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두 개의 부록 본문 : 다섯 번에 걸친 불행 선언의 에필로그(32장)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을 향한 번의 불행 선언(28-31장)과 이방 민족 통치자를 향한 여섯 번째 불행 선언(33장) 사이에, 32장이 위치한다. 여기서 관건은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들의 계획을 추구하는 예루살렘 통치자의 모습과 대비되는 이상적인 통치자들의 등장을 예고하고(32,1-8), 태평스러운 여인들을 향한 애도(32,9-14)와 함께 희망적인 구원(32,15-20)을 선포한다는 점이다. 구조적으로 선행하는 5개의 불행 선언은 32장에서 마무리되고 시온에 다가온 구원의 모습이 예고된다. 이를 위해 32장은 독립적인 단락 두 개를 나란히 배치한다. 이상적인 통치자와 그의 다스림에서 시작되는 전환이 예고되며(32,1-8), 태평스러운 여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현된 심판에 대하여 애도하라고 호소하는 동시에 구원의 그림이 제공된다(32,9-20).
1) 정의와 공정을 바탕으로 한 이상적인 통치자의 등장(32,1-8)
28-31장에서 불행 선언의 수신자로 지목된 이들은 현실적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악행으로 시온은 위협을 받게 되었고, 시온을 보호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 선포되었다. 이제 그 구원의 선포가 구체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이 부분은 문학적 장르와 주제에 따라 두 단락으로 구성된다. 첫 단락은 미래를 예고하는 형식으로 의로운 임금과 제후를 통한 이상적인 통치에 대하여 들려준다(32,1-5). 두 번째 단락은 지혜문학적 분위기 안에서 인간의 행위를 고찰하고 그의 악한 행위를 묘사한다(32,6-8).
1-5절 의로운 임금과 제후의 통치
이 단락은 의로운 임금과 제후의 통치를 선포하면서 시작된다(32,1). 이들의 등장은, 지금까지 불행 선언에서 심판의 대상이 된 예루살렘 지도자와 대비를 이룬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인간적 계획과 계산으로 백성을 다스렸지만, 의로운 임금과 제후는 공정과 정의를 바탕으로 통치한다. 공정과 정의의 조합은 이사야 예언서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를 구성한다. 시온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시온에 공정과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1,21). 따라서 공정과 정의가 바탕을 이루어야만 시온과 시온의 백성은 재건될 수 있다(1,27). 아울러 이사야서가 제시하는 이상적 통치자 메시아는 공정과 정의를 통치의 기초로 삼는다(9,6 ; 11,4).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통치자가 공정과 정의를 바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그가 메시아적 인물임을 알려준다.
의로운 통치자의 다스림을 통해 공정과 정의가 회복되면서 상황은 변화된다. 변화된 상황은 ‘봄’, ‘들음’, ‘깨달음’, ‘말함’에서 드러난다. 보고 들음은 이사야 예언자가 사명을 받을 때부터 이사야서의 주요 주제로 나타난다(6,9-10 ; 심판의 의미에서 :29,9-10 ; 30,10-11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보고 듣고 마음으로 깨우쳐서 당신께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그러한 모습은 이사야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이사야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의 전하는 가르침을 봉인하여 증거로 남겼다(8,16-18 ; 29,11 ; 30,8 참조). 그렇게 보고 들어서 깨우치지 못하던 백성이 하느님 심판을 통해 회개라는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대전환이 선포된다. 그리하여 눈은 보고, 귀는 듣고, 마음은 깨닫고, 혀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뀌게 된다. 말 그대로 정상적인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32,5).
