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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축(安軸, 1282~1348)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 근재(謹齋) 시호 문정(文貞)
근재집 제1권 / 시(詩)
산삼을 탄식하다 산삼 조공의 폐단이 심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蔘歎 蔘貢多弊故云〕
신농씨가 책을 지어 풀이름 논하기를 / 神農著書論草名
풀 중에 나삼의 약효가 가장 영험하다 하였지 / 草中羅蔘藥最精
한 뿌리 세 가지에 다섯 잎이 피고 / 一根三枝開五葉
사람을 치료하는 신묘한 효능 다 평하기 어렵네 / 理人神效難具評
해마다 천자께 공물을 바치느라 / 年年貢獻聖天子
약국의 늙은 의원 모두 탄식하고 놀라는구나 / 藥局老醫皆嘆驚
배와 수레로 상인들 다투어 사니 / 船車商沽競求買
먼 지방에 내다 팔면 값이 비싸서라네 / 轉賣遠方價不輕
이로부터 관리들이 그 이익을 이롭게 여겨 / 從此官家利其利
해마다 기한을 정해 백성에게 거두어 가네 / 歲收編民有期程
이 물건 귀한 것은 본래부터 귀해 / 物之貴者本自貴
날 때부터 천한 여느 풀과는 다르다네 / 非如凡草賤生成
백성들 채취하러 온 골짝 돌아다니지만 / 方民採掘遍山谷
천만번을 찾아야 한 뿌리를 얻는다네 / 千搜萬索得一莖
언제나 기한에 맞게 근수를 채우나 / 何曾計日足銖兩
가시덤불 헤치느라 농부의 옷 다 해졌네 / 農衣弊盡披蓁荊
가을 벼가 비바람에 누운 이때에 / 是時秋禾臥風雨
독촉하는 아전이 두려워 제 농사일을 잊었네 / 畏吏督納忘私營
돌아와 아내 마주하고 몹시도 슬피 울면서 / 歸來對妻苦悲泣
이미 고향 버리고 떠돌아다닐 마음먹었네 / 已有棄土流亡情
천지가 사물을 내고 약의 성질 부여한 것은 / 乾坤生物賦藥性
본디 지극한 인으로 군생을 구제하려는 것인데 / 本以至仁濟群生
백성의 온갖 괴로움이 이 약초에서 나오니 / 生民一病出於藥
이 약초를 다스리는 약은 누가 만들려나 / 理藥之藥其誰行
뿌리를 옮겨 먼 지방에 심을 수 있다면 / 有能移根種遠方
뿌리 뽑고 종자 없애기는 다툴 일 아니네 / 括根無種非所爭
우리 백성 차라리 어리석은 백성이 될지라도 / 吾民寧作至愚民
지혜와 총명이 늘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리라 / 不須益智多聰明
[주-D001] 나삼(羅蔘) : 우리나라 인삼 중에서 영남(嶺南)에서 나는 것을 나삼이라 하고, 영동(嶺東)에서 나는 것을 산삼(山蔘), 강계(江界)에서 나는 것을 강삼(江蔘), 집에서 재배하는 것을 가삼(家蔘)이라 한다. 《心田考 3 應求漫錄》[주-D002] 신농씨(神農氏)가 …… 하였지 : 신농씨는 중국 고대의 삼황 중 한 명으로, 각종 초목의 맛을 보며 온갖 질병에 대해 처방을 제시했는데, 후세에 이를 전승하여 《신농본초(神農本草)》라는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通志 三皇紀》 하지만 이 책은 《한서》 〈예문지(藝文志)〉에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후한 시대의 고을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후한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나삼의 약효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전거를 알 수 없으며, 후대의 저작인 《본초강목(本草綱目)》이나 《신농본초경소(神農本草經疏)》에도 나삼과 관련된 언급은 없다.[주-D003] 지혜와 …… 않으리라 : 산삼의 효험은 대단히 광범위한데, 그중에는 지혜와 총명을 늘리는 약효가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신농본초경소(神農本草經疏)》 권6에 의하면, 인삼의 효능에 대해 “오장을 보호하고 정신을 편안하게 하고 혼백을 안정시키고 놀란 것을 멈추게 하고 사악한 기운을 제거하고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열어 주고 지혜를 더해 준다.〔補五臟 安精神 定魂魄 止驚悸 除邪氣 明目 開心 益智〕”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서정화 안득용 안세현 (공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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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樊巖集) 채제공(蔡濟恭)생년1720년(숙종 46)몰년1799년(정조 23)자백규(伯規)호번암(樊巖)본관평강(平康)시호문숙(文肅)특기사항오광운(吳光運), 채팽윤(蔡彭胤)에게 수학. 정범조(丁範祖), 이헌경(李獻慶), 안정복(安鼎福) 등과 교유. 청남(淸南)의 거두
樊巖先生集卷之二 / 詩○ 御定 榮恩錄 謹依御定凡例。取散見於各編者。彙成此錄。
上軫賤臣暑病。遣御醫看之。頒新羅蔘二兩。服之卽效。枕上感吟。
休道勳華濟衆難。吾王別有壽民丹。不知善養周文世。三椏能令二老安。
번암집 제2권 / 시(詩)○어정(御定) 영은록(榮恩錄) 삼가 〈어정범례(御定凡例)〉에 따라 유고의 각 편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수합하여 이 〈영은록〉을 만들었다.
