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문학 49호 권두에세이- 건전한 시 정신/ 전문수 gnbook|2013.06.02 14:11
권두에세이
건전한 시 정신
전문수 ● 본지 주간, 문학평론가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란 캐치프레이즈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육체와 정신은 상호 보완적이어서 분리가 불가능하다고 보기에 당연하게 여겨 모두 건강에 유의한다. 똑같은 방식으로 시 정신(문학 정신)이라는 문제를 이에 유비한다면 건전한 시 정신과 건강한 시의 육체관계도 이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굳이 시의 육체라는 생소한 용어를 쓰는 것은 인간의 정신 기능이나 작용 능력은 육체의 힘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소유하는 정신적 활동과 여러 정신적 가치들의 실제는 정작 인간의 육체에서 나오거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문학뿐 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정신적 가치들도 같을 것이다. 즉 가치 있는 정신들은 삶 속의 여러 건강한 사물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실은 그간 우리는 인간의 오감이 이루어내는 온갖 체험들이 인간을 위요한 수많은 사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 왔다. 다시 말하면 바로 시 정신의 몸통들, 시 정신의 육체들을 잘 알아 온 셈이다.
시 정신의 육체는 개체의 건강한 육체가 아니라 건강한 천지의 삼라만상과 인간의 구체적 삶의 서사적 행위들이 된다. 따라서 건전한 시 정신은 건강한 삶의 체험이라는 육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한 충고를 우리는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하면 건전한 시 정신의 건강한 몸통은 모든 인간 체험의 바탕에 깔려있는 높은 인간적 가치를 잃지 않은 몸통이다. 진리에 대한 경외와 신뢰, 가치 있는 윤리에 대한 실천, 정의와 정직에 대한 신념, 탐욕에 대한 절제와 수양 등등 인간적 여러 덕목들을 기초로 한 육체가 바른 시의 정신의 몸통이다.
시 정신은 속된 말로 시정잡배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속물적 행위들이나 세속적 가치의 몸통에서는 도저히 추구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고상한 정신을 요구하고 모든 일반 보통사람들의 적당주의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다. 시 정신은 최고의 지성과 덕성과 감성의 융합체이다. 성직자적 삶의 인격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 모든 시 작품들은 바람직한 인간 삶의 높은 구경적 경지를 추구하는 내용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탐욕을 조장하고, 증오와 불의를 권장하고 무지를 찬양하는 그런 문학작품은 없다.
요즘 세상이 상상 이상으로 변한 것을 잘 알면서 이런 쾌쾌 묵은 삼강오륜 같은 순진한 문학 타령을 하는 사람, 현대판 돈키호테라고 질타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이런 질타를 예상하지만 현하 한국 문단이 소위 중앙문단을 비롯해서 각 지역 문단 등을 막론하고 진정한 문인 집단인가 하는 회의에 빠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이지만 소위 문인이라는 사람들이 시정잡배 못지 않은 감투욕에 차 있고 개인 탐욕에 빠지고 정의가 없고 순수가 없어 문인 아닌 사람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들고 나오는 무기가 무균질의 순결주의 문학정신이 아니겠는가 싶다. 작품 자체에만 시정신이 살아 있으면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괴변은 시 제작 기계가 있으면 가능할 것이다.
건강한 정신이 바탕이 된 시적 체험, 즉 시적 육체를 가졌을 때 건전한 시 정신이 살아있는 시작품이 나올 것이다. 비록 이름도 없는 산골에 묻혀 있더라도 우리는 이런 시와 시인을 존경하고 경외한다.
한그루의 어떤 나무가 바로 시 정신의 몸체라고 비유해 본다. 푸른 하늘도 시의 몸체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시 정신의 건전한 몸체다. 더 이상 순수한 몸체가 이보다 더 좋겠는가. 이들 몸체들은 어느 것 하나 자연의 진리를 그르치는 일이 없다. 순수를 잃는 일이 없다. 탐욕이 전혀 없다. 정작 어느 시인이 나무 한그루보다 못한 시 정신의 몸통을 갖추었다면 이것이 참 아이러니 한 것 아닌가 싶다.
시 정신은 진부하고 거친 일상적 인간 세계를 한그루 나무 세계로, 푸른 하늘로 은유해서 등가 가치로 확대하고 의미를 변화시키는 창조 정신이다. 비정한 인간들의 탐욕과 증오와 질투와 권모술수를 수정시키기 위해서 성직자처럼 나선 시인의 창조 정신이다. 그러자면 시인 자신의 체험들을 가장 순수하고 정결한 건강성으로 시의 몸체를 길러야 한다. 즉 시인의 다양한 삶의 체험이 높은 수준의 가치로 고양되어야 한다.
어떤 글이든 글은 일차적으로, 글 쓰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요 참회의 눈물이라고 봐야 한다. 남에게 쓴 글을 보이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스스로 자기 생각을 들키는 것이다. 요즈음 나는 삶에 대한 무슨 처절한 절박감 같은 것을 자주 느낀다. 이 글이 내 넋두리일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의 끝이 죽음이고 참 깨끗한 없음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알게 될 때, 살아 있는 현실의 무지한 미망을 벗을 수 있을 같다. 탐욕도, 증오도, 이기도, 출세의 허상도 우쭐대는 자기과시도 전혀 진실이 아니고 다만 자기가 자기를 기만하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잘 꾸며 입은 옷이나 얼굴화장은 자기의 만족이지 타인은 만족할 수가 없다. 옆을 지나가는 낯선 누구도 진정으로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가 나를 잘 봐 줄 걸로 생각하는 자신의 착각, 자기 최면일 뿐이다.
다시 찾아오는 새봄을 깨끗하게 맞고 싶다. 건강한 시의 육체에 건전한 시 정신이 깃든 글한 편 쓰고 싶다. 참으로 간절하게 건전한 삶을 이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