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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25권, 세조 7년 7월 26일 甲子 3번째기사 1461년 명 천순(天順) 5년
전라도 도관찰사 함우치가 정종에 대해 치계하다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함우치(咸禹治)가 치계(馳啓)하기를,
"광주(光州)에 안치(安置)한 정종(鄭悰)이 본월 19일에 수직(守直)하는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삼칠일(三七日)430) 을 먹지 아니하고 앉아 참선하여 지금 이미 성불(成佛)하였고, 사리(舍利)가 분신(分身)하여 향기로운 냄새가 방에 가득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연하였으니, 만약 계달(啓達)을 늦추면 이 고을 사람들을 특히 다 죽이겠다.’ 하면서, 몸을 떨쳐 뛰어오르고 발로 문짝과 담장을 차며 망령되게 미친 말을 발하였는데, 수직(守直)하는 사람들이 주위를 살펴보니 바깥 문 위에 사람의 자취가 있으므로, 곧 찾아서 중[僧]
성탄(性坦)이란 자를 잡아서 단단히 가두고, 아울러 수직하는 사람과 일에 간여한 자를 가두었습니다. 정종이 가지고 있던 경문(經文) 한 종이를 올려 보냅니다. 정종이 외인(外人)과 교통(交通)하여 담을 넘어 불러들인 형상을 보면 잡인(雜人)과 서로 통한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닌 것이 명백하니, 죄악이 깊고 무겁습니다. 목사(牧使) 유곡(柳轂)은 조금도 금방(禁防)하지 아니하였으니, 청컨대 아울러 유사(攸司)로 하여금 가두어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하니,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이번(李蕃)에게 명하여 정종·유곡 및 성탄과 일에 간여한 사람들을 잡아 오게 하였다.
[註 430]
삼칠일(三七日) : 21일.
○全羅道都觀察使咸禹治馳啓: "光州安置鄭悰本月十九日呼守直人曰, ‘我三七日不食坐禪, 今已成佛, 舍利分身, 香臭滿室, 瑞氣連天, 若稽留啓達, 則此邑之人特令盡殺。’ 奮身踊躍, 足踢門扉、欄墻, 妄發狂言, 守直人等周回審察, 則外門上有人跡, 卽搜得僧
性坦者牢囚, 竝囚守直人及事干者。 悰所有經文一紙上送。 觀悰交通外人踰垣招致之狀, 則雜人相通, 非一朝夕明矣, 罪惡深重。 牧使柳轂略不禁防, 請竝令攸司囚鞫。" 命義禁府鎭撫李蕃拿致悰、轂又性坦事干人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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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재집 제5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 충정공 박심문 신도비명〔忠貞朴公審問神道碑銘〕
명나라 경태(景泰) 7년(1456, 세조2)에 전(前) 행 예조 정랑(行禮曹正郞) 박심문(朴審問) 공이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갔다가 10월 정미일(11일)에 의주(義州)에 이르러 성삼문(成三問) 등 육신(六臣)이 상왕(上王)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밤에 종행인(從行人)을 불러 한 통의 편지를 주면서 “내 아들에게 일러서 ‘상왕 때에 제수된 예조 정랑〔上王時所除禮曹郞〕’이라고 내 무덤에 쓰라고 하라. 육신의 모의에 나도 실제 참여하였는데, 이제 육신이 실패하고서 나 홀로 산다면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선왕을 뵙겠는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때에 상왕을 위해 죽은 신하들은 모두 혹독한 화를 만났는데, 공은 멀리 변방에서 죽었으니, 사람들이 두려워 말하기를 꺼렸으므로 그 일이 묻혀 드러나지 않았다.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은 상왕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의빈(儀賓 부마)인데, 은밀히 육신의 사적을 기록하면서 공의 죽음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히 언급하였다. 순조 갑자년(1804, 순조4)에 대신이 공의 후손 경운(景雲)이 조상을 위해 신원(伸寃)한 일을 처리하면서 정공의 기록을 근거로 논주(論奏)하기를 “단종의 옛 신하 박심문이 임금을 위해 죽은 절개는 육신보다 못하지 않으니, 높은 관작을 추증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순조는 이조 참판에 증직하라고 명하였다.
