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글
어제 걷다가 중지한 반암리해변에서 통일 안보교육원까지 걷고
드디어 내일 해파랑길 50코스 지점에 도착하려 한다.
-걸었던 날 : 2024년 11월 10일(일요일)
- 걸었던 길 : 해파랑길 48~49코스.(반암해변~거진항~응봉~김일성 별장~대진항~통일안보교육원~명파해변)
- 걸은 거리 : 25km (약 40,000보, 7시간)
- 누계 거리 : 664.4km.
- 글을 쓴 날 : 2024년 11월 16일(토요일).
아침 일출을 보러 나왔는데 여튼 해무에 가려 선명한 해맞이는 못했다.바다는 잔잔하여 그물을 걷으러 나간 어선들이 보였다.바쁘게 사는 어민들의 모습이었으며 그들의 힘든 삶을 상상했다.칠흑같은 어두운 새벽에 출항을 했을 어민들의 그물에 고기가 많이 잡혔으면 좋겠다.그렇지만 최근에 바다는 수온이 변하였고 어종도 바뀌고 그나마 어획량도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다.나는 콘도에서 새벽 해수사우나를 즐겼다.
숙소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반암리 해변으로 이동했다.다행스럽게 이번 트레킹 구간은 노선 버스가 다니는 길과 같았고 정류장에서 얼마를 기다리지 않고 다가온 버스에 올랐다.내가 묵었던 금강산콘도는 동해안 최북단 콘도이다.다만 오래된 건물이어서 이용객이 많지 않은것 같아 아쉬웠지만 금강산콘도는 해수사우나 시설도 있었고 콘도건물 양옆으로 깨끗한 모래해변이 있으며 콘도앞 바다에 아담한 무송정섬 해변도 건너가 걸어 볼만하다.이곳 콘도에서 북쪽으로 700m 거리에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가 있다.통일전망대를 가려면 출입신고소에서 부터는 차량으로 이동해야 한다.
반암리 해변에 도착해서 거진항과 통일전망대를 향해 출발했다.바람도 없고 날씨도 좋다.오늘 걷고나면 내일 통일전망대에 도착하여 해파랑길은 끝이다.그동안 걸었던 여러가지 모습들이 생각났다.처음 시작할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줄 알았다. 그러나 1년동안 10번 출발하여 32회차에 750km 해파랑길을 마치게 된다.
어느덧 거진항에 도착하고 거진등대가 있는 거진해맞이 공원의 계단을 오른다.거진항은 항만이 넓어 많은 선단이 정박할수 있는 항구로 보였다.거진항은 과거 명태가 만선하던 항구여서 지금도 명태축제을 개최하고 있다.동해바다 명태는 잡히지 않는다고 했으니 수입 냉동 명태축제인셈이다.기후의 변화로 동해의 명태와 울진대게는 러시아에서 잡히고 그것을 수입하여 울진에서는 대게축제를 하고 거진에서는 명태축제를 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강원도 고성은 여러 명품길을 선정하였는데 "화진포 해맞이 산소길,응봉숲길, 화진포 성 숲길, 거진항 등대 해맞이길등등 아담한 여러 둘레길도 있다.(현판글 참조)
거진등대 해맞이 길에서 가을을 음미하며 걸었다.산림헌장 첫 소절은 "숲은 생명이 숨쉬는 삶의 터전이다.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과 기름진 흙은 숲에서 얻어지고, 온 생명의 활력도 건강하고 다양하고 아름다운 숲에서 비롯 된다". 라고 적었다.숲은 인간의 삶을 정화 시키는 현장이다.그리고 지친 삶을 힐링하며 아픈 마음을 치료하는 기능도 하고 누구에겐가 다시 일어 설 수 있는,재충전을 하는 기회를 주는 곳이기도 하다.그런 숲을 우리는 아끼고 간직하며 후손에게도 잘 물려주어야 할 숲인것이다.
