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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묵상글 1차(04:10), 2차(05:00), 3차(08:50)
6월 27일 묵상글 04시 1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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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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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8,5–17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한 이방인, 곧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입니다. 그는 선택된 백성 밖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백인대장의 겸손과 믿음에 주목합니다. 그는 권력을 쥔 군인이었지만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낮춥니다. 그러면서도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하며 주님 말씀의 권능을 온전히 믿습니다. 암브로시오는 이 겸손과 신뢰야말로 참믿음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교회는 이 백인대장의 고백을 너무도 소중히 여겨, 미사 때마다 영성체에 앞서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으나 한 말씀만 하소서.” 하고 그의 말을 되풀이합니다.
암브로시오는 또 ‘동쪽과 서쪽에서 온 많은 사람’에 주목합니다. 하느님의 잔칫상은 한 민족, 한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식탁에 온 세상의 낯선 이들이 함께 둘러앉습니다. 정작 위험한 것은 ‘우리는 안에 있다’는 자만에 빠져 스스로 바깥 어둠을 택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혈통이나 소속이 아니라 마음의 겸손과 신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와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며,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고 질병을 짊어지셨다”는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십니다. 주님은 멀리서 명령만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을 당신 어깨에 짊어지시는 분이십니다. 이방인의 종도, 베드로의 장모도, 저녁의 병자들도 그 자비의 손길 아래 하나가 됩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평화의 식탁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 줍니다. 동쪽과 서쪽, 안과 밖, 이 종교와 저 민족을 넘어 겸손히 믿는 모든 이가 한자리에 초대됩니다. 이웃의 진실한 신앙 앞에서 겸손히 배우는 것, 그것이 갈라진 세상에 평화를 여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우리는 안에 있다’는 자만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나는 이웃 종교와 낯선 이의 신앙 앞에서 겸손히 배우는가? 나는 백인대장처럼 ‘한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는가? 나는 아픔을 짊어지신 주님을 닮아 이웃의 아픔을 나누는가?
주님, 저를 제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게 하소서. 동쪽과 서쪽에서 오는 모든 이를 형제로 맞이하게 하시고, 백인대장의 겸손과 믿음을 닮게 하소서. 우리의 병약함을 짊어지신 당신처럼 이웃의 아픔을 함께 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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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사제 모임이 잘 끝났습니다. 비행기가 두 번이나 취소되면서 시작부터 쉽지 않았지만, 결국 무사히 도착했고, 좋은 만남과 은총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살다 보면 그렇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산 넘어 산’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 시간도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욥은 시련 가운데서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하였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쁜 것을 주셨을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인생은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돌아갈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제가 예전에 인상 깊게 읽었던 영어 문장이 있습니다. “Life is not about for the storm to pass, it is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인생은 시련이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련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세월의 무게를 견뎌온 나무에는 ‘옹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옹이는 상처일 수도 있지만, 옹이는 어쩌면 훈장일 수도 있습니다. 제게도 크고 작은 ‘옹이’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저의 실수와 잘못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어떤 것은 욥이 겪었던 것처럼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긴 것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성경 말씀처럼 지나간 날의 옹이에 감사드립니다. ‘산 넘어 산’을 겪어야 했던 분이 있습니다. 감당하기에 버거운 직책을 맡았지만 지혜롭게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은행 일을 보고 나오던 중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방을 빼앗겼지만, 다행히 몸은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불안해서 새로이 집을 옮겼습니다. 전에 있던 집은 성당에서 5분 거리여서 좋았는데 새로 옮긴 집은 15분 거리였습니다. 그래도 새집을 축성 받으며 마음을 주고 지냈습니다. 동생 부부와 함께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성지순례 중 뜻하지 않게 남편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다행히 남편은 건강을 회복하였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작년 1년은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또 ‘산 넘어 산’을 넘어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아들이 응급실을 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동생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2년 전에 제게 기도를 부탁했듯이, 올해도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산을 잘 넘을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시련 속에서도 희망의 길을 찾기를 청합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딘 나무에는 ‘옹이’가 있습니다. 