상께서 천신이 더위 먹은 것을 염려하여 어의를 보내 증세를 살펴보고 신라 인삼 두 냥을 하사하였다. 그것을 복용하니 즉시 효과가 있으므로 머리맡에서 감회를 읊었다〔上軫賤臣暑病 遣御醫看之 頒新羅蔘二兩 服之卽效 枕上感吟〕
요순처럼 백성 구제 어렵다고 말 마소 / 休道勳華濟衆難
우리 임금 별다른 수민단을 지녔다네 / 吾王別有壽民丹
노인 잘 보살폈던 주 문왕 세상에서 / 不知善養周文世
인삼으로 두 노인 과연 편케 하였을까 / 三椏能令二老安
[주-D001] 수민단(壽民丹) : 백성을 병 없이 장수하게 하는 약이라는 뜻으로, 먹으면 특별한 약효가 있는 인삼, 곧 산삼을 가리킨다.[주-D002] 두 노인 : 백이(伯夷)와 강태공(姜太公)을 가리킨다. 문왕이 서백(西伯)으로 있을 때 노인을 잘 보살핀다는 소문이 났는데, 북해의 해변에 있던 백이와 동해의 해변에 있던 태공이 그 소식을 듣고 문왕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孟子 離婁上》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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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28년(1828) 사은 겸 동지 정사(謝恩兼冬至正使) 홍기섭(洪起燮)의 막비(幕裨)로 연경(燕京)에 다녀온 심전(心田) 박사호(朴思浩)의 연행 기록
心田稿[三] / 應求漫錄 / 春樹淸譚
春樹齋。卯橋庄也。與主人卯橋及雪門,曉峯,亦宜,元甫,九山,蘭雪,茶心,雲客諸人。多日從遊。拾其筆談餘紙。作春樹淸譚。
卯橋問貴國蔘產於何處。色品何者爲上。曰。產於嶺南曰羅蔘。嶺東曰山蔘。江界曰江蔘。家種曰家蔘。色則白者未必不如紅。曰。京師蔘鋪。皆以紅蔘爲上。枝長有鬚者爲老山蔘。皆貴國之蔘也。余曰。聞太行之山。有檀蔘。然乎。對。絶無而僅有。
묘교가,
“귀국의 인삼은 어디서 나며, 빛깔과 품질은 어떤 것을 상품으로 칩니까?”
하고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영남에서 나는 것을 나삼(羅蔘), 영동에서 나는 것을 산삼, 강계(江界)에서 나는 것을 강삼(江蔘), 집에서 심은 것을 가삼(家蔘)이라고 합니다. 빛깔은 흰 것[백삼]이 붉은 것[홍삼]만 못하지 않지요.”
하니, 그가 말하기를,
“북경 삼포(蔘鋪)에서는 모두 홍삼을 상품으로 치며 가지가 길고 수염이 있는 것을 늙은 산삼이라 하는데, 모두 귀국의 삼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듣건대, 태항산(太行山)에 단삼(檀蔘)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극히 귀합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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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
환재집 제5권 / 시장(謚狀) / 영의정으로 치사한 봉조하 조공의 시장〔領議政致仕奉朝賀趙公謚狀〕
공의 성은 조씨(趙氏)이고, 휘는 두순(斗淳)이고, 자는 원칠(元七)이고, 호는 심암(心庵)이다.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상조(上祖)의 휘는 잠(岑)으로 고려에서 판원사(判院事)를 지냈고, 두 대를 전하여 서운관 정(書雲觀正) 휘 의(誼)가 조선조에 들어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이 분이 휘 말생(末生)을 낳으니, 대제학을 지냈고 시호는 문강(文剛)으로 영릉(英陵 세종)조의 명신이 되었다. 그로부터 7대를 전하여 휘 존성(存性)이 지돈녕부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어 소민(昭敏)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을 스승으로 섬겼다. 이 분이 휘 계원(啓遠)을 낳았는데, 형조 판서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충정(忠靖)으로 효종과 현종 대의 명신이 되었다. 다시 두 대를 전하여 우의정을 지낸 충익공(忠翼公) 휘 태채(泰采)는 호가 이우당(二憂堂)으로 경종(景宗) 임인년(1722, 경종2)에 대저옥(懟儲獄)이 일어나자 충헌(忠獻) 김공(金公 김창집(金昌集)), 충문(忠文) 이공(李公 이이명(李頤命)), 충민(忠愍) 이공(李公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화에 연루되었으니, 세상에서 건저사대신(建儲四大臣)이라 부른다. 이 분이 휘 정빈(鼎彬)을 낳으니 음직으로 도정(都正)을 지냈고, 개제(介弟 동생)인 교관(敎官) 휘 겸빈(謙彬)의 맏아들 휘 영극(榮克)을 후사로 삼았다. 이 분이 공의 증조(曾祖)인데,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祖)의 휘는 종철(宗喆)인데, 의령 현감(宜寧縣監)을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고(考)의 휘는 진익(鎭翼)인데, 진주 목사(晉州牧使)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우의정 충헌공(忠憲公) 종악(宗岳)의 딸로 정조 병진년(1796, 정조20) 4월 7일 자시(子時)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고, 스승에게 나아가서는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에 온 마음을 기울이니, 의정공(議政公 부친)이 그 맑고 가녀린 모습을 가련히 여겨 여유를 가지고 공부하라고 권면하였다. 이에 밤마다 등불에 바구니를 씌워 의정공이 모르게 하였다. 순조 병자년(1816, 순조16)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병술년(1826, 순조26)에 황감응제(黃柑應製)에 장원하였으며, 정해년(1827, 순조27)에 문과에 합격하여 권점을 받아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에 제수되었다. 9월에 의정공의 상을 당했다. 경인년(1830, 순조30)에 6품에 올랐고, 임진년(1832, 순조32)에 통정대부, 헌종 병신년(1836, 헌종2)에 가선대부, 을사년(1845, 헌종11)에 자헌대부, 무신년(1848, 헌종14)에 정헌대부와 숭정대부, 철종 경술년(1850, 철종1)에 숭록대부, 신해년(1851, 철종2)에 보국대부, 계축년(1853, 철종4)에 우의정, 무오년(1858, 철종9)에 좌의정, 금상 갑자년(1864, 고종1)에 영의정, 을축년(1865, 고종2)에 기사(耆社)에 들어가 기사년(1869, 고종6)에 치사(致仕)하였으니, 이것이 공이 역임한 관직과 품계이다.