거진 화진포의 명품 숲길을 걷는데 숲이 갑자기 환해졌다.은행나무 노란단풍의 영향으로 노란 형광등을 켜 놓은듯한 모습이다.나는 누가 저 은행나무을 심었을까?궁금하기도 했다.송림숲 사이에 갑자기 나타난 은행나무 군락이 다른 빛깔을 나타내고 있었다.은행나무로 유명한곳이 있다.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나이가 1,100년이나 되어 현존 국내 최고의 수령의 은행나무로 유명하다.그리고 충북 괴산의 문광저수지 은행나무 숲은 오래전에 마을주민 김인환씨의 나무기부로 200여 그루의 은행나무가 저수지 제방에 큰 숲을 이루고 있다. 이제는 은행나무축제를 하기도 한다.한사람의 나무 기부가 축제를 할 만큼의 기회를 만들었으니 대단한 일이다.농촌지역에서는 일손 부족으로 경작이 다소 불편한 땅들이 휴경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이나 지자체에서는 그런 여유로운 땅에 지금이라도 나무를 심어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화진포를 향해 야산을 오른다.송림 숲길 아래에 서너개 또는 대여섯개의 작은 돌을 쌓아 올린 돌탑이 규칙적인 거리로 쌓아 놓았다.그리고 가끔은 군락을 이루는 돌탑도 있었는데 돌탑은 숫자를 헤아일 수 없이 많아 한두해 쌓은것이 아니고 여러해 쌓은듯 하다.솜씨로 보면 한 사람의 작품인듯 했다.
누가 쌓았을까?.
어떤 사연으로 하나하나의 돌을 올려 놓았을까?.
그분은 어떤 마음이엇을까?
궁금했다.은자여사는 그 돌탑위에 하나의 돌을 더 쌓으려다가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그래서 다시 정성스레 다시 쌓고 일어섰다.
매봉은 해발 122m의 낮은 산이다.산 모양이 매가 앉은듯 하여 매봉이란다.우리 민족은 매을 기르기도 했고 매와 친숙하다.그리고 지명도 매와 관련한 지명이 많다.백두대간 태백에는 바람의 언덕 매봉산(1,303m)이 있다.지금은 고랭지 배추단지로 유명하고 풍력단지가 설치되어 있는데 백두대간 매봉산에서 낙동정맥이 뻗어 나간다.그 매봉산은 설화에 의하면 옛날 바다에 해일이 일어 한반도 육지가 모두 잠겼는데 매 한마리 겨우 앉은만한 땅만 남았다.그 땅이 매봉산이다.믿거나 말거나 설화일뿐!. 응봉은 화진포 소나무 산림욕장이다.응봉정상에서 카메라를 거치하고 사진 한컷 찍었다.
응봉에서 화진포가 내려다 보인다. 화진포 호수 수면위에 청명한 가을 하늘이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호수는 가느다란 모래해변이 바다와 갈라 놓아 고요함을 품은 호수이다. 2015년 12월 14일 싱가포르 "리센룽" 총리부부가 휴가차 이곳 고성에 와서 통일전망대와 화진포 일대를 방문하였다.그리고 매봉에 올라 기념 사진을 찍고 화진포을 감상했다. 총리부인 "호"여사님께서는 이곳 매봉에서 찍은 부부의 사진을 SNS에 공유하면서 "화진포는 아름다운 해변과 고요한 호수를 간직한곳"이라고 설명하셨다고 한다.그후 싱가포르 관관객들이 이곳을 많이 방문하기도 한다고 하는 설명의 현판글을 읽었다.
또한 이곳 화진포 일대에는 김일성 별장과 이승만 별장 그리고 이기붕 별장이 있다.