옹이는 상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옹이는 그 나무가 강한 바람과 추운 겨울을 견디어 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의 상처도 그렇습니다. 실패와 아픔, 억울함과 눈물은 우리의 약점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왔다는 믿음의 훈장인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돌아보면 크고 작은 옹이들이 있었습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생긴 것도 있고, 욥처럼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 시간도 저를 더 깊게 만들었고, 사람들의 아픔을 조금 더 이해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지나간 날의 상처에도 감사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생에는 이렇게 반복되는 시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련이 없느냐가 아닙니다.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나의 딸 백성이 파멸하고 도시의 광장에서 아이들과 젖먹이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눈은 눈물로 멀어져 가고 내 속은 들끓으며 내 애간장은 땅바닥에 쏟아지는구나.” 예언자는 백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억눌린 이가 수치를 느끼며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련한 이와 불쌍한 이가 당신 이름을 찬양하게 하소서.” 신앙은 아픈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의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믿는 것입니다. 1997년 제기동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성당 마당에는 감나무가 한그루 있었습니다. 파란 감들이 주렁주렁 가지에 매달려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감나무에서 감들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감나무는 왜 감을 떨구어 냈을까요? 본당 신부님께서는 제게 “감나무는 더 크고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해서 스스로 작고 볼품없는 감들을 떨구어 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은 참 아름다운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종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제 종은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사랑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믿음이 아니라, 아픈 이를 위한 믿음이었습니다. 지금 힘든 시간을 지나고 계신 분이 있다면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리고 지나간 뒤에 돌아보면, 그 시간 속에도 주님의 은총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눈물이 내일의 믿음이 되고, 오늘의 상처가 내일의 옹이가 되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입니다. 좋을 때 감사드리고, 힘들 때도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건강할 때 감사드리고, 병중에도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성공했을 때만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도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그 믿음 안에서 오늘도 희망의 길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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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나병환자 치유에 이어, 백인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야기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야기, 그리고 악령 들린 이들과 병자들을 고치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늘 우리는 백인대장에게서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고개 숙이는 모습’입니다. 결코 아무나 고개 숙일 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고개를 숙이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나아가서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조정당하는 일’은 더더욱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는 ‘백인대장의 말’을 되새겨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 날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영성체 때에 드리는 신앙고백입니다. “주님, 제 안에 당신을 모시기 합당치 못하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낫겠나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아름다운 마음’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를 담아내야 할 일입니다 <첫 번째>는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8,7)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많은 죄인입니다”(루카 5,8)라고 자신의 비참한 실존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집에 모실만한 ‘합당한 자격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곧 자신이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라는 것이요, 백인대장의 신분이지만 하인의 병을 어찌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의 병행구문에서는 ‘주님 앞에 나서기에도 합당치 못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제 자신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제대 앞에 설 때마다 ‘합당치 못한 제 자신의 모습’이 몹시 두렵고 떨리기 때문입니다. ‘합당치 못한 제 자신의 모습’이 가시가 되어 찌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라는 의탁과 신앙고백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빵이심을 깨달았을 때,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요한 6,46)라고 믿고 의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곧 그분이 ‘주님이심에 대한 깨달음’과 그분의 ‘권능에 대한 의탁’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고, ‘이렇게 하라’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 하면 저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낮이건 밤이건 구름만 걷혀 올라가면 길을 떠났고, 구름이 이틀이고 한 달이고 한 해이고 머물러 있으면 떠나지 않았던 것’(민수 9,21-22)처럼 말입니다.