그리고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로는 사간과 대사헌, 옥서(玉署 홍문관)로는 부교리ㆍ응교ㆍ부제학, 은대(銀臺 승정원)로는 동부승지를 시작으로 차례로 올라 도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제조(諸曹 육조)로는 이조ㆍ호조ㆍ병조의 참의를 지냈고, 이조ㆍ호조ㆍ예조ㆍ병조ㆍ형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이조ㆍ호조ㆍ예조ㆍ형조ㆍ공조의 판서를 지냈다. 경조(京兆 한성부)로는 우윤과 판윤, 돈부(敦府 돈녕부)로는 도정과 동지사를 지내고 두 번 판사(判事)가 되었고, 추부(樞府 중추부)로는 두 번 판사가 되었고 다시 영사(領事)가 되었으며, 간간이 의정부 사인(舍人)ㆍ검상(檢詳), 장악원(掌樂院)ㆍ훈련원(訓鍊院) 정(正),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여러 차례 홍문관ㆍ예문관 제학(提學)이 되었고, 두 차례 대제학(大提學)에 제수되었고, 규장각 제학에 제수되었다. 겸직으로는 설서(說書), 사서(司書), 필선(弼善), 선전관(宣傳官), 동학 교수(東學敎授), 경연관ㆍ춘추관ㆍ의금부의 동지사(同知事)와 지사(知事), 경연관에서는 다시 영사, 의금부에서는 다시 판사가 되었고, 지실록사(知實錄事), 일강관(日講官), 특진관(特進官), 주사 당상(籌司堂上), 부도총관(副都摠管)이 되었고, 승문원ㆍ사역원ㆍ내의원ㆍ종묘서의 제거(提擧)가 되었고, 종묘ㆍ사직ㆍ남전(南殿)ㆍ비궁(閟宮)ㆍ훈국(訓局)ㆍ군감(軍監)ㆍ내의(內醫)ㆍ사역(司譯)ㆍ사복(司僕) 등은 도상(都相 도제조)으로 겸직하였다.
참여한 사업으로는 《문헌비고(文獻備考)》 찬집당상(纂輯堂上), 《정순익삼조보감(正純翼三朝寶鑑)》 찬집당상, 《철종실록(哲宗實錄)》 총재관(摠裁官), 《대전회통(大典會通)》 찬집총재관(纂輯摠裁官), 가례도감(嘉禮都監) 제조(提調)와 총호사(摠護使)를 지냈다.
봉명(奉命)으로는 문례관(問禮官), 동지 부사(冬至副使), 관반(館伴)을 지냈다. 공로로 은혜를 입은 것으로는 휘경원(徽慶園) 친제(親祭)에 대축(大祝)이 되어 6품에 올랐고, 문우묘(文祐廟) 입묘도감(入廟都監)의 도청(都廳)이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고, 순ㆍ익 양조의 어제(御製)를 봉인할 때 교정각신(校正閣臣)이 되어 가선대부에 올랐고, 익종(翼宗)의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할 때에 악장문 제술관(樂章文製述官)이 되어 정헌대부에 올랐고, 《삼조보감(三朝寶鑑)》 찬집당상이 되어 숭정대부에 올랐고, 《헌종어제(憲宗御製)》를 봉인(奉印)할 때 교정각신이 되어 숭록대부에 올랐고, 순원왕후(純元王后) 존호(尊號)를 더 올릴 때에 옥책문 제술관(玉册文製述官)이 되어 보국대부에 올랐다. 문표(文豹 무늬 있는 범 가죽)와 상사(上駟 좋은 말) 등 특별 하사를 받은 것이 23차례였다.