6-8절 악한 행동에 대한 묘사
여기서는 악한 이들의 행동에 대한 심판과 구원의 예고가 함께 선포된다. 악한 이들은 두 부류 곧 어리석은 이들과 간교한 자들로 나뉘어 언급된다. 지혜로운 자들의 눈에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을 뿐이며, 간교한 자는 존귀한 이로 보이지 않는다(32,5).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고, 간교한 자는 술책을 꾸밀 뿐이다(32,6-7). 여기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자와 간교한 자를 앞에 나온 불행 선언의 수신자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연관하여 살펴보면(28-31장), 그들은 하느님을 믿지도 의지하지도 않는 이들이다. 오히려 이집트 군사를 믿고 그들의 보호를 청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인간적인 간교한 술책을 꾸밀 뿐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통치자가 그들을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이 예고된다. 여기에서 의로운 임금과 통치자는 어리석고 간교한 자들과 대비되면서 고귀한 이로 드러난다(32,8).
2) 심판과 구원의 예고(32,9-20)
두 번째 말씀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우선 걱정 없이 사는 여인들에게 다가올 재앙에 대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하라는 요구가 선포되고(32,9-14), 이와 반대되는 모습으로 구원이 예고된다(32,15-20). “한 해가 조금 지나면 너희는 무서워 떨게 되리니...”(32,10) 라는 말씀은 예루살렘이 외부의 침략을 앞둔 상황을 설정한다. 본문이 구체적인 역사적 정황을 제시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그 침략의 배경으로 기원전 701년의 산해립의 공격과 기원전 587년의 네부카드네자르의 공습을 꼽을 수 있다.
9-14절 걱정 없는 여인들을 향한 호소
하느님의 말씀이 여인들을 향한다. 그들은 걱정 없고 태평스러운 모습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녀들이 듣고(32,9), 가슴을 치며 탄식할 것을(32,11-13) 호소하신다. 하느님의 호소와 함께 황폐해지는 장면이 묘사된다(32,10). 여인의 태평스러운 모습은 이미 3,16-4,1에서 심판의 이유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인의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재앙의 원인이 여인에게 있지 않다. 28-31장에서 전개되는 불행 선언은 분명하게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향하고 있다. 이 본문을 그들의 악행에 따른 결과로 바라본다면, 32,9-20은 불행 선언의 예고(28-31장)를 현실화하고 마무리하는 에필로그로 이해된다. 그 맥락에서 여인들을 향한 호소는 그들 때문에 재앙을 겪는다는 비난이 아니라, 위협을 모르고 살아가는 여인들에게 갑작스럽게 닥칠 재앙이 얼마나 끔찍한지 강조할 뿐이다. 둘째, 여인들의 모습에서 은유적으로 표현된 예루살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유 있고 한가로운 여인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계획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 식으로 살아가는 백성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황량해지고 짐승의 소굴로 변할 것이다(32,14).
15-20절 구원의 예고
구원의 예고는 황폐화가 마무리되는 시점을 언급한다. 그때는 “우리 위의 높은 곳에서 영이 내려올 때까지”(32,15)이다. 곧, 하늘에서 영이 내려올 때, 황폐화의 시간이 마무리되고 구원이 새롭게 시작될 것임을 알려준다. 불행 선언에서 언급된 영은 백성 사이를 어둡게 만드는 것으로(29,10.24),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30,1.28)과 관계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내려오는 영은 그와 완전히 상반된 영이다. 새로운 영이 부여되면서 28-31장의 죄와 악행은 마무리되고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 시온은 공정과 정의가 가득한 곳으로 변화되고, 공정과 정의는 평화, 평온과 신뢰를 열매로 맺는다(32,15ㄴ-17). 그리하여 하느님 백성은 평화롭고 안전한 안식처에 살게 된다(32,18). 앞에서 걱정 없는 여인들이 맞이하게 될 운명(32,9-14)과 하느님께서 “나의 백성”(32,18)이라고 표현하시는 이들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린다. 이러한 구원의 그림이 제시된 마지막에 ‘행복 선언’이 나온다(32,20). 이로써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향한 5번의 ‘불행 선언’은 시온의 의로운 이들을 위한 행복 선언으로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