주님! 이제 저도 백인대장처럼,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하고, 믿음의 간청을 드립니다. 주님의 권능뿐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믿으며, 특별히 사랑을 성취시키시는 ‘말씀의 권능’을 믿습니다. 저를 ‘먼저’ 믿어주시는 당신의 믿음에 의탁하여, 성모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저도 ‘먼저’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 저도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믿음으로 듣고, 청하기 전에 ‘먼저’ 믿고 청하게 해주십시오. 오늘 제가 당신의 거룩함 앞에서 제 비참함을 깨닫게 하시고, 광야에서 당신 백성이 그러했듯이, 오로지 당신 말씀에 의탁하여 가능해 보일지라도 ‘돌아서 가라’ 하면 돌아서 가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곧바로 가라’ 하면 곧바로 가게 하소서. 당신이 진정 저의 주님이시오니, 저를 인도하시나이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만을 제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자유를 주시니,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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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카파르나움은 호숫가의 작은 도시였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었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 정결한 이와 부정한 이, 자유인과 노예로 나뉜 경계입니다. 그 한가운데 한 백인대장이 있습니다. 그는 제국의 질서를 따라 명령과 복종에 익숙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가 예수님께 건네는 말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주님, 제 종이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마태 8,6). ‘종’이라고 옮긴 그리스 말 ‘파이스’는 노예 또는 아이를 가리킵니다. 이름 없이 불리는 존재, 그러나 누군가를 간절하게 만드는 인물. 백인대장은 그를 위하여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낮춥니다. 백인대장의 고백은 체면을 버리는 대신 한 사람의 고통을 멈추게 하려는 애원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에 놀라워하십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많은 이가 와서 아브라함과 함께 잔칫상에 앉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세상의 신분과 권력과 명예가 갈라놓는 경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바깥 어둠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경계에서 안타깝게도 서로를 잊어버리는 이들, 그들의 어둠을 경고하십니다. 복음은 누구를 배제하기보다 우리가 ‘우리’로 서 있는지 조용히 묻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인의 손에 당신 손을 대셨고 그 부인은 일어났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이 모든 장면을 이사야 예언자가 한 말로 감쌉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8,17).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멀리 밀어내시기보다 사랑으로 당신께서 기꺼이 짊어지십니다. 병의 무게가 누군가에게 홀로 남겨지는 상처가 되지 않도록 상처 곁에 머무는 법을 배우는 일,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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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사랑의 원천적 동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투신 안에서 용기와 확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고난의 때의 희망 사랑의 원천적 동기! 2026년 6월 26일 금요일 설령 희망이 무너진다 해도, 그보다 더 큰 것이 우리를 채워 주니,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 종말론적 운명 이후의 삶(Life After Doom) 브라이언 맥라렌은 사랑이 결과에 의존하지 않는 깊은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결실에 이르는 길이 보일 때 우리는 희망을 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에 빠집니다. 길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희망을 간직하지만 그 길이 닫히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허약하기 그지없는 희망으로 남습니다. 우리의 근본 동기가 사랑일 때, 전혀 다른 논리가 작동합니다. 우리는 좋은 결과의 가능성에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서약 안에서 용기와 확신을 발견합니다. 사랑은 우리의 곤경을 해결하는 길을 열어 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알 수 없는 길을 한 걸음씩 내딛게 하며,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제 친구 재키 루이스가 말하듯, 이 뜨거운 사랑에 지탱되어 우리는 오래도록 인내할 수 있고, 그때 뜻밖에도 길이 없던 곳에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다시 희망을 가질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설령 희망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마지막 숨결까지 사랑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좋은 결과에 대한 희망을 잃는다 해도, 선한 사람이 될 희망까지 잃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용기 있고, 지혜롭고, 친절하며, 사랑하는 이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악을 거슬러" 말입니다. [1]…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선언을 느낍니다. "세상이 아무리 추하고, 두렵고, 거칠어져도, 실패와 죽음이 불가피해 보인다 해도, 우리는 가능한 한 오래도록 아름답고, 용감하며, 친절하게 살아가리라." 사실 이러한 덕은 실패와 죽음이라는 맥락 안에서만 자라납니다. 그래서 리처드 로어는 이러한 희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혜롭고 관대하게 고통을 견디는 배움에서 맺히는 열매. 그 과정을 통해 당신은 훨씬 더 큰 존재가 되고, 그 ‘큰 존재됨’이 곧 당신의 희망이 된다."라고요. 