외직으로는 안악 군수(安岳郡守), 황해(黃海)ㆍ평안(平安) 관찰사,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를 지냈고, 두 차례 탁지부(度支府 호조)를 맡고 여덟 차례 중서성(中書省 의정부)에 들어갔으니, 여기에서 관력의 아름다움과 임무의 중대함을 볼 수 있다.
공은 충성스럽고 전통 있는 가문의 종손으로 시(詩)와 예(禮)를 익히고 효도와 우애의 근본을 길렀다. 의정공이 진주(晉州)의 관아에서 돌아가시자 천 리 길에 상여를 운구하면서 모든 절차가 정성과 예에 맞아 성신(誠信)을 다하여 후회를 남기지 않았으며, 상례의 형식과 슬픈 마음〔易戚〕이 절도에 맞았다. 여러 아우들과 유무(有無)를 함께 하여, 스스로 궁핍함을 편안히 여겼고 여러 아우들은 늘 넉넉하였다. 누이 이씨(李氏)가 과부로 지내자, 더욱 가련히 여겨 맛난 음식도 나누고 부족한 것도 잘라 주었다. 집안에 화재가 나자 3천 꿰미를 내어 집을 사서 안돈시켰고, 곤궁과 가난을 구휼하고 상례와 혼례를 도와 친척과 친구들이 공의 도움을 받았으니, 이는 공이 집에 거처하며 실제로 행한 일이다.
외직에 나가 재능을 펼칠 때에는 먼저 은혜와 신의를 베풀고 강함과 엄함으로 조절하여, 중후한 위엄으로써 백성을 거느리고 청렴과 근면으로 스스로를 단속하였다. 양도(兩道 황해도ㆍ평안도)의 관찰사가 되어 수령을 평가할 때에는 고관도 꺼리지 않았고, 바닷가 전답에 흉년이 들어 진휼의 방도를 논의할 때에 조정에서는 남쪽의 곡식을 이송하려 하였는데, 이리저리 뒤바뀌는 바람에 어느 때가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공이 결국 상소를 올려 선혜청에 납부해야 할 연안(延安)과 배천(白川)의 상정미(詳定米) 3천 7백 섬을 환용(換用)하기를 청하고, 스스로 1천여 곡(斛)을 마련하여 굶주림을 구제하여 살려낸 백성이 매우 많았다.
내직에서는 양전(兩銓 이조와 병조)을 관장하여 한미하고 지체된 인재들을 발탁하였고, 나라의 재정을 관장할 때는 재원을 맑게 다스려 봉장(封樁)을 넉넉히 채웠으며, 과거 시험을 관장하면서 선발을 정밀하고 공정히 하여 사론(士論)이 흡족해 하였다. 이것은 공이 조정에서 행한 성대한 일이었다.
연공사(年貢使)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올 때엔 중국의 물건을 가져오지 않았고, 호조에서 주조하고 남은 돈 3만 꿰미를 평소 아는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역원 제거(司譯院提擧)로 있을 때에 역관이 비단과 완상품을 진상하자 모두 내치고 받지 않았다. 이것이 공이 자신을 수양함에 엄격한 사례이다.
삼사(三事 정승)로 있을 때에는 덕이 있고 어진 이를 높이는 일을 급선무로 삼아, 선유(宣侑 제사를 올려줌)를 청하기도 하였고, 세사(世祀 영원히 제사를 올림)를 청하기도 하였으며, 절혜(節惠 시호)와 이증(貤贈 추증)을 청하기도 하였고, 자손을 녹용(錄用)하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선유(宣侑)로는 문충공(文忠公) 정 선생(鄭先生), 문경공(文敬公) 김 선생(金先生), 문순공(文純公) 이 선생(李先生), 문성공(文成公) 이 선생(李先生), 문원공(文元公) 김 선생(金先生), 문정공(文正公) 두 송 선생(宋先生)이고, 충절공(忠節公) 길재(吉再)인데, 길재는 고려 충신이다.
이증(貤贈)과 절혜(節惠)로는 태백 사현(太白四賢)인 심공 장세(沈公長世), 정공 양(鄭公瀁), 강공 흡(姜公恰), 홍공 석(洪公錫)이 있는데, 홍공 우정(洪公宇定)에게 이미 시행한 예를 따라 시호를 추증한 것이다. 고(故) 참판 이공 선(李公選), 증(贈) 참판 이공 재형(李公載亨), 증(贈) 이조 참의 김공 신겸(金公信謙), 고(故) 지평 이공 봉상(李公鳳祥), 증(贈) 도헌(都憲) 임공 성주(任公聖周), 고(故) 동추(同樞) 김공 상악(金公相岳), 고(故) 참판 이공 채(李公采)에 시호를 추증했고, 문목공(文穆公) 유숭조(柳崇祖)에게 이상(貳相 찬성)을 추증했고, 증(贈) 지평(持平) 이공 기지(李公器之)에게도 아경(亞卿)에 초증(超贈)하고 정려를 내렸다.
