 눈물을 말렸고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추려 산과 강의 구석구석에 묻어 두었고 불의 넋 물의 흐름으로만 남아 땅속에 묻힌 하늘의 소리 하늘로 올라간 땅 속의 소리를 들으려 하였다.
떠돌음이여 그러나 나를 하늘도 바다도 어둠도 그 무엇도 될 수 없게 하는 바람이여 하늘과 땅 사이에 나를 묶어두는 이 기묘한 넋의 힘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게 하는 이 소리의 울림이여.
- 「비천」에서
모름지기 시인이란, 그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임을 시적 이미지로 묘사한다. 비록 “산과 강의 구석구석”에 육신이라 이름 지은 형체를 따로따로 묻어둔다 한들, “떠돌음”의 본질/본성은 다만 “하늘과 땅 사이”에서 날아다니는 “소리의 울림”으로만 존재가 입증되는 것.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을 비롯하여 비천상(飛天像)이 새겨진 종들의 아름다움이 종소리로 울려 퍼진다.
선생은 현대문학(신석초 추천, 1965~66년)을 통해 등단했다. 1970년 연작시 「장자시」 33편이 현대문학 10월호에 발표되어 문단의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첫 시집 莊子詩(예문관, 1975년)로 노장사상의 정신과 사상을 시에 대입해 현대적으로 변용시켰다는 찬사를 받았다.
“장자의 사상을 시로 풀어내었다기보다는 노장사상의 정신과 상상력을 나에게 대입해 현대적으로 변용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어요. 개인의 정신을 위한 노장사상, 그중 장자는 자유로운 정신의 사상가였죠. 결론적으로 노장의 정신적인 아나키즘은 예술가를 예술가로 존재하게 하는 동력원이라고 나는 생각해요.”(위 이정현 대담에서)
꾸겨둔선線하나가녹이슨채바람에실려떠나가거니
잘가거라
만리萬里의뱃길을도는만년萬年이한마리누에잠이언만
뉘라손을붙잡으랴
가까이갈수록뜨거워지는한덩이금은金銀의말조차수천수만의
그림자로
이세상世上의여기저기를떠돌고있느니.
- 박제천 「장자시 그 넷」 전문
“꾸겨진 선”으로 “바람에 실려” 떠가는 “한 마리 누에”의 “잠”은 어쩌면 장자의 나비의 꿈일 것이고, “금은의 말”로 표상되는 시어(詩語)도 “세상”을 떠도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 이 시에서도 “떠돌음”의 이미지가 겹친다.
선생의 시를 처음 만난 것은 제3시집 律에서였지만, 막상 선생을 처음 뵌 것은 필자가 등단(1988년)한 이후에 한국시인협회 행사에서였던 듯싶다. 언제부터인가 선생은 필자에게 <방산사숙>에 오라고 권유하셨다. 그때마다 그저 흘려들으며 이미 등단했는데…, 하는 속생각을 했었다.
인연도 성숙의 때가 오기 마련, 여러 상황 탓에 칩거하던 몇 년이 지나면서, 방산 선생을 스스로 찾게 되었다. 칠팔년간 쌓아둔 원고 더미를 정리하여, 선생이 운영하시는 <문학아카데미>에서 시집을 낼 결심을 했던 것.
선생의 숙달된 편집과 직접 쓰신 해설로 제5시집인 여유당 시편(2004년)을 상재하여 경기문화재단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고, 다음 해부터는 적극적인 권유로 <방산사숙>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후 청평으로 이사 들어오기 전까지 약 5년간 지속된 그 모임에서 새롭게 시를 보는 눈을 얻게 된 듯하다.
평소 선생은 늘 편안하게 대해주셨기에, 필자는 궁금한 걸 질문하고 명쾌한 답변을 듣곤 했다. 언제나 주저함 없이 번뜩이는 답변에는 동서양의 문학과 학문을 통섭하는 백과사전적인 지식과 판단력이 들어 있었다. 서가에 꽂힌 책 중에서 추천받은 책을 빌려와 본 일도 있었다.