화진포 설화는 이렇다. 먼 옛날 화진포 마을에 이화진이 살고 있었는데 성격이 고약하고 구두쇠였다.어느날 건붕사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얻으려 염불을 하는데 이화진은 시주대신 소똥를 바랑에 넣어 주었다.그러자 스님은 답례로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말하고 집을 나오는데 이 광경을 본 며느리가 얼른 쌀을 퍼와 스님께 드리며 "우리 아버님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용서를 바랬다.그러자 스님은 시주를 받지 않고 못 들은체 지났는데 며느리는 계속 따라가면서 또 용서를 빌었다.그러자 스님은 "그대는 무슨 큰 소리가 나더라도 절대 뒤를 돌아 보지 말라"고 당부를 하며 시주를 받았다.그리고 얼마 뒤 갑자기 "꽝"하고 큰 소리가 나자 며느리는 자기도 모르게 뒤 돌아 봤다.그러자 하늘에서 엄청난 폭우가 마구 쏟아지고 이화진이 살던 집이며 전답은 순식간에 호수에 잠겨 버렸다.그뒤 스님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놀란 며느리는 그대로 돌이 되어 버렸다. 그후 마을 사람들은 착한 심성을 가진 그 며느리를 "고총서낭신"으로 정성껏 모시니 농사도 잘되고 전염병도 사라졌다고 하며 화진포라는 호수는 그 이름에서 유래 하였다는 설화이다.(현판의 글을 옮겨 씀)
응봉에서 김일성 별장(성)으로 내려 갔다.김일성 별장은 자연석 몽돌을 쌓아 벽체를 만든 유럽의 성을 닮은 모습이다.전시관에 들어가 자료을 봤다.지금의 별장 모습은 터만 같을 뿐 당시의 건물은 아니며 김일성이 지은 건물도 아니었다.1938년 일제 강점기에 독일 선교사 "셔우드 홀" 박사부부가 독일의 망명건축가 "베버"에게 작고 아담한 별장을 짓게 하였는데 "베버"는 유럽의 성을 닮은 건물을 지었다.그 건물이 일제가 패망하면서 38선 이북의 화진포는 북한땅이 됐고 김일성 가족이 자주 이용하였다는 설명과 사진을 볼수 있엇다.
최초 건물를 지은 선교사 셔우드와 메리언부부는 1926년 조선에 입국하여 해주구세 병원에서 근무하였고 우리나라 최초로 결핵 전문병원을 설립하였다.당시 한국에서 결핵은 5명중 한사람이 결핵 환자였으며 결핵은 낫지 못하는 불치병으로 여기던 시절에 셔우드는 계몽과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재원마련을 위해 "크리스마스 씰"을 도입하였다.셔우드 박사는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 될때까지 9회에 걸쳐 "크리스마스 씰"를 발행하였다고 한다.종교를 떠나 현대 의학을 한국에서 펼치고 결핵의 퇴치를 위해 봉사했던 독일인 셔우드 박사부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인듯 하다.(기념관 자료 참조)
김일성별장 옥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계단을 내려와 화진포로 향했다.
오후1시 화진포 호수를 걷는데 배가 허기지고 고팠다.응봉를 넘으면 화진포가 가깝고 당연하게 식당이나 카페가 있을것 같았으나 아직까지 식당이나 카페는 없었다. 배낭에서 방울토마토를 꺼내 우선 허기를 해결하면서 걷다가 텅빈 화진포 주차장에서 호떡차량을 만났다.호떡 차량은 구세주였다.따끈한 호떡과 아메리카노를 사셔 마시며 점심을 대용했다.그리고 화진포 모래해변을 걷고 금강산콘도를 지나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 도착하였다.오늘은 이곳에서 마감할 예정이었다.서로 더 걸을 수 있는지 체력을 물었다.아직 체력도 있었고 시간도 넉넉했다.오늘 걷고 나면 내일은 더 여유로울것 같아서 내일 걸어야 할 재진 검문소까지 5km를 더 걷기로 하였다.그러나 동해안 최복단 명파해변까지는 야산 숲길이였다. 오후 4시를 지나는 시간에 최북단 가파른 야산 숲길을 초행하면서 마음이 다급해졌다.늦은 오후 숲길 5km은 짧지 않았다.명파해변에 도착하더라도 공공버스가 없다고 했기에 더 그랬다.부지런히 걸었다.오늘 진즉 20km를 넘게 걸었고 거진해맞이길과 응봉숲길을 걷고 다시 명파해변까지 봉화봉 숲길을 오르고 넘는데 버거웠다.어느정도 걷다가 산불감시요원을 만나 길을 묻고 마침내 재진검문소가 보였고 명파해변 입구로 내려섰다.그리고 신호 대기중인 SUV 차량운전자의 도움으로 금강산콘도 주변에 도착하여 오늘의 일정을 마쳤다.오늘도 25km 정도를 걸었다.저녁은 콘도에서 가져간 돼지목살 구이에 소주를 마시며 해파랑길 마지막밤을 기념했다.
2024년 11월 16일 저녁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