세사(世祀)로는 문충공(文忠公) 박공 순(朴公淳), 문충공(文忠公) 유 선생 계(兪先生棨), 문간공(文簡公) 김 선생 창협(金先生昌協), 문정공(文正公) 이 선생 재(李先生縡), 문경공(文敬公) 이공 태중(李公台重), 충정공(忠貞公) 김공 성행(金公省行), 장무공(莊武公) 신공 여철(申公汝哲), 무숙공(武肅公) 장공 붕익(張公鵬翼), 이공 홍술(李公弘述), 이공 우항(李公宇恒), 윤공 각(尹公愨), 백공 시구(白公時耈), 이공 상(李公尙), 심공 진(沈公榗), 유공 취장(柳公就章), 김공 시태(金公時泰)이다.
사손(祀孫)을 녹용한 일로는 길 충절(吉忠節), 문정공(文正公) 조 선생(趙先生), 박 문충(朴文忠), 유 문충(兪文忠), 이공 선(李公選), 문충공(文忠公) 민공 정중(閔公鼎重), 신 장무공(申莊武公), 고(故) 도헌(都憲) 공공 서린(孔公瑞麟), 참봉(參奉) 공공 덕일(孔公德一)의 자손 중에 음직으로 조용(調用)했다. 이것은 공이 풍성(風聲 풍교)을 수립하고 명교(名敎)를 격려한 사례이다.
유학을 보호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삼아, 임공 헌회(任公憲晦)가 어질다는 명성을 듣고 벼슬에 오르도록 천거하였고, 또 상소를 올려 전(前) 참봉 이항로(李恒老)를 통선(通選)의 직임에 천거하였다. 절차에 따라 후보자를 검토하여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내어 모두 선발하니, 한 가지 재능으로 이름이 나고 작은 선행을 행한 선비들은 누구나 메아리가 호응하고 그림자가 따르듯이 모여들었다. 이것은 공이 누락된 인재를 천거하고 어진 인재를 장려한 사례이다.
임술년(1862, 철종13)에 영남과 호남의 백성들이 환향(還餉 환곡(還轂)과 군향(軍餉))의 누적된 폐단에 시달리다 소요를 일으키자, 임금이 특교(特敎)를 내려 이정청(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三政)의 폐단을 함께 구제하도록 하였다. 공이 명나라 장거정(張居正)의 일조편(一條鞭)의 남긴 뜻을 인용하여, 열읍의 환향을 거두고 베푸는 법을 모두 혁파하고 일체를 전부(田賦)에서 받아들여 창고를 만들어 나누어 저장하였다가 경용(經用)에 제공토록 하고자 절목을 찬진(撰進)하였는데 계획이 세밀하였으나 끝내 시행되지 못하여 공이 늘 한스러워했다.
이 해 봄에 철종이 편지 않자, 공이 내국(內局 내의원)의 도제조로 본원에 숙직하면서 관복을 입고 단정히 앉아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대궐 안에서 급작스럽게
나삼(羅蔘)을 들이라고 명하자 공은 크게 놀라 코피를 쏟으니, 조복이 흥건히 젖었다. 들것에 실려 돌아와 한 달이 넘어서야 비로소 회복되었다.
계해년(1863, 철종14)에 임금이 아직 정양중이었는데, 공은 전직(前職)으로 진료하는 자리에 들어가 몸을 보호할 방도를 면전에서 아뢰는데, 그 말이 격렬하고 간절하였고 눈물이 철철 흐르니, 임금이 낯빛을 바꾸고 가납하였다.
고종 기사년(1869, 고종6) 봄에 질병을 이유로 휴가를 청하여 세 차례의 상소를 올리고서야 허락을 얻었다. 교지가 내리는 날에 임금이 편전으로 불러서 내찬(內饌)을 하사하고 법온(法醞)을 친히 권하며 섭섭하다는 뜻을 여러 차례 표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병이 위중하였으나, 삭망 때에 종묘를 향해 절하는 예를 폐하지 않았다. 자질(子侄)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운명은 하늘에 달렸으니, 의원도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내가 오늘 나이와 지위가 모두 높아 오직 저승명부가 이르기를 조용히 기다릴 뿐이니, 어찌 약물을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10월 8일 축시(丑時)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춘추가 75세였다.
임금이 어의를 보내 간병케 하고, 부고가 이르자 애통해 하는 하교를 내리고, 조정과 시장을 정지시키고, 예에 맞게 부의를 보내서 장례를 돕게 하였다. 이해에 윤달이 들어 발인일이 11월에 있었고, 4일 해시(亥時)에 홍주(洪州) 금정리(金井里) 오좌(午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저서에 유고(遺藁) 30권이 있으나, 아직 간행되지 않았다.
배(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대구 서씨(大邱徐氏)로 판중추부사 문정공(文貞公) 준보(俊輔)의 딸이다. 유순하고 아름다워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고, 공보다 한 살이 적었다. 열네 살에 공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를 섬김에 깊은 사랑이 있었고, 동서 사이에 비난하는 말이 없었으며, 하인들을 부림에도 은혜로운 뜻이 넘쳐났다. 남편을 공경히 섬기고 예스러운 용모를 단속하여 늙도록 변함이 없었으니, 이는 부인의 내행(內行 부인의 행실)의 아름다움인데, 이 또한 공이 집안을 바르게 단속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종자(從子) 병집(秉集)을 후사로 삼으니, 전 현령(前縣令)을 지냈다. 자식이 없자 공의 종손(從孫) 동희(同煕)를 후사로 삼았다.
