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산법회 설교
가수 인순이 이야기
1. 이끄는 말
인순이를 아시나요
인순이의 이름은 김인순이랍니다.
인순이는 흑인 주한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가수입니다. 그녀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떠났고 그렇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인순이는 1957년생(나이)이랍니다.
1950년 6.25가 있었고 1953년에 휴전이 되었으며
동두천 의정부 등지에는 많은 미군들이 많았습니다.
이태원도 미군들이 주 고객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렵고
미군들과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미군들과 함께 다니는 여인들을 보면
보통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자녀들을 보면 혼혈아라고 하였습니다.
인순이는 흑인 미국 군인과 살다가 낳은 아이이고
제대하거나 전출가면 그만인 것이었습니다.
이러면 닭 쫓던 개라고 가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고
가버리고 나면 경제적 궁핍
인순이는 중학교도 겨우 나왔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학력위조
우리는 보통 대학 학력을 위조하는데 인순이는 고등학교를 이조해
그 시대 상황을 안 사람들은 인순이를 이해했다고
예) 요즘 수상 위조, 학력위조가 많은데
죄송하다고 진솔하게 참회면 어떨까 생각을 해 봅니다.
인순이도 자신과 어머니를 남겨두고 미국으로 가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아울러서, 외모로 인한 차별, 정체성 혼란, 홀어머니의 딸로서 자라온 슬픔으로 얼룩져 있답니다.
인순이는 가수 데뷔 이후에도 티비에 출연할 때면 특유의 곱슬머리를 가려야하는 등 많은 차별로 인한 상처를 받아왔답니다.
인순이는 어린시절에 미국에 있는 아버지와 몇번 편지를 주고받았고, 12살 무렵에는 아버지의 미국행 제안을 받았답니다. 그렇지만 인순이는 "혼자 남을 어머니를 생각해 거절했던 것이다. 이게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의 삶은 고될 거라고 짐작했던 것이지만, 저 때문에 부모를 다 힘들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며 어린 나이에도 성숙했던 속내를 털어놓았답니다. 쉽지 않았던 인생만큼이나 일찍 철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순이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위해 다문화 대안학교(중학교)를 설립한 뒤에 7년째 운영중이라고 밝혔답니다. 인순이는 "몇 명의 아이들에게라도 힘을 주고싶다고 생각해 시작했던 것인데, 기적처럼 커졌던 것이다.
인순이는 한국사람과 결혼을 해서 딸을 낳고
인순이의 딸은 미국 스탠포드대를 수석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했었다. 그런데, 창업하겠다고 보따리 싸서 들어왔다. 사업가로 변신했던 것이다"며 근황을 전했답니다.
2. 카아네기홀 공연
그녀는 불행한 환경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늘 밝고 당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사회자가 그이 유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혼혈아라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극복하고 누구보다 밝고 당당하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내 삶의 배후에 용서와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이지요.“
인순이에게 물었답니다.
사회자가 "인생의 최고 절정의 순간은 미국 카네기홀 공연이었나요?"라고 묻자 그녀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뉴욕 카네기홀 공연 후 바로 이어서 가진 워싱턴 국방성 공연이 제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그 공연 전에 그는 특별히 그 자리에 6.25 전쟁 참전 용사들을 많이 참여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련된 자리에서, 장내에 가득한 참전 용사들 앞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내 아버지이시고 나는 여러분의 딸입니다. 나와 같은 딸을 둔 것 때문에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난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절대 불행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난 이 말을 하려고 여기에 왔습니다. 나의 아버지들이여!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가수 인순이 씨는 그 순간이 절정이었다고 했습니다.
잠깐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여인을 장난감처럼 여기고
아이를 낳고 갈 때는 그냥 떠나버리는 무심한 사람들.
예) 웃기네 – 베트남에서
자신의 운명을 애꿎은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그 사람들을 향해 용서와 사랑, 그리고 축복을 듬뿍 주었던 것입니다. 내게 해를 끼치고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수많은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선택은 단 두 가지입니다. 내가 보복하느냐, 아니면 용서하느냐입니다. 내게 상식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을 가한 사람을 용서하기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다고 분노하여 보복하면, 나의 감정과 상처가 낫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노예가 되어 또 다른 가해자가 되고 맙니다.