무자년(1828, 순조28)에 장릉(莊陵) 곁의 육신을 모신 창절사(彰節祠)에 나란히 합사(合祀)하였고, 철종(哲宗) 병진년(1856, 철종7)에 이조 판서와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더 증직하였다. 금상(今上) 8년 신미년(1871, 고종8)에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내렸으니, ‘임금을 섬기며 절개를 다하는 것을 충이라 하고, 깨끗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을 정이라 한다.〔事君盡節曰忠淸白自守曰貞〕’라고 하였다. 이때에 공의 훌륭한 절개가 비로소 크게 드러나 백세 뒤까지 밝게 빛나게 되었다.
공의 자는 모(某)이고, 호는 청재(淸齋)이다. 박씨의 선계는 신라 왕자에서 나왔는데, 그가 밀양(密陽)을 봉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후손이 밀양인이 되었다. 고려 때에 휘 사경(思敬)으로 전법 상서(典法尙書) 상장군(上將軍) 추성익위 공신(推誠翊衛功臣)이 있었으니, 이 분이 공의 증조이다. 조(祖)는 전의시 판사(典儀寺判事)를 지낸 휘 침(忱)으로 조선조에 개국 공신에 책록되었다. 고(考)의 휘는 강생(剛生)으로 호는 나산경수(蘿山耕叟)인데, 정주학(程朱學)을 창도하여 밝혀 당시의 빼어난 인재들이 모두 경술(經術)로 떠받들었다. 관직은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지냈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비(妣)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삼사우윤(三司右尹)을 지낸 승경(承慶)의 딸이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공이 막내이다.
공은 영락(永樂) 무자년(1408, 태종8)에 태어났다. 어려서 총명하여 보는 자들이 큰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찬성공이 돌아가시고 두 형도 먼저 죽자, 나이 겨우 열여섯에 외로운 고아가 되었으나, 상중에 있으면서 예를 다하였고, 어머니를 봉양하며 효성을 다하였다. 독실한 뜻으로 학문에 힘써서 사우(士友)들의 신망을 얻으니, 당시의 재상이 천거하여 인수부 승(仁壽府丞)과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에 보임되었다. 정통(正統) 병진년(1436, 세종18)에 세종이 과장에 나와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공은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공은 법도 있는 집안의 자제로 명성이 자자하여 당시 여론이 청요직(淸要職)에 올려야 한다고 칭송하였는데, 여동생이 후궁에 선발되어 장의 궁주(莊懿宮主)에 책봉되자 이 때문에 두려워하며 겸양하였다.
정사년(1437, 세종19)에 조정에서 육진(六鎭)을 개척하려고 하자, 도절제사(都節制使) 김종서(金宗瑞) 공이 종사관으로 초빙하여 변방의 일을 자문하였다. 공은 “혹자는 그 땅을 개척하고 그곳 사람을 축출하자고 하는데, 이는 왕자가 먼곳을 회유하는 정치가 아닙니다. 그러나 야인(野人)은 거친데다 조석으로 반란의 기회를 노리니, 차라리 남쪽 백성을 옮겨다 그곳에 살게 하는 것이 온전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김공이 조정에 강력히 요청하여 공의 건의대로 시행하니, 북변이 안정되었다. 그 공로로 예조 정랑에 올랐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 단종1)은 단종 원년이다.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우의정 정분(鄭苯)이 국난(國難)에 죽고, 세조가 선양을 받아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추존하였다. 그러자 공이 비분강개하여 형의 아들 중손(仲孫)에게 말하기를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하라. 사람마다 스스로 선왕께 의로운 뜻을 바쳐야 한다.〔自靖人自獻于先王〕’라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병을 핑계로 문을 닫아걸었다.