공이 어려서 중주(中洲) 이 문경공(李文敬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다시 화천(華泉) 이 참판공(李參判公)에게 학업을 청하였으며, 풍고(楓皐) 김 충문공(金忠文公)의 인정을 받았다. 선진장덕(先進長德)이 큰 그릇이 될 것으로 칭찬하여 먼 장래를 기대하였다. 이 때문에 도를 일찍 듣고 학문을 널리 하여 전예(典藝)를 깊이 탐구하여 백가(百家)에까지 섭렵하였으며, 사자서(四子書)에 대해서는 더욱 전력을 기울였다. 평생의 수용(需用)은 《논어》 한 부에 있었으니, 만년에 문하생에게 읽게 하여 이를 듣는 것을 일과로 삼았고, 때로 읊조리며 느긋이 즐기곤 하였다.
문장을 지을 때는 옛 작가의 문로(門路)를 추종하여 이경(二京 서한과 동한)의 끊어진 궤도에 곧장 나아가 나루를 얻어 건너니, 금석의 악기에 올리고 아름다운 옥을 내건 듯이 기운이 화창하고 말이 전아하였다. 웅장하고도 넓어 응용이 끝이 없고 정결(潔淨)하고 간고(簡古)하여 탁연히 일가의 문장을 이루니, 이는 경례(經禮)에 근거하고 홍유(弘猷)로 윤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업과 공적에 드러난 것이 또한 모두 의리의 바름을 준칙으로 삼았다.
을묘년(1855, 철종6)에 조석우(曺錫雨)가 선조의 문집을 간행했는데, 문집 속에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을 핍박하는 구절이 있으니, 중외의 많은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성토하였으나 번번이 배척되었다. 이에 공이 상주하였다.
오혁(吳爀)의 상소에 처분이 이미 내렸으니, 이는 그가 까닭 없이 문제를 일으켜 7, 80년 전에 결말이 난 사건을 끄집어 내, 조정의 기상이 편안치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취를 궁구해보면 참으로 놀랄 일이지만, 그 말은 폐기해선 안 됩니다. 반대편의 설이 나오자, 과장하여 사실을 변환시키고 군색하여 본말을 가려서, 스스로 배치되고 폐기되는 줄 깨닫지 못했으니, 비유하자면 사슴을 쫓는 자가 태산(泰山)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진실로 병신년(1716, 숙종42)과 임인년(1782, 정조6)에 감히 마음을 먹거나 입 밖에 내지 못하던 바이니, 그리하여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함은 모든 식자들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생각건대 선정신 송시열이 효종의 성대한 시대를 만나 의리를 잡아 널리 발양한 것은 바로 《춘추(春秋)》 대일통(大一統)의 의리입니다. 그리하여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으며, 절의를 숭상하고 사특함을 내쳐서 쏠리는 파도를 벽처럼 막아서서, 한 몸으로 강상(綱常)을 담당하여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후 2백 년 동안 마음에 새겨 준수하고 강론하여 밝혀 보호한 것이, 첫째도 국시(國是)이고, 둘째도 국시였으니, 어찌 일찍이 조금이라도 당파에 따라 달랐겠습니까. 비록 한쪽 편으로 말하더라도 그대로 인습하여 따른 논의가 있었더라도 저들 속에서 표방한 데 불과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도(師道)와 연원(淵源)이 유래가 있음을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전후의 하교에 “백세 전부터 분분한 것이 당론이다.”라고 한 것과 “각기 스승만 위한다.”라고 한 것과 “스스로만 옳다고 하는 버릇이다.”라고 한 말씀은 우리 성상께서 균형을 맞추고 포용하기 위한 성의(聖意)임을 신이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또한 후세에 무궁한 염려가 없을 수 없습니다. 대저 확고히 정해진 국시임에도 일체를 당론으로 돌린다면 천하의 만사가 장차 어디로부터 손을 대서 변별하여 안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인들이 이것을 구실로 함정을 파서 집안을 해치고 나라를 그르쳤으니, 이것을 생각하면 관계됨이 작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은미한 조짐부터 막아야 하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시어, 모두 환수(還收)한다는 명을 내리시어, 성덕을 빛내시고 사문(斯文)을 다행스럽게 하소서.
성상 갑자년(1864, 고종1)에 정조(鄭造), 정인홍(鄭仁弘)의 후손이 스스로 조상이 원통함이 있다고 주장하며 임금의 거둥길에 호소하였다. 이에 공이 상주하여 “이 두 역적은 만세토록 반드시 토벌해야 함은 국사(國史)와 야승(野乘)에 실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데, 이 역적이 원통함이 있다면 혼미한 조정에서 흉화를 양성하여 윤리와 강상을 무너뜨린 자들도 아무도 죄를 성토당하거나 주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우주 간에 이렇게 큰 변괴는 없었습니다. 조상을 위해 신원함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것만은 결단코 평범히 처분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공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데 명석한 것이 학문의 힘이 아님이 없음을 볼 수 있다.