생태신학자 샐리 맥페이그(Salli Mcfague: 1933–2019)는 희망을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안에 두었습니다: 우리의 희망의 근거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희망은 하느님의 근원적 초월성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느님의 초월성, 곧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지탱하시는 사랑의 힘은 우리 자신보다 더 가까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세계, 곧 연약하고 쇠퇴해 가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힘과 사랑의 근원, 그 환경이십니다. 세상은 홀로 버려진 것이 아니며, 하느님은 단순히 어떤 것에 ‘덧붙여진’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우주를 움직이고 그 안에서 빛나는 생명, 사랑, 진리, 선, 아름다움이십니다…. [3] 믿음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두는 믿음이며, 그것은 우리를 근본적인 변화의 삶으로 자유롭게 이끌어 줍니다. 어쩌면 그것만이 참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개인적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로 삼지 않습니다 — "하느님께 맡겨 두자"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오히려 이 희망은 결과에 대한 압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업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합니다. 이 믿음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두는 믿음이며, 그것은 우리를 근본적인 변화의 삶으로 자유롭게 이끌어 줍니다. 어쩌면 그것만이 참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개인적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로 삼지 않습니다 — "하느님께 맡겨 자"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오히려 이 희망은 결과에 대한 압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업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수십 년 전, 제가 가톨릭 신앙 안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리처드 로어의 『아담의 귀환』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그의 많은 책을 읽었고, CAC를 방문했으며, 그의 ‘매일 묵상’을 읽어왔습니다. 저의 가톨릭 정체성은 더욱 깊어졌고,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방식에 축복처럼 작용하고 있습니다. — Bill M. References /우리 공동체 이야기 수십 년 전, 제가 가톨릭 신앙 안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리처드 로어의 『아담의 귀환』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그의 많은 책을 읽었고, CAC를 방문했으며, 그의 ‘매일 묵상’을 읽어왔습니다. 저의 가톨릭 정체성은 더욱 깊어졌고,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방식에 축복처럼 작용하고 있습니다. — Bill M. References [1] Howard Zinn, 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 A Personal History of Our Times (Beacon Press, 1994), 208. [2] Richard Rohr, A Lever and a Place to Stand: The Contemplative Stance, the Active Prayer (Hidden Spring, 2011), 104; Brian D. McLaren, Life After Doom: Wisdom and Courage for a World Falling Apart (St. Martin’s Essentials, 2024), 84–85. [3] Sallie McFague, A New Climate for Theology: God, the World, and Global Warming (Fortress Press, 2008), 169, 171.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yu Ha,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희망과 우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시간에 연결되고자 하는 깊은 열망으로 손을 뻗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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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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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27 04:43
- 백인대장의 믿음을 톺아보고,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는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마태오복음은 어제와 오늘 주님의 놀라운 치유를 끌어낸 위대한 신앙의 두 모범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어제는 나병환자 자신이 치유되는 얘기이고, 오늘은 백인대장의 종이 치유되는 얘기인데 공통점은 그들의 위대하고도 완전한 믿음입니다.
이들의 믿음에 의심이란 전혀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데 우리가 톺아봐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이 백인대장이 이방인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위해 그것도 종의 치유를 위해 그렇게 진심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백인대장의 두 가지 점을 톺아보고 반성도 해야 합니다. 첫째는 백인대장의 완전한 믿음인데 말씀에 대한 완전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 말을 믿냐? 또는 그 말을 믿냐고 합니다. 그 사람을 믿지 못하든지 그가 한 말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지 못하는 주님을 믿는 것이고, 주님께서는 한 말씀으로도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주님을 믿더라도 이 정도로 믿지 못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오셔서 손을 얹어주셔야 나을 것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매일 미사를 드릴 때 성체를 나눠주며 특히 병자에게 나눠주며 백인대장의 믿음을 생각하며 나눠줍니다.
우리는 성체를 영하기 전에 사제가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참여하는 이는 복되도다!” 하면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하고 오늘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으로 답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제 영혼이 곧 나으리라고 조금 바꿔 말하지만 옛날에는 제 영혼이 아니라 제가 곧 나으리라고 한 적이 있고 백인대장도 자기 종이 곧 나을 것이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지요.
우리는 이런 믿음으로 성체를 영합니까? 이 성체로 내 육신과 영혼이 모두 치유되리라는 믿음으로 영합니까?