모든 생각과 선택은 나의 몫이고 나의 책임입니다. 나는 부모와 유전인자와 집안 환경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주어진 이후의 삶과 환경의 모든 것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불행이냐, 감사냐?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의심이냐, 확신이냐? 축복이냐, 저주냐? 용서할 것이냐 원망할 것이냐? 이 모든 것은 나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는 날 아파트 몇 채를 남겼느냐가 우리 인생의 평가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을 만난 것이 복이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 당신 때문에 도움을 받았다고, 당신의 영향을 받아 오늘이 있게 되었다고 눈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것이 우리 삶의 결산일 것입니다.
당신이 이 땅을 떠나더라도 당신 삶의 정신과 사역을 감사하고 축복하며, 그 일을 계속 이어갈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서 축복을 선택한 것입니다.
4. 인순이 "나 닮은 딸, 상처 덜 받게 미국서 출산“
원정출산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 원정가서 낳는 것을 말한다.
왜 원정을 가느냐 하면 시민권을 받기 위해서 그렇다.
국민을 정할 때 그 나라에서 난 사람이 국민이라고 하는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 한국은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이 난 아이를 우리 국민으로 하고 있다.
한국사람이 미국에 가서 아이를 나면 이중국적이 되는 것이다.
미국이 선진국일 때 미국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한다.
원정출산이 비판을 받을 때 인순이는
인순이의 자녀로는 외동딸이 있는데 원정출산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만약에 딸이 자신을 닮아서 흑인 혼혈 외모가 두드러지게 태어난다면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 이민보내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한국에서 인생을 보내야 하며 한국 가수로 쭉 살아야 하는데 만약 딸과 헤어질 수 없다면, 딸에게 외국 시민권이라도 있어서 외국인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학교에서 자신이 받았던 차별과 놀림을 조금이라도 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출산 직후에 귀국하여 라디오 출연해서 자신이 원정출산을 하고 왔다고 “마음껏 욕해 달라”고 대중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했지만 심지어 9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흑인 혼혈에 대한 사회의 차별 의식은 어마어마했기에 대중들에게 그다지 비난받지는 않았다. 출산 이후에 딸의 외모가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다행히 딸과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으며 딸을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키웠다고 하였다.
인순이 씨는 “난 이민 갈 생각이 없고 한국에서 뼈를 묻을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한국에서 마음 상하지 않고 자라길 바랐다”라며 “딸을 한국에서 외국인학교에 보내면 상처를 덜 받지 않을까 해서 미국에서 출산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사는 전했다.
5. 맺음말
인순이는 아버지를 용서했습니다.
어찌보면 다 부르는 아버지를 불러보지도 못하고
편모 슬하에서 쪼들리는 삶을 살아야 했고
외모로 인해서 많은 따돌림을 받았는데
원망을 해도 엄청 했어야 하는데
용서를 선택한 인순이를
원정출산을 했다는 사회의 비판앞에서
이유를 달지 않고
숨기려하지 않고
진실한 참회를 한 인순이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지 않고
같이 눈물을 흘려주었다.
한 장남은 달력이
금년의 끝자락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
기쁨과 보람도 있었지만
아쉬움과 미안함도 있었습니다.
참회와 용서로
한해를 정리하면서
법신불 사은전에 은혜와 감사로 합장을 합니다.
한 해를 마치고
새해를 맞기 위해서
용서를 빌고 용서해 주기를 원합니다.
참고자료
인순이는 혼렬 연애인
인순이 씨는 ‘핸디 김’ 등 혼혈 연예인 1세대에 이어 윤수일, 박일준 씨와 함께 2세대 그룹을 형성했지만,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유일한 2세대 혼혈 가수다.
다니엘 헤니 등 이국적 외모의 연예인들이 큰 거부감 없이 인기를 얻고 있는 요즘과 달리 과거 인순이 씨가 걸어온 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우리 혼혈인들은 150% 노력을 해도 효과는 90%밖에 안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2등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온 게 사실”이라며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 의무감이 늘 존재한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도 연습벌레처럼 연습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처음 방송할 때 곱슬머리라는 이유로 출연을 거부당한 적이 있다. 그래서 모자를 쓰거나 머플러로 묶는 식으로 나 자신을 감춰야 했다”라고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회상했다.
한편 그는 최근 이국적 용모를 지닌 혼혈 연예인들이 대거 등장해 인기를 끄는 것과 관련, “시간이 지나면서 외국 사람에 대한 이질감이 많이 줄어들어 혼혈 연예인에 대한 호감도 상승 분위기에 접어든 것 같다”라면서도 “하지만 호감은 여전히 다니엘 헤니나 나 같은 ‘연예인’에 국한될 뿐”이라고 이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중요한 건 혼혈 사회에서는 ‘돈’에 대한 보상보다 ‘성공’모델이 더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라며 “그래서인지 아이들 앞에서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고, 더 조심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라고 말했다고 기사는 전했다.
