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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에 위치한 매화마을(본명:섬진마을)은 이른봄이면 매화꽃으로 환해진다. 마을주변 밭과 산 능선 등에 100만여그루(30만여평) 매화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는 3월초부터 4월초까지 매화마을은 봄맞이 관광객으로 성황을 이룬다. 특히 매화꽃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섬진강 풍경은 꽃과 산과 강이 한데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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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유래 및 특징
1997년 시작된 매화문화축제는 전국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매실과 매실로 만든 매실식품을 널리 알리고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시작하여 전국의 관광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섬진강에 인접한 백운산 동편자락 30만여평에 군락을 이룬 매화단지와 섬진강 풍경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내어 찾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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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섬진강의 지명유래가 된 두꺼비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섬진나루터와 청매실농원의 전통옹기, 그리고 섬진강 재첩잡이 풍경이 볼거리를 제공하고 강변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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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시기 : 매년 3월 초순
개최장소 :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매화마을)과 섬진교 둔치
축제내용 : 추모제, 관광홍보관 운영, 매화꽃길 음악회, KBS 전국노래자랑, 농촌체험장, 봄소식전하기, 전국매화사진촬영대회, 매화사생대회, 생생포토서비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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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와 절개 매화 이야기
옛날에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팔아 살아가는 영길이란 청년이 있었다. 영길이에겐 예쁜 약혼녀가 있었는데 그만 병 때문에 결혼 사흘전에 죽고 말았다. 영길이는 매일 무덤에 가서 슬피 울었다. 어느날 무덤 옆에 매화나무 한 그루가 돋아나 있는 것을 보았다.
영길이는 이 꽃이 죽은 약혼녀의 넋이라고 생각해서 집에 옮겨 심고 그 꽃을 가꾸며 사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더구나 약혼녀가 죽은 후부터는 왠지 그릇도 그 모양이 슬퍼하듯 찌그러져 잘 팔리지 않아 고생은 점점 심했다. 세월이 흘러 영길이는 늙고, 매화나무도 자랄 대로 자랐다. 명절마다 매화나무를 꽃 그릇을 새로 만들어 옮겨 심고는 산 사람에게 말하듯 내가 죽으면 누가 돌 봐 주느냐고 슬퍼했다.
영길이는 더 늙어 눈도 잘 안 뵈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불쌍한 노인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동네 사람들은 영길이 노인집 대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슨 곡절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안에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고 영길이가 앉았던 그자리에 예쁘게 만든 그릇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뚜껑을 열자 그 속에서 휘파람새가 날아 나왔다. 영길이가 죽어서 휘파람새가 된 것이다. 아직도 매화꽃에 휘파람새가 따라 다니는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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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 (문화홍보담당관실 : 061-797-273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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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좋고 물 맑은 고장, 연중 따스한 햇살이 가장 많이 비추이는 고장인 광양지역의 특산물을 얘기하자면 밤, 매실, 설록차, 고로쇠약수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밤과 고로쇠약수를 제외하고는 특산물에 대해 이렇다할 기록이 없는 형편이다. 특히 광양매실은 매화나무의 최초 집단재배 시기와 장소가 광양밤과 맥을 같이 하였고, 매실의 상품화 노력 또한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계승 연구되어왔다. 그러나 광양밤이 그 유래가 분명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데 반하여 광양매실은 새로운 품종의 매화나무가 밤나무와 함께 대량으로 들어왔다는 기록 이외에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에 광양매실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광양매실이 가진 전통과 특징을 밝혀 광양이 밤뿐아니라 매실의 본고장임을 자리매김 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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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은 매화나무 열매
매실은 매화나무의 열매이며, 그 원산지는 중국으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에는 약 천 오백년 전에 들어와 우리의 선조들이 수백년 전부터 이 열매를 식용 또는 약용으로 사용하여 왔다. 세계적으로 매실의 산지는 동북아시아 즉 한국, 중국과 일본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남부지방에서만 생산되는, 지리적으로 특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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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닌 온대과실로써 중부이북의 매화나무는 꽃은 피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특성을 보인다. 매실의 식품으로서의 가공법과 약리작용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연구 끝에 그 놀랍고 신비스런 약효가 증명되어 전 일본국민의 건강식품으로 애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실주를 수 십년 전부터 상품화 해온 것 이외에는 최근에서야 매실음료가 나오게 되었고, 매실을 이용한 전통매실 반찬은 광양의 청매실 농원에서 94년 처음으로 상품화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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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매실의 역사
○ 광양매실의 자존심 홍쌍리 역사
• 밀양태생으로 올해 54세인 홍쌍리 여사는 31년 전인 1965년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 ″밤나무골 김영감님″의 아들인 김달웅(55세)씨에게로 시집와서 밤나무 1만주, 매실나무 5천주가 심기워진 7㏊의 산비탈 농장 청매실농원을 가꾸고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하지만 홍여사는 몇 년 전부터 ″매실박사 홍쌍리″로 통하는 전국적인 유명인사이다. 최근에는 그녀의 명성이 동남아 식품박람회를 통해 홍콩, 싱가폴에도 알려졌으니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된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홍쌍리 여사가 매실의 본고장인 광양매실의 자존심이라는 점이다. 광양매실의 자존심 홍쌍리 여사의 유명세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아본다.