또 우리는 이웃의 치유를 위해 이렇게 진심으로 기도하고 주님의 치유를 받도록 이렇게 발 벗고 행동으로 나섭니까?
혹 나나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백방으로 애쓰고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까지는 해도 주님께 데리고 가 주님의 치유를 받게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아무튼 한 마디로 백인대장의 믿음과 백인대장의 이웃 사랑을 우리는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톺아보고 돌아보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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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두려움의 신비에서 사랑의 신비로 변화되는 순례의 여정
두려움의 신비에서 사랑의 신비로 변화되는 순례의 여정
'루돌프 오토'의 종교적 경험에서 거룩함의 핵심은 두려움의 신비와 매혹의 신비를 통합하는 것입니다. 특히 복음의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두 차원이 어떻게 하나로 통합되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토가 『거룩함의 의미』에서 발견한 것은 종교적 경험의 구조였습니다. 그는 인간이 '거룩한 것,을 만날 때 먼저 그것을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반응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거룩함은 단순히 윤리적으로 선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압도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실재입니다 . 첫째, 두려움의 신비는 압도적인 하느님 앞에 자아가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의 첫 반응은 거의 예외 없이 두려움입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큰일 났구나.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라고 외칩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의 기적을 체험한 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중심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는 충격'입니다. 나보다 훨씬 크고 선하며 진실한 존재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왜곡과 한계를 보게 됩니다. 프란치스칸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내 왕국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겸손 역시 자기 비하가 아니라 진실 앞에 서는 용기입니다.
둘째, 매혹의 신비는 사랑이 두려움을 넘어서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분은 언제나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에게도, 목자들에게도, 제자들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왜일까요? 거룩함의 목적은 인간을 멀리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끌어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화는 무한히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고, 죄인의 친구가 되시며,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초월은 사랑 안에서 내재가 됩니다.
복음은 두려움에서 황홀로 향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에서는 거룩한 산에 함부로 오를 수 없습니다. 법궤를 함부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지성소에는 대사제만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성전 휘장이 찢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오십니다. 성체 안에 자신을 감추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십니다. 즉, 거룩함은 더 이상 접근 금지 구역이 아니라 사랑의 품이 됩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두 번째를 더욱 강조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체험한 방식은 흥미롭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위대함 때문에 자신을 낮추었지만, 그보다 더 크게 감동한 것은 그토록 높으신 분이 이토록 낮아지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탄의 구유를 사랑했고, 십자가를 사랑했고, 성체를 사랑했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하느님의 권능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분이 되셨다." 여기에서 프란치스칸의 내적 가난이 시작됩니다. 나도 그 사랑을 믿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두려운 하느님에서 황홀한 하느님으로 가는 완전한 일치입니다. 삼위일체는 무한한 초월성을 지닌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관계적 사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를 완전히 내어주시는 사랑의 순환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거룩함은 단순한 권능이 아니라 관계의 거룩함입니다. 이 거룩함 앞에서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우리의 이기심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매혹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우리를 심판하기 전에 먼저 받아들이고,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관계 안에서 경험하는 거룩한 황홀경은 특별한 신비 체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관계 속에서 자주 찾아옵니다. 누군가가 끝까지 나를 용서해 줄 때, 나는 부끄러움과 감사를 동시에 느낍니다. 내 잘못을 있는 그대로 알면서도 사랑해 주는 사람 앞에서는 숨고 싶어집니다. 그러면서도 그 품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성체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이 고백은 압도적인 하느님을 떠 올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이것이 두려움 안에서도 황홀한 하느님을 만납니다. 거룩함은 나를 밀어내지 않고 내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결국 복음은 '두려운 하느님'을 '친밀한 하느님'으로 바꾸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려울 만큼 거룩하신 분이 바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은 두려움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두려움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거룩함 앞에서 내가 작아짐을 배우고, 마침내 그 거룩하신 분이 나보다 먼저 나를 사랑하셨음을 깨달으며, 그 사랑 안에서 자신도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때 거룩함은 더 이상 성전 안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의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용서와 기다림, 겸손과 섬김으로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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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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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깊은 신앙과 지극한 겸손, 따뜻한 인간미의 소유자, 백인대장!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 탄 인간, 접촉하거나 상종하거나 말을 섞지 말아야 할 존재로 완전 개무시하면서, 마주치면 재수 옴 붙었다며 욕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나병 환자들, 세리와 죄인들,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선민의식이 유달리 강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혈주의를 고수하면서 다른 민족들과 피가 섞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으며, 이방인들을 개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으며,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중죄로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물 한잔 달라는 예수님의 청을 의아하게 여긴 사마리아 여인의 태도라든지, 딸의 치유를 청하는 이방인 여인을 향해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예수님의 의아한 발언 등이 그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세상 착한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굳이 이방인인 자신의 집까지 오실 필요가 없겠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백인대장의 깍듯한 예의와 배려심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백인대장의 넘치는 인간미는 놀랄 정도입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치유, 아니면 부인이나 아들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을 보십시오. 자신의 소유물이었던 종의 치유를 간절히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마태오 복음 8장 6절)