2. 인순이 학력
인순이의 학력은 그동안 포털사이트 등 각종 프로필에 경기도 포천고등학교의 전신인 포천 여자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기재돼 왔으나 실제 경기도 연천 청산중학교가 최종 학력인 것으로 확인됐다.
4일 현재 네이버 등 일부 포털사이트에는 인순이의 학력이 청산 중으로 수정된 상태다.
인순이의 측근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인순이 씨가 집안 사정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사실은 맞다”라며 “그러나 이 사실을 공개하기 전까지 주위 사람들 대부분이 알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주로 대학 학력이 문제가 됐던 학위 위조 논란에서 인순이처럼 고등학교 졸업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3. 다문화학교(해밀학교)
강원도 홍천군에 위치한 다문화학교(해밀학교)
대안학교 설립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인순이는...
"2010년 우연히 라디오를 듣다 다문화 아이들의
고등학교 졸업률이 28%라는 사실을 접했다.
'아,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인가' 싶었다" 라고
말을 시작하네요~
"내가 이들과 똑같은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정체성을
찾아주고 싶었다. 난 스스로 사랑하는 걸 배우기까지
너무 힘들게 흔들렸다. 내가 그들을 덜 흔들리게,
지름길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라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인순이는 다문화학교를 설립했고
해당 학교는 4월 11일 개교했다고 합니다.
인순이는 이 곳에 직접 김장김치를 담아주고 책상까지
나르는 등 몸소 학교를 짓는데 일조했다고 하네요.
인순이는 "그 아이들 인생길 옆에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얘기해주고, 고민을 해주도록 하겠다" 라고 ....
4. 인순이의 역사
인순이는 흑인 주한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프리카계 혼혈 한국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국에서 인순이가 태어나고 나 몰라라 식으로 대처하고 떠났기 때문에 인순이는 아버지를 본 적도 없다고 한다.[15] 12살 때 미국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미국행을 제안받았지만 혼자 남을 어머니를 생각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몇번 편지를 주고 받은 적이 있지만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고 한다. 기사 당시 홀어머니 혼자 키우는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듯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했으며 인순이는 힘겹게 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선 매우 나아졌지만 아직도 혼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마당에, 196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혼혈, 그것도 흑인 혼혈이고, 아버지가 없는 미혼모의 딸(인순이)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매우 좋지 않았다.[16] 어렸을 적 뿐만이 아니라 가수로 성공한 이후에도 이러한 차별은 은연중 따라다녔다. 결국 이는 인순이의 인생에 커다란 상처로 남게 되었다. 익히 알려진 사실 중 하나지만 인순이가 과거 1970년대 희자매로 활동하던 시절 흑인 혼혈 특유의 곱슬머리 때문에 방송에 나올 때에는 머리에 천을 둘러야 했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까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정체성 혼란에 시달렸다고 하였다. 기사 방송에서 말하길 자신의 집(home, 고향)은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그 사이에 있는 바다(태평양)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현재에는 자신은 한국인이며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혼혈로 자라면서 학창 시절이 힘들었기 때문에 강원도 홍천군에 다문화 대안학교인 해밀학교를 세웠으며, 대한민국 교육부에게 정식 인가받은 중학교이다.
5. 가수로서의 생애[편집]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터라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생계 활동을 시작해야 했다. 그때 김완선의 이모이자 프로듀서로 잘 알려진 한백희의 눈에 들어 가수 생활을 시작한다.
먼저 가수 한백희의 무대에서 백댄서로 일하다가 우연히 인순이의 노래 실력을 본 한백희가 자기 대신 인순이를 무대에 세우며 가수로서의 길을 시작했다. 인순이의 고백에 따르면 '연습생도 뭣도 아니었고[18] 그저 한백희를 따라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시작한 가수 생활'이었다고 한다.
1978년 3인조 걸그룹 희자매의 멤버로 데뷔했다.
6. 카네기 홀(Carnegie Hall)
대부호이자 자선 사업가였던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가 1890년에 건립한 콘서트 홀이다. 철근이 아닌 석재로만 짓고 건물 벽체를 매우 두텁게 만들어 음향 시스템이 뛰어나다.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한번쯤 콘서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카네기홀은 전세계 음악가들이 그리는 ‘꿈의 무대’이다.
