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고통을 어루만져 주자
두 번째 종류의 자양분은 감각을 통한 인상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과 마음은 감각 대상과 끊임없이 접촉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접촉은 의식을 위한 음식이 된다. 차를 타고 도시를 통과할 때면, 우리의 눈은 엄청나게 많은 광고판을 보게 되고, 이때 받은 이미지가 의식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잡지를 볼 때면, 기사와 광고가 의식을 위한 음식이 된다. 소유욕과 성욕 그리고 식욕을 부추기는 광고는 그야말로 독약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을 읽고 뉴스를 듣고 나서 혹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걱정스럽거나 피로한 느낌이 들면 그것은 바로 독약을 접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눈과 귀와 마음을 위한 음식이다. TV를 볼 때면 프로그램이 음식이 된다.
하루에 다섯 시간씩 TV를 보는 아이들은 마음속에 있는 탐욕, 공포, 분노와 폭력이라는 부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는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독소를 지닌 엄청나게 많은 형상, 색, 소리, 냄새, 맛, 촉각의 대상 그리고 생각에 노출되어 있는데, 그것은 심신의 안녕을 빼앗아가기 마련이다.
절망감이나 두려움 또는 우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인상을 통해 지나치게 많은 독소를 받아들인 결과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폭력성이 짙고 건전하지 못한 영화, TV 프로그램, 책, 잡지 그리고 게임으로부터 아이들만 보호해서 될 일은 아니다. 어른 역시 그러한 매체로 인해 인성이 파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념할 수 있다면, 공포와 혐오 그리고 폭력성이 라는 독소를 ‘섭취’할 것인지 아니면 이해와 연민 그리고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고무시켜주는 음식을 먹을 것인지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전념 수행을 하게 되면, 이것을 보고 듣고 만지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평화스러운 느낌이 드는데, 저것을 보고 듣고 만지면 걱정이 되고 슬퍼지고 우울해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 결과 접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확실하게 분간하게 된다. 피부는 외부로부터 박테리아가 침입하는 것을 막아준다. 항체는 몸속으로 들어온 침입지를 막아준다.
우리는 그것에 상당하는 의식의 측면을 이용해서 건전하지 못한 감각 대상에 중독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부처님은 이와 관련해서 극단적인 비유를 하나 들려주고 계신다.
“아주 심한 피부병을 앓는 바람에 피부가 거의 남아나지 못한 소가 한 마리 있었다. 그 소를 오래된 담벼락이나 고목 근처로 끌고 가면, 나무껍질 속에 있는 벌레들이 죄다 몰려나와 소의 몸통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을 것이다. 소를 물속으로 끌고 가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심지어는 공터에 그냥 놔둔다 해도 아주 작은 곤충들이 날아와 피를 빨아먹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이미지, 소리, 냄새, 촉감과 생각의 침입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중의 상당수가 탐욕, 폭력성, 두려움 그리고 절망감을 부추긴다. 부처님은 스스로를 지키려면 전념이라는 보초를 각 감각기관의 문전에 세워두라고 충고하셨다. 그러니까 불안(佛眼)을 이용해서 섭취하고자 하는 자양분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속에 독소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만 섭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 다섯가지 전념 훈련이 아주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개인, 가족, 도시 그리고 국가 단위로 모여 함께 자기 보호와 생존 전략에 관해서 논의해 보아야만 한다.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모두 함께 전념 수행을 해야 한다.
세 번째 종류의 자양분은 의지 또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간에 얻고자 하는 욕구다.
의지는 모든 행동의 토대를 이룬다. 행복해지려면 커다란 회사의 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말과 행동은 모두 그 목표를 실현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추게 될 것이다. 심지어는 잠자는 동안에도 우리의 의식은 계속해서 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자기와 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은 과거 어떤 사람의 잘못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잘못을 저지른 그 사람에게 앙갚음을 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제 오직 복수하겠다는 생각만을 품고 살아간다. 그가 하는 말이나 세우는 계획을 보면 온통 그 사람을 혼내 주고자 하는 것뿐이다. 밤이 되면 그는 복수하는 꿈을 꾸고는 복수를 해야 분노와 증오를 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 안에는 자기만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스스로를 몰아대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에겐 지위, 복수, 부와 명예나 재산이 행복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저 푸른 하늘과 나무 그리고 우리의 어여쁜 아이들처럼 언제나 가까이할 수 있는 삶의 경이로움을 향유하고자 한다면, 앞서 말한 것들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생각을 키워야 한다. 마음을 집중해서 앉고 걷고 보는 생활을 3개월 내지 6개월 정도하고 나면 현실을 깊숙이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기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즐기며 현재를 살아가는 능력을 통해 갖가지 충동을 여의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어느 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점심 공양을 마쳤을 무렵, 한 농부가 입술이 바짝 탄 얼굴을 하고 찾아와 물었다. “스님들, 제 소들을 보지 못했습니까? 이런 큰 불행을 당하고 나니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부처님이 물으셨다.
“무슨 일로 그러하오?”
“오늘 아침에 제 소 열두 마리가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올해 수확한 곡식을 곤충들이 모두 먹어 치워 버렸답니다.” 다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여보시오. 우리는 당신의 소를 보지 못했소. 아마도 다른 방향으로 가버린 모양이오.” 농부가 자리를 뜨고 나자 부처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벗들이여, 너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너희에겐 잃어버릴 소나 곡식도 없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늘 좀 더 많이 가지려 든다. 그리고 ‘소’ 같은 재물을 자신의 존재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은 그런 것들은 행복을 막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소를 놓아주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보라. 정말로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소를 놓아주어야 한다. 부처님은 또 하나의 극단적인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힘세 두 사람이 어떤 사내를 끌고 와서 불구덩이에 던져 버리려고 했다. 사내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그 사내를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내던져 버렸다.” 부처님은 힘센 그 두 사람은 바로 우리의 의지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고통을 바라는 사람은 없지만, 뿌리 깊은 습관의 힘이 우리를 고통의 불구덩이로 끌고 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의지가 우리를 해탈, 평화와 자유의 방향으로 몰고 가는지 아니면 고통과 불행의 방향으로 몰고 가는지 알고자 한다면 의지의 본성을 깊숙이 잘 살펴보라고 하셨다. 우리는 의지를 길러주는 음식이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네 번째 종류의 자양분은 의식이다.
의식은 자신과 가족과 사회가 과거에 한 행동을 통해 심어진 갖가지 씨앗으로 이루어져 있다. 날마다 우리가 한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은 의식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 몸과 마음 그리고 세상을 만들어낸다.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닦아서 의식을 좋은 방향으로 강화하는 사람도 있고, 탐욕, 증오, 무지, 의심 그리고 교만으로 의식의 내용을 채우는 사람도 있다.
의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뭔가를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자양분을 섭취할 것인가를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