당시 종이나 노예는 정식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주인의 소유물로서 가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값도 나가고, 좋은 가격에 매매도 할 수 있었지만, 늙고 병든 노예는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보통 주인들은 노예가 병들면 병들었는가보다, 죽으면 죽는가 보다 하고 그냥 방치했습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을 보십시오. 자신의 아들보다 더 끔찍이 여겼습니다. 중풍으로 고생하는 종의 치유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백인대장의 예수님을 향한 깊은 믿음과 한없는 겸손을 보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메시아성, 전지전능하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굳이 현장에 가시지 않더라도 원거리에서 치유할 수 있는 원격치유능력 지니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깊은 신앙과 지극한 겸손, 따뜻한 인간미에 감동받으신 예수님께서 아주 흡족해 하시며 그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세례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수도 생활이나 사제생활의 연륜이 길다고 뻐길거 하나도 없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순교자 집안, 구교우 집안 출신이라고 어깨에 힘줄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입니다. 잔뜩 어깨에 힘준 사람들,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크게 뒤통수를 치시고, 그를 곤두박질치게 만드십니다. 깊은 바닥 체험을 통해 거듭나게 하십니다.
반면에 한사코 낮은 곳을 찾는 겸손한 사람들,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 나는 큰 죄인이라고 가슴 치는 사람은 가엾이 보시고, 총애하시고 위로 위로 높이 끌어 올려주십니다. 나자렛의 소녀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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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마태 8,5-13)> 1)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병’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예수님의 명령에 ‘병’이 복종하고 병자에게서 떠날 것이고, 그러면 병자가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분”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과 같은 말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신앙고백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이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그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은 최초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으로 믿고 있는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잘 고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병을 포함해서 온갖 고통과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곧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하느님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약속입니다. 2) 그런데 그 백인대장은 어떻게 그 믿음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사도들의 경우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 믿음에 도달했습니다. 백인대장이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는지, 무슨 계시를 받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어떻든 제자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닌 사람이 그렇게 최초로 그런 신앙고백을 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그를 선택하셨고 은총을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일은 필요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3) 그 백인대장이 아들이나 가족도 아니고, 친척이나 친구도 아닌, ‘종’을 위해서 간청했기 때문에, 그를 자비롭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즉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그 종에게(루카 7,2) 왜 자유를 주지 않고 노예로 데리고 있었을까? 정말로 사랑한다면 해방시켜 주고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사고방식, 관습, 문화 등의 한계입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판단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부분은, 당시의 사고방식이나 관습이나 문화 등을 기준으로 해도 많이 아쉬운 점입니다. 그리고 그 종이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지, 또 믿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백인대장의 믿음이 핵심 주제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청을 들어 주셨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 종이 백인대장의 종이기 때문에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종도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고쳐 주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노예’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유인이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17).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요한 15,14-15ㄱ).” 라는 말씀을, 노예제도를 폐지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4) 11절-12절의 말씀은,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경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21장과 루카복음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4,24).”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지만, 구원받기를 원하고, 노력하는 사람만 구원받게 됩니다. 원하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
26062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는 오늘 백인대장의 동정심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있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 백인대장을 만나봅시다. 그는 "century(센추리)", 즉 백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장교였습니다. 군대는 명령을 주고받는 질서 정연한 조직이며, 계급과 임무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군대의 언어는 명확하고 단호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명확성과 효율성에 매력을 느끼며, 사회 전체에까지 그것을 강요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파시즘"이라 부릅니다. "파시즘"이라는 말은 이탈리아어 fascio(묶음)에서 왔는데,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들은 행진할 때 한 묶음의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기계처럼 행진했습니다. 이는 흩어진 나뭇가지보다 묶음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군대는 겉으로는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사회 안에서 가장 많은 낭비를 일으키는 조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군대 문화"라는 것이 사회 안에 깊이 침투해 있을 때 우리는 인간적인 면모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독재 정권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군대가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왜 군인들은 그냥 걷지 않고 "행진"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기계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며, 보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례 자세를 취한 병사는 스스로를 '병사-사물'로 만들며, 그의 눈은 규정에 따라 고정된 지점을 바라볼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라고요...