공은 평소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와 친하여 때때로 방문하며 어울렸다. 공이 질정관에 뽑혀 북경으로 갈 때에 여러 사람과 송별연을 벌이게 되었는데, 슬픈 노래를 부르고 통분해 하고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렸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 의미를 몰랐다. 공이 임종 시에 남긴 말씀을 듣고서 자제와 식구들은 비로소 공이 육신과 함께 죽기로 맹세한 지가 오래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 육신의 일이 발각된 것은 공이 국경을 나선 뒤이니, 육신은 비록 죽지 않고자 한들 될 수 없었고, 공은 죽을 수도 있었고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논평하는 자들이 공의 죽음을 어려운 일로 여겼다.
그러나 공이 속으로 꾹 참고서 죽지 않은 것도 이미 오래이다. 때를 기다려 한번 그 뜻을 펴고자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육신의 뜻이고, 공의 뜻이었다. 우리 성스런 조정이 충의(忠義)와 절열(節烈)을 기리고 장려한 것이 전대보다 뛰어나, 아무리 은미하고 아무리 그윽한 것이라도 다 드러내 표창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육신과 공이 누가 먼저 드러나고 나중 드러나느냐는 논할 것이 못된다.
배(配)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부사(副使) 승순(承舜)의 딸로, 공의 부음을 듣고서 따라 죽었다. 7남 1녀를 두니, 원충(元忠)은 문과에 급제하여 통판(通判)이 되었고, 원공(元恭)은 사직(司直), 원의(元懿)는 사직(司直), 원정(元正)은 진사(進士), 원량(元良)은 생원(生員), 원온(元溫)과 원준(元俊)은 호군(護軍)이다. 손자는 18인으로 후손이 번창하여 대대로 명성이 드러난 사람이 나왔다. 유학을 흥기시켜 진도(珍島)에 제향된 이가 연(衍)이고, 영남에서 왜적을 격파하여 의열(毅烈)이란 시호를 받은 이가 진(晉)이고, 남한산성에 임금을 호종한 이가 수형(隨亨)이고, 세자를 심양(瀋陽)까지 모셔서 임금이 충절(忠節)이라고 써서 하사한 이가 민도(敏道)이고, 효성으로 정려받은 이가 인수(麟壽)이니, 가장 드러난 분들이다. 아, 하늘이 공에게 보답한 것이 육신에 비교하면 두텁다 하겠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고양군 / 維高陽郡
원당리에 / 里曰元堂
높이 넉 자로 / 其崇四尺
언덕에 무덤이 있는데 / 有封于岡
큰 글자 깊이 새기니 / 大書深刻
예조 정랑이라 / 禮曹正郞
이곳은 충정공 / 是維忠貞
박공이 묻힌 곳이다 / 朴公之藏
충정공은 / 維此忠貞
백세토록 명성이 흘러 / 百世流光
육신과 짝이 되어 / 六臣與儔
죽어서도 강상을 지켰네 / 死爲綱常
우연으로 지는 해를 붙들어 / 扶日虞淵
부상으로 되돌리려 하였으니 / 欲返榑桑
계획은 엉성했으나 / 謀則疏矣
의리는 푸른 하늘에 가득찼네 / 義塞穹蒼
부끄러운 낯빛도 없이 / 庶無愧色
죽어서 선왕을 배알하니 / 歸拜先王
성관에 패옥을 차고 / 星冠玉佩
백운향에 머물리라 / 左右雲鄕
생을 버리고 인을 이룬 / 捐生成仁
요해는 아득한데 / 遼海茫茫
묻혀도 결국 드러나고 / 始晦終顯
오래될수록 더욱 빛나네 / 悠久彌彰
태사가 명을 지어 / 太史作銘
무궁한 후세에 알리니 / 用詔無疆
지나는 자 공경하여 / 過者其式
탄식하며 방황하리 / 咨嗟傍徨