신임대의(辛壬大義)에 이르러선 바로 공의 가학이어서, 늘 자질들을 훈계하여 “이것이야말로 나라와 집안이 흥망할 수 있는 핵심관절이니, 선비가 된 자라면 누가 굳게 지키지 않겠으며, 하물며 우리 집안 자손임에랴. 만약 몽매하여 살피지 않아 오래 지나서 점차 잊는다면, 곧 조상을 잊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지수(持守)의 엄정함과 명론(名論)의 바름을 더욱 볼 수 있다.
늘 제갈무후(諸葛武侯 제갈량)와 한수정후(漢壽亭侯 관우)가 충의가 정대하여 천년 뒤에도 광채를 발하니, 실로 후생들이 존경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평상시의 말에서도 그 이름을 감히 지적하지 않았다.
공은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열 줄을 한 번에 읽었고, 한번 눈에 지나치기만 하면 곧 외웠다. 연경에 다녀오면서 주고받은 시문(詩文)이 모두 몇 권이나 되는데, 모두 암송했다가 기록한 것이지, 행장 중에 초본을 간직한 적이 없었다.
공은 조정에서 벼슬한 45년간 문학과 품행, 정술(政術)과 덕업의 성대함이 사람들의 이목에 혁혁하여, 왕가의 주축이 되고 사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태어나서 태평성대의 완인(完人)이 되었고, 죽어서 말세의 명상(名相)이 되었으니, 속에 쌓여 겉으로 드러나 가릴 수 없는 점이 있어서이다. 다시 어떤 칭송의 말을 늘어놓아 후세로 하여금 고증하지 못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삼가 가장 드러난 것을 뽑아 편차하여 태상씨(太常氏)의 절혜(節惠)의 은택에 대비한다.
[주-D001] 영의정으로 …… 시장 : 이 글은 환재가 1874년(고종11)경에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의 시호를 청하려고 지은 시장(諡狀)이다.[주-D002] 말생(末生) : 조말생(趙末生, 1370~1447)의 본관은 양주, 자는 근초(謹初)ㆍ평중(平仲), 호는 사곡(社谷)ㆍ화산(華山)이다.[주-D003] 존성(存性) : 조존성(趙存性, 1554~1628)의 본관은 양주, 자는 수초(守初), 호는 용호(龍湖)ㆍ정곡(鼎谷)이다.[주-D004] 계원(啓遠) : 조계원(趙啓遠, 1592~1670)의 본관은 양주, 자는 자장(子長), 호는 약천(藥泉)이다.[주-D005] 태채(泰采) : 조태채(趙泰采, 1660~1722)의 본관은 양주,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다.[주-D006] 우의정을 …… 부른다 : 대저옥(懟儲獄)이란 신축옥사(辛丑獄事)와 임인옥사(壬寅獄事)를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신축년(1721, 경종2)에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집권세력인 노론은 왕의 건강이 좋지 않고 후사가 없는 것을 이유로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발의하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중추부판사 조태채, 중추부영사 이이명(李頤命) 등 이른바 노론 4대신들이 인원왕후(仁元王后) 김대비(金大妃)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노론의 강공으로 연잉군의 대리청정에까지 논의가 미쳤으나, 이에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를 필두로 한 소론측의 공격으로 노론 4대신과 핵심세력들이 삭탈관직되고 유배형을 받았다. 이어 임인년(1722, 경종2)에는 소론의 영수 김일경(金一鏡) 등이 주도하여 남인 목호룡(睦虎龍) 등을 시켜 노론이 경종을 제거하기 위한 세 가지 계획[三手逆]까지 세웠다고 고변하여 이미 유배를 떠난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을 처형하였고 노론 170여 명을 유배 또는 치죄하였다.[주-D007] 정빈(鼎彬) : 조정빈(趙鼎彬, 1681~?)의 본관은 양주, 자는 중보(重甫)이다. 1705년(숙종3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주-D008] 종철(宗喆) : 조종철(趙宗喆, 1737~?)의 본관은 양주이다. 영조 41년(176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주-D009] 진익(鎭翼) : 조진익(趙鎭翼, 1762~?)의 본관은 양주, 자는 사현(士顯)이다. 1789년(정조13)에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주-D010] 상례의 …… 마음〔易戚〕 : 원문은 ‘이척(易戚)’인데, 이는 형식에 치중한 것을, 척은 슬픔을 가리키는 말이다. 《논어》 〈팔일(八佾)〉에 임방(林放)이 예(禮)의 근본을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상은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낫다.[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라고 하였다.[주-D011] 상정미(詳定米) : 상정법(詳定法)에 의하여 거둔 미곡을 가리킨다. 상정법은 조선조 숙종 34년(1708)에 황해도에 실시한 세법의 하나로, 대동법이 적용되기 어려운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전(田) 1결(結)에 12말(斗)을 징수하였으나, 그 후 별수미(別收米) 3말을 가하여 15말을 징수하였다.[주-D012] 봉장(封樁) : 창고의 한 종류로 홍수나 기근, 우박, 지진 등의 천재지변이나 전란이나 전염병 등의 비상시에 대처하기 위한 재용(財用)을 저장하던 곳을 말한다.[주-D013] 홍공 석(洪公錫) : 원문에는 ‘홍공석지(洪公錫志)’로 되어 있으나, 사실관계를 고려하여 수정하였다.[주-D014] 장거정(張居正)의 일조편(一條鞭) : 장거정(張居正)은 명나라 신종(神宗) 때에 10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대외적으로는 몽고의 침입을 막고 여진을 평정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재정의 낭비를 줄이고 황하의 치수 공사를 완성하며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이는 등의 많은 치적을 올렸다.