이후 <문학아카데미>가 주최하는 여러 행사에 자주 참여하면서 문학과 창작에 원로시인들과의 대담을 청탁하셨고, 시인들의 시집리뷰나 시집해설까지도 쓰게 했으며, 숲속의시인상, 한국시문학상 등을 받게 됨으로써 더욱 고무적으로 시인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일 년에 네 차례의 시축제 중 여름에는 <숲속의시인학교>를 춘천, 가평, 고성, 충청도 등지에 가서 1박 2일로 열어, 시인들과의 돈독한 교유를 이어나갔다.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서 거문고를 타며 제자들에게 예악을 가르쳤듯이, 또 조선시대 여항인들이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시회(詩會)를 열었듯이, 문학과 창작에 발표한 자작시를 낭독/낭송한 시회는 지금도 꽃잎 흩날리는 꽃나무 아래에서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매년 노명순 시인의 땀으로 창작된 시극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명공연이었다.
그 시축제에서 만나 뵌 분들은 허영자 시인을 위시하여 강우식, 성찬경, 유경환, 김여정, 강민(부인인 작가 이국자), 이탄, 박현령, 김동호, 홍진기, 양채영, 이길원, 고창수, 민용태, 이영춘, 김학철, 문효치, 윤강로, 장덕천, 윤석산, 김용범, 박상천, 강만수, 이상문(소설가) …… 등등, 이젠 유명을 달리한 분들도 많다.
미당 선생이 문학과 창작 창간 기념(1995년)으로 써주신 <祝詩> 휘호는 시축제마다 모든 시인들을 반겼었다.
시집 중에 마틸다라는 연가곡 시집은 제14시집(2015년)이다. ‘마틸다’는 2005년 사별한 부인 김정희 님의 가톨릭 본명으로, 만남과 헤어짐, 추억과 죽음 등 그와 함께 한 시인의 생애 40년이 절절한 60여 편의 연시로 담겼다. 성수아트홀(2022. 3. 29.)에서 《‘마틸다’를 위한 연가곡》 공연이 이루어졌으며(이근형 작곡/소프라노 신승아/박제천 연시), 많은 시인들이 관람하였다.
나는 이제 다시는 반지를 끼지 않으리
나에게 다짐했어요
한밤중에 하늘을 보니, 그 반지가 떠 있었어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이름 없음이 하늘땅을 여니, 이름함이 모두의 어미란다
그대 말이 들렸어요
이 몸, 이 마음에 새겨진 반지달빛
반지 위에 반지를 하나 더 끼고
반지의 집을 찾아갔어요
-제11곡 「밤하늘에 뜬 반지」, 제1부 <사랑의 슬픔Sorrow of Love> 11곡 중에서
방산 선생은 1969년 주부생활에 처음 입사해서 1976년 문예진흥원에 자리잡기까지 일감을 찾아 무려 스무 군데쯤의 직장을 전전해야 했다. 그 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자료관장, 홍보출판부장, 문학미술부장, 문화총괄부장, 조사연구부장 등)에 20여년(1976~95년)을 근무하면서, 출판 홍보 쪽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총감과 연감, 사보 등을 편집 제작했고, 특히 공연예술총서(전10권)와 문화예술 행정총서(전10권), 대한민국연극제희곡집 등 비상업 전문도서를 중점 제작했다. 자료관장을 세 번 맡으면서 예술의전당 자료관으로 이전, 확장해 전문자료관의 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예술강좌를 기획했고, 대한민국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또한 1988년 <문학아카데미>를 창립하였고, 1995년부터 2023년까지 시 전문지 문학과 창작(통권178권)을 발행하면서 329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한편으로는, <방산사숙>을 열어 시인들 및 시인 지망생들의 문학창작실이 되었다. 문학과 창작은 2021년 여름 기준으로 각종 문학상, 기금, 추천도서 수상자가 335회에 달하고, 2001년부터 ‘한국시문학상’, 2002년에는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을 제정해서 지난해까지 이어졌다. <방산사숙>과 더불어, 문예진흥원에서 퇴사한 1995년 이후에 10여 년간 시창작실기 강좌를 전담한 동국대 문창과 학부와 대학원, 문예대학원, 성균관대, 경기대, 추계예대 등의 시인 제자들까지 합치면 몇 백 명의 시인이 그의 지도를 받은 셈이다.