[주-D001] 충정공 박심문 신도비명 : 이 글은 고종 8년 신미년(1871) 3월에 박심문(朴審問, 1408~1456)에게 충정(忠貞)이란 시호가 내리자 이 즈음에 지은 신도비명이다.[주-D002] 질정관(質正官) : 조선 시대에 중국에 보내던 사신의 한 종류로, 특정의 사안에 대하여 중국 정부에 질의하거나 학습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동지사(冬至使)ㆍ성절사(聖節使) 등의 정기사행에 정규 사신의 일원으로 서장관(書狀官)과 함께 파견되었으나, 중기 이후에는 서장관이 질정관을 겸임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정규 인원에서 제외되었다.[주-D003]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 : ?~1461.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450년(세종32)에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혼인한 뒤 영양위에 봉해졌고, 단종 초기에 형조 판서가 되어 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455년(세조1)에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가 수양대군에 맞서 단종을 보호하다 유배되자, 정종도 이에 연루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사육신 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광주(光州)에 안치되었고,
1461년 승려 성탄(性坦) 등과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명목으로 능지처참되었다. 영조 때 신원(伸寃)되었고, 단종묘(端宗廟)와 공주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헌민(獻愍)이다.[주-D004] 모(某) : 박심문의 자는 신숙(愼叔)이다.[주-D005] 사경(思敬) : 박사경(朴思敬, 1312~1404)은 문유(文有)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법 판서(典法判書)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충정왕(忠定王)이 훙서한 뒤에 후사가 없음을 빌미로 친원파가 왕위를 노릴 때, 박사경이 원나라에서 급히 귀국하여 공민왕과 함께 이들을 처단하여 추성익위 공신에 책록되었다.[주-D006] 침(忱) : 박침(朴忱)은 공민왕 때 문과에 올라 전의 판사(典儀判事)가 되었으나, 조선 태조를 섬겨 공로가 있었기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권되고, 벼슬은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이르렀다.[주-D007] 강생(剛生) : 박강생(朴剛生, 1369~1422)의 자는 유지(柔之), 호는 나산경수이다. 아버지는 호조 전서(戶曹典書) 침(沈)이며, 어머니는 밀산군(密山君) 박린(朴隣)의 딸이다. 1390년(공양왕2)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 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호조 전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408년(태종8)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세자에 대해 보고를 잘 함으로써 황제의 환심을 사고 돌아오자 태종으로부터 미두(米豆)를 하사받고 이어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1417년 수원 부사를 지내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 뒤에 다시 등용되어 세종 때 안변 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를 지냈다. 문장이 전아(典雅)하여 이름이 높았다.[주-D008] 중손(仲孫) : 박중손(朴仲孫, 1412~1466)의 자는 경윤(慶胤), 호는 묵재(默齋)이다. 