획일성은 인위적으로 만든 사물에는 어울리지만,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와 국가 안에서 "획일성"과 겉모습의 "효율성"을 숭배하는 태도를 식별력 있게 경계해야 합니다. 참된 생명력과 창조성은 오히려 일상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고, 일상의 흐름, 즉 자연스러움은 획일성과 효율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피조물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존재의 사슬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을 위해서만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이 자연스러움이 어떤 경우 우리에게 불편함을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이비 종교는 "효력과 효율의 사이비 종교"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23년 [세계 병자의 날]을 앞두고 이런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병과 연약함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만능주의적 '효율성의 문화'에 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병을 맞이할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을 인정하는 것조차 어려워합니다. 우리의 나약함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만능주의적 효율성의 문화는 그것을 덮어두려 하며, 인간적 나약함을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깨지기 쉬운 존재이며, 자비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 자비는 멈추어 서서 다가가고, 치유하며,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사랑입니다. 병자들의 처지는 무관심을 뚫고 들어와, 마치 형제자매가 없는 듯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라고요. 또한 교황 프란치스코는 귀천하시기 얼마 전인 2025년 1월에 인공지능(AI)와 관련하여서도 다음과 같이 경고하 바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기술관료적 패러다임(technocratic paradigm)'을 강화하는 데 사용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 패러다임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오직 기술적 수단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과 형제애는 효율성 추구에 종속되곤 합니다. 마치 현실과 선, 진리가 기술과 경제 권력에서 본질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오 14세 교황님은 아예 이 인공지능(AI)과 관련한 '교황 회칙' [고귀한 인류: Magnifica Humanitas]를 반포하셨는데, 한 부분을 인용하면 이러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위엄 안에서 창조하신 인류는 오늘 중대한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새로운 바벨탑을 쌓을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과 인류가 함께 거하는 도성을 세울 것인가. 각 세대는 자기 시대를 형성하고, 역사를 모든 이의 존엄이 보장되고 정의가 증진되며 형제애가 가능해지는 자리로 이끌어야 하는 과제를 물려받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시대는 비인간적이고 더 불의한 세상을 만들어낼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인류가 자기 참된 정체성을 훼손할 위험에 처할 때마다, 우리는 육화하신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오직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 안에서만 인간의 신비가 참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위엄을 지닌 인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며, 우리 각자가 충만함을 향해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십니다."(서문 1항) 그런데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종교 관례에 따르면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면 '부정'해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던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군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은 기계를 숭배하는 듯한 모습의 군대 지휘자였지만, 그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심어주신 동정심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있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초기 교회의 한 문헌은 이렇게 전합니다. "이 백인대장은 이방인의 첫 열매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적도, 나병환자가 치유되는 것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치유의 소식을 들었을 뿐인데, 그는 들은 것 이상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율법이나 예언서를 읽은 적도 없었고, 그리스도의 기적을 직접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께 나아가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며 주님께 자기 종을 치유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우리는 대개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으로만 신앙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이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솟아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느님은 놀라움의 하느님이시며, 은총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순수한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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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7.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https://story.kakao.com/_0TX0X5 또는 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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