카네기 홀의 원래 이름은 지금도 건물 외벽에 쓰여 있듯이 ‘앤드류에 의해 설립된 뮤직 홀(Music Hall Founded by Andrew Carnegie)’이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온 뮤지션들은 이 뮤직 홀을 보고 클래식 콘서트 홀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이 술을 마시면서 대중적인 음악을 즐기는 ‘보드빌(vaudeville)’ 무대를 떠올렸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을 캐주얼하게 ‘카네기 홀’로 줄여 부르기로 했다.
뉴욕 필하모니가 1962년까지 카네기 홀에 상주했으나 현재는 링컨 센터에 있으며 공연장으로만 쓰인다.
7. 인순이 '아버지'
그녀의 '아버지'라는 곡은 바로 그 꺼내기만 해도 아픔이 되는
그녀의 트라우마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가수다'의 첫무대에서 꺼내든
이 곡은 가수로서의
그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곡이면서,
동시에 아마도 어쩌면
그녀가 불렀던 그 어떤 곡보다 어려운 곡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노래 시작 전에 읊조렸던 그 말,
'커다란 산'이 '야트막한 둔덕'이 되었다는 그 말은
아마도 모든 아버지를 가진 이들의 마음일 것이다.
물론 이 의미도 이중적이다.
'커다란 산'은 든든함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아픔으로 가진 이들에게는 넘어설 수 없는
'막막함'을 뜻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야트막한 둔덕'이 되었다는 인순이의 진술은 이제 그 고통을
넘어 트라우마마저 관조할 수 있는 자신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녀는 노래 첫머리에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다.
"부디 사랑한다는 말을 과거형으로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하지
못한 그 말만을 뜻하는 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부모가 자식에게
하지 않은 그 말이기도 할 것이니까.
그러니 이제 사랑한다는 말은
모두에게 현재진행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카네기홀에서 두 번씩이나 공연을 가진 인순이는
그 두 번째 무대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모셔놓고
"여러분은 모두 제 아버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8. 아버지 가사
한 걸음도 다가 설 수 없었던 내 마음은
알아 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래 왔는지
눈물이 말해 준다
점점 멀어져 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아버지)가 보고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 했었다
제발 내 얘길 들어주세요 시간이 필요해요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아버지)가 보고싶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담아두기만 했던
그래 내가 사랑 했었다
긴 시간이 지나도 말하지 못했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9. 원정 출산
원정 출산(遠征出産)은 문자적으로 현재의 거주지가 아닌 먼 외국에 가서 아이를 출산하는 것을 말하나 특히 자신의 자녀의 외국 국적 취득을 위해 해외에서 아이를 낳는 것을 가리킬 때가 많다. 원정과 출산의 합성어이며 단지 출산의 목적을 위하여 산모가 단기간 대상국을 방문하여 출산하는 사례만을 지칭하며 유학이나 취업등 장기간 거주중에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는 원정 출산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대상이 되는 나라는 출산하면 시민권이나 국적이 부여되는 속지주의를 행하는 미국, 캐나다 등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대략 매년 5000 여명의 아이들이 미국에서 원정출산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전체 출산아의 약 1%에 해당하는 숫자이며, 또한 이것은 원정출산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업체에서 추정하는 숫자이므로 이런 기관들을 이용하지않고 출산하는 아이들을 합치면 숫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1] 일본에서는 일본 내에서 저출산으로 인해 산부인과가 줄어들자 대한민국으로 원정 출산을 한다.[2] 중국의 경우,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원정 출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3]
현재 한국인이 가장 원정출산을 많이 가는 국가는 출생지주의 시민권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미국과 캐나다이다. 뉴질랜드 역시 2006년 국적법 개정 이전까지는 원정출산을 많이 갔던 국가 중 하나였다.
2018년 11월 도널드 트럼프가 미 수정헌법 개헌을 주장하며 속지주의 시민권 부여 정책을 폐지할 것을 검토하였으나 헌법 개정은 국민투표 외에 행정명령으로는 개정할 수 없으므로 이 정책은 보류되었다. 대신 2020년 1월부터 ESTA를 비롯한 미국 비자 심사 과정에서 여성들에게 임신 여부에 관련된 질문을 의무화하기로 의결하였다. 앞으로 미국의 외교공관에서 비자 인터뷰를 진행할 때 영사는 재량으로 여성 신청자들에게 임신 여부를 묻고, 이에 따라 비자 발급을 거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