아버지는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절문(切問)이며, 어머니는 왕고(王高)의 딸이다. 1453년(단종1)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난 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면서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각조 판서를 거쳐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시호는 공효(恭孝)이다.[주-D009] 스스로 …… 한다〔自靖人自獻于先王〕 : 《서경》 〈미자(微子)〉에 보이는데, 은(殷)나라가 점점 망해 가자, 은나라의 종실(宗室)인 미자(微子)가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에게 한 말이다.[주-D010] 우연으로 …… 하였으니 : 단종 복위를 꾀했음을 비유한 말이다. 우연(虞淵)은 전설 상에 해가 지는 곳이고, 부상(榑桑)은 부상(扶桑)과 같은 말로, 동해 속에 있다는 상상의 신목(神木)인데, 해가 뜰 때에는 이 나뭇가지를 흔들고서 올라온다고 한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김채식 (역) | 2016
瓛齋先生集卷之五 潘南朴珪壽瓛卿著 / [神道碑銘] / 忠貞朴公審問神道碑銘
有明景泰七年。前行禮曹正郞朴公審問充質正官赴京師。十月丁未。還到義州。聞成三問等六臣謀奉上王復位。事覺而死。夜召從行人。授一封書曰。誡吾兒必以上王時所除禮曹郞題吾墓也。六臣之謀。吾實與焉。今六臣者敗而我獨生。何面目歸拜先王乎。遂飮藥而卒。當是時死事諸臣。皆遘禍甚烈。而公之死遠在徼外。則忌諱怵㥘。黯眛不顯。而惟寧陽尉鄭悰。上王姊敬惠公主儀賓也。密記六臣事始末。幷及公之死甚悉。純廟甲子。大臣以公後孫景雲爲祖申籲。據鄭公之記論奏曰。端宗舊臣朴審問。其爲主死節。不下於六臣。宜贈顯秩。乃命贈吏曹參判。戊子幷祀于莊陵側六臣之彰節祠。哲宗丙辰。加贈吏曹判書兩館大提學。今上八年辛未。贈謚忠貞。事君盡節曰忠。淸白自守曰貞。於是乎公之大節始大顯。而炳朗乎百世矣。公字某號淸齋。朴氏系出新羅王子。其封邑密陽者。後爲密陽人。高麗時有諱思敬典法尙書上將軍推誠翊衛功臣。寔公曾祖也。祖典儀判事諱忱。錄本朝開國勳。考諱剛生號蘿山耕叟。倡明程朱學。一時英俊。咸以經術推重。官集賢殿副提學贈左贊成。妣坡平尹氏三司右尹承慶女。擧三子。公其季也。生于永樂戊子。幼聦穎見者期以大器。及贊成公卒。二兄先亡。年纔十六。煢然孤孑。能居喪盡禮。養母盡孝。篤志力學。有士友望。宰執剡擧。補仁壽府丞,司醞署直長。正統丙辰世宗臨軒策士。擢丙科。公以法家子。聲譽藉蔚。物議許以淸要。女弟有選入後宮者封莊懿宮主。以是兢惕斂退。丁巳朝廷將開拓六鎭。都節制使金公宗瑞辟爲從事。諮以邊務。公曰或以爲拓其地逐其人。非王者綏遠之政。然野人勁悍。朝夕反側。不如徒南民以實之。計在萬全。金公力請于朝。一如公言。北邊賴安。以勞陞拜禮曹正郞。景泰癸酉。惟我端宗元年也。領議政皇甫仁,左議政金宗瑞,右議政鄭苯死於國難。而世祖受禪。尊端宗爲上王。公慷慨語兄之子仲孫曰自靖。人自獻于先王者何謂也。遂謝病杜門。公素友善河忠烈緯地,成忠文三問,李忠簡塏。時相過從。方公之充質正官赴京。與諸公飮餞。悲歌感憤。歔欷流涕。人莫能測。及公之臨歿有言。子弟家人始知其矢心與六臣同死者久矣。嗟乎。六臣事發。在公出疆之後。六臣者雖欲無死不可得。公則若可以死若可以無死。是以尙論者。以公之死爲難。雖然公之隱忍不死。亦已久矣。思欲有待。一伸其志。而竟無奈何。則亦死而已。此六臣之志也。此公之志也。惟我聖朝。褒忠義奬節烈。度越前代。無微不闡。無幽不彰。則六臣與公之顯晦先後。不足論也。配淸州韓氏。副使承舜女。聞公訃從殉。生七男一女。元忠文科通判。元恭司直。元懿司直。元正進士。元良生員。元溫,元俊護軍。孫男十有八人。後承番衍。代有聞人。興勸儒學。俎豆於珍島曰衍。破倭於嶺南。謚毅烈曰晉。扈駕南漢曰隨亨。陪儲君瀋陽。賜御書忠節曰敏道。以孝旌閭曰麟壽。此其最著者也。嗚呼。天之報施於公。視六臣爲厚矣。銘曰。
維高陽郡。里曰元堂。其崇四尺。有封于岡。大書深刻。禮曹正郞。是維忠貞。朴公之藏。維此忠貞。百世流光。六臣與儔。死爲綱常。扶日虞淵。欲返槫桑。謀則疎矣。義塞穹蒼。庶無愧色。歸拜先王。星冠玉佩。左右雲鄕。捐生成仁。遼海茫茫。始晦終顯。悠久彌彰。太史作銘。用詔無疆。過者其式。咨嗟傍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