시집으로 장자시 노자시편 너의 이름 나의 시 나무 사리 SF―교감 등 17권이 있고, 시선집 8권과 기타 저서들을 발간했다. 2005년 6월 27일엔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시업 40년 기념 박제천시전집 5권을 발간하면서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월탄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공초문학상, 바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새로운 기획으로 《시인만세》라는 유튜브를 개설하여 수십 인의 시인들과의 대담을 기록한 바, 필자의 대담은 임경하 시인이 맡아서 올려주는 수고를 해주었다.
5년 전쯤인가부터 선생의 병세가 점점 깊어졌었나 보다. 병세에 시달리며 자주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는데, 한번은 문병을 갔다가 병실에서 새로운 장자시를 이십여 편이나 쓰시는 모습에 놀랐고, 퇴원하면 곧바로 사무실에 출근하여 제자들과의 수업을 계속하는 모습에서, 아마도 저 정신력으로 오래 버텨주시리라 믿었었다. 그러나, 그 믿음이 허망하게 끝났다. 작년 6월 10일 부고가 전해졌다. 어리벙벙하여 그리 쉽게 가셨다고? 라며 믿고 싶지 않았다.
“죽음이란 주제는 참으로 매력적이에요. 나는 죽음이란 문제를 떠올릴 때마다 언제나 별과 연관 지어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내가 살기엔 적당치 않은 이 별을 떠나기에 앞서 우주의 흑판 여기저기에 백묵으로 나의 별을 그려 보지만 웬일일까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라는 시구처럼 별을 통해 나를 표현했어요.(위 이정현 대담에서)
선생 사후에도 <문학아카데미>와 <방산사숙>에 마음을 담았던 시인들의 열기는 그치지 않는다. 여름과 가을 시축제 행사를 회장 이명 시인 중심으로 진행했고, 겨울 시 축제에선 예년대로 한국시문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등 시상식을 행하여 마치 방산 선생이 그 자리에 참석한 듯한 착각에 빠졌다.
허전한 마음 한귀퉁이를 문진文鎭으로 눌러놓고 여기저기 유인
遊印이나 찍어보다가 꾸겨버리곤 합니다 처음부터 쓰고 싶었던
글월도 없었으니 먹墨을 더럽히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꾸겨버린 종이뭉치 사이로 언뜻언뜻 사람의 피와
같은 붉은 빛이 보여서 이제는 인주印朱마저 치워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피나 신경 따위는 비치지도 않는 한 장의 백지白紙로
남아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나 맞으며 하늘에서 눈이 내리지
않으면 또 그런 대로 눈을 만들어 뿌리기도 하면서 한겨울을
지내고 있습니다
- 백지白紙 전문, 律(문학예술사, 1981)
삶을 질러가서 어딘가에 서면, 진정으로 “쓰고 싶었던 글월”이 사라져서 “백지”를 더럽히는 일도 생기지 않을 듯하다. 더더구나 “인주” 빛과 같은 색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될 터이다. 마음 자체가 “백지”이자 눈밭이 되어버리면, 이미 생과 사, 라는 분별심도 증발해버릴 것이다. 그렇게 삶이 깊어져서 죽음에 이르고 죽음이 깊어지면 무형무색(無形無色)의 시공간에 이르게 될까.
작년 12월 말에는 새로운 임원을 구성하여 임시총회를 열어서 2024년부터 해나갈 계획을 마련했다. 여느 때보다 더 많은 회원들이 참석하여 새로운 항해를 향한 열기가 범선의 깃발처럼 나부꼈다.
선생은 가셨어도 남기신 행적과 아름다운 날들은 <문학아카데미시회> 시인들의 삶에 시회(詩會)에서 흩날리던 꽃잎처럼 남았고, 한동안은 생전의 말씀이 쟁쟁하게 울릴 것이다. 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정신이 바로 시(詩)라는 말씀이…….
정복선
1988년 시대문학 등단. 시집 변주, 청평의 저쪽 등 8권,
시선집 젊음이 이름을 적고 갔네, 영한시선집 Sand Relief,
평론집 호모 노마드의 시적 모험. 한국경기시협 부이사장, 한국시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