일조편법은 장거정이 주도하여 가정(嘉靖) 연간 이후 시행된 새로운 조세수취 제도로 청나라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각 주현(州縣)의 토지세나 요역을 한 항목으로 통합하여, 전지(田地)의 넓이와 성년남자의 수에 비례하여 액수를 정하고 은(銀)으로 납부시킴으로써 지방 관리들의 부정을 막는 이점이 있었다.[주-D015]
나삼(羅蔘)을 …… 쏟으니 : 최후의 약재를 써야할 정도로 임금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줄 알고 놀랐다는 의미이다. 나삼은 조선 시대 영ㆍ호남, 즉 지금의 소백산과 지리산 일대에서 나는 산삼으로 최고의 품질로 쳤다.
[주-D016] 중주(中洲) 이 문경공(李文敬公) : 이직보(李直輔, 1738~1811)로, 본관은 연안(延安), 초명은 성보(城輔), 자는 유종(維宗), 호는 중주ㆍ돈암(遯庵)이다. 일찍이 김양행(金亮行)에게 수학해 크게 아낌을 받았고, 동몽 교관(童蒙敎官), 경연관(經筵官) 등을 거쳐 벼슬이 이조 판서에까지 올랐다. 경사(經史)에 박통해 평소 선비들의 중망을 받았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는 항상 《논어》와 《맹자》 중에서 인용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시호는 문경이다.[주-D017] 화천(華泉) 이 참판공(李參判公) : 이채(李采, 1745~1820)로,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이다. 1774년(영조50) 사마시에 합격, 휘령전(徽寧殿) 참봉, 사헌부ㆍ호조ㆍ형조의 벼슬을 거쳐 돈녕부 주부를 지냈다. 음죽 현감이 되었을 때 무고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학문에 전념함과 동시에 가업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1790년(정조14) 다시 출사하여 벼슬이 호조 참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주-D018] 풍고(楓皐) 김 충문공(金忠文公) : 김조순(金祖淳, 1765~1832)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이다. 영의정 창집(昌集)의 4대손이며, 순조의 장인이다. 1785년(정조9) 약관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조, 순조 연간에 요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영돈녕부사에까지 이르는 동안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초계 문신이 되었고, 비명ㆍ지문ㆍ시책문ㆍ옥책문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 《풍고집》이 있다. 시호는 충문이다.[주-D019] 조석우(曺錫雨)가 …… 배척되었다 : 《철종실록》 철종 6년 을묘년(1855, 함풍5) 8월 2일에, 윤선거ㆍ윤증ㆍ조석우ㆍ이현일을 탄핵하는 유학(幼學) 오혁(吳爀) 등 팔도 유생 3천 4백 16인의 상소가 실려 있다. 철종은 이 상소에 비답하기를, “당시에 스스로 시비(是非)가 있었는데, 지금 와서 무슨 변해(卞解)가 그리도 많은가? 대저 남의 장단(長短)에 대해 의논하기 좋아하는 것을 내가 매우 미워하고 있다. 소두(疏頭)를 우선 정거(停擧)시키게 하라.”라고 하였다.
조석우(曺錫雨, 1810~?)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용(稚用), 호는 연암(烟巖)이다. 1854년 고조부 하망(夏望)의 문집인 《서주집(西州集)》을 간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윤증에 대한 제문 속에 송시열을 비난하고 효종(孝宗)을 폄하한 구절이 말썽을 빚어 유생의 줄기찬 항의로 파직당하여 중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857년 석방되어 공조 참판에 올랐으며, 그 뒤 1867년 이조 판서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일가를 이룰 정도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주-D020] 공이 상주하였다 : 조두순의 상소는 《철종실록》 철종 6년 을묘년(1855, 함풍5) 9월 5일 조에, ‘두 승선의 처벌ㆍ오혁의 상소에 대한 처리 등을 의논하다.’라는 조목에 보인다.[주-D021] 병신년과 임인년 : 병신년은 소론의 영수 유봉휘(柳鳳輝) 등이 소장을 올려 노론을 공격하자, 숙종이 하교하기를, ‘근일의 일은 시비가 아주 명백하여 백세 뒤에도 의혹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일종의 괴귀(怪鬼) 같은 무리들이 공의(公議)에 도전하여 혈전(血戰)을 벌이고 당여(黨與)를 위하여 죽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있는데, 이것이 다름 아니라 처분(處分)이 엄중하지 못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특별히 윤증 부자의 벼슬과 시호를 추삭(追削)하고, 사원(祠院)과 문판(文板)도 모두 훼철시키도록 명한 것을 가리킨다.
임인년은 소론의 주도로 노론이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고 고변하여 노론을 대거 제거한 임인옥사(壬寅獄事)를 가리킨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김채식 (역) |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