○ 60년 전통의 매실식품 제조명인 • 홍쌍리 여사의 청매실농원은 매실식품의 맛이 좋고 약효가 좋기로 유명하다. 또 한가지는 종류가 다양하기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매실김치, 매실절임, 매실고추짱아찌, 매실마늘짱아찌 등 매실반찬은 청매실 농원에서만 만들고 있다. 홍쌍리 여사가 정식으로 매실전통식품제조업 허가를 받은 것은 1994년이고 1995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매실전통식품 지정을 받았다. 지금 만들어내고 있는 종류는 매실농축액, 매실절임, 매실장아찌, 매실음료, 매실식초, 매실쨈 등이 있다.
청매실 농원에서는 한결같이 매실식품을 전통제조법에 따라 만든다는 것이 오늘의 홍쌍리 씨를 있게 한 근본이며, 또 하나는 60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대를 이어오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하면서 제품을 만들어 상품화하게 되었다는데 남다른 유명세의 원인이 있다. 물론 매실농축액 제조과정에서는 기계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제조공정중에 반드시 사람손을 거치게 되어 있어 매실농축액 제조도 완전 자동이 아닌 반자동으로 하고 있다. 청매실을 숙성·발효시키는 과정도 남다르다. 마당에 즐비하게 늘어선 300여개의 장독들, 숨쉬는 그릇인 전통용기로 구워낸 장독에 매실을 담아 수개월동안 발효하는 전통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 청매실을 3개월 이상 보관하지 않고 반드시 3개월 이내에 제조작업을 마침으로써 매실식품의 신선도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청매실 농원의 식품이 최고 품질을 갖기까지는 시아버지,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60년 전통에 보다 큰 근본이 있다. 홍쌍리 여사가 시아버지 김오천 선생과 시어머니의 매실식품 제조 활용법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고 눈썰미있게 새겨두면서 끊임없이 묻고 연구한 끝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시아버지 김오천 선생이 밤과 매실을 수확하기 시작한 1935년부터 30년간을, 홍쌍리 여사가 김씨 집안에 시집온 1965년부터 31년간을 매실 식품 제조에 매달려 온 것이다. 이제 홍쌍리 여사는 매실전통식품 제조자로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95년에는 “매실박사 홍쌍리의 매실미용 건강 이야기”라는 책을 써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홍쌍리 여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보다 더 좋은 식품을 만들기 위해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이다.
○ 밤나무골 김영감님과 광양매실 ·• 오늘날 광양매실을 이야기하려면 광양뿐만아니라 전국적으로 통했던 밤나무골 김영감님인 김오천 선생이야기로부터 시작할 수 밖에없다. 김영감님이 1931년 일본에서 밤나무 묘목과 함께 들여온 5,000주의 매화나무 묘목으로부터 광양매실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김영감님의 매화나무 재배 김오천선생은 1902년 11월 21일(음력)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일곱살 나던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13년간의 광부생활로 돈을 모았고 1931년(30세때)에 귀국하면서 밤나무 1만주, 매실나무 5천주를 비롯하여 감나무, 배나무 등 양질의 신품종 묘목을 가지고 들어왔다. 3년동안에 가지고온 묘목을 심고 관리하던 김영감님은 나무 기우는데 필요한 기술과 돈을 구하기 위해 1934년 다시 일본에 들어가서 10년동안 일본과 광양의 고향집을 수없이 오고가면서 돈을 벌고 나무 키우는 기술을 익혔다. 김영감님은 두 번째로 일본에 들어가서는 당신이 광부생활을 했던 구천에서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인부를 수 십명이상 많을때는 1백여명까지 썼고 고향마을 사람들도 10여명에 달했다. 1944년에는 완전 귀국하여 다시 밤나무, 매실나무 키우는 일에 매달려 45만평의 임야를 밤산으로 만들었고 집주변 언덕배기에는 매화나무를 집중해서 키웠다. 이후 1960년대에 밤나무 혹벌레 피해로 전국적으로 밤산이 황폐화되었을 때 김영감님이 재배한 밤산은 끄떡없이 이곳에서 1년이면 8톤트럭 십여대분의 묘목이 접수용으로 나간 일, 1965년 산업훈장 받은 일등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밤나무골 김영감님에 대한 기록이다.
http://maehw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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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 (문화홍보담당관실 : 061-797-2731)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