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간행된 문정공(文靖公) 고은(皐隱) 안지(安止, 1384~1864)의 문집 고은안선생유고(皐隱安先生遺稿)에 실린 세계도(世系圖)에는 순흥 안목의 셋째 아들 안원린을 탐진 시조로 하고 있다.
고은안선생유고 (皐隱安先生遺稿) 1912년 원문 이미지 보기 가능 : 한국국학진흥원 이 책은 해제에 1772년 후손 안병희(安炳喜)의 초간이라고 소개되고 있으나, 책의 말미에 실린 안병희(安炳喜)의 글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글과 같은 임자년(1912년)의 것이다. 맨 앞의 서문도 임자년(1912년) 장승택(張升澤)이 쓴 것 뿐이며, 이전 초간본의 서발문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은안선생유고는 1912년 후손 안병희(安炳喜)와 방계 후손 안만곤(安晩坤)이 처음 간행한 것이며, 1772년 안병희(安炳喜) 간행 초간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같다. 한국국학진흥원 도서 해제의 오류로 보인다. 안병희(安炳喜)는 1900년에 경북 경산의 조곡서원(早谷書院) 중건에 간여한 사람이므로 1772년 초간은 사실이 아니다.
p.7부터 세계도(世系圖)가 나옴. - 순흥에서 분파하는 계보 기록 유도헌(柳道獻. 1835-1909)이 柔兆敦牂(丙午, 1906년)에 지은 신도비문(p.69), 김도화(金道和, 1825~1912)가 임자(1912)에 지은 행장(p.73) 모두에 문정공이 문성공(안향) 후손이며 안원린이 탐진으로 이봉된 것으로 기록했다.
(增訂) 皐隱先生文集 경산 : 耽津安氏文靖公派宗中, 2015 (增補國譯) 皐隱先生文集 趙春鎬 編譯 탐진안씨 문정공파 종중회 발행 : 천마인쇄소 발행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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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活字本으로 인출한 安止 선생의 <고은안선생유고(皐隱安先生遺稿)> 3卷 單冊 : 한옥션 (경매) - 1912년 간행본 <내용> 木活字本으로 인출한 安止 선생의 <고은안선생유고(皐隱安先生遺稿)> 3卷 單冊으로 권두에 隆熙後壬子(1912)...張升澤序, 권말에 李中久, 安晩坤의 跋이 있다. 상태 양호하다. <크기> 20.6×30.5cm <참고> 안지(安止, 1377~146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탐진(耽津: 康津). 자 자행(子行). 호 고은(皐隱). 시호 문정(文靖).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가 되고, 141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한 후 1420년(세종 2) 수찬(修撰), 1441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등을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1446년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집현전부제학·이조참판·공조판서 등을 거쳐 1449년 예문관부제학을 지내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시(詩)에 능하고 해서(楷書)를 잘 써서 세종의 명을 받고 태종을 위해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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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安止), 고은안선생유고(皐隱安先生遺稿) (1책완질, 조선시대 木活字本) 옛날물건 (판매) - 1912년 간행본 조선시대 木活字本으로 간행된 용비어천가의 공동저자 탐진안씨인 안지(安止)선생의 시문집인 고은안선생유고(皐隱安先生遺稿)1책완질 상태좋으며 파장없음 크기:30.5*20.8센치
**안지(安止) 태종(太宗)16년(1416년), 중시(重試) 을과2(乙科2) **1414년(태종14)천시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를 거쳐 141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1420년(세종2)수찬.1441년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고 다음해 공조참판으로 정인지와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바쳤다.1446년 호조참판으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집현전 부제학이조참판 공조판서를 거쳐 1449년 예문관 대제학 영중추원사를 지내고 봉조하가 되었다.시에도 능했고 해서를 잘써서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해 금자법화경을 썼다. **『고은안선생유고』는 안지(安止 ; 1394~1474)의 시문집이다. 안지의 본관은 탐진(耽津:康津), 자는 자행(子行), 호는 고은(皐隱)이다. 이 책은 1772년(영조 48)에 후손 炳喜가 간행하고, 傍後孫 晩坤이 1912년에 중간하였다. 3권 1책이며, 목활자본이다. 권수에 세계도 1편, 권 1과 권2에 시 10수, 발 2편, 묘지명 1편, 묘갈문 1편, 전(箋) 2편, 권3은 부록으로 시 2편, 습유(拾遺) 1편, 「조곡서원창건기(早谷書院創建記)」 및 봉안문 각 1편, 「충현사제액후소지(忠顯祠題額後小識)」, 신도비문, 행장, 실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품격이 고절(高絶)하며 기상이 청일(淸逸)하다. 그 가운데 「제압구정(題狎鷗亭)」과 「문주팔경도영(雯州八景圖詠)」이 대표작이다. 발 가운데 「권매헌선생집발(權梅軒先生集跋)」은 스승인 권우(權遇)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그 출간경위와 스승의 행적 및 교육하는 방법 등을 설명한 것이다. 전 중 「용비어천가전」은 『용비어천가』의 초안 125장을 필사하여 올리면서 쓴 것이다. 이 밖에 변계량(卞季良)의 문집을 간행할 때 그 소감을 밝힌 「변춘정계량집발(卞春亭季良集跋)」과 병조판서 정연(鄭淵)의 묘지명, 예조판서 이이기(李二錡)의 묘갈문 등이 있다. 안지는 조선이 나라의 기틀을 다져가는 초창기에 『용비어천가』를 짓고, 시의 품격이 뛰어났으며 글씨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로서 그의 문집은 나라가 차츰 자리가 잡혀가던 당시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안지는 찬성 사종(士宗)의 아들이다. 1414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가 되고, 1416년 다시 중시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수찬, 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45년 공조참판으로 권제(權口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고,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집현전부제학, 이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필(史筆)의 일로 고신(告身)을 환수당하였다. 1455년에 소환되어 지중추원사에 복관이 되고, 이어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세조가 즉위한 뒤 그를 불러 관작을 주니, 그때 그의 나이 80세가 넘었는데도 강건하므로 세조가 기뻐하여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그는 시를 지은 때 속된 말을 섞어서 빨리 잘 짓고, 짧은 서간에까지도 거의 시로 말뜻을 이끌어갔다. 그는 또 해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하여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베꼈다. 뒤에 경산의 조곡